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현 함태영(1914.5.24∼1983.11.28, 唱泫 咸泰英) 목사 약력
A Chronological History of Min. Tae-Yung Ham

함동진 아동문학가


나의 아버지 밀알로 썩다
-창현 함태영 목사(唱泫 咸泰英 牧師)

 

 

 

 

 

 

창현 함태영(唱泫 咸泰英) 목사의 서울성서신학교/ 현서울기독대학교 제1회 졸업 당시 모습

 창현 함태영 목사 사진모음

 

 

 

 

 

 

창현 함태영 목사 그는 한국의 암흑기에 오직 헌신(獻身) 하나로 일생을 사신 분이다. 조선 고종황제의 명성황후가 1895년 일본자객에 의해 시해되자 전국의 유림(儒林)들이 분연히 일어나 의병에 가담하여 침략자 일본과 대항하던 시기인 1907년 "생즉의사 사즉의귀(生則義士 死則義鬼 -살아서는 의로운 투사요, 죽어서는 의로운 귀신으로 싸운다.)"의 좌우명을 내세우며 의병 전투에 가담한 송암 함봉표(松庵 咸鳳表) 선생과 金月林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한다.
송암 선생은 일본군과의 여러 전투에서 전과를 올리는 의병전투에 참전하던 중 적의 포로가 되어 고문당하고 목포형무소에 수형(受刑)되었다가 풀려났으나 계속적인 일본의 형사와 헌병들의 끈질긴 감시와 추적에 못 이겨 끝내는 깊은 산골에 들어가 오지에서 농지를 개간하며  두문불출(杜門不出)하는 은둔생활(隱遁生活)을 하게 된다. 이에 장남으로 태어난 창현 함태영은 단신으로 가출하여 풍운아적(風雲兒的)인 삶을 영위하게 된다.
창현은 온갖 간난(艱難)한 인고의 세월 속에서 기독교 목사가 되어 그리스도의 종(從)으로서 사명(使命)을 다하게 된다. 그는 물욕과 탐(貪)함 없이 한국그리스도의 교회에 있어서 순교자적(殉敎者的) 사도(使徒)의 정신으로 그의 모든 것을 다 바쳐 一生을 主님께 헌신하였다.
일제로부터 8·15광복(光復)을 맞고, 6·25전쟁으로 인하여 묻 사람들이 지나치게 生에 탐(貪)하여 서로를 미워하며 속이고 저주(詛呪)하는 암흑시기(暗黑時期)에, 이 사회에서는 윤리(倫理)와 도덕(道德)과 종교(宗敎)가 땅에 떨어지고 사랑이 짓밟히고 있는 불운한 시대에 처해 있었다.
창현은 복음(福音)으로 교육(敎育)으로 그 해결방안을 찾으려고 동분서주(東奔西走) 밤낮을 뛰면서 生의 모든 것을 바쳐 진리(眞理)를 전파하였다.
창현은 암흑시기에 목회와 교육자 생활을 도시보다는 주로 교통 통신이 척박한 벽촌 또는 빈민촌락을 전전하며  살았기에, 잦은 이사와 허름한 처소 찌든 가난으로 인하여 그가 남긴 글이나 언론매체를 통한 기사나 유고(遺稿)가 전혀 없다는 것이 한(恨)스러울 정도다.
창현은 선친의 유산 몫이나 그에게로 수입되는 모든 재물은 오직 목회와 교육에만 투자하였을 뿐, 가사의 장래나 가족을 위하여 재산을 형성한다거나 저축하는 일은 없었다. 이로서 가족들의 생활은 몹시 궁핍하였고 내핍된 생활을 강요받은 셈이 된다. 그러므로 자녀들과 인척들로부터 너무하지 않느냐는 비난도 감수하여야 했다.

(詩) 『사부곡(思父曲)』

어리석은 놈, 바보
예수쟁이, 멍청이 놀림을 받고
신사참배 거부하다 끌려가
쇠고랑 차고 감옥에 누웠어도
야곱의 돌베개 침방으로 여기고.

돌은 놈, 미치광이
예수쟁이, 정신병자 비아냥 받고
공산주의 거부하다가
친미파 반동분자로 몰려
내무서 감방에 앉았어도
골방의 기도실로 여기고.

알거지같은 놈, 비렁뱅이
예수쟁이, 거러지 손가락질 받고
배고파 기진하고
누더기 걸치고 거친 침실이었어도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어디든 천국으로 여기고.

자나깨나 복음전도와 교육, 환원운동으로
일생을 살아가신 나의 아버지
창현 함태영 목사
남기신 유산은 오직
낡은 성경책과 찬송가 단 한 벌
그리고 교훈
"生則福音(생즉복음)*
死則麥粒(사즉맥립)

환원 운동*이여 빛나라
떨구어진 밀알
천 배나 만 배나 더 결실하소서!

(*"生則福音 死則麥粒 -살아서는 주님의 분부대로 복음을 전하고 죽어서는 한 알의 밀알로 썩는다." <사도행전1:8, 요한복음12:24 참조>.
*환원운동(還元運動 -"사도행전시대의 '성서적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
              (함동진의 시 <사부곡> 전문)

창현 함태영 목사의 年譜

◎1914년 5월 24일(음력 4월 30일) ☞전라남도 장성에서 강능 함씨 송암 함봉표와 김해 김씨 김월림과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
◎1919년 (5세 때) ☞선친 송암 함봉표께서 설립한 사립학교에서 초등학문을 닦음.
◎1924년 (10세 때) ☞선친의 독립운동(의병전투 참가 여파 등)으로 일본 경찰과 헌병에 쫓기어 가세가 기움.
         ☞전남 장성에서 구례군 구례면 봉서리로 이주함. 이 때에 생계에 막중한 타격이 있었으나 선친의 독립운동의 뜻은 계속 되었음.
◎1931년 (17세 때) ☞7년 후 전라남도 승주군 외서면 장산리로 이주함.
         ☞보통학교를 졸업.
◎1932년 (18세 때) ☞중학과정을 닦기 위해 단신 부산으로 가출, 고학으로 면학의 길에 들어섬.
◎1935년 (21세 때) ☞중학을 수료함.
         ☞건축분야의 미장, 조적. 토목, 조각, 설계 등 기술자가 됨.
         ☞만주의 봉천, 태래, 지하자루 및 러시아 국경지인 마주리 등지에서 2년을 기거함.(일본군징병 징용기피 목적)
◎1936년 (22세 때) ☞전라남도 광주를 잠시 경유하는 중, 전남 담양에서 한국인을 학대하는 일본인 감독을, 한국인 담당 감독자로서 좌시할 수 없어 이를 살해 담양사건을 일으킴으로서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고 평안 북도 신의주로 피신함. (동아일보보도)
         ☞중학교동창친구인 서씨와 함께 압록강 철교의 철로를 절단키 위해 접근 시도하다가 발각 미수에 그침.
◎1937년 (23세 때) ☞평안북도 선천으로 주거지를 옮김.
         ☞기독교인 하동 정씨 정용옥(鄭觀林과 李鳳女 사이의 장녀)여사와 혼인하여 기독교에 입교함.
◎1938년 (24세 때) ☞평안북도 선천 북교회에서 독립운동가 백영력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음.
◎1939년 (25세 때) ☞평안북도 선천 북교회 집사 피택.
         ☞ 6월 21일(음,5월4일) 장남 함동진 출생.
◎1941년 (27세 때) ☞일제의 강압적 신사참배거부문제로 감금된 경찰서에서 탈출.
         ☞담양사건의 추적 등으로 평암북도 압록강 주변인 자성군으로 피신 후 만포진과 만주 삼강진 등으로 옮겨 은거생활로 2년을 기거함.
◎1944년 (30세 때) ☞단신으로 전라남도 순천시로 피신하여 기독교 신앙인으로 은거했으나 일본경찰의 추적에 적발되어 투옥 됨.
◎1945년 (31세 때) ☞4월에, 가족들은 평북선천에서 후발(後發)로 순천 외서면 장산리에 귀향.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아 자유를 얻음.
         ☞순천시에 가옥 한 채를 매입 이주함.
         ☞해방직후 순천고등성경학교에 입학과 동시에 장로교해룡면교회 전도사로 시무함.
         ☞별량면에 임차한 셋방으로 주거를 옮김.
         ☞전라남도 승주군 별량면에 사재를 처분하여 첫 번째의 개척교회(장로교회)를 설립함.
◎1947년 (33세 때) ☞순천성경고등학교를 졸업함.
         ☞서울 마포 도화동으로 이주하여 38선을 넘어 월남한 정착촌 군용 천막에 임시기거함.
         ☞강순명 목사를 도와 월남난민촌 천막학교를 운영하며 어린이들을 교육하고, 주일이면 교회로 사용, 목회와 복음 전도에 힘씀.
         ☞일본군의 고사포부대 지하 벙커로 옮겨 임시 기거함.
         ☞벙커의 임시거처를 월남민에게 양보하고 임차한 집으로 거소를 옮김.
         ☞도화동산 정상 마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대지를 마련, 점포가 달린 주택을 손수 건축하여 이주하고. 점포를 운영 생계를 유지하며 학비를 조달, 새벽마다 판매할 상품을 매입하랴 신학공부하랴 분주함.
         ☞예수교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 2년 수료 후 그리스도의교회의 환원 운동이 성서적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인 서울성서신학교(현재의 서울기독대학교)로 학적을 옮김.
         ☞점포가 달린 주택이 완성되기까지는 생계유지를 위하여 야간에 길거리에서 경찰의 곤봉을 맞아가며 빵을 구어 파는 행상과 임시 구멍가게운영으로 늦깎이 신학공부를 함.
         ☞본인이 다니고 있는 예수교 장로회 신학교 한국신학대학교교장인 함태영(咸台永-심계원 원장 후일 대한민국 부통령이됨)과 종친으로서 친분을 갖고 아현동 댁에 자주 들러 학문적인 도움을 받았으나 그분이 제의한 공직자리는 사양함.
◎1948년 (34세 때) ☞10월 19일「여수·순천반란사건」이 일어났으나 사건 직전에 서울로 이주하여 화를 면함(순천 별량면에 거주 당시, 주민과 신도들 중에도 공산주의자들이 있어 항상 이상한 낌새가 돌았고, 교인의 일가족이 예수 믿고 반동자가 되었다고, 공산주의자의 방화에 의해 몰사한 사건도 있었음. 공산주의자 중 신앙심을 갖고 교화된 신도는 함태영 목사에게 어떤 어려운 사건이 있을지 모르니 떠나라는 귀띰도 주었다 함. 신도 중에서 경찰에 연행된 공산주의자는 경찰을 설득하여 인도 받아 책임지고 교화시킴.)
         ☞중학동창이며 압록강철로절단미수에 동행한 서씨는 완전한 공산주의자가 되어 도화동에 있는 서북청년단에 끌려가 린치고문을 당한 후 행방불명되었음. 그의 자녀들은 창현의 가족들과 함께 6·25전쟁피난 시 한강을 도강한 후, 노량진 부근 백사장에 이르러 한강철교에 투하되는 폭탄의 화염 속에서  생사를 모르는 채 헤어짐.
◎1950년 (36세 때) ☞창현은 6·25 전쟁으로 한강철교가 폭파되기 전 단신으로 전남 순천 외서면으로 본가로 피난하고, 가족들은 서울 함락 2주 후 별도로 피난함
         ☞초등학교 친구인 공산주의자의 밀고에 의해 기독교인 및 친미파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외서면 내무서에 투옥 옥고를 치룸.
         ☞부친 송암 함봉표의 선행 덕분에 죄목을 붙이지 않고, 밤중 남 몰래 풀려나 숲 속의 토굴에 은신 두문불출함.
         ☞부인 정용옥 여사 역시 38선을 넘어 월남한 동생들을 만나려다 순천 해룡면 내무서에 체포되어 갔으나 감시소홀을 틈타 탈출함.
         ☞공산주의자들의 감시의 눈을 피하여 단신 부산으로 옮겨 기독신보사 파견, 국방부정훈국 소속 선무원으로 종군함.
         ☞종군 선무원으로서 군복을 입고 벌교에 야간 잠입하든 중 선박 내에서 빨치산에 의해 포위되었다가 기지로서 탈출에 성공 죽음을 면함.
         ☞수복과 동시에 전남 광주시 방림동 서병렬(徐炳烈) 목사 댁으로 임시주거지를 옮김.
◎1951년 (37세 때) ☞김은석 목사를 비롯하여 창현 함태영, 이신, 최요한, 김재순, 장주열이 그리스도의교회 목사 안수를 받음.
         ☞창현 함태영 목사는 사재를 들여, 광주 사직동 공원입구(KBS방송국 앞, 2000년 1월 현재 치과병원이 들어 있음)에 일본의 적산가옥 2층집 을 매입하여 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하고 시무함.
         ☞같은 교회건물에 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를 개설 김은석 목사, 이신 목사(감리교신학대학 출신인 이신 목사를 환원운동에 동참케 한 데에는 함태영 목사와의 교유에 의한 것임.), 김태수 목사 등이 협력하여 환원운동신학강좌를 실시함. 함태영 목사의 3제 함태중의 재정적 후원으로 신학교 운영에 큰 도움이 됨.
         ☞가을, 충남 논산군 부적면으로 이주하여 충곡리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 시무함.
         ☞같은 시기에 논산군 부적면 신교리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 시무함.
         ☞11월 15일, 신교리의 마을회관을 빌어 복음중학교(후일 후배 이춘식 목사가 인수하여 대명중학교로 개칭)를 설립, 피폐한 농촌 2세들을 교육함. 3제 함태중과 계제 함태욱이 교회와 학교 일에 적극 협력함.
         ☞복음중학교교사들의 식사문제 등으로 인해서 가족의 거소를 충곡리교회에서 신교리교회로 옮김.
         ☞이신 목사는 부여 합송리로 이주하여 합송리그리스도의교회에 시무하며 광주에서 운영하던 신학교를 이곳에 옮겨와 김은석 목사, 함태영 목사 등과 함께 신학강좌를 하며 기독교환원운동을 전개함. 김확실 전도사, 정찬성 목사등 많은 환원신학도를 배출하였음.
         ☞부여 합송리 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에서는 <로고스(λογοζ)>라는 환원운동신학잡지를 간행 전국 환원교회에 배포함.
◎ 1953년 (39세 때) ☞서울 마포구 도화동의 주택을 기증하여 현 도원동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하는데 도움을 줌.
         ☞3월 24일(음), 유림이면서도 환원운동과 복음전도에 물심양면 아낌없이 지원하시던 부친 송암 함봉표께서 서거하심.(묘소: 순천시 외서면 장산리 산12 선영)
         ☞6월 18일 0시를 기해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측이 모르게 반공포로를 석방하므로 논산포로수용소에서 미군의 총격을 받고 탈주한, 겁먹은 5명의 포로를 국가의 손이 미칠 때까지 의식주를 제공 보호함.
         ☞7월 13일(음 6월4일), 복음전도의 동반자인 아내 정용옥(鄭龍玉) 여사가 급환으로 소천(32세 요절, 1921년∼1953년)되어 시련이 따름.(묘소: 논산시 부적면 신교리 3구 아개울방죽마을 뒷산 공동묘지)
         ☞종군을 하였던 관계로 인연이 있는 미8군과 교섭하여 서울로 들어가는 한강도강이 어려운 시기에 교역자들에게 도강이 쉽도록 알선 편의를 제공함.
         ☞경기도 광주군 분원리로 이주 숭실중학교 교장과 학교 교목을 역임함.
◎ 1955년 (41세 때) ☞서울성서신학교(현, 서울기독대학교)를 제1회 졸업.
◎ 1957년 (43세 때) ☞이리시로 주거를 옮김.
         ☞이리시에 교회개척장소를 물색하였으나 마땅한 곳이 없어, 주거지를 전주로 옮김.
         ☞전주 금암동에 주택 한 채를 손수 건축함.
         ☞전주 인후동 반공포로 정착촌 1세대 분 주택을 매입 이주함.
         ☞인후동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시무. (반공포로 정착촌 의무실을 운영하며.)
◎ 1958년 (45세 때) ☞전주 금암동의 주택을 매각하고, 완산군 용진면 소양리(현재 전주시편입)에 100여 평의 대형건물을 매입 용진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시무
         ☞원광대학교에 다니는 장남 동진(군입대시 까지)과 함께 약종상(藥種商-제약회사에서 포장되어 출하된 완제품만 판매)경영.
◎1962년 (49세 때) ☞대전시 가오동에 손수 협소한 집을 짓고 주거를 옮김. 가정교회로 예배를 드림.
                  ☞불럭공장을 운영, 손수 시멘트 불럭을 찍어 생산하는 중노동을 하며 시련을 겪음.
                  ☞생활안정에 도움이 된다할지라도 교파주의는 배격하고. 오직 환원교회만을 선택 고집스레 고수하였음.
◎1963. 12 전주그리스도의 교회(전주시 경원동 3가 37번지  조주희 집사 설립) 제1대 함태영(唱泫 咸泰英) 목사 부임, 1964. 03 사임
◎1964년 (50세 때) ☞충북 부강그리스도의교회에서 시무.
                  ☞충북 남일면 방서리그리스도의교회에서 시무함.
◎ 1974년 (60세 때) ☞논산 대명중학교 창립20주년기념일에 설립자에 대한 공로표창과 황금기념메달을 받음.
◎ 1975년 (61세 때)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장남 함동진의 집에서 동료 목회자인 이신, 구강서, 이종만, 조충연, 설하운, 함명덕, 임상규 목사, 박정훈, 백○○ 장로, 김경옥 부평보육원 원장 등과 형제자매 가족들이 모여 조출한 회갑연을 베품.
◎ 1980년 (66세 때) ☞노환으로 목회직을 은퇴함.
◎ 1983년 (69세 때) ☞대전시 가오동 자택에서 11월 28일 01시 30분 소천함. (묘소: 순천시 외서면 장산리 산12 선영)
        
창현 함태영 목사는 부강그리스도의교회와 방서리그리스도의교회 봉직을 마지막으로 노환을 얻어 하나님의 사역인 거룩한 목회직을 은퇴하게 된다. 반신마비와 당뇨환으로 투병할 때 계제인 태욱이 모시고 침 뜸과 약으로 극진히 간병하여 한없는 헌신으로 형제우애를 바쳤다. 이 세상의 재산과 육신을 주님을 위해, 교육을 위해 송두리채 바치고, 남은 것은 맨주먹과 뿌려서 썩어진 밀알정신 뿐, 이제 마지막 병든 육신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짐 지고 가는 고난과 고통의 시험을 견디어 내는 것이다. 오직 감사합니다! 이 한마디 뿐, 십자가상에 가시관을 쓰시고 옆구리에 창으로 찔리시고 양손과 양발에 박혀있는 대못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대속(代贖)의 피를 그려보며, 자신이 주님을 위해 완전히 썩어진 밀알이 되었는지를 확인한다. 평생의 좌우명인 "生則福音 死則麥粒(생즉복음 사즉맥립-살아서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죽어서는 주님의 분부대로 한 알의 밀알로 썩는다. 마태복음28:19-20, 요한복음12:24)"
국민들은 무지하고 가난이 찌든 시기에 불신자들은 교회를 향한 핍박이 극심하였다. 교회를 연애당이라 부르고, 교회가 비윤리적 부도덕한 장소인 것처럼 지칭, 비방하며 핍박하엿다. 예배드리는 시간에도 신도들의 신발을 감추고, 유리창에 돌을 던지며, 오물을 끼얹기도 했다. 혹시 신도들 중에서 병이 들거나 죽게되면 예수를 믿어 망한 것이라고 비방도 했다. 전등이 없는 깜깜한 초롱불 밑에서, 겨울이면 난방이 없는 냉랭한 냉방에서 신도들과 함께 기도하며 예배를 드렸다. 하루에도 수 십리 씩 산을 넘고 돌부리에 채이며, 물을 건너 수렁에 빠지며, 폭풍우와 폭설을 무릅쓰고, 험한 길을 밤낮으로 걷고 뛰며 전도하고 심방을 하는 복음전도생활의 연속이었다. 병원이 없고 치료비가 없어 고통받는 신도의 병든 환부를 입으로 빨아 피고름 근종의 뿌리를 뽑을 때도 있었다. 때로는 불량배들의 공갈협박과 핍박과 위협을 받으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열심히 뛰었다. 십자가를 메고 주님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 감사하는 기도와 찬송으로 더욱 힘을 내며 사명을 감당하였고, 한 알의 밀알로 썩음을 실천하며 그리스도의 교훈을 따랐다.
교회를 지키며 교육과 복음을 전하는 일을 자신의 이익과 명예와는 아무러한 관계없이 오직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일념으로 헌신하였다. 봉사와 헌신의 일생, 맨손맨발로 뛰며 달리는 복음전도의 생활,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생이었다. 창현 함태영 목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운명하였을 때에는 空手來空手去(공수래공수거-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간다.) 말 그대로였다. 손수 찍어 만든 시멘트 불럭 몇 장으로 그것도 남의 땅위에 가까스로 손수 쌓아 올려지어 비가 새는 움막같은 거처였다. 지니고 있던 재산이라고는 손때묻은 낡은 찬송가와 성경책, 몇 권의 신학서적뿐이었다. 그리고 보람으로 간직했던 복음중학교 창립20주년기념일에 설립자 공로로 받은 황금메달도 신병치료비로 보태기 위해 이미 팔아 없어진 터였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참으로 육신을 위한 모든 것을, 한 알의 밀알이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한 밑거름으로 주님께 다 헌신하였다. 이제 창현 함태영 목사의 뜻이 이루어져 한국그리스도의교회 안에서 환원운동의 역사와 더불어 사랑의 실천이 메마르지 않을 것이며 갈보리 산상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더욱 빛날 것이다.

(詩) 『사모화(思母花)』
      -백 합


생후 8개월 막내, 그 위로 세자매, 그 위로
맏인 나 십삼세 어린 소년일 적에
천상으로 이끌리며 천사들과 함께
노래하시는 울엄니 보았네
차마 눈감지 못하는 두 눈의
마지막 눈물도 보았었네.

선녀 되어 하늘 가신 울엄니
내 가슴에 백합송이 심어
순결한 향으로 감쌌네
우리들 남매 부활의 날을 소망하며
그 향을 품고 자랐네.

엄니 보고픈 날은
백합송이 화병에 꽂아
방안 가득한 젖냄새
나, 엄니 품 소록소록
청아한 천상의 소리
엄니의 노래를 듣네.
        (함동진의 시<思母花-백합> 전문)  

(2000. 11. 17)

깊은산골(長山)
함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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