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넨버그 서신(Lunenburg Letter)(1

조동호 목사 


 들어가는 말

루넨버그 서신(Lunenburg Letter)은 링컨 신학 대학원이 교재로 쓰기 위해서 간편한 형태로 편집해 출판한 문서들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 서신과 알렉산더 캠벨의 해설과 설명이 1837년 {천년왕국 예고자}(Millennial Harbinger)에 처음 실린 이후 환원운동권에 속했거나 속하지 아니한 많은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쳤다.

루넨버그의 "양심적인 자매"에게 보낸 캠벨의 회신에서 비롯된 쟁점들의 토론은 정기적으로 발행되는 이 잡지를 통해서 계속되었다. 캠벨과 다른 저자들, 특히 크리스티아노스(Christianos)와 토마스 헨리(Thomas M. Henley)의 기사들이 1837년부터 1840년까지 다음과 같이 {천년왕국 예고자}지에 실렸다.

1837년호: 411-414, 506-508, 561-567, 577-578쪽
1838년호: 348-349, 426-427, 520-521
1839년호: 43-45, 124-128, 168-179, 213-216, 292-294, 395-401, 475-476, 529-531, 547쪽
1840년호: 21-22, 106-109, 125-128, 162-165, 275-277쪽

루넨버그의 자매로 하여금 {천년왕국 예고자}의 편집자에게 편지를 쓰게 한 캠벨의 글은 "영국에 보내는 서신들, 제 1 호"(Letters to England-No. 1)로 제목이 붙어진 기사(記事)였다. 이 기사는 1837년 6월호에 실렸다. 이 기사 전문을 그대로 여기에 옮겨 놓겠다. 문제가 됐던 부분은 신명 순명조체로 표기하여 쉽게 알아 볼 수 있게 하였다.

몇 가지 질의해 주신 내용을 검토해 보면서 본인은 우리 형제들은 일반적으로 교회를 그들이 합법적으로 후원할 수 있는 유일한 도덕적이고 신앙적인 단체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선교회, 교육협회, 문서선교, 성서공회, 금주회, 반노예 연합단체를 만들지 않는다. 만약 이런 것들이 선한 일이라면, 그것들은 각 교회가 특성에 따라 처리해야 할 일들이다. 그리고 모든 교인들은, 재물과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그리스도인(a Christian)으로서 이러한 일들을 장려해야 한다. 우리 판단으로 기독교는 모든 불경과 불의, 부정, 억압 그리고 잔악한 행위를 세상에서 몰아내고, 인간 실존의 상태를 개선할 수 있는 모든 자선과 자비와 구제의 일을 실천하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모든 신앙인들에게 요구한다. 복음은 전파되어야 한다. 복음전도자들과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교회는 그들을 후원해야 한다. 전 사회가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교육을 받아야 한다 -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어린이는 훈련을 받고 유용하고, 안전하고, 존경받는 사회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 성서는 언제나 발행되어야 하며, 때때로 신앙문서, 신문, 잡지 그리고 팜플렛들이 세상 곳곳에서 발행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일에 절제해야 하며, 특히 모든 알콜성 음료들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그렇다. 때에 따라서는 전적으로 절제해야 할지도 모른다. 주의 만찬에 참여한 자들이 이슬람교도(Turks), 유대인, 무신론자와 같은 주의 적들과 비밀리에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결합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대상이 누구든지 간에, 백인이든지, 흑인이든지, 황인 이든지, 종이든지, 고용인이든지 간에 그들을 약탈하고 억압하는 모든 책략에 반대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종들에게 정당하고 동등하게 모든 것을 제공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법이 허용할지라도, 남편으로부터 부인을, 모정(母情)과 부정(父情)의 품에서 유아들을 판매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가장 오래고, 존중할 만하고, 성스런 결혼제도를 위반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위반하게 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들이 정치적으로나 그 밖의 다른 인위적이고 상황적인 구별이나 차별에 관계없이, 그들의 동료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서 취급되어야 하며, 신앙으로 교육받고, 영생을 위해 훈련받는 것이 그리스도의 훈계로서 우리들이 거룩하게 받드는 신념이요, 주장이다.

우리는 진실로 이러한 문제들을 가지고 모든 그리스도인들(all Christians)이 협력하는 것과 그와 같은 목적을 위해서 기금을 조성하는 것에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 우리 판단에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일이라면, 그들이 우리 형제 교회들에 소속되어 있든지 혹은 소속되어 있지 않든 지간에 그들과 협력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개신교 교단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발견하기 때문이다(FOR WE FIND IN ALL PROTESTANT PARTIES CHRISTIANS). 그들도 관련된 지식과 기회들에 따라서 우리 자신들만큼이나 모범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탄의 무리와는 연합단체(confederacy)를 형성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인의 대의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탄의 종들을 후원(tax)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 모든 협의체들(associations)이 공개적으로 그리고 분명하게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권에 관계없이 이들 결속된 연합체(union)들 중에 어느 하나에라도 공동체(a community)를 형성하는 한, 그리고 그 단체들이 불경하고 불신앙적인 사람들, 혹은 신조가 없거나 모든 것을 신조로 삼는 비기독교인들과 단지 일치(coincidence)라는 이유 때문에, 그 것이 무엇이든 지간에, 영적인 교섭을 갖는 한, 우리는 그들과 연합할 수 없으며, 그들과 함께 같은 한 깃발아래서 행진할 수 없다. 또한 그와 같은 조직들이 정말 필요하다면, 교회는 실패한 것이요, 하나님의 제도는 단지 사람의 손아귀와 제도들에 굴복 당하고 마는 것이 틀림없다(271-273쪽/ 볼드체는 캠벨의 것이며, 신명 순명조체와 영문 대문자체는 루넨버그의 자매가 지적한 내용이다).

1970년 3월

본문

개신교 교단들 속에 있는 어떤 그리스도인들

루넨버그, 1837년 7월 8일

존경하는 캠벨 목사님께, 저는 오늘 목사님(brother)께서 개신교 교단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신 {천년왕국 예고자}지에 실린 글을 읽고 매우 놀랐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모든 개신교 교단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발견한다"고 말씀하셨더군요.

존경하는 목사님, 저는 놀라움과 옳은 것을 행하려는 열망으로 즉시 이 서신을 목사님께 띄웁니다. 알고자 하는 저의 미약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써 주실 것을 여성의 신분에 관한 목사님의 평가로 볼 때 매우 확신합니다.

어떤 방법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지를 친절하게 좀 일러주시겠습니까? 목사님의 무슨 행위가 목사님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했습니까? 어떠한 때에 바울은 자신에 관해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불려지게 했습니까? 어떠한 때에 고넬료는 그리스도가 자신에 관해서 이름 불려지게 했습니까?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이 이 이름을 통해서가 아닙니까? 그리스도(Christ) 혹은 그리스도인(Christian)의 이름이 오로지 복음을 믿고,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로 장사된 자들에게만 속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 세심한 자매의 물음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한다. 만일에 개신교 교단들에 그리스도인이 없다면, 카톨릭교인들 사이에도 그리스도인은 분명히 없고, 유대인들, 이슬람교도들, 비기독교인들 사이에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들 말고는 혹은 예수께서 명하신 모든 명령을 지키고 있고, 지키려고 애쓰는 우리와 같은 자들말고는 이 세상에 어떠한 그리스도인들도 없다. 그러므로, 수 백년동안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의 교회도 없었고, 그리스도인들도 없었다. 그리고 영원한 메시아 왕국에 관한 약속들도 실패했고, 지옥의 문들이 그의 교회 위에 군림하였다. 이런 일이 있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교파들 속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있다.

그러나 누가 그리스도인인가? 나사렛 예수를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로 마음으로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뜻과 그분이 원하시는 모든 것에 순종하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벽한 성인, 혹은 완벽한 그리스도인이 있는가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유아" 혹은 믿음의 걸음마 단계에 있는 사람 혹은 불완전한 그리스도인도 있다. 신약성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벽한 사람이나 불완전한 사람 모두를 인정한다. 전자는 후자를 포함한다. 바울은 불완전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온전하라"(고후 3:11)(2고 명령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의 온전케 됨을 기원한다고 말한다. 고린도에 있는 성도인 너희를 위해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의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3 바울은 다시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고전 2:6)라고 말한다. 또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 14:20)고 권한다. 이 밖에도 다른 많은 곳에서 바울은 이와 같은 말을 하거나 함축하고 있다. 뜻과 기질과 행위에 온전함이 있는가하면, 온전한 상태나 온전한 개성도 있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의 상태나 개성을 절대적으로 상실치 않고도 어느 정도 불완전하게 되는 것이 가능하다. 바울은 "육적인" 그리스도인들과 " 강하고 약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도 말한다. 예수께서는 착하고 충실한 사람들이라도 단지 30배의 의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60배, 혹은 100배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도 있다고 인정하셨다.

모든 사람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 보다 더 지적(知的)이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곤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외식함(Pharisaism)이나 천박함 혹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경솔한 판단 때문에 그들보다 뛰어난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정죄를 당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지켜야 할 의무 혹은 그리스도인의 상태나 특성의 표준을 정할 수 없으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받는 침례조차도 정할 수 없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지식이나 동의없이 유아 때에 약식으로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천국에 대한 확고한 희망이 없는 외인들이라고 마음으로 간주하고 있다. "구원은 유대인들의 것이었다"고 그리스도께서도 인정하셨다. 한편, 그리스도께서는 외국인이요, 이스라엘의 복지와 관련이 없는 외인인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해서(5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6고 말씀하셨다.

만일에 유아세례자가 성서적으로 더 지적이고, 침례자나 혹은 초대교회의 믿음을 따라 신앙을 고백한 후에 침수세례를 받은 자보다 주께 더 은혜 지향적이고, 더 헌신적이라면, 가장 사랑하는 그에게 내 마음의 편애함을 한 순간도 주저할 수 없다. 다르게 행동한다면, 본인은 골수 교파 교인이요, 그리스도인들 중에 바리새인일 것이다. 아직도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그가 주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 이외에 그가 나의 주를 사랑하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대답은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은 주의하기 바란다. 순종을 보편적이고 심지어는 일반적인 순종을 위한 한가지 명령으로 대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본인이 가르친 대로 침수이론이나 실천을 후자보다는 전자를 의심없이 정확하게 인정하는 자보다 교파교회의 세례자나 유아세례자가 더 은혜 지향적이고, 더 그리스도의 요구들에 전반적으로 순응하는 것을 본다면, 본인은 충심으로 인정할 것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할 것이다. 본인은 그렇게 판단하고 느낀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기다리며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그리고 이것은 몇 가지 항목들로 정확하게 구성되지 않으며, 오히려 알려진 전체적인 진리에 전반적인 헌신으로 구성된다.

본인과 더불어, 잘못된 이해 때문에 범하는 실수들과 고집 때문에 범하는 과오들이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그것들은 양극처럼 거리가 멀다. 천사도 명령의 뜻을 잘못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가 이해한 범위에서 그것을 순종할 것이다. 요한 번얀(John Bunyan)과 요한 뉴튼(John Newton)은 매우 다른 사람들 이였다. 그들은 세례와 다른 몇 가지 것들에 대해서 매우 다른 견해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그들의 지식이 미치는 범위에까지 모든 일에서 주께 순종하였다.

타락한 실수가 있고, 타락하지 아니한 실수도 있다. 모든 세계가 저주하지 않으면 안될 고의적인 과오들이 있고, 모든 사람들이 불쌍히 여기는 피할 수 없는 실수들도 있다. 베드로도 주께서 요한에 관해서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7고 말씀하셨을 때에 주님을 오해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8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가 거짓되게 말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들은 아브라함도 죽었다고 주장하면서 그 분의 말씀을 왜곡하였다.

많은 선한 사람들이 실수를 저질렀다. 실수들은 명령된 내용들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태만해서 발생되었을 때에만 부패된 심령에서 나온 책망할만한 것으로 또 단정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진다. 무지는 그것이 자발적일 때 언제나 범죄이며, 자발적인 것이 아니 였을 때에는 무죄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적극적인 제도들을 태만히 하고 있고 또 그것들 대신에 인위적인 권위의 다른 어떤 것들로 대치한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알면서도 하고 있고, 또는, 모르고 하고 있다 할지라도, 기록된 것을 자발적으로 태만히 한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실수들이 그들의 모든 공언들을 비기독교적인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성서에 있는 어떤 것을 무시하는 것은 언제나 불행이며, 범죄이다. 정말 그렇다. 그러나 읽을 수 없는 사람이 얼마나 되며,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은 얼마나 되며, 교육을 받은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지식과 경건에 있어서 우수한 것으로 간주한 것들, 그들이 태어나서 교육받은 곳, 그들 자신의 굴뚝의 연기와 티끌로부터 결코 피할 수 없는 것들의 권위에 의해서 지배되는가? 이 모든 것들이 상당한 결핍과 당혹감으로 고통을 겪고 있으며, 더 많은 지식인들은 면제된다.

본질적인 것을 설교하는 자들이나 비본질적인 것을 설교하는 자들 모두가 자주 과오를 범한다. 본질론자는 정신(the heart)을 얕볼지 모르며, 비본질론자는 제도를 경멸할는지 모른다.  후자는 천국의 제도들을 쓸모 없게 만들고, 전자는 하나님께서 가장 눈여겨보시는 정신적인 성향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람이 제도 없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약간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순간에 우리에게 서신을 보내 주신 분은 우리가 제도의 권위와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계층에 속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보거나 듣는 것을, 그들 중 어느 것도, 또는 종합적으로 그들 모두도 삶에 본질적이지 않다고 단언함으로서, 과소 평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들과 교제하기로 오히려 선택한다. 지상에 있는 모든 금을 구입하기 위해서 두 눈 중에 하나를 팔지 않겠다. 왜냐하면, 그것 없이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신앙 고백에 따라 받는 침수를, 그것이 비록 성화와 안위에 대단히 본질적일지라도, 그리스도인에게 절대적인 본질로 만들 이유(occasion)는 없다. 나의 오른쪽 손과 오른쪽 눈은 나의 소용과  행복에 대단히 본질적이다. 그러나 나의 생명에는 그렇지 않다. 그것들 없이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침수의 진실 되고 성서적인 의미와 목적대로 바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수용함이 없이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거기에서 침수세례자 이외에는 아무도 그리스도인이 없다고 추측하는 사람은 분명하고 온전한 시력을 가진 자 이외는 산 사람이 없다고 단언하는 사람만큼이나 큰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9

제안된 모든 질문들이 한 가지 점에 집중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질문에 정식으로 답하지 않고, 그 한 가지 점에만 이들 의견들을 집중시키겠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법령(ordinance)을 무시하는 사람 혹은 그것을 자진해서 무시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일리 없다는 생각을 주저없이 발표한다. 그리고 만일에 제정(institution)의 의미를 실수로 잘못 알고 있으나, 심령으로는 총체적인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하는 누군가에게 그가 영원히 멸망 받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갖도록 가르친다면, 나 자신의 확신과는 반대로 나 또한 범죄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장에 결론을 내리자면, 극복하기 어려운 무지와 비자발적인 실수를 통해서 그것을 태만히 하거나 범하는 사람들도 구원받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예수의 모든 계명들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을 소홀히 할 수 있는 자격을 스스로 요구하는 자, 혹은 그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도 그리스도인 일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의 수단과 기회들이 미치는 전체적인 범위에까지 주의 뜻을 확인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태만히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지 못했고, 주의 백성들 사이에 등록될 리가 없다. 그래서 본인은 이치를 따진다. 그리고 신구약 성서의 모든 선지자들과 사도들에 의해서 지지 받는 증명(reasoning)에 따라 생각한다.

알렉산더 캠벨(A C).

교파들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들(1)

9월호에 실렸던 루넨버그 서신에 따른 기사 중에 어떤 문장들은 두 서너 분의 지식인들과 서신을 주신 훌륭하신 많은 분들로부터 반대 의견이 개진되었다. 우리는 개신교 교파들 속에도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점을 우리의 견해로서 설명했다. 견해, 진실로 필요할 때는 언제나 우리가 개진해 왔던 것이다. 본인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죄사함에 관한 첫 번째 임시증간호에서 특별히 언명되어진다. 한편, 본인이 지금까지 고집스럽게 지켜왔던 점을 양보했다 또는 본인이 이제 말한 견해를 지지하기 위해서 성서의 일정한 부분을 잘못 적용했다고 이들 형제들은 지금 생각하고 있다. 언급된 기사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의무 혹은 그리스도인의 상태나 특성의 표준을 정할 수 없으며, 침례조차도 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신앙 고백에 따라 받는 침수를, 그것이 비록 성화와 안위에 대단히 본질적일지라도, 그리스도인에게 절대적인 본질로 만들 이유(occasion)는 없다"고 말했다. 이 두 문장이 언급된 기사의 논쟁적인 부분의 관절과 골수 부분이며, 독자들이 알아야 할 부분이다.

질의자의 질문들에 답을 만들어 감에 있어서 많은 분들이 질의자의 드러난 기분과 견해에 의존한다. 이 경우에도 그렇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전적으로 침수세례를 받지 않은 자, 또 심지어 물에 장사되기 전에 침례의 진실한 의도와 뜻을 이해하지 못한 침수세례자에게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을 적어도 허용하지 않는 한, 이들 설명을 요구한 질의들의 제출자는 그리스도인 침례라는 주제에 관해서 극단론자였던 것으로 이해했다. 우리는 그녀의 서신에서 이것을 추측했고, 물론 전에 했던 만큼의 용기 있는 답변, 아마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용기 있는 답변, 그러면서도 그 주제에 관한 한 우리의 이전 입장과 전혀 다르지 않은 답변을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기고가들에 대한 본인의 높은 관심 때문에 문제된 그 문장들에 관해서 우리의 견해를 좀더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를 느낀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이 처음에 침수자 신앙인들에게 주어졌지, 다른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에 우리는 루넨버그의 자매는 물론 그들과도 기꺼이 일치한다. 그러나 그들이 침수되었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로 옷입었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세계 공용어에 있어서 다른 모든 말처럼, 바울이 때때로 그 말들의 부분적인 의미에서 성도와 죄인, 유대인과 이방인이란 말들을 사용할 때처럼, 이 말도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우리의 견해를 피력하고자 한다.

바울이 표현한대로 유대인에도 내적인(이면적) 유대인과 외적인(표면적) 유대인이 있다. 그렇다면, 내적인 그리스도인과 외적인 그리스도인은 없겠는가? 외적인 사람이 언제나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은 아니며, 기고가 중에 어떤 사람은 '내적인 사람도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말하게 될 지 모르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내적이며 외적인 사람이 그 말의 온전한 뜻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바울이 할례에 대해서 이치를 따지는 것처럼, 우리도 침례에 대해서 이치를 따져 볼 것이다.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다"(10라고 박식한 바울은 말한다. 즉 우리가 바울을 이해하는 대로, 그것은 외적인 육신의 것이 아니다.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오,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11 침례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외적인 육신의 것만이 아니오, 또한 영적인 것이다. 우리는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을 다투고 있다. 외적인 것은 우리 자신들을 포함한 인간을 위한 것이고, 내적인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지만,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 모두는 하나님과 인간 모두의 칭찬을 위한 것이다.

몇 분의 형제들이 다르게 생각하는 훌륭한 견해는 이렇다. 왜곡시키지 않은 채로 단순히 침례를 잘못 받은 사람이 내적인 침례를 가질 수 있는가? 의도적으로 혹은 태만하게 외적인 것을 왜곡시킨 사람은 내적인 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것에 우리 모두는 동의한다. 그러나 단순히 실수에 의해서, 마음에 왜곡시킬 의사가 전혀 없이 외적인 침례를 오해한 자가, 침례에 대한 자신의 견해에 따라서 그것에 순복했다면, 자신의 상태를 변화시키고, 모든 사람에게는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칭찬을 듣는 내적인 침례를 가질 수 있는가?  꼼꼼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본인의 견해는 가능하다이다. 이 이상의 것은 단언하지 않는다.

이 견해에 대한 본인의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우리가 가진 두 가지는 이번에 제시할 시간과 공간뿐이다. 일곱 개의 난점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이다. 이 일곱 개 가운데 두 가지는 가설이 발생되는 것과는 반대로 극복될 수 없다: 영원한 그리스도의 교회에 관한 약속이 실패했다. 그리고 지난 삼 백년 동안 지상에 몇 개 안되는 가장 훌륭한 이름들이 사탄의 왕국의 신하들로서 간주되어져야 했다는 것이 뒤따르게 될 것이다!!

우리 형제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침례를 단지 외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들은 물 속에 몸을 외적으로 침수시킬 때에, 동시에 그리스도 속으로 정신과 마음이 내적으로 침수된다는 것을 모두 믿는다. 게다가 그들은 전자가 후자 없이도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다. 후자가 어떤 의미에서는 전자없이 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뜻에서 그것 없이도 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부언해야 할뿐이다.

여전히 본인의 견해는 형제들의 행동에 강제성을 띠지 않는다. 또 그것이 사람에게 쓸데없는 것으로 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과 회개와 침례를, 메시아 왕국에서 그들의 타고난 시민권과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의 성화와 위안에 필수적인 것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되풀이 가르치는 동안, 어떤 사람도, 자신의 사적인 만족을 위한 것말고는, 이 세대의 모든 차이들에 관한 우리의 견해들을 요구할 권리를 갖지 않는다. 사도들에 의해서 우리들에게 전달된 "교리의 틀"을 마음으로 복종하는 그가 확실히 더 안전하다. 그리고 그 자신만이 하나님과 사람과, 믿고, 회개하고, 침례 받고, 거룩한 사도들이 우리들에게 전달한 적극적이고 도덕적인 모든 법령들을 지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자신부터 칭찬을 받는다. 문제가 된 기사에서 인용된 성구들은, 기고자들 가운데 한 분이 잘 지적한대로, 모두가 그리스도인의 상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특성에 적용된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잘못 적용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전반적인 설명이 이 문제에 관한 만족할만한 답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알렉산더 캠벨(A C).
오하이오 리버, 1837년 9월 28일.

교파들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들(2)

이 사무실에서 받은 많은 서신들로 판단해 보건대, 루넨버그 자매에게 회신한 본인의 글이 우리 형제들에게는 많은 고통을 주었고, 교파교단의 친구들에게는 얼마간의 기쁨을 주었다. 교파들을 형성하는 자들이 조롱하며 우리 형제들에게 말하기를, "그렇다면, 우리는 당신들만큼이나 안전하다" 또 "당신들은 이제 문제 중에 가장 큰 문제, 이를테면, 침례가 그리스도인에게 본질적이지 않다고 인정함으로서, 우리들에게 건너오고 있다"라고 말한다. 우리 형제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죄사함을 위한 침례의 중요성에 관해서 말해왔던 많은 것들을 우리가 중립화시켰고, 그리스도인의 의무와 그리스도인의 특권에 관한 총체적인 주제에 관한 시대의 무지와 과오와 무관심에 대항하여 싸웠던 무기들의 상당수를 그들에게서 해제시켰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여론주의(opinionism)에 대한 본인의 견해는 본인에게 교리화시키는 것과 나 자신의 견해를 확립시키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인이 문제가 된 부분에 대해서 찬반양론의 수백 통의 서신들을 출판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양해가 있기를 바란다. 단 한가지 중요한 점만이 이 서신들을 출판함으로서 얻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서신들에 할애할 지면이 부족하다는 점을 다소 애석하게 생각한다. 그것은 이 나라에 캠벨주의자들(Campbellites)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까지 지역사회의 눈들을 진실로 충분히 뜨게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기고가들이 나의 의견이 거짓되고 근거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캠벨주의자들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 내게 썼던 것 같다.

그리고, 나 자신은 나의 견해를 교리화 시킬 의사가 전혀 없고, 그 의견 자체를 위해서 싸워야 할 의무감을 전혀 느끼지 않지만, 아래의 세 가지 내용만큼은 꼭 설명해야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한다.

첫째, 일관성이 없다는 비난에 대해서 나 자신을 변호해야 할 의무.
둘째, 교파주의가 이용하지 못하도록 그 견해를 방어해야 할 의무.
셋째, 이 시점에서 그와 같은 견해를 개진해야할 몇 가지 이유들을 제시해야 할 의무.

1. 그러면 이제부터 본인이 일찍이 싸워왔던 어떤 것도 양보했거나 굴복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반대로 문제가 된 그 견해야말로 진실이든 거짓이든 본인이 언제나 공언해 왔던 것이란 점을 아주 신속하게 서둘러 입증해 보이겠다(12.

⑴ 우리가 사도적 기초 위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연합에 관해서 써왔던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지를 먼저 질문하겠다. 세상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우리 자신의 지역사회에서 연합했다고 우리가 가르쳤는가?

⑵ 그리고 둘째로, 만일에 우리가 허약한 우리들의 친교집단 이외에 주께서 더 이상의 백성을 갖고 계시지 않는다고 상상했다면, 성령께서 바벨론에 머무는 성도들에게 하신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13고 하신 말씀을 왜 우리는 그렇게 자주 인용했으며, 배교적인 기독교계에 적용했는가?

⑶ 그러나 아직도 의심이 가는 사람은 1825년 4월호 {그리스도인 침례자}(Christian Baptist)(14에 실린 다음의 글을 읽기 바란다. "교파들이 하나의 거대한 군대로 연합하는 것을 볼 생각도 없고, 보고 싶지도 않다. 이것은 우리들의 자유와 법을 위협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주께서는 기도하지 않으셨다. 이성과 선행이 그들로부터 요구하는 것은 단지 그들 사이에 흩어진 제자들 뿐이다." 이것은 교파들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란 우리의 입장인 현재의 견해와 매우 유사하다. 제2쇄, {베다니}(Bethany), 85쪽.

⑷ 또다시, 그리스도인들의 연합을 위해서 언어구사의 순수성에 대해서 말하자면, "여러분(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어느 분도 아직까지 여러분의 방침대로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연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여러분은 그들이 어떻게 나누어질지, 어떻게 각 파가 자신들을 유지해 갈지를 종종 보여 주었다. 그러나 여러분은 제자들의 가시적인 일치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또 한편 그들의 가시적인 불일치를 지지하고 있다. 우리는 여러분들을 이해할 수 없다." 1827년 3월호, 제4권.

⑸ 기고가들이 보내준 "그리스도인 연합"에 관한 많은 기사들과 서신들은 우리의 지지와 함께 독자들에게 소개되었다. 그들 중 하나 가운데 몇 구절을 인용하고자 한다. "모든 이름의 그리스도인들 속에는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그의 몸의 참 지체들이며, 참 포도나무의 가지들이며,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인,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있다는 것을 모두가 동의한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1826년 10월호, 제4권, 53쪽.

⑹ 1826년 8월 스펜서 클락(Spencer Clack)에게 보낸 서신에서 본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있는 분열의 죄악에 관해서 말씀해 주신 것에 대해서 본인은 아무 것도 반대할 것이 없다. 본인은 모든 분열과 현존하는 모든 당파심을 진심으로 개탄한다. 그리고 만약에 본질적인 토대 위에서(constitutional grounds) 모든 분열들을 고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연합시키기 위해서 본인이 했던 것 보다 더 노력한 사람이 이 대륙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본인은 도보로 수백 마일을 걸어서 그 분을 만나 뵙고, 나의 과오를 고백하겠다." 제5권, 15쪽.

⑺ 오웬과 토론하기 위해서 떠나기 전 저녁에, 1829년 4월 6일, 제6권, 239쪽, 그 위기를 암시하면서 본인은 말한다. "모든 교단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선한 소원과 기도와 소망을 본인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느끼고 기뻐한다." 그래서 수 차례 {그리스도인 침례자}지에 언급하였다.(15

⑻ 이 주제에 관한 {천년왕국 예고자}지의 견해들은 [회복된 기독교](Christianity Restored)란 제하의 글들 속에 농축되어 있다. 그 밖에도 [방침들에 관련된 견해]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 공동체를 형성할 기초에 관해서](of the Foundation on which all Christians may form one communion)란 제하의 글들을 참고하시오.

그리스도인의 연합을 위한 기초에 관한 긴 기사가 실린 그 책에서 교파들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연합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교파들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우리의 견해에 대한 가장 명확한 입증이 될 101쪽부터 128쪽까지의 내용 전체를 추천한다. 참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공동체를 일컬어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을 어느 날 한 곳으로 모을 중축(中軸)이라고 말하고 있다(102쪽). "교파들이 정말 그치겠는가? 한 주님아래, 한 믿음 안에, 한 침례 안에로 모든 제자들이 연합될 때가 정말 오겠는가? 분열들이 정말 치유되겠는가? 지상의 성도들 사이에 벌어지는 싸움이 정말 그치겠는가?"

⑽ 첫 증간호 혹은 [죄사함을 위한 침례]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유아세례자들의 기독교의 허약함으로부터 "이 구원을 의도적으로 태만히 하는 자들, 죄사함을 위한 침수세례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갖고도 이를 의도적으로 태만히 하거나 거절하는 자들말고는 아무도, 정말 이런 사람들말고는 다른 어떤 사람도, 배제시키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들이 복음에 관한 그들 자신의 정의에 따라 구원을 거절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희망을 갖지 못하는 만큼,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거의 희망을 갖지 못한다. 제1호, {임시 증간호}, 제1쇄, 53쪽.

이와 같은 열 개의 증거들과 논박을 통해서, 우리가 일관성이 없이 입장을 바꿨다고 책망하는 자들에게, 그들이 우리들을 매우 확실하게 오해하지 않았는지를, 본인은 지금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 열 개의 증거들을 우리들이 손쉽게 백 가지로 늘리는 것이 필요하겠는가?

2. 이제는 우리의 견해를 교파주의자들이 악용하지 못하도록 변호하겠다.

⑴ 우리의 견해가 그들에게 가져다 준 위안에 대해서 너무 많은 기쁨을 누리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견해가 침례를 받지 아니한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도 전혀 죄사함이나 구원의 확실함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견해에 근거해서, 침례 받지 아니한 모든 사람들은 이 견해에 대해서 모르거나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과 그것을 알고 기뻐하는 사람들의 두 그룹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이 견해를 모르거나 무관심한 사람들은 그것을 기뻐하거나 악용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 자신을 위해서 그것을 기뻐하는 자들은 그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잠시만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와 같은 견해를 기뻐하는 사람은 그것을 심사숙고해야 할 주제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그 주제에 관해서 완강하게 또 자발적으로 잘못을 범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미 수천 번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바로 그 견해에 의해서, 그는 그것에 숨겨진 어떤 혜택으로부터도 제외된다. 그의 기쁨은 진정으로 그를 반대하여 강하게 추정되는 증거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느낌들에 있어서 한쪽에 치우쳐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올곧은 마음 즉 그 견해를 심사숙고해 볼만한 그런 마음은 적어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주제에 관해서 자기 자신들과 어떤 토론도 해 보지 못했던 사람들, 그리고 전혀 사전지식없이 자신들이 침례 받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만을 존경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어떤 경우에도, 일부 다른 사람의 믿음에 따라 뿌림을 받고, 부음을 받고, 물 속에 잠김을 받은 사람, 혹은 자기 자신의 믿음을 따라 뿌림을 받거나 부음을 받음 사람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확실성(다른 모든 것들은 동등하다 할지라도)과 처음부터 믿고, 그리고 나서 자기 자신의 신앙고백에 따라 침례를 받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확실성과 동등한 것이 될 수 없다. 전자의 경우에서, 우리는 기껏해야  인간의 부족한 추론과 견해를 가질 뿐이지만, 후자의 경우에서, 우리는 우리 구세주와 재판장의 확실하고 무오한 약속을 갖고 있다. 신자들의 침수세례가 싫어서 혹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유아 혹은 성인 때의 뿌림이나 부음의 세례를 주께서 인정하실 것이라고 그 자신을 위해서 기뻐하는 자는 문제가 된 그 견해를 심사숙고하는 마음의 상태가 옳지 못하다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한다는 점과 하나님의 뜻과 즐거움을 기뻐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뜻과 쾌락을 추구하는 자임을 입증했다는 점을 아무리 강조해도 과하지 않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는 어떤 호감 가는 견해도 가질 수 없다.

⑵ 그러나 전술한 견해는 우리들로 하여금 무지와 과오와 무시에 대항하여 벌리는 논쟁으로부터 그만두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문제의 그 사람이 그 주제에 관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의 충분한 범위에까지 행동반경을 넓히고 있고, 또 주의 뜻을 확인하기 위해서 기회들을 따라서 그가 태만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견해의 말 때문에, 오로지 의심하는 자, 혹은 그의 침례가 사도적이고 신적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 그 사람은 정당화되지 못하며, 스스로 정죄된다.  

⑶ 신약성서의 모든 진보된 지식이나 경험 없이도 유대인이나 구약의 족장들에게도 구원이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것이 기독교 제도의 최상의 가치와 우월성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닌 만큼, 교파들 속에 그리스도인들이 있을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죄사함을 위한 침례의 가치와 중요성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성향, 상태, 그리고 특성말고도 그리스도인의 특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으로는, 믿고,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고, 주님과 함께 지성적으로 장사되고 부활한 사람만큼 칭의나 죄사함에 관한 확신을 완전하게 갖는 사람은 지상에 없다. 그러므로 현재의 구원은 침례 받은 사람들에 의한 것만큼, 다른 모든 것은 동등하다 할지라도, 침례를 받지 못한 사람에 의해서 그렇게 충분하게 결단코 즐겨질 수 없다.

⑷ 또 모든 교파가 동의하는 것처럼,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고 침례를 받은 사람은 정말 세례를 받은 것이다. 기독교계의 단지 소수의 사람만이 침례의 방법으로서 어떤 다른 행동의 가능성을 인정할 뿐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연합과 협동을 위해서, 신성한 제도를 존중하며, 길을 개방하는 것말고는 어떤 다른 이유도 없다면, 그리스도인들의 연합을 위해서, 침례를 받는 것이 모든 신자들의 의무란 점이 쉽게 드러날 것이다. 그 밖에도, 침수세례는 예수의 우주적인 왕국에서 타고난 시민의 권리를 수여한다. 그러나 우리의 반대자들과 함께, 그들 자신들이 재판장되었을지라도, 그들의 "세례"가 단지 그 왕국의 일부 지역들에서만 시민의 권리들을 수여한다. 침례에 관한 한, 동방교회(the Greek), 카톨릭교회(the Roman), 성공회(the English), 루터교회(the Lutheran), 칼뱅주의(the Calvinian), 아르미니안주의(the Arminian), 그리고 침례교(the Baptist) 공동체들이 침수세례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계의 오직 일부분만이 뿌리거나 붓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견해는 어떤 의미에서도 침례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는다.

⑸ 마지막으로, 신앙생활에서 무엇인가를 단지 행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성향도 아니고, 특성도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총체적인 뜻을 알려고도 하지 아니하고, 행하려고도 하지 아니하는 것은 우리가 추진시킨 그 견해의 본질에서 개인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일들이 그렇다면, 우리는 묻는다. 어떤 점에서 그와 같은 견해의 공언이 기독교 제도 속에 있는 침례의 가치에 관해서 지지 혹은 모독하기 위한 논쟁을, 혹은 예수의 명령들을 지키지 않을 모든 것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구별할 중요성과 필요성의 논쟁을, 혹은 전능의 아버지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순종하도록 명령한 유명한 선지자의 요구에 지체없이 순종하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그치게 하는가?

3. 세 번째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시점에서 그와 같은 견해를 개진해야 할 몇 가지 이유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⑴ "개신교 교단들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찾는 문제에 관해서 이 글이 실린 최근 호에서 인용한 내용을 설명해 달라고 한 자매로부터 간청을 받았다. 그녀는 극복하기 어려운 난제들이거나 그 내용에 강하게 반대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던 질문 목록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녀는 본인이 그녀의 모든 질의에 무슨 답을 줄 것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았기 때문에, 본인은 그 질의들에 대해서 회답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본인 생각에 전술한 내용에서 그녀가 느꼈을 난제를 해설하였던 것이다.

⑵ 그러나 우리는 이 자매가 가진 난제들보다도 일부 형제들이 가진 편견을 바로 잡지 않으면 안될 더 화급한 이유들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타교파를 비난하고, 그들을 통틀어서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외인들로서 또는 적그리스도적이며 부패한 집단으로 단정하는 일에 너무 깊이 빠져 있다. 자, 주께서 바벨론에 대해서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고 말씀하셨으므로, 본인은 호기심이 강한 이 자매의 어깨 너머로 그들을 바로잡아야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아주 열렬한 이들 형제들이, 신앙을 고백하는 대중의 모든 사적이고 사회적인 덕행들을 얕보면서, 우리가 침례를 구세주로 만든다든지 혹은 천국 가는 여권으로 만들고 있다는 교계의 비난에 빌미를 제공하였다. 자,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의견들을 제시하였으므로, 본인은 그들 자신의 것만큼 강하고 신랄한 말로 그들에게 한 견해를 제시함으로서 그들을 좌익에서 중도로 이끌고자 했다.

그 경우는 이렇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고자 하는 한 사람을 볼 때, 그의 형제우애, 동정, 그리고 활동적인 자선행위는 그의 상황들말고는 경계가 없다는 것을 안다. 집회 때마다 그의 자리는 결코 빈 자리로 남아 있지 않으며, 그의 내적 경건과 헌신은 알려진 모든 책임에 세심하게 복종함으로서 증명된다. 그의 가족은 주를 경외하는 일에 길들여져 있고, 그의 항구적인 친구는 성경이다: 어떤 사람이  결코 문의는 하지 않았으나, 그가 성서적으로 침례 받았다는 것, 그리고 또한 이 모든 공적이고 사적인 덕행들이 크게 부족됨으로서, 그의 주된 또는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가 침수 세례를 받았다는 것, 그리고 복음에 관한 성서적인 이론을 견지하고 있다는 것을 언제나 간주했기 때문에, 이교인이나 세리로 분류된 그와 같은 사람을 본인이 볼 때를 말하는 것이다. 본인은 그와 같은 사람을 칭찬하고픈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그를 그의 잘못에서 깨어나도록 돕고 싶다. 그리고 예수의 모든 명령들 중에 가장 작은 것이라도 가볍게 보는 교파교단의 가장 훌륭한 신자를 인도하는 대신에, 나의 침수세례 형제에게 바울이 그의 유대인 형제에게 말한 것처럼  말하겠다. 그 유대인은 그가 만들지 않았던 한 체계를 찬양하였다: '선생님, 그의 무할례나 무침례가 그에게 침례로 간주되지 않겠습니까? 또 당신이 문자적이고 참된 침례를 가졌다 할지라도, 그가 여전히 당신의 왕의 성문율을 범하거나 태만히 하는 당신을 정죄하지 않겠습니까?'

⑶ 우리는 세 번째 이유를 갖고 있다. 우리는 파당을 지어 머리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고 언제나 비난을 받아왔다. 또 한편 우리는 진실로 현재 우리가 서있는 기반을 잡아야 한다는 압력을 언제나 받아왔다. 본인은 과거 일 이년간 이 인상을 지우려고 애썼다. 본인이 아는 것은, 백 명의 형제 중에 한 명 정도가 낌새를 채는 정도가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비밀리에 그리고 전반적으로 퍼져있다는 것이다. 이 진술에 관해서 본인은 더욱 서슴없이 개신교주의를 방어하려 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본인은 현재 진술하려는 것보다 더한 방법으로, 우리가 억지로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서려하는 것이 몹시 못마땅하다는 것과 그들이 일컫는 대로, 그리고 지금은 우리가 일컫는 대로, 그들이 이 커다란 "분열"의 원인이란 점을 개신교 대중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자, 이제 마음의 생각을 이렇게 펼쳐 보였으니, 그가 양보라고 주장했던 것의 의미를 검토해 보자. 그리고 본인이 먼저 묻겠다. 무엇이 우리들로 하여금 이 위기의 때에 분열을 만들도록 야기시킬 수 있었는가? 혹은 매우 강하게 그것을 반복하자면, 본인은 좀더 정확하게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반대자들이 억지로 우리로 하여금 논쟁의 힘으로 그것을 만들게 했다고 아무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 자신들이 재판관이 되었을지라도 우리들은 아무 것도 논쟁에서 잃은 것이 없다. 완벽한 자유의사에 따른 제시에 대해서는 "양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을 모든 사람은 동의한다.

그들은 우리가 그들의 위치를 부러워한다고도 말할 수 없고, 그들의 기반을 점하려 할 것이다 라고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들처럼 단순히 우리를 새로운 교파로서 간주함으로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순수한 본래적인 복음적 제도들에 대해서 그들이 아무 것도 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기독교계에서 최고의 개종자 조직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그들과 함께 하기를 바랄 아무런 이유를 갖지 않는다. 믿음, 회개, 그리고 죄사함을 위한 침례, 그리고 그리스도로 옷입은 자들에게 주신 그리스도인의 양자 됨과 하늘의 부르심의 모든 약속들은 교파교회의 강단과 지푸라기 즉 통곡의 벤치, 근심의 자리, 그리고 회심을 이끌어내는 다른 모든 현대식 방법들(paraphernalia of modern proselytism)에 비교가 안될 정도로 앞서가고 있다. 그것이 매우 실제적이고 또한 이론적이라는 점은 개신교 교단들의 가장 분별력 있고 믿음이 깊은 부분들에 앞서는 전례 없는 진보들의 사실에서 드러나고 있다. 매우 착실하고 빠른 성장을 하면서 신약성서 교회를 부르짖는 우리와 같은 교파는 이 땅이나 조국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거의 모든 주와 이 거대한 연방제 영토에서, 심지어는 외국에서조차도 매우 성공적으로 알려졌다.

모든 반대 조직들에 대항해서 총체적으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면, 대체적으로, 부족한 모든 것은 충분한 수의 지적이며 일관된 주창자들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이 동의한다. 왜냐하면, 수많은 실험들이 그것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많은 체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위선 그리고 사악함 때문에, 그리고 일부 선한 형제들의 경솔함과 경거망동 때문에 우리는 정말 많은 것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상황이 매우 만족스럽게 증거 하는 바와 같이, 해마다 지탱해왔고 점증하는 부흥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크고 배타적인 교단이나 교파를 만들거나 끌고 가려고 하는가? 우리에게 그럴 능력이 없는가? 그렇다면, 왜 우리가 무엇인가를 양보하는가? 우리가 그와 같이 육적이고 이기적인 생각들에 의해서 움직인다면, 어떻게 다른 교파에도 구원의 가능성 있다고 양보할 수 있겠는가? 우리 견해의 신선한 이 모든 사실들과 논리적 근거들로서 본인은 묻는다. 그와 같은 양보가, 즉 그와 같은 시기에, 그와 같은 자유의사에 따른 제시가, 기독교계에 새로운 교단을 형성하는 영광을 추구한다는 비방에 주어질 수 있는 가장 만족스럽고 대답할 수 없는 논박이 아닌가?  몇몇 반대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만약 우리가 그들에게 유리하게 새롭고 예상치 못했던 양보를 했다면, 우리는, 이기적이고 파당심이 강한 견해들과 감정들의 토대 위에서 그들의 비난과 질책에 이제부터는 (우리 생각에) 침묵을 지켜야 할 그와 같은 시기에, 그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 앞에 놓인 그와 같은 전망을 가지고, 그것을 했다.

동료 사역자들의 일부분은 친근책(approaches)이 질책(reproaches)보다 더 주님의 방식에 부합되는 영적인 방법이라는 점을 잊고 있는 것 같다. 호의적인 평판을 얻기 위해서는 화친하고 온유하며, 자비로운 태도를 취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고 그리스도인다운 것이며, 가장 성공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아주 만족스럽게 입증했다. 많은 개신교 교사들과 그들의 공동체들이 우리들에 대해서 전보다 훨씬 좋은 인상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들 중에 상당수가 우리들과 연합할 날이 그리 멀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성서 하나에만 이르게 되는 때는 언제든지 확실히 우리들에게 건너오지 않으면 안된다. 침례교인들과 유아 세례자들도 개혁의 필요성을 날마다 점점 더 느끼고 있고, 우리의 견해가 해마다 대중의 마음을 점점 더 확실히 사로잡아 가고 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버지니아주 동부에 사는 우리 형제들은 우리 견해의 매우 강한 표현을 적어도 이 때에 이끌어 내야할 호기를 맞았다. 그리고 전술한 견해에 관해서 우리는 현재 사분의 일 정도의 많은 서신들을 그 지방에서 받고 있다. 그들 중에 일부가 크고 불합리하게 교파들을 악용하지 않았거나 혹은 그렇게 행한 자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도움을 주고, 부추기지 않았다면, 그리고 일부 몇몇 다른 지역에서 몇몇 사람이 기독교를 보편적인 성결에 좌우되기보다 침례에 더 좌우되게 하지 않았다면, 다음과 같은 태도와 방법으로 루넨버그 자매에게 회신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네 가지 중요성을 가지고 사용되고 있다.

1. 신약시대 특히 사도시대에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추종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 말의 본래적이고 성서적인 뜻을 엄격하게 배려한다면, 본인이 좋아하고 종종 언급했던 정의는 이렇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을 끊임없이 믿고,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을 끊임없이 행하는 사람이다.(16

2. 그러나 그 말의 전국적이고 매우 인기 있는 의미는 다만 기독교의 신앙고백자(professor)를 의미한다. 그래서 이교나 이슬람교 국가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국가들도 있고, 정치집단이나 철학의 학파가 있는 것처럼 기독교에도 교파들이 있다.

3. 그러나 새롭고 특별한 혹은 적절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로 옷입는 방법과 수단에 관해서 혹은 그의 종교적 신앙을 고백하는 수단과 방법에 대해서 논쟁들이 발생하는 순간, '그리스도인'은 먼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자기 죄를 회개하고, 그리고 나서 신앙고백에 따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물 속에 장사되고, 그 후로는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실천을 지속적으로 행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4. 그러나 본인이 사용했고, 루넨버그 자매가 처음 문제삼았던 문구 속에도 여전히 그 의미가 남아있다. 많은 사람들의 판단대로, 일부는 신앙고백을 바로 하고 잘못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신앙고백을 잘못하고 올바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방법을 채택했다. "나는 그가 무엇을 믿는지 모른다. 그가 어떻게 세례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아담 클라크(Adam Clarke)는 어떤 시 구절을 인용한다.

모두가 선포하는 너 다른 교파들이여,
보라!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시다. 그리스도께서 저기 계시다!
너의 강한 증거들이 신성하게 수여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어디에 사는지 나에게 보여달라!

자, 이런 내용대로라면, 대개의 개신교 교단 속에는 내가 바라건대 주께서 용서하실 실수나 과오들을 범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지상 왕국의 모든 축복들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할지라도, 본인은 그들이 의인의 부활에 동참하게 되리라고 즐거이 기대한다.

유대인, 이스라엘, 할례, 제자와 같은 말들은 성경 속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사용된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오"(17-"진실로 이스라엘인"-"참된 할례"-"이면적 또는 표면적 유대인"-"그러면 진실로 너희가 나의 제자이다," 등.

우리의 형제들이 올바른 방법이라면 애써 지키려 하고, 식별력 있고, 매우 독립적인 것을 볼 때 매우 기쁘다. 그들은 성서적인 이름들에 따라 성서적인 것들을 호칭하는 습관이 매우 빠르게 진보하고 있다. 그들은 그 말을 가장 엄격하게 성서적인 뜻대로 사용함으로서, 우리 앞에 놓인 그 문제에 있어서, 가장 현대적인 뜻에 따라서 그 말을 사용했던 본인을 오해하고 있을 뿐이다.

본인은 마지막만큼 쉽게 처음에도 우리 자매의 질문에 이런 회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인은 그 때에 무엇인가 다른 것이 요구됐던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본인은 잘못되지 않았다. 본인이 이 안에서 더 유용하고 유익한 과정을 추구했던 모두에게 그것이 아직도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본인의 의견으로, 우리의 동부 형제들은, 그들이 문제의 전반적인 내용을 들어보고 생각해 볼 시간을 거의 갖기도 전에, 그들 자신들을 표현함에 있어서 정말 성급하고 다급했다. 그들이 다른 경우에도 그렇게 신속했기를 바란다. 그리고 본인은 매우 자주 이름이 거명된 훌륭한 자매가 거론한 주제에 대해서 본인은 언급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배우고 있고, 완전을 향해서 전진하고 있다. 만약에 그들 중에 누가, 모두는 아니고, 이 문제와 어느 정도 관련 있는 해설을 수반하는 글들을 싣기를 원한다면, 본인은 계획에 따라 그것들 중에 일부를 출판할 의무를 진다.

본인은 그들이 성급했던 것에 대해서 전혀 그들을 진정으로 책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인이 반 시간 너무 늦게 했던 것처럼 오히려 한 시간 매우 빠르게 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받았던 몇 가지 해결책들은 전반적으로 오히려 미숙했다고 생각한다. 거룩한 모든 형제들에게 주의 축복이 함께 하며, 그들에게 모든 일에 깨우침을 주시기를!

알렉산더 캠벨(A. C.)

각주

1) Alexander Campbell, "Any Christians Among Protestant Parties," and "The Lunenburg Letter," Millennial Harbinger, 1837, reprinted by the Lincoln Christian College Press, Lincoln, Illinois.
2) 역자주: 고린도후서 3장 11절은 13장 11절의 잘못된 인쇄로 생각된다.
3) 역자주: 고린도후서 13장 9절.
4) 강조는 역자의 것임.
5) 역자주: 마가복음 7장 24-30절; 마태복음 15장 22-28절.
6) 역자주: 마태복음 8장 10절. 이 말씀은 예수께서 백부장의 믿음을 보고 하신 말씀이다.
7) 역자주: 요한복음 21장 22절.
8) 역자주: 요한복음 8장 51절.
9) 강조는 역자의 것임.
10) 역자주: 로마서 2장 28절.
11) 역자주: 로마서 2장 29절.
12) 그것은 우리와 더불어 죄사함을 위한 침례만큼 오랜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적어도 {그리스도인 침례자}(Christian Baptist
)만큼 오래된 것이다. 그 작품의 창간호와 두 번째 호를 읽어보시오.
13) 역자주: 계시록 18장 4절.
14) 역자주: {그리스도인 침례자}는 알렉산더 캠벨이 1823년부터 1830년 5월까지 7년간 발행한 잡지이다. 1830년 1월부터 1866년까지는 {천년왕국 예고자}(Millennial Harbinger
)지가 캠벨에 의해서 출판되었다.
15) 그리스도인 연합에 관한 기사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들께서는 {그리스도인 침례자}를 참고하기 바란다. 특히 독립 침례교회(Independent Baptist)에 회신한 내용을 관심 있게 보기 바란다.
16) A Christian is one that habitually believes all that Christ says, and habitually does all that he bids him.
17) 역자주: 로마서 9장 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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