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인(金敎人)장로는 김은석 목사를 부강교회로 초빙했던
분으로 충북 청원군 사주면 농촌리 217번지에 출생하였다.
부친이 술로 가산을 세 번이나 탕진하고 있던 차에 민선교사라는
분이 찾아와 예수를 믿으라고 권하였다. 그 때 부친께서 묻기를, "예수를 믿으면
술을 끊을 수 있는가?"고 하였다. 선교사가 그렇다고 하자 즉시로 부친이 믿겠다고
결심하였고, 아버지와 김교인, 그리고 세 동생이 모두 상투머리를 자르고 그 자리에서
술독을 깨쳐 버리고 담배대를 아궁이에 던져 버리고 예수를 믿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문중에서는 난리가 났다. 김교인의 집이 종가집이었기 때문이었다. 문중에서 재산을
다 빼앗아 버려 김교인과 동생들은 금전품을 팔아 생계를 꾸려 나갔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민선교사가 사람을 보내어 김교인을 불렀다.
그는 김교인에게 전도를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김교인이 "내가 무엇을 알아야
전도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니까, 성경책을 내놓으면서 이렇게 저렇게 전도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그 성경책은 국문으로 된 사복음서였다. 그러나 도대체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없어서 한문으로 된 성경이 있으면 달라고 하여 한문성경을
읽게 되니, 무슨 뜻인지를 알게 되었다. 이후 전도를 하고 선교사로부터 생활비를
받게 되었다.
전도인이 되어 더욱 열심히 복음을 전하여 오록골에 교회를
세웠고,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고 1936년에 부강으로
이사를 하였다. 부강에서 양약방을 열었는데, 그렇게 잘될 수가 없었다. 그곳 오데골에
5-6명(김교인 장로가족, 김규상 목사 모친 구 집사, 작은 어머니)정도 모이는 장로교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예배를 인도하며 교회를 끌고 나갔다.
1944년 집안에 어려움이 있어 부인이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노회가 열려 노회에 참석하였더니, 광고시간에 서울에서 훌륭한 목사님이 오셨는데,
모실 교회는 모시라고 하였다. 집에 돌아와 사모와 의논하고 결정하여 1945년 가을에
목사님을 모시게 되니, 그분이 바로 김은석 목사였다.
김은석 목사는 부임 첫날부터 부흥집회를 열었는데, 그 날부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교회가 놀랍도록 부흥하였다. 그러나 부흥회 일로 김은석 목사가
노회로부터 파면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김은석 목사는 부임하자마자 100회 집회를
선언하고 시행하여 큰 부흥을 일으켰는데, 노회로부터 자제하라는 명령이 시달되었다.
이에 굴복하지 않자, 노회는 김은석 목사를 제명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김교인은 김은석과 함께 나와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웠다. 사모인 김정렬은 손 대접하기를 수도없이 하였는데, 부강교회를 다녀간 사람치고
그분의 대접을 받지 아니한 사람이 없을 만큼 갖은 헌신을 다한 분이었다.
김교인 장로는 1970년 숙한으로 신촌교회에서 소천하였다.
자녀로는 김재순 목사, 김태수 목사, 김철수 목사, 김복수
집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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