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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와 멜바 래쉬(Richard and Melba Lash)

1957년 1월말에 딕과 멜바 래쉬(Richard and Melba Lash) 부부는 일본 오키나와로 가기로 했던 선교계획을 한국으로 바꿨다. 이 결정에 해롤드와 애다 테일러(Harold and Ada Talor)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이때 래쉬 부부는 링컨성서신학교(현 링컨기독대학교)에서 추가 수업을 받고 있었다. 테일러 부부는 1955년 11월 13일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줄곧 래쉬 부부가 한국으로 오게 되기를 바랐다. <참고로 1950년대에 한국에 온 미국선교사들 가운데 링컨성서신학교 출신들이 꽤 많았다. 래쉬와 절친했던 조 세걸키 또한 링컨성서신학교 출신이었고,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 모교에서 일하였다. 따라서 한국인 지도자들 중에도 최윤권, 최순국, 안재관 등 링컨성서신학교 출신들이 많았다.>

래쉬 선교사는 1957년 한국에 도착해서 약 1년간 서울에 머물면서 테일러 선교사의 주선으로 한국말을 공부했고, 테일러 선교사가 교장으로 재직했던 서울성서신학교에서 가르치다가 1958년 5월 10일 강릉으로 선교지를 옮겼다. 선교지를 서울에서 강릉으로 옮긴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었겠으나, 첫째는 태일러 선교사가 존 채이스 선교사 및 존 힐 선교사가 키워온 선교부 건물과 부지 및 신학교 건물과 부지를 1958년에 팔았기 때문이다. 신학교는 새 부지와 건물이 마련되기까지 운영이 중단되어 가르칠 수 없게 되었다. 래쉬의 사모 멜바는 1958년 4월 24일에 쓴 선교서신에서 테일러가 3월 31일자에 건물과 부지를 매입하겠다는 사람을 만난 것으로 언급하였고, 자신들도 4월 하순에 강릉에 거처를 계약했다고 적었다. 둘째는 한반도 남서쪽에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제법 많지만, 강릉에는 한 곳도 없었기 때문이다. 강릉에서 북쪽으로 30여 킬로미터 떨어진 어촌에 가정교회가 한 곳 있었고, DMZ에 가까운 곳에 또 한 곳이 있었으며, 강릉에서 남쪽으로 7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또 한 곳이 있었지만, 건물이 팔리고 교인들이 흩어졌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적었다. 더 남쪽으로 내륙 산악지역 한 곳에 교회가 있었고, 또 다른 지역의 부잣집에서 6-7명이 모인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목사는 동해안 연안에 한 명밖에 없다고 적었다. 래쉬 가족은 동해안 최북단에서 부산까지 그리스도의 교회 상황이 이처럼 열악한 강릉지역을 선교지로 선택하였던 것이다. 당시에는 도로 사정과 교통편이 좋지 않아서 서울에서 강릉까지 자동차로 17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1960년 6월 16일 딕이 쓴 서신에 의하면, 래쉬 가족, 특히 멜바는 강릉에서 얻은 선교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5.16군사혁명으로 인한 사회불안, 과중한 업무, 각종 질병, 문화충격, 언어충격, 사단의 방해까지 겹쳐 좌절과 실망으로 우울증과 신경쇠약에 시달리곤 했다며 특별 기도를 부탁하였다. 다음 달 1960년 7월 20일자 서신에서 멜바는 이렇게 적었다.

    친구들이여, 우리는 여러분의 매일 드리는 신실한 기도후원이 없이는 여기서 우리의 일을 지속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이 일을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좀처럼 누그러질 것 같지 않은 엄청난 압박에 날마다 직면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매일의 전투에서 기꺼이 기도로써 우리와 함께 싸우시겠습니까? 우리는 임무를 띠고 이곳 “최전선”에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배후에서 신실하게 “실탄”을 공급해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임무를 수행해나가겠습니까? 또 여러분의 편지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격려가 되는지를 어떻게 설명해야하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언어를 쓰는 분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의 친교로 격려를 받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 영광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모국어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찬양하지 못한 채 수개월씩 지내야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만일 여러분이 그 같은 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조금치라도 이해하신다면, 여러분이 보내신 서신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기쁨이 되고 온기가 되는지를 상상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편지가 중요치 않을 것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마십시오.

래쉬는 1958년 8월부터 강릉시 옥천동에 장소를 마련하고 복음전도를 시작하였으며, 초등, 중등 및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다. 그 당시 대전에서 이름을 떨치던 김은석 목사가 강릉에서 집회를 열어 래쉬의 선교 일을 도왔다. 주문진 교회는 서울성서신학교에 다녔던 어느 여학생에 의해서 설립되어 자립의 길을 걷고 있었으며, 영동교회는 어느 석탄 광부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강릉교회는, 1959년 11월 25일자 서신에 의하면, 주일날 70-100명 정도가 모였고, 여름성경학교 때는 아이들이 평균 80여 명씩 모였다. 동년에 한국인 전임목회자가 부임하였다.

래쉬의 통역은 최종묵이 맡아 수고를 했는데, 통역으로 사역하는 동안 평산교회를 개척하여 설교하다가 래쉬 가족이 부산으로 옮겨간 1964년부터는 전임 목회자로 사역하였다. 그리고 1967년경부터는 강릉교회를 담임하였다. 강릉교회는 1969년 말에 선교보조금을 더 이상 받지 않겠다고 통보할 만큼 성장하였다. 1964년 2월 11일자 서신에 의하면, 평산교회는 250여명이 출석하였는데 대다수가 초신자들이었다.

래쉬는 1963년부터 한국인교회지원자클럽(Korean Church Helpers Club, KCHC)을 만들어 운영하였다. 이 클럽에 자신을 포함해서 세 명의 지도자를 두고, 선교헌금 100불을 종자돈으로 삼아 시작하였다. 이 돈이 매월 조금씩 불어나기를 바랐고, 미국의 후원자들뿐 아니라, 모든 한국교회들이 이 클럽에 동참해 주기를 바랐다. 매년 다섯 번째 주일을 KCHC의 날로 정하여 지키자고 하였다. 딕은 이 무렵 한국에서는 1천불이면 꽤 괜찮은 예배당을 지을 수 있었다고 적었다. 1967년 9월 25일자 서신에 의하면, KCHC에 모금된 돈이 탄광(영동)교회 건축에 쓰였다.

1963년 11월 20일자 서신에 의하면, 강릉에서의 사역의 제한성, 두 딸의 교육문제, 장성만 목사가 지속적으로 부산에서 함께 일하자는 권유 등으로 인해서 부산으로 선교지를 옮기기로 결정하였다고 진술하였고, 1964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부산에서 활동하였다. 래쉬는 장성만 목사가 귀국하기 전에 강원도에서의 사역을 정리하고 그가 미국에서의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는 대로 부산에서 함께 대학설립을 하기로 이미 오래 전에 약속한바 있었다. 장성만 목사는 미국 신시내티성서신학원(Cincinnati Bible Seminary)에서 학업과 교회순방을 마치고 1964년 늦은 여름에 귀국하였다. 그 공백 기간에 래쉬는 부산에서 대전 한국성서신학교로 출강하였다. 1964년 12월, 1966년 12월, 1971년 6월 졸업사진에서 딕 래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래쉬는 장성만 목사와 함께 1964년 가을에 동래 온천장에 작은 2층 건물을 세 얻어 1965년 2월 1일 영남기독교실업학교로 2년제 대학과정을 출범시켰다. 같은 해 11월 20일에는 부산시 변두리(당시는 동래군 사상면 주례리 냉정부락)에 땅을 임대하여 이층건물 ‘알파 홀’(후에 래쉬기념관으로 변경)을 건축하는 기공식을 거행하였고, 1966년 4월 2일 이곳으로 이사하면서 동서기독교실업학교로 개명하였다.

1965년 2월 2일(화요일, 설날)자 래쉬의 서신에 의하면, 2월 1일에 기독교실업훈련학교(Christian Worker's Training Institute)가 개소되었다고 썼다. 1월 30일 토요일에 입학시험과 면접이 있었고, 20명 모집에 33명이 지원하였다. 31일 주일에 부산시내 교회에서 특별감사예배가 드려졌고, 2월 1일 월요일에 개강예배가 있었다. 강의는 수요일 3일부터 시작되었다. 2일이 설날이었기 때문이다. 수업방식은 오전에 신학교 커리큘럼과 유사한 과목들을 가르쳤고, 오후에는 농장에서 실습을 하였다. 농장의 첫 프로젝트는 돼지사육이었다. 이 학교는 현재의 경남정보대학과 동서대학교의 발전되었다.

래쉬는 1971년 5월 1일자 서신에서 15년간의 한국 사역을 끝내고 8월경에 한국을 완전히 떠나겠다고 선언하였다. 안식년을 가진 3년을 제외하면 4년씩 세 차례 총 12년간 사역하였다. 그 일을 래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바쁘게 살았던 기간이었고, 기쁨과 역경이 함께한 나날들이었다. 그 그간에 우리는 가볍게 깰 수 없는 많은 관계들을 형성시켜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들과 단절해야할 시간이 가까이 온 것이다. 그게 아니면, 나는 “스트레칭”이란 말을 대신 써야할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는 대양을 가로지르는 작별여행에서 살아남을 또 우리가 미국 어느 곳엔가 안전하게 자리를 잡은 후에도 여전히 때로는 우리를 잡아당길 꽤 많은 관계들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결정한 데에는 학교 인가(승인)가 생각보다 빨리 났고, 따라서 입학정원의 증가와 학생들이 내는 등록금 수입으로 경제적 자립이 가능해졌으며, 외국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의 한계가 제한적이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라면 발전하는 학교에 남아 그 공을 함께 누릴 수 있겠지만, 학생들을 위해서라면 자신보다 더 유능한 인물이 자기가 차지한 자리에 대신 설 수 있도록 자신이 빠져줘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목회 경험은 없지만, 목사관에서 보고 자랐으니 가능하지 않겠느냐, 혹은 지난 14년간 11,000통, 거의 매일 2매 정도의 편지를 쓰느라 타이핑을 했으니 작가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며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의 자신의 장래에 대해서 스스로 위로하였다. 래쉬 가족은 한국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기 얼마 전 ‘케빈’이라고 이름을 지은 미숙아를 입양하였다.

한국을 떠나기로 작정한 1971년 8월 첫 주에 부산시 사상구 주례동(당시는 동래군 사상면 주례리) 교정에서 전국 그리스도의 교회 목회자 수련회가 개최되어 한꺼번에 작별인사를 할 수 있었고, 둘째 주부터 강릉지역을 방문하였다. 그곳에서 다섯 개 교회가 발전하고 있는 모습을 기쁨으로 둘러볼 수 있었다. 주문진교회는 출석교인이 거의 100명에 가까웠고, 탄광(영동)지역 교회는 새 건물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으며, 래쉬가 방문하기 전날 5명의 새신자가 침례를 받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아름다운 산중에 새로 세워지고 있는 교회도 방문하였다.

비행기 삯을 아끼기 위해서 래쉬는 두 딸과 함께 멜바와 케빈보다 먼저 8월 31일에 한국을 떠났다. 멜바와 아기 케빈은 며칠 뒤에 한국을 출발하였다. 래쉬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어, 미네소타성서대학에 시간제 선교학 교수로 채용되었고, 동시에 학교가 소재한 로체스터 프레전트 그로브(Pleasant Grove)에 소재한 60-70명 정도의 교인을 가진, 그러나 100여명이 출석하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설교자로 채용되었다. 교회소유의 큰 목사관이 있어서 주택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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