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명 전도자 관련 보충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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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목사


1. 한신대학교 오영석 교수가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회보}지에 실은 글 "고 이준묵 목사의 생애와 사상 4: 해암의 삶과 목회"(2001년 5월호)에서 발췌함.
http://www.prok.org/book/200105/08.htm

학창생활의 꿈과 열정을 접고 비통한 심정으로 광주로 돌아온 학생 이준묵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갈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놀라운 영적인 순례의 교과목을 이수하도록 하였다. 그는 여기서 평생동안 그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기도와 겸손의 사람, 한국의 성자 성프란시스와 같은 강순명 목사와 강 목사의 장인 최흥종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최흥종 목사는 1919년 서울까지 가서 3. 1운동을 주도하다가 투옥되었고, 1920년 광주 YMCA를 창설한 선각자였다. 그는 눈부신 사회활동 중에 특기할 만 것은 1932년에 한국나환자근절협회를 창설하였다. 당시 발기인은 김병로·이인·김성수·송진우·조만식들과 같은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최 목사는 이들 회원들을 앞세우고 총독부로 찾아가서 거리에서 유리걸식하다가 죽어가는 나환자들의 치료와 생계문제를 위한 대책을 세워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반응은 냉랭하였다. 그래서 협회의 회원들은 지쳐버리고 그만두자고 하였으나, 끓어오르는 의분과 나환자들에 대한 불타는 연민과 사랑을 지닌 최 목사는 세계사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특유한 대행진을 감행하였다. 이 행진은 미국의 흑인 인권목사 루터 킹의 행진보다 더 독특하고 감명깊은 것이다. 그것은 최 목사가 광주로 내려가서 나환자들과 함께 서울 총독부를 쳐들어가려고 한 것이다. 그는 5백여 명의 나환자를 이끌고 서울 총독부를 향한 대행진을 감행하였다. 11일만에 굶주림, 타는 목마름, 병, 조소를 무릅쓰고 그는 총독부 앞에 서서 우가끼 총독과 면담을 신청하였다. 그러나 일본 총독이 5백여 명의 나환자를 이끌고 온 최 목사를 쉽게 만날리 없었다. 그러자 그는 5백여명의 나환자들과 함께 환호하고 손벽치고 발로 땅을 구르며 연좌 농성을 하였다. 그러자 더 이상 버틸 수 없던 총독은 7시간만에 최 목사와 면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면담을 통하여 그는 이미 나환자 수용소가 있는 소록도 전체를 나환자를 위한 수용소로 만들고 치료시설과 문화시설을 확충하고 치료된 사람들이 재활하여 갱생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해 줄 것을 제안하였다. 총독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한 것을 알리자 나환자들은 만세를 불렀고 총독은 이들이 무사히 소록도로 돌아갈 수 있도록 열차까지 배려해주었다. 이렇게 하여 그후 1939년 11월에 소록도에 나환자 갱생원이 개설되었다.

최흥종 목사는 원래 싸움꾼이었지만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희생봉사에 감동되어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았고, 드디어 42세에 안수를 받아 탁월하게 목회를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명상하다가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고통을 체험하였다. 그것이 그의 나이 55세가 된 1935년 3월 17일이었다. 그후 그는 다음과 같은 사망통고서를 지인들에게 보냈다.

“1935년 3월 17일 이후, 나 최흥종은 죽은 사람임을 알리는 바입니다. 인간 최흥종은 이미 죽은 사람이므로, 차후에 거리에서 나를 만나거든 아는 체를 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나 최흥종은 오늘부터 이 지사에서 영원히 떠나 하나님 품에서 진실로 하나님과 함께 자유롭게 살 것입니다. 여러분도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기를 바랄 뿐입니다. 본인을 사망자로 간주하시고 우인 명부에서 삭제하여 주시기를 복망하나이다. 가정에 대하여 오만한 자, 사회에 대하여 방일자(放逸者), 사업에 대하여 방종한 자… 종교에 대하여 방랑자로… 가면극이 왕왕 연출되어 양심상 사이비한 생활을 청산하고 무익한 죄인이 세사(世事)에 간여하는 것은 유익보다 폐해가 더 될 것을 각오하므로, 십자가의 구주 예수만 신뢰하고 범사에 예수의 교훈으로 생활할 것을 맹약하고 이제는 생사간에 예수 이외에 아무 것도 없으므로 세사에 대하여 사망자가 되어 스스로 매장한 것이외다…. 자금 이후로는 사장자로 인정하시고 모든 관계와 통신을 단절하여 주시기를 통고하나이다.”( 문순태, 「성자의 지팡이」)

사망통고서를 보낸 후 최 목사는 무등산에 은거하면서 성경과 도덕경을 더 깊이추구하고 누더기를 걸치고 걸인처럼 살았다. 그러나 그의 삶은 하늘의 거룩한 불길 속에서 이어졌다. 그는 모든 일상의 체면과 허위를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진실된 삶을 살아갔다. 그는 거기서 교회의 혁신을 부르짖었다. 교계 지도자들이 신사를 참배하고 창씨개명을 하고 교회의 종까지 떼어다가 바치고, 출전 장병들의 무운을 빌고 묵념하는 추태에 견딜 수 없어 그는 채찍을 들기도 하였다.

해방이 되자 그는 강요에 못이겨 전남 건국위원장직을 맡았다가 14일만에 사퇴하고, 한국나예방협회, 삼애학원을 설립하여 농촌건설에 앞장섰고, 음성환자들이 함께 살 수 있도록 호혜원을 만들어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였다. 그가 1966년 86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자, 그의 장례식에 수많은 음성나환자들과 폐결핵환자들이 줄지어 따라가면서 “아버지, 아버지” 하며 울부짖었다는 것이다. 실로 한국의 테례사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해암은 자주 최 흥종 목사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삶을 새롭게 고쳐 세우곤 하였다. 최 흥종 목사의 특유한 영성생활과 가난한 자, 걸인, 폐병환자, 나환자를 돌본 사랑의 실천과 금욕적인 생활, 농촌을 살리려는 운동, YMCA 운동은 강순명 목사를 통하여 해암에게 샘물처럼 이어져 흘러내려 싱그럽게 결실하였다. 해암이 이런 분들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의 목회활동은 전혀 다른 궤적을 그었을 것이다.

이러한 놀라운 목사의 사위인 강순명 목사는 해암보다 13살 정도 연상이었다. 강 목사도 가난한 청년이었지만 그의 뜨거운 믿음과 헌신적인 삶을 보고 최 목사는 그를 사위로 맞이하였다. 그가 일본 유학시절에 1924년 동경 대지진의 불길 속에서 부인과 함께서 크게 회개하고 귀국하여 남을 위하여 살기로 결심하였다. 강 목사는 광주 YMCA의 농어촌부 에비슨 선교사와 함께 사역하면서 계몽운둥에 앞장섰고 독신전도단과 광주농업실습학교를 창설하였다. 독신전도단은 독신으로 농촌에 들어가 전도하면서 낮에는 미취학 아동들을, 밤에는 부녀자들을 모아 가르쳤다. 협동조합과 소비조합을 조직하여 농촌생활을 향상시키려고 힘썼고 양계와 양돈을 지도하여 부업을 장려하였다. 위급한 환자가 생기면 상비약을 비치하여 놓고 돌보아 주고 기도하여 주면서 빛도 없이 이름 없이 헌신봉사를 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생활을 기쁨으로 하였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고 사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여겼고 그러한 삶에 감사하고 밤에는 철야기도를 하곤 하였다.

해암에 의하면 강 목사는 최흥종 목사처럼 길거리에서 나환자, 걸인들이나 폐결핵 환자를 만나면 집으로 업어와 몸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힌 다음 정성을 다하여 돌보아주었다. 어떤 때는 나환자를 집으로 데려가 부인에게 밥상을 차리도록 하여 함께 식사를 하고, 교인들이 강 목사를 위하여 정성껏 마련해준 새옷을 나환자에게 입혀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해암은 강 목사의 삶을 본받으려고 힘썼고, 그를 한국의 성자로 여겼다.

한 사람이 태어나 자신의 독특한 사명을 자각하고 그 사명의 수행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것은 숭고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사명의 자각에서 인생은 진정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불타는 사명감이 있을 때, 인간은 새로운 영감과 용기를 갖고 미래의 새 역사를 개척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를 빛내는 사람들은 뚜럿한 사명의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명의 사람들은 사회의 부패를 막는 소금이고 어두운 역사에 빛을 가져온 존재들이다. 그런데 한 인간이 그러한 사명감을 새롭게 자각하고 그 사명을 위하여 기쁘게 고난의 길을 걷고, 자신의 전존재를 불태울 수 있으려면,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를 스물여섯 번 왕복할 수 있을 정도로 긴 뇌세포를 지닌 인간의 뇌에 영감의 불꽃을 붙이고, 거룩한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스승과의 만남이 있기 마련이다.

해암에서도 그러한 계기들과 스승들이 있었다. 그의 큰 스승들은 어머니, 최흥종 목사, 강순명 목사들이고, 친구 관계로 지낸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 일본의 하천풍언과 내촌 선생, 그리고 함선헌 선생이었다.

위에서 언급된 강순명 목사에 의해서 조직된 독신전도단의 감화력과 영향력이 커지자 기성 교회의 목회자들부터 박해가 시작되었다. 마침내 조선예수교장로교 총회로까지 비화되어 독신전도단을 조사하는 특별위원회까지 결성되었다. 그래서 독신전도단을 강단에 세우지 말라는 징계가 내려졌다. 전남노회에서 강 목사를 1년 동안 강단에 서지 못하게 하였고 “강순명 목사를 절대 지지하는 이준묵을 그 집단에서 축출시키고, 강 목사의 추종자를 즉시 해산시킨다”는 징계 결의가 발표되었다. 이준묵은 가장 젊은 시절 성결한 인격과 깊은 영성의 사람, 봉사와 헌신의 사람인 강순명 목사 밑에서 6년 동안 지성으로 영성훈련을 받았고, 피폐한 농촌을 복지 농촌으로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철학을 절실하게 배웠고 그것을 실천하였다. 이런 훈련이 해암으로 하여금 일생동안 농촌운동에 뜨거운 관심과 열정을 갖게 하였고, 그가 말년에 이르기까지 복지농촌을 건설하려는 꿈을 갖고 헌신하도록 하였다.

독신전도단이 해산되어 청년 이준묵은 전도자의 길을 걸었다. 나주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개척교회를 시작하였다. 열심히 교회를 섬기면서 전도활동을 하는 중에 전북 김제의 어느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았다. 그 교회의 선임 목회자는 민족의식이 강하여 일본 경찰에 구속되었다. 새로 부임한 23세된 이준묵 전도자는 그 교회에 설립된 사립보통학교를 계속하여 운영하였다. 홀로 1학년에서 6학년까지 60여명을 불타는 마음으로 가르쳤다. 그는 강 목사에게 배우고 익힌 수도자적인 자세로 4년간 충실히 교회를 섬겼다. 거기서 그는 빈민을 돌보고, 부녀자들을 위한 계몽운동과 교육을 실시한 하천풍언(賀川豊彦)의 책들을 읽었다. 그 자신이 받은 감화는 무척 컸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가 일본의 고베 신학교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중 자주 하천풍언 선생이 살고 전도하던 지역을 친히 가서 전도하였고, 하천풍언의 부인을 만나서 하천풍언이 애독하였던 성경을 선물로 받기도 하였다. 해암은 무교회주의 창시자 내촌과 그의 사상을 좋아하였지만, 특히 그가 하천풍언을 좋아하고 흠모한 것은 그 자신의 삶과 어느 정도 유사성을 발견한 까닭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천풍언이 폐병으로 피를 흘리고 누워있으면서도 늘 기도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였고, 그는 아름다운 산천의 경치를 그려놓고 그 그림 속으로 여행하면서 지친 몸과 정신을 쉬었다는 것이다.

이준묵 전도자는 27세에 윤남하 목사의 소개를 받고 일본의 고베 신학교(관서 성서학교)로 유학을 갔다. 그가 목회하면서 절실히 느낀 바가 신학교육의 필요성이었다. 그래서 그는 형님의 도움으로 고베 신학교에서 신학수업을 받으면서 다양한 전도방법을 터득하고 실천하였다. 그는 그 신학교의 교장 선생의 큰사랑을 받았다. 그 교장 선생은 그의 딸을 한국의 학생과 결혼시켜서 서울에서도 신학교를 운영하게 하였을 정도로 한국 학생들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베풀었다는 것이다. 이준묵 전도자는 일본에서 대한수도원을 세운 2년 선배인 유재헌 목사를 알게 되었다. 그는 자급전도의 방법으로 구루마 전도를 펼쳤다. 구루마에 구두, 우산을 수선할 공구를 갖추어 작은 이동식 가게를 만든 것이다. 어디든지 끌고 다니며 구두와 우산을 수선하면서 사람들이 모이면 전도하고 밤에는 문을 닫으며 취사와 취침을 할 수 있도록 시설을 구비하였다. 이준묵 전도자도 그를 따라다니면서 구두를 수선하는 기술을 배웠다. 이 기술을 해남에서 목회할 때 교회의 집사에게 전수하였고, 그 기술을 전수 받은 집사는 후에 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큰 양화점을 운영하였다. 이준묵 목사는 배운 것을 반드시 실천하여 열매를 맺게 했다.

2. {호남교회춘추} 발행인 한인수 목사가 쓴 목자 이경필(牧者 李敬弼)에서 발췌함
 출처:
http://www.lifewater.co.kr/homebook/appendice/priest/priest.html

경필이 새 성전에서 목양에 한창이던 1932년 12월 '강순명 사건'이 일어났다.  강순명은 獨身傳道團의 일원으로서 맹렬한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동 단체가 노회와 총회의 결의에 의해 해체된 이후에는 광주에 와서 생활하고 있었다.

한국YMCA의 농촌사업을 지도하러 온 어비슨(Avison)의 집에서 기거할 처소를 갖게 된 그는 모여든 청년들 20여명과 함께 새벽에는 기도회, 낮에는 노동,그리고 밤에는 예배를 각근히 드리며 공동생활을 영위했다. 그 무렵 양림교회에서 부흥사경회가 열렸는데 순명과 청년들은 낮 공부시간과 저녁 설교시간에는 열심히 참가했으나 새벽기도회만은 자체 기도회 때문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것이 말썽이 되었다. 과거의 경력 때문에 순명에게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내던 목사들은 이를 기화로 즉시 '강순명 집단 심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사한 후 그 결과를 금정교회에 통보해 왔다. 순명이 금정교회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위원장 김창국 목사의 명의로 작성된 동 문서에는 순명이 장로교회의 헌법 위반과 영적 교만을 긍정하고 자복함으로 이번에는 용서하나 다음에는 반드시 치리할 것이라며 향후 일년간은 대중 앞에서 설교를 금하는 결정을 내렸으니 금정교회 당회가 본인을 불러 잘 권면하며 주의를 시키라 씌어 있었다.

경필이 당회를 소집하고 순명을 초청하여 사실을 심문해 보니 심사위원회의 통첩과는 부합되지 않는 면이 많이 있었다. 경필은 후진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순명의 편에 서서 그를 감싸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가 심사위원장 앞으로 보낸 회답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강순명군을 초청하여 교시대로 1년간 복종하도록 권면하고 주의를 시킨즉 여차히 엄중한 처벌은 억울하기 순복키 곤란하다 하오니 노회에서도 이미 금번까지는 용서하시고, 권면하신 것과 같은 책벌을 취소하시기를 바라나이다. 금후로부터 본 당회는 더욱 주의하겠사오니 조량하심을 바라나이다. 1932년 12월 19일 금정교회 당회장 이경필"

강순명은 훗날 평양신학교를 마지막회로 졸업하고 전남노회에서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되었으며 평생을 가난하게 살면서 전도와 빈민 봉사에 헌신한 주의 종이 되었다.

3. 강순명 전도자의 아들이자 강은수(姜恩秀) 천혜경로원 원장에게 광주시 동구청이 제5회 구민상을 수여하면서 적은 글
출처:
http://www.donggu.gwangju.kr/gujung/prize/prize51.htm

상기자(강은수)는 우리고장의 명문인 광주서중과 광주일고를 졸업하고 부친인 강순명 목사가 52년 7월 동구 학동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여 젊은이들을 위한 성경학교를 인도하며 고아와 한센씨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하면서 설립된 천혜경로원에서 결혼 후 선친의 유업을 받들어 천혜경로원의 원장으로 지난 30년동안 80여명의 노인들의 아들이자 보호자로 살아오면서 헌신적으로 노인사랑을 실천하여 지역사회의 모범이 되고 있음.

4. 참고자료

{기독신보} 1928.8.1.
윤남하. {믿음으로 살다 간 강순명 목사 소전} 호남문화사, 1983.
은성수도원 엄두섭 목사.  {내가 존경하는 인물들} 은성출판사.
이덕주 교수. 청빈과 헌신의 독신전도단 운동가 강순명(http://www.kchmuseu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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