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빈과 헌신의 독신전도단 운동가 강순명

글: 이덕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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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한국 교회의 가장 독창적이고 전위적인 전도단이었던 ‘독신전도단’을 창설한 강순명(姜順明)은 1898년 3월 24일 광주 방림동 가난한 농부의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모태신앙으로 출생한 그의 어린 시절 경험은 가난에서 출발했다. 아홉 살 때 부친이 별세한 후 어머니와 형(강태성, 후에 광주중앙교회 장로)과 함께 ‘살 길을 찾으러’ 목포로 갔으나 고생만하고 다시 광주로 돌아왔다. 그는 남장로회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숭일학교에 입학하여 1911년 보통과를 졸업했는데 그 해 '믿음 좋은’ 어머니마저 별세하였다. 이 때부터 긴 방황의 세월을 보냈다. 형이 차려준 이발소를 운영하였으나 돈 벌 생각은 없었다. 주먹 싸움도 종종 벌였는데 ‘박치기 명수’로 이름을 날린 것도 이 때 일이다.

그러다 1918년 10월, 광주 최초 교인으로 북문안교회(현 광주제일교회) 장로였던 최흥종의 딸(최숙이)과 결혼하면서 생활의 안정을 찾았다. 그 때 장인은 평양신학교 재학 중이었는데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광주 만세시위를 준비하였고, 직접 서울에 올라가 남대문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1년 6개월 옥고를 치르고 내려왔다. 장인은 1921년 신학교를 졸업한 후 광주 북문안교회 초대 당회장 목사로 부임하여 이후 광주가 낳은 ‘성인’(聖人) 목회자로 이름을 남겼다. 강순명이 이런 장인에게 신앙적 지도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회심과 전도 소명

강순명은 1921년 3월 이발소를 처분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소쿠(正則)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23년 9월 유명한 도쿄 대지진이 일어났다. 지진으로 인한 두려움도 컸지만 지진 직후 조선인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는 일본 자경단의 만행이 더욱 두려웠다. 그 때  학살당한 조선인들이 5천 명이 넘었다. 그도 우에노공원으로 피신하였다가 절대 절명의 위기 순간에 몰려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하나님, 내게 사흘만 더 살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나의 모든 죄를 청산하고 죽겠습니다. 주 예수님, 사흘만! 사흘만!”

살육의 광풍이 몰아치는 공원에서 강순명은 난생 처음 뜨겁고도 깊은 기도를 드렸다. 눈물을 흘리며 죄를 자백하는 기도가 터져 나왔다. 긴 기도 후 평안이 찾아왔다.

“나의 일생은 온전히 주님을 위해 살리라.”

강순명이 중생을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강순명은 우에노공원 회심 체험 1년 후인 1924년 7월 귀국했다. 그 무렵 기독교청년회(YMCA) 운동가 에비슨(Douglas W. Avison)이 광주에 내려와 농촌사업에 착수하였는데 그는 에비슨의 서기가 되어 전라도 일대를 순회하며 농촌운동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정열적으로 일에 매달렸다. 이 때 비로소 그는 농촌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일제의 농지 수탈정책으로 농촌의 경제 위기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국의 경제 불황으로 선교비가 줄어드는 바람에 농촌 사업을 중단해야 했다. 그러나 경제보다 더 심각한 것은 영혼의 구원 문제였다. 강순명의 기도 시간이 늘어났고 이 무렵부터 그의 기행(?)이 시작되었다.

“강순명은 혼자 텅 빈 교회당에 들어가 밤을 새웠고 눈물의 열도(熱禱)로 제단을 적시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거리에서 거지를 보면 몇 푼 되지 않는 돈이지만 털어주었고 헐벗은 이를 만나면 단벌옷을 아끼지 않았다. 고아를 보면 업어왔고 병자를 보면 목을 안고 간절히 기도해 주었다. ... 그는 가끔 길을 가다가 멈춰 서서 하늘을 우러러 보고 눈물을 흘리며 한숨과 함께 ‘주님!’을 부르짖기도 하였다. 때로는 폐병환자를 찾아가 위로해 주며 외로운 그들과 함께 자리를 같이해 주기도 했다. 나환자를 만나면 손을 내밀어 잡아주고 등을 두들겨 주었다. 그는 마침내 뜻을 정하고 집을 나섰다.”1)<1) 윤남하, 《믿음으로 살다 간 강순명 목사 소전》, 호남문화사, 1983, 74-75쪽.>

그는 유명하다는 명사들을 찾아 나섰다. 가르침을 얻기 위함이었다. 윤치호, 백낙준, 김활란, 노정일, 신흥우, 현동완, 김창제, 조만식 등 유명하다는 인사들은 모두 만났고 무교회주의자 김교신과 금강산 ‘은둔 수도자’ 김성실도 만났다. 그런데 1928년 여름 금강산에 들어가 기도하던 중 전주 서문교회 배은희 목사를 만났다. 삼일운동 때 옥고를 치른바 있는 배은희 목사 역시 농촌 현실 문제와 민족주의, 사회주의 사상 문제로 고민하다가 신경쇠약증세를 보여 요양차 금강산에 들어와 강순명을 만났다. 자살을 시도한 배은희의 목숨을 구한 것을 계기로 둘은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되었다. 둘은 신앙으로 농촌을 살리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찾았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독신전도단이다.

독신전도단 운동

금강산 기도를 마치고 돌아온 배은희 목사와 강순명은 동지들을 구했다. 전주서문교회 장로 신현창, 유상백, 김병수와 강봉의, 박노수, 김종흡 등이 지지하고 나섰다. 이들은 1928년 7월 다음과 같은 독신전도단 강령을 발표하며 단원을 모집하였다.

“1) 인류는 다 유물(唯物)의 길을 밟는다. 우리는 신국운동(神國運動)을 기(期)함

2) 시대는 예수 재림의 불원(不遠)을 고한다. 우리는 복음선전(福音宣傳)을 촉진함

3) 경제는 교역(敎役)의 현제(現制)를 위협한다. 우리는 가족책임(家族責任)을 초월함.”2)<《기독신보》, 1928.8.1.>

독신전도단은 누가복음 14장 26절, “무릇 내게 오는 자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씀과 마태복음 9장 12절,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느니라.”는 말씀을 근거로 삼았다. 복음 전도를 위해 철저히 자신을 바치는 헌신을 목적하였다.

강순명은 일본 유학 시절 알게 된 일본의 빈민 전도자 가가와(賀川豊彦)의 저서, 《가난한 자의 눈물》,《농민운동의 실제》,《노동운동사》,《한 알의 밀》등을 읽으면서 터득한 기독교 사회주의(Christian Socialism) 정신을 농촌 현장에서 실천하려 노력하였다. 즉 초대교회와 같은 기독교 신앙 공동체를 농촌에서 구현하려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십자가 정신으로 자신(개인)을 희생하여 농촌(사회)을 살리는 일에 헌신할 전도자들이 필요했다.

독신전도단원은 적어도 3년간 가정생활(성생활 포함)을 피하고 독신으로 농촌에 들어가 주간과 야간에 부녀자들과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고, 주일이면 전도자로 설교하고, 마을 단위로 농촌 협동조합과 소비조합을 조직하여 농촌 경제를 구조적으로 개선하며, 기초 상비약을 준비하여 환자 치료까지 할 수 있어야 했다. 독신전도단에 지원한 남녀 청년 10여 명은 익산 옛뚝이부락에 있는 훈련원에 들어가 사관학교식으로 6개월 훈련을 받은 후 전북 익산, 전남 광산 등지로 파송받아 농촌 사업과 복음 전도에 헌신하였다. 강순명 자신도 제주도 모슬포교회로 가 독신전도단원으로 활동하였다.  

독신전도단원들의 열심과 헌신의 결과는 여러 곳에서 나타났다. 이들은 보수도 받지 않고 어려운 농촌으로 들어가 몸을 사리지 않고 헌신했다. 그러나 전도단의 성공은 다른 곳에서 탄압과 시기를 불러왔다. 농촌운동이 민족운동으로 발전하는 것을 두려워 한 일제 경찰당국이 노골적으로 독신전도단 활동을 방해하였고 독신전도단에 대한 교인과 지역 주민들의 호평에 위기감을 느낀 기성 교회 목사들의 비난도 점증했다. 1931년 접어들어 독신전도단원들이 제일 많이 활동하고 있던 전북노회에서 독신전도단을 ‘이단’으로 정죄하려는 분위기가 일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배은희 목사는 이단 시비의 원인이 되는 ‘독신’이라는 단어를 빼고 ‘복음전도단’이란 명칭으로 내용을 바꾸어 계속하려 하였으나 강순명은 ‘독신’을 고집하였다. 결국 둘은 갈라섰다. 그러나 복음전도단도, 독신전도단도 오래 가지 못했다.

호남 영맥의 한 줄기

독신전도단 해산과 함께 모슬포교회를 사임하고 다시 광주로 돌아온 강순명은 다시 에비슨과 함께 1932년 광주농업실수학교를 설립하고 농촌사업 지도자를 양성하는 일에 몰두했다. 훗날 ‘해남의 성자’로 불리게 되는 이준묵 목사와 ‘맨발의 성자’로 불리게 되는 동광원 창설자 이현필이 이 때 실업학교 학생으로 들어왔다. 강순명은 이 무렵 오랜 독수도 끝에 성경 말씀에 통달하여 금욕과 청빈, 무욕의 도를 실천하고 있던 ‘도암의 성자’ 이세종과 교류하기 시작하였고 역시 이세종과 같은 수준의 금욕적이고 청빈한 수도생활을 실천하고 있는 장인 최흥종 목사와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었다. 이세종-최흥종-강순명-이현필-이준묵으로 이어지는 ‘호남 영맥(靈脈)’이 형성된 것이다.

이미 도쿄에서 귀국한 1924년 이후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삶’을 실천해 온 강순명은 청빈의 삶으로 일관했다. 처음부터 그에겐 집이 없었다. 사업을 해서 어느 정도 여유를 갖게 된 형이 보다 못해 17평짜리 집을 한 채 지어주어 그의 가족 여섯 식구가 비로소 자기 집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그런데 그 무렵 광주에 들어온 성결교회가 예배당 신축을 위해 이성봉 전도사를 데려다 부흥회를 하였는데 강순명이 그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그 집을 건축 헌금으로 바쳐 그의 가족은 다시 셋방으로 나앉게 되었다. 이런 식이었다. 그 무렵 광주에는 불신자들까지 “예수를 믿으려면 강순명처럼 믿어라.”는 말이 돌았다.

강순명은 처음엔 ‘평신도 전도인’으로 끝내려 하였지만 에비슨의 권고로 목회자가 되기로 하고 1934년 감리교 계통인 서울 감리교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듬해 평양 장로회신학교로 옮기면서 그 곳에서 1년 밖에 공부하지 못했지만 진보적 신학자 정경옥 교수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았다. 졸업반 때 평양 신학교는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되어 결국 그는 통신과로 한 학기 수업을 마친 후 졸업장을 받고 1938년 11월 전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남평교회, 전북 금암교회, 용강 온천교회 등지에서 목회했으나 시국 상황 때문에 한 곳에서 오래 머물지 못했다. 결국 1942년 11월 목사직을 사임한 후 서울로 올라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숨어 예배드리는 교인들의 신앙을 지도하면서 해방을 기다렸다.

연경원 설립

해방 직후 강순명 목사는 대대적인 구령운동이 일어날 것을 예감하고 전도자 양성에 착수하였다. 북아현동(후에 원효로로 이전)에 적산 한 채를 얻어 ‘연경원’(硏經院)이란 간판을 걸고 주로 북에서 피난 온 학생들을 합숙시키며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는 성경을 가르쳤다. 일종의 신학교였다. 학교 운영은 독신전도단과 농업실수학교 방식으로 혹독했다.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 교수였던 윤필성 목사를 비롯하여 복음교회 윤치병 목사, 장로교회 오종덕 목사, 음악가 이남철, 조선신학원 학생 차남진 등을 교수진으로 하였는데 처음 시작할 때는 20명이던 학생이 2년 만에 120명으로 늘었다. 그러다보니 연경원 출신들의 목사 안수 문제가 불거졌다. 결국 이 문제로 강순명 목사는 그 때까지 소속해 있던 장로교 군산노회로부터 “사사로이 안수하여 교계의 질서를 파괴하는 행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제명당하였다. 강순명 목사는 담담하게 군산노회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이후 강순명 목사는 동석기 목사의 권유를 받고 그리스도의 교회로 소속을 옮겨 원효로교회, 부산교회, 광주교회를 담임하였고 1952년 광주 천혜경로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1955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신촌 언덕에 토굴을 파고 ‘연경신도원’(硏經神道院)을 만들고 기도생활을 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광주로 내려가 요양하던 중 1959년 3월 12일 별세하였다. 

평생 가난과 함께 하며 가난을 통해 그리스도 진리를 터득하고 실천했던 전도자, 그러했기에 소유와 명예, 교리나 신조, 제도와 교권으로부터 자유로웠던 ‘독신’ 전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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