로마제국과 유대민족의 관계

조동호 목사


유대민족은 하나님을 믿는 그들의 신앙 때문에 다른 어떤 민족들에 동화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내려 주신 토라(율법)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은 로마가 주는 시민권조차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로마시민이 되면 속주세의 면제를 비롯해서 로마법에 따라 보호를 받는 등, 여러 가지 이익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로마시민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로마시민이 되면 로마법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은 이민족들 가운데서 의사나 교사에게 시민권을 주었고, 로마군단에 입대하여 보조병으로 25년 동안 복무하는 경우에도 시민권을 주었다. 유대인들은 우수한 민족이었기 때문에 의사나 교사가 많았지만, 이 특권을 활용하는 자들이 많지 않았다. 또 군에 입대를 하게 되면, 황제에게 충성을 서약해야 하기 때문에 우상숭배를 피하기 위해서 군에 입대하는 것을 기피하였다.

이밖에도 유대민족은 타민족과는 다른 다음과 같은 특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1. 거주지 팔레스타인이 강대국인 시리아와 이집트를 잇는 점이지대에 있었기 때문에 외침이 많았고, 로마제국의 속국이 되기 전에도 앗수리아제국, 바벨론제국, 페르시아제국, 헬라제국으로부터 침탈과 유배와 지배를 받아왔다.

2. 유대인들은 우수한 민족이었다.

3. 고대 그리스인들에 못지않을 만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많았다(이 당시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수만 해도 총인구 100만 명 가운데 약 4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인들과 다른 점은 해외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라 할지라도 1년에 2드라크마의 예루살렘 성전세를 바쳤고, 성지순례도 유대인의 의무 가운데 하나였다.

4. 유대들은 꿈을 가진 민족이었다. 타민족을 지배해본 경험이 없었고, 오히려 타민족의 지배를 받는 가혹한 현실 속에서 메시아 도래를 강하게 기대하였다.

5. 유대인의 정체성은 그들이 속한 유대교에서 비롯되었다.

유대민족의 이런 특수한 면들을 로마제국의 통치자들은 대체로 수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칼리굴라만큼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앙숙관계였던 그리스인들의 편을 들었고, 유대인들에게는 불이익을 주었다. 로마가 유대민족에게 관용을 베푼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1. 사회불안의 원인이 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2. 유대인들은 어디에 살든 1년에 2드라크마의 예루살렘 성전세를 바쳐야했는데, 그 관행을 허용하였다.

시리아 총독 퀴리누스는 유대속주에서 가장 사용빈도가 높은 동전에 한하여 황제의 옆얼굴이 새겨지지 않은 통화를 만들게 하였다. 유대교가 우상을 금하고 있음을 고려한 때문이었다. 또 퀴리누스는 유대교가 이방인들의 예루살렘 영내진입을 금하는 것을 존중하여 이것을 어긴 자는 사형에 처하도록 허락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모든 타종교와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예루살렘 성전에만은 아내 리비아와 함께 봉납품을 바쳤다. 티베리우스는 예루살렘에 바쳐진 로마의 봉납품에 황제를 상징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지만, 이것조차도 신격(神格)이 된 선황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쳐진 가이사랴의 신전으로 옮기라고 명령했다. 예루살렘 성전이 이방인들의 봉납품으로 더럽혀졌다고 유대인들이 생각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대제사장의 제의복은 로마측이 예루살렘 궁전 안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티벨리우스는 이것마저도 유대측에 돌려주라고 명령했다.

3. 국내외의 유대인 거주지역 안에서 법집행을 할 수 있도록 사법권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사형집형은 로마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이러한 조치는 동방의 유대인사회에서만 한정되었다.

또 로마당국은 유대인들의 자극을 피하기 위해서 지배자 로마를 상징하는 군사를 예루살렘에서 100킬로미터나 떨어진 가이사랴에 주둔시켰다. 가이사랴에 기지를 둔 로마군 병사가 예루살렘으로 출동을 해야 할 경우에도 황제의 권력을 상징하는 군기는 가이사랴 기지에 놓아두고 출동하도록 규정하였다.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총독직에서 해임된 가장 큰 이유는 군기를 앞세운 부대를 예루살렘에 입성시켰기 때문이었다.

4. 타민족에서는 볼 수 없는 안식일법 준수를 허용하였다.

5. 병역을 비롯한 국가의 공직을 면제하였다. 다만 원하는 자에게는 문호를 개방하였다. 유대인들은 병역을 면제받고 있었는데, 군대에 들어가면 최고사령관인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하기 때문에 우상숭배를 피하고 싶다는 그들의 주장을 받아드린 결과였다. 그러나 유대인이라도 원하는 경우에는 군복무를 비롯한 각종 공직에 취임할 수 있었다.

이밖에도 카이사르는 과거 300년 동안 유대인들을 지배했던 그리스인과 동등한 상업적인 권리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부여하였다. 이후 티베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이를 재차 확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혜택들은 유대 강경파들의 두 차례에 걸친 큰 반란전쟁들로 인해서 물거품이 되었고, 오히려 유대민족은 그나마 지켜왔던 예루살렘 성지(聖地)의 멸망과 그곳에서의 추방이라는 엄청난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네로황제말기와 하드리아누스황제 재임시에 발생한 로마와의 유대전쟁으로 인한 유대인의 피해는 대략 다음과 같다.

1. A.D. 66-70의 유대전쟁

전쟁의 발단은 플로루스 총독이 체납된 속주세 대신 예루살렘 성전의 보물창고에서 17달란트의 금화를 몰수한 데서 비롯되었다(서민 560명의 1년 수입에 해당). 이에 분노한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과격파인 열심당원들의 습격을 받아 로마 수비대원들, 온건파인 대제사장 등이 학살당하였다. 열심당원들은 로마군 수비대가 주둔해 있던 마사다 요새도 습격하여 장악하였다(66년 6월).

이 당시 동로마 지역의 대 도시들에서는 그리스계 주민들과 유대계 주민들이 대립하고 있었고, 예루살렘과 유대지방에서는 유대인 급진파와 온건파가 대립하고 있었으며, 그 밖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그리스계 주민 및 로마군과 유대계 주민들이 대립하고 있었다.

70년 예루살렘은 5개월의 격전 끝에 함락되었다. 8월 10일, 성전에 불이 붙었고, 9월 20일 모든 저항이 끝났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사망자와 포로를 합쳐 60만 명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포로의 수는 유대전쟁을 통틀어 9만 7천명, 예루살렘 공방전에서 사망한 사람은 무려 110만 명에 이른다고 하였다. 대부분은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5개월 동안 포위되는 바람에 희생된 유대인들이었다.

이 사건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불탔고, 대제사장 제도도 폐지되었다. 70인 산헤드린(공의회)도 폐지되었다. 그리고 이 때까지는 주둔하지 않았던 군대가 예루살렘에 1개 군단과 보조병을 합쳐 1만 명의 병력이 상주하였다. 유대인에 의한 자치가 더 이상 인정되지 않았고 직할통치를 받게 되었다. 국내외 유대인들은 그동안 내던 성전세를 로마의 제우스 신전에 바쳐야 했다. 유대인들은 이 수치스런 의무를 ‘유대인세’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3년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예루살렘과 오늘날의 텔아비브 사이에 있는 얌니아에 유대문화연구소 설립을 허가하였다.

2. A.D. 131-134의 유대전쟁

이 전쟁의 발단은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유대인들에게 할례를 금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범죄자에게 할례를 하는 방식으로 유대교를 멸시하였고, 예루살렘에 군단도시 ‘아에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를 건설한데서 비롯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유대반란을 막기 위해서 130년 팔레스타인을 방문하였고 의도적으로 예루살렘에 강경책을 펼쳤다.

131년 가을에 유대반란이 일어났고, 바르 코크바(Bar Kokhba)와 랍비 아키바(Rabbi Akiba)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아람어로 ‘별의 아들’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바르 코크바는 메시아를 자처하며 반란을 주도하였고, 랍비 아키바는 코크바를 유대왕과 메시아로 치켜세우며 성전(聖戰)을 선포하였다.

이 전쟁으로 요새 50개가 모두 파괴되었고, 985개의 마을이 잿더미가 되었으며, 50만이나 되는 유대인이 목숨을 잃었다. 134년 초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남서쪽 베틸 요새로 옮겨 136년 9월 26일까지 항쟁을 지속하였다. 이 때 바르 코크바는 전사하고, 포로가 된 랍비 아키바는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이 날은 70년 당시 예루살렘이 함락된 날과 같은 날이었다고 한다.

다른 한편 70년 성전이 붕괴된 날은 주전 586년 압월 9일(양력 7-8월) 느브갇네살에 의해서 성전이 붕괴된 날짜와도 같다고 한다. 4세기경부터는 남아있는 성전 터(통곡의 벽)에서 곡할 수 있도록 일년에 한 차례 예루살렘 출입이 허락되었다. 이날 유대인들은 하루 종일 금식하고, 구약성경 '예레미야 애가'를 읽으면서 그 날의 역사적 의미를 반추한다.

이 전쟁의 결과로 유대는 팔레스타인이 되었고, 예루살렘도 ‘아에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로 바꿨다. 원로원의 의결을 거쳐 135년부터 공식 발효한 하드리아누스의 칙령으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추방을 당하였고, 유대교도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였다.

이상의 글들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한길사), 6,7,8,9권에 실린 내용을 정리한 것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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