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명 목사는 광주군 효천면 방림리(현 광주직할시 서구
방림동)에서 자라 광주 숭일 보통과를 졸업하였고, 최숙이 사모와 1918년 3월에 결혼하였다.
광주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정치중학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던 중인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에 엄청난 지진이 도쿄와
요코하마 일대를 강타하는 것을 보고 회개하고 광주로 돌아왔다.
1928년 여름, 섬기던 배은희 목사가 몸이 쇠약하여 금강산으로
휴양을 떠날 때에 동행하였다. 금강산 구룡폭포에 이르러 배은희 목사가 말하기를,
눈에 떠오르는 것은 교회의 싸움과 사회의 혼란, 농민들의 참상과 민족의 절망뿐이니
자신이 살아 있다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며, "강군, 나는 여기 이 절벽에서
떨져 죽어야 하겠오. 강군이 산을 나서면 또 다시 예수님이 옳으니 잘못이니 하는
싸움을 계속하게 되겠지." 하면서 폭포 속으로 몸을 날려 물속에 뛰어들었다.
이에 강순명은 옷 입은 채로 물에 뛰어들어 배은회 목사를 구출해 낸 일도 있었다.
1930년 독신전도단을 창단하여 1931년 5월 29일 제주도 모슬포교회에
부임하여 전도하다가 1933년 광주농업실습학교를 만들었고, 1934년 3월에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35년 4월 평양신학교 2학년에 편입하였다. 1938년 9월
20일 평양신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진 폐교하였지만, 강순명은 그 해 11월
평양신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전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후 강순명은 군산노회 금암교회에 부임하였다가 1942년
전도여행 중에 4개월간 수감되기도 하였다. 1945년 10월에 연경원을 설립하였고,
1946년에는 남정국연학교에서 김구 선생이 자축연회를 베풀었다.
그러나 1948년 10월에 동석기 목사와 성락소 목사를 만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였다.
환원 후 원효로 2가 원효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기다가 6.25가
터지자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삼각산으로 피난하였다가 9.28수복 후 10월경에 상경하여
수라장이 된 교회를 정리하고 예배를 드렸다. 1-2주가 지나면서 교인들이 모여들었고,
10월 27일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11-12월의 워낙 추운 날씨
탓에 꼼짝도 못하고 크리스마스를 지내려고 떡을 하기 위해 찹쌀을 담가 놓았는데,
정부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고 떡쌀로 찰밥을 지어 주먹밥을 만들어 12월 24일 영등포역에
나와 이틀 저녁을 기다리다가 뚜껑 없는 곡간 차를 얻어 타고 천신만고 끝에 이리역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3일간 쉬고 형님 집으로 가서 그 해를 넘기고 1951년 1월 7일
부산 그리스도의 교회 교단 총무로부터 목회 할 곳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산으로
내려가 장성만 목사 집에서 모이던 대교리 그리스도의 교회를 맡아 시무하다가 용두산
언덕으로 예배처를 옮기는 일을 했다.
1952년 5월에는 고향인 광주로 이사하였다. 광주에서 걸인과
노인 그리고 고아들을 집에 데려다 돌본 사람이 30명이었고, 사동다리를 지나다 움막에서
중풍에 걸린 여인을 발견하여 병을 치료해주다 장례까지 치르다 보니 광주 학동 그리스도의
교회가 120명 수용능력의 양로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955년 5월에 연경신도원(硏經神道院)을 신촌토굴에서 개설하였으나
과로로 쓰러져 1959년 3월 12일 소천하였다. 현재는 그의 가족이 양로원을 운영하고
있다.
강순명 목사의 유명한 설교는 "기도만능"(막 9:14-29)이고,
장기는 엄지손가락에 막대기 붙이기, 원숭이 놀이, 자전거 뒤로 타기, 시조에 미친
창평노인 흉내내기, 이발기술, 박치기, 겨드랑 밑에서 총소리 내기, 임기웅변의 재주,
코끝에 막대기 세우고 그 끝에 독아지 올려놓기, 땅 짚고 재주넘기, 수영 등이다.
그가 즐겨 부르던 찬송은 "나의 갈길 다 가도록"과 "주안에 있는
나에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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