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석(民石) 장성만(張聖萬) 목사
 


학력
부산 부민초등학교, 부산제일공업중학교(6년제, 현 부산공고), 일본 오사까 성서신학교, 미국 신시내티 성서 대학원, 미국 미드웨스트대학에서 신학박사(D.D.),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발전정책과정

경력(종교계)
대교 그리스도의교회 목회(목사안수 받음), 부산 그리스도의교회 시무(1953~1978년), 부산 기독교교회 협의회 부회장(1970년), 부산 기독교 문인협회 회장, 기독교 사회윤리 위원회 위원장, 부산 기독교 방송국 운영위원장, 목양회 창설 초대회장, 명예회장, 북구 교회 지도자협의회 회장, 명예회장, 한국 그리스도의교회 교역자 회장, 성목회 명예회장

경력(교육계)
동서 기독교 실업학교 설립, 교장(1965~1970년), 부산 실업전문학교 교장(1971~1977년), 경남 공업전문대학 학장(1977~1982년), 부산 경남 전문대학장 협의회장, 동서공과대학 설립(1992년), 학교법인 동서학원(경남전문대학, 동서공과대학)이사장

경력(정계)
국회의원(11대, 12대), 민정당 부산시 지부위원장(2회), 민정당 집행위원, 민정당 노동특위위원장, 국회예산결산위 제4분과위원장, 민정당 정책위원회 의장, 국회부의장(12대)

저서
장성만 에세이전집(1978년)(전5권): 생각 잃은 갈대, 저 피안의 언덕에 뜻이 있는 곳에 길이, 길가는 나그네, 피리를 불어도
수상집: 세 번째 부름(1983년), 議政活動과 政策課題(1984년), 民意와 政策사이(1988년), 도전과 시련 그리고 새로운 약속(1991년)
잡지: 월간「아가페」발행인, 월간「로고스」발행인, 계간「地域社會」칼럼 집필, 공저「씨 뿌리는 사람들」
聖書文學(1979년)

상훈
대통령 표창(교육공로/1978년), 부산시 문화상(지역사회 개발부문/1977년)

국제회의
APPU 제20차 총회 한국대표, 최고정책과정 세미나 참석(미국 죠지 와싱톤 대학 및 소련 극동문제 연구소), 대통령 특사로 노르웨이 방문(1991년), 國會議員 使節로 구라파(프랑스, 스웨덴, 영국, 독일) 의료보험제도 시찰, 미국 레이건 대통령을 위한 국가 조찬기도회 국회대표로 참석, MRA 세계대회 한국대표(스위스 코오 및 일본 오다와라), 크리스찬 대회(일본 가고시마)에 특별강사로 참석, 기독교사절로 성지순례(요르단 및 이스라엘)

기타
수필 동인회 동인, 부산 문협 수필분과 회원, 부산 수필가협회 이사, 사단법인 한국 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 민정동우 회장, 정우회 회장

생애와 사상

민석(民石) 장성만 목사는 1932년 11월 2일(음력) 부산시 토성동에서 장용환(張容煥) 씨와 박보질(朴甫質) 씨의 장남으로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중학교 2학년(15세) 때에 사업가이시던 아버지를 잃고 여덟 식구의 장남으로써 어려운 시절을 겪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중학교(당시 6년제)를 마칠 무렵 6.25전쟁이 터졌다.

장성만은 원래 장로교 교인이었으나, 6.25동란 중에 부산으로 피난 온 백발의 동석기 목사가 미국 문화원 강당을 빌려 행한 기독교 강연회에 자주 참석하여 새로운 기독교 교리를 들었고, 동석기 목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성서이외의 어떤 인위적인 교리나 신조도 거부하는 순수한 복음주의 신앙을 갖게 되었다. 침례를 행하고, 매주 성만찬을 행하며, 개교회 중심의 초대교회(사도행전 2장)로 돌아가는 것이 성서적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때부터 장성만은 장로교 교인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교인이 되었고, 서울에서 피난 온 신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에 매진하다가 낙동강 전투 때 국군에 입대하여 전투에 참가하였고,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넘겼다. 제대 후 다시 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 부산 그리스도의 교회의 전신인 대교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이것이 1953년 1월 첫 주일이었다. 자신의 집 2층 8조 다다미방에서 7명의 성도가 모여 성찬식을 행하며 감격스러운 첫 예배를 드렸다.

장성만은 학업과 목회를 겸하면서도 뜬 눈으로 새벽을 밝히면서 공부하고 기도하며 글을 썼다. 각종 청년집회에서 강연하는 것을 필두로 부산과 경남지방의 숱한 교회에서 전도강연회를 열었고, 신문, 잡지, 방송 등을 통하여 글을 발표하였다. 이때 발표했던 글들을 모아 훗날 {생각 잃은 갈대}라는 첫 수필집을 발행하였다.

이후 교회는 발전하여 많은 젊은이들이 참석하였는데, 미국 선교사들도 내한하여 함께 예배를 드렸다. 이들이 바로 기독교 방송 선교를 위해 한국에 온 빌스(Bills) 가족, 세걸키(Seggelki) 가족, 엘리스(Ellis) 가족들이다. 그 외에도 일본에 주재하는 마크 맥시(Mark Maxey), 데비드(David), 심스(Sims),  오사까 성서 신학교 교장 크라크(Clark) 등이 자주 찾아와서 격려하였다.

장성만은 신학을 마치고 1960년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후 교회는 부산 YMCA 강당으로 옮겼고, 1970년에는 그가 세운 부산 실업전문학교 강당으로, 그후에는 학교 앞에 예배당을 건축하여 부산 그리스도의 교회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장성만 목사는 이 교회에서 무급으로 25년간을 목회하였고, 7명의 청년들로 세족회를 조직하여 특별 신앙훈련을 시켰다. 여기에 김찬영, 신용철, 이동발, 박구하, 김동렬, 안대현, 양군(작고) 등이 참여하였는데, 이들 중에 두 사람이 목사가 되었다.

장성만 목사는 그의 에세이 집에서 자신의 신앙적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신약성서의 신앙에 입각하여 환원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다음 몇 가지 나의 신앙적인 입장을 밝혀둔다.
첫째, 교파의 분열은 어떤 이유에서든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현존하는 교파들이 진정으로 하나로 돌아 오기를 원한다.
둘째,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종류의 신조나 교리를 우리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모든 인위적인 문서를 버리고 성경으로 돌아오기를 원한다.
셋째,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어떤 다른 이름도 우리의 흥미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인위적인 명칭을 청산하고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돌아오기를 원한다.
넷째, 인간의 머리 속에서 짜낸 어떤 조직도 우리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조직 이외는 따라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명하시는 대로 겸손히 순종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다. '성경이 말한 것만 말하고, 성경이 침묵한 것은 우리도 침묵하자.' 이 표어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 보겠다는 환원 운동자들의 절규이다. 진정 교회의 단일화를 원한다면 인위적인 조직과 정치, 인간의 신조와 유전, 이 모두를 던져 버리고 성경에 절대 순응해야 한다. 진정 교회의 통합을 원한다면 새 교파, 새 신조, 새 교리를 만들지 말고 신약교회로 돌아가서 하나의 이름, 하나의 믿음, 하나의 세례, 하나의 소망으로 결속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 거대한 운동에 참가하여 앞으로 전진하고 있다. 이 운동이 완수되는 날까지 우리는 잠시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다. 우리 앞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의 손엔 진리의 말씀이 쥐어져 있기 때문이다.(장성만 에세이전집 중에서)

장성만 목사는 이후 일본주재 마크 맥시(Dr. Mark G. Maxey, Kyushu Christian Mission) 선교사의 주선으로 일본에 건너가 클라크(Clark) 선교사가 교장으로 재직했던 오사까 성서 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이 때가 5.16 군사혁명 당시였다. 그는 일본에서의 학업을 마치고 약혼녀(朴東順 여사, 이화여대 영문과 및 신시내티 성서 대학원 졸업, 경남전문대학 교수 및 이사장 역임)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신시내티 성서 대학원에서도 공부하였다.

1964년 늦은 여름 미국에서 귀국 후, 미국인 선교사 리처드 래쉬(Richard Rash) 부부와 함께 동래 온천장에 작은 2층 건물을 세 얻어 1965년 2월 1일 영남 기독교 실업학교로 2년제 대학과정을 출범시켰다. 래쉬는 장성만 목사가 귀국하기 전에 강원도에서의 사역을 정리하고 그가 미국에서의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는대로 부산에서 함께 이 일을 하기로 이미 오래 전에 약속한바 있었다. 같은 해 11월 20일에는 부산시 변두리(당시는 동래군 사상면 주례리 냉정부락)에 땅을 임대하여 이층건물 '알파 홀'(후에 래쉬기념관으로 변경)을 건축하는 기공식(사진 참조)을 거행하였고, 1966년 4월 2일 이곳으로 이사하면서 동서기독교실업학교로 개명하였다.

이 일이 나날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에 조직된 이 학교 재단이사회의 후원 때문이었다. 장성만 목사는 1969년 8월 5일 미국에 들어가 20개 주를 6개월간 순방하면서 도움을 호소한 결과 1969년 12월 1일 재미 재단이사회를 구성하였고, 1970년 5월 28일에는 교육부로부터 학교법인 동서학원 설립인가를 받아냈으며, 같은 해 12월 16일에는 부산실업전문학교의 정식인가를 받아냈다. 이렇게 해서 부산실업전문학교가 1971년 3월 1일 정식 개교되었다. 이후 부산실업전문학교는 1977년 8월 26일 경남공업전문학교, 1979년 1월 1일 경남공업전문대학으로 개편되었고, 1991년 11월 15일에는 또 하나의 4년제 동서공과대학 설립인가를 획득하여 1992년 3월 3일 개교하였고, 현재의 종합대학인 동서대학교로 크게 발전하고 있다.

장성만 목사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으며, 모두를 훌륭한 인물로 키워냈다. 그는 또 글 쓰기를 좋아하여 1950년대에 기독교 문인들을 중심으로 부산 기독교문인협회를 창설하였고, 63년 7월에는 수필동인회를 발족시켰으며, 동인지로 {隨筆}을 발행하였다. 이 밖에도 그는 60년대에 {基督敎文藝}라는 계간지를 발행하였으며, 개인적으로도 월간 {아가폐}지를 프린트 판으로 발행하다가 후에는 월간 {로고스}지에 기독교사상과 생활지라는 부제를 부쳐 발행하였다. 이런 이유들로 그는 10권의 책을 펴냈다.

그는 또한 정치에도 입문하여 제11대, 12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민정당 부산시 지부위원장(2회), 민정당 집행위원, 민정당 노동특위위원장, 국회예산결산위 제4분과위원장, 민정당 정책위원회 의장, 국회부의장(12대)를 역임하였다. 

향년 83세를 일기로 2015년 12월 6일 오전 9시 50분 소천하였다. 모신 곳은 실로암 공원묘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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