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가서
기독교에 입교한 후에 순교한 이바라끼 가족 흉상. 
1549년 7월, 일본 큐우슈우(九州)에
상륙한 예수회 신부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를 허용한 일본 최고 지배자였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후계자로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예수회 신부들을 만나
명과 조선을 정복하여 전역에 교회당을 세우고 그들 백성들을 천주교인으로
만들겠다고 호언하며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실제로 세스페데스
신부(예수회)가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 군에 종군하여 조선에 전도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포로로 끌러간 조선인들 가운데에는
기독교에 개종한 자들이 다수 있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 1611년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天家康)의 천주교 박해 때에는 무려 21명의 조선인이
순교하였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앞선 1597년
2월 5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주교를 박해한 일이 있었는데, 이
때에 나가사끼(長崎)에서 조선인 바오로 이바라끼, 그의 동생 네오 이바라끼,
그의 아들 12세의 소년 루도비꼬 이바라끼가 순교하였다. 이들은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가서 일본에 살면서 기독교에 입교한 후에 성 프란치스코
3회에 입회하여 신앙생활을 했던 한국 사람들이다. 이들 3인은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이바라끼 가족의 흉상은 서울 합정동
절두산 성지 서쪽 광장 끝 쪽에 세워져 있으며, 서울 대방동 성 안또니오
형제회에서 1976년 6월 8일 봉헌 건립하였다.[{절두산 순교 기념관 개관
20주년 기념 화집}, 32-33쪽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