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요한(1923.1.21-) 목사
 


최요한 목사는 장로였던 외조부로부터 신앙을 전수 받아 예수를 믿게 되었다. 총각집사였던 최요한은 옥중에서 고생하다가 나온 사람들이 세운 제건장로교회에 나가 섬기다가 엄단면 영흥교회에서 김은석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였다.

2년간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던 중에 김은석 목사는 물론 성낙소, 최상현, 존 힐, 동석기 목사를 알게 되었고, 전남 함평에서 첫 목회를 하였다. 김재순 목사의 부임시 영광교회를 순회하던 중에 냇가에서 침례를 받았다.

광주교회는 김윤선 집사의 송아지 한 마리로 2층집을 빌려 시작되었고, 최요한, 김은석, 이신, 김재순은 어깨띠를 메고 노방전도에 힘썼다. 그리고 최요한은 이 노방전도 3년만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최요한은 상월리 집회를 통해서 그곳 교회를 환원시켰고, 장성교회에서 8개월간 전도하며 침례와 성찬의 중요성을 가르쳤으나 변화가 없자 목포로 나와 유달산을 기도처로 삼고 계속해서 환원을 외쳤다. 이 때 광주에서 하나님의 성회 총회가 열렸다. 최요한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령론에 갈등하던 차에 성령의 역사를 반대하는 곳에는 생명이 없다고 생각하여 (순)복음성회로 옮겼다. 그러나 성찬에 뜻이 맞지 않아 20명을 환원시켜 그리스도의 교회로 다시 환원하였다.

그리스도의 교회로 돌아온지 2달만에 성령의 역사(용문산 나오기 전에)가 일어났다. 성만찬이 생명인 것을 알고 전하니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불과 8개월만에 50여명이 모이게 되어 예배당을 지었다.

그후 2년이 지나 대지 70평에 130평의 (순)복음교회를 지었는데, 복음교회라는 이름이 성경에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교회로 간판을 붙이려고 하였으나 간판 문제로 싸움이 일어나 교회를 떠났다. 당시 받았던 사례비가 쌀 2가마였는데, 목포에서는 제일 많은 것이었다.

그러나 최요한은 이를 포기하고 나와 40만원에 사택을 구입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를 시작하였다. 이 사택을 수십 번 개조하여 오늘의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를 만들었다.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를 하는 동안 비지 밥을 2달, 고구마 밥을 10년동안 먹었다고 한다. 이토록 고생하며 교회를 키우니 목포에 있는 140여개 교회들 가운데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큰 교회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최요한 목사는 찬송가 141장, "왠 말인가, 날 위하여"를 즐겨 불렀다. 성만찬은 교회의 생명이요, 핵심이기 때문에 기념설이 아닌 생명설을 주장하였고,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를 가져오는 힘이라고 믿었다.

자녀로는 수신(목사), 대한, 대성, 수명, 수정, 수진, 신정, 수청 등이 있다. 동생 최요열 목사는 순복음 신학교(현 한세대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써 한국 성서신학교(현 한성신학교)에서 교수와 가장동 그리스도의 교회(당시 교내에 위치함)에서 담임 목사로 있다가 순복음 교회로 옮겨가 부천시 역곡동에 위치한 새소망의 집 구내에 새소망교회를 개척하여 성장시킨 후 따로 독립하였다. 조동호 목사는 이 새소망교회 출신으로 최요열 목사의 권유를 받아들여 한성신학교에 입학하였고 그리스도의 교회 목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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