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의 '자생 그리스도의 교회' 관련 자료

조동호 목사


1. 말콤 펜윅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란 이름으로 최초로 교회를 세운 사람은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이었다. 그가 한국에 온 것은 1889년 7월이었다. 그는 캐나다에서 철물상을 경영하던 사람으로서 신학교육을 받지 못하였으나 예배인도자 윌더(Wilder)로부터 사막에서 물을 구하다가 갈증으로 죽어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용기를 얻어 선교사가 되었다. 윌더는 말하기를 “만약 당신이 훌륭한 유리병에 물을 담아와 유리잔에 부어서 그에게 준다면 그는 감사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낡고 녹순 찌그러진 깡통 밖에 없어서 그 속에 물을 담아다준다 하더라도 그는 그 물을 마시고 살아 날 것이다.”고 하였다.

펜윅은 침례교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자신은 교파의식을 떠나서 사역하였으며 그가 관계한 교회들은 ‘대한기독교회’로 알려져 있었다.

미국을 방문한 펜윅이 1893-95년 사이에 매사추세츠의 보스턴 크라렌든가(街) 침례교회에서 얼마간 지냈는데, 씽(S. B. Thing)이란 집사가 외동딸을 추모하기 위한 뜻으로 선교회를 만들어 1895년에 6명의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였습니다. 이들 선교사들은 공주를 중심으로 한 충청도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선교자금 부족으로 1900년까지 모두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그들이 하던 사역을 원산에 있던 펜윅이 넘겨받게 되었다. 펜윅의 노력으로 250여 개 교회가 설립되었고 만주와 시베리아에까지 교회들이 세워졌으나 1936년 펜윅이 죽은 이후로 1950년까지도 침례교와는 어떤 연관도 없었다. 다음은 펜윅이 쓴 자서전(The Church of Christi in Corea)의 일부내용이다.

하나님은 나를 어떠한 교단에도 속하지 않은 상태에서 부르셔서 사역을 맡기셨고, 이 나라의 여러 지역에서 주님께로 돌아오는 영혼들이 많아지자 감독자들을 임명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고, 할 수 있는 대로 가장 간결한 교회 이름을 지었는데, 한국어로는 ‘대한기독교회’(Dai Han Kitock Kyouhay)였으며, 그것은 ‘한국의 그리스도의 교회’(The Church of Christi in Corea)란 의미였습니다(허긴, 대한기독교회사: 펜윅 선교사의 자서전적 이야기).

2. 한석진

한석진 목사는 1868년 평북 의주출생으로써 동향인(同鄕人) 백홍준과 서상륜의 전도를 받고 처음 기독교를 알게 됐고, 1891년 마펫에게 세례 받았다.

한석진은 자주의식이 강해 마펫의 조사(助事)로 일하면서도 “내가 그리스도를 알고, 감격하여 그 진리를 내 동족에게 전하는데 외국인에게 돈을 받을 필요는 없다.”는 논리로 선교사가 주는 봉급을 거절했고, 평양 장대현교회, 서울 안동교회, 마산 문창교회, 신의주 제일교회 예배당을 건축할 때도 “한국인의 교회는 한국인의 힘으로 건축한다.”는 원칙을 고집했다고 한다. 또 1910년 장로교와 감리교 연합신문인 예수교회보 사장이 되어서는 신문사를 주식회사 형태로 전환하여 한국인들의 헌금만으로 신문을 발행하여 선교부 자금의 유입을 차단시켰다.

한석진은 200년 전 미국에서 토마스 캠벨과 발톤 스톤이 펼쳤던 운동과 마찬가지로 ‘교파주의’를 극복하려고 한 자생적 환원운동가였다.

한석진은 1909년 일본 도쿄에 유학생들의 한인교회를 설립할 때에 초교파적인 연합교회로 세울 것을 주장하였고, 장로교회나 감리교회로 세우기를 원하는 학생들과 본국교회를 설득하여 “일본에서만큼은 장로교나 감리교가 아닌 연합교회로 운영한다.”는 원칙을 만들어냈다.

한석진은 기회만 있으면 교파구별이 없는 ‘하나의 교회’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구체적인 예로 1915년 자신이 속한 경기충청노회에 ‘조선예수교장로회’란 교단명칭을 “조선기독교회로 바꿀 것”을 헌의하였다. 교단명칭에서 ’장로‘자를 빼고 보편적인 ’기독교‘ 명칭을 사용하자는 그의 헌의는 물론 부결되었다.

한석진은 목회말년에 금강산 기독교 수양관 건립을 위해 헌신하였는데, 1926년부터 모금을 시작하여 1930년에 2층짜리 웅장한 돌집 수양관을 건립하였다. 기금은 한석진이 장로교회들을 순방하여 모은 것이었다. 수양관 간판을 달 때, 사람들은 당연히 ‘장로교 수양관’이 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모금은 장로교인들이 했지만 공간은 다른 교파 사람들에게도 공개하자.”며 ‘기독교 수양관’을 고집했고 결국 그대로 되었다(이덕주, “한국교회의 자존심, 한석진 목사”).

3. 최태용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다!”(고전 1:24)는 묵시를 얻었다면, 최태용(1897-1950) 목사는 “그리스도는 생명이다!”는 묵시를 얻었다.

10대 후반 수원농림학교 재학시절 기숙사에서 처음 기독교신앙을 접한 최태용은 어느 날 침상에 누우려 할 때에 홀연히 광명한 빛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복음을 위하야 네 몸을 바치라”는 가슴에 울리는 소리를 듣게 되고, 20대에 “그리스도는 생명이다!”는 묵시를 얻게 된다. 27살에 박동완, 전영택, 송창근, 강명석, 최상현, 채필근 등이 동인지처럼 펴내던 신생명(新生命)에 글을 발표하다가 28살에는 스스로 천래지성(天來之聲)을 펴냈다.<주: 강명석(관서학원과 밴더빌트대학 졸업)과 최상현(연희전문과 협성신학 졸업, ?신학세계? 편집)은 본래 감리교 목회자들이었으나 1930년 중반부터는 그리스도의 교회 발전에 공헌함.> 그는 이 신앙지에서 “사람은 다만 그리스챤이란 일흠 외에 무삼 딴 일흠으로써 신자를 부르기 십허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리스챤 이외의 일흠으로써 여배(余輩)를 부르랴거든 여배(余輩) 또한 한 일흠을 제공하리라.... 여배(余輩)는 교회주의라는 것이 비진리오 악마의 오묘(奧妙)임을 주창한다.”(“비교회주의자”, 天來之聲) 17호, 1926. 10)고 하여 ‘오직 그리스도인!'(Christian Only!)을 주창하는 ’그리스도의 교회‘ 운동의 한국인 선구자라 할 수 있다. 36살이던 1933년 9월 어느 날에는 작은 배를 타고 노를 저어 물살이 센 큰 강을 건너는 꿈을 꾸고서 “소(小)하고 순(純)한 교회”를 세우라는 하늘의 계시로 받아들여 1935년 12월 22일 ‘기독교 조선 복음교회’를 창설하였다. 이 때 그가 제창한 표어가 “1)신앙은 복음적이고 생명적이여라. 2)신학은 충분히 학문적이여라. 3)교회는 조선인 자신의 교회어여라.”(“우리의 표어”, 영과 진리 81호, 1935. 12)였다.

4. 성낙소

성낙소(成樂紹) 목사는 1890년 5월 16일에 태어나 1964년 11월 30일 74세로 소천 하였다. 그는 일찍이 구국의 일념으로 홍주성 의병군에 가담하여 왜적을 물리치려 하였으나 기회를 놓치자, 구세군에 가입하여 이를 실현하려 하였으며, 기미년 독립만세운동 때에는 영동지방의 유지와 청년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왜경에게 쫓겨 다녔던 애국지사였다. 이 시기에 처가가 있던 충남 부여군 세도면 화수리 2구 290번지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곳 사랑채에서 「기독지교회」(基督之敎會)를 시작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 성낙소 목사는 그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927년 정월 초에 충남 부여군 세도면 화수리에서 성낙소 자신이 기독교계를 시찰한바 기독교 각파가 기독 정신의 골자인 박애(博愛)로 속죄구령의 목적을 충각(忠覺)하고 각기 자파(自派)의 교세만 확장하려는 동시에 자파가 아닌 교회는 이단시할 뿐만 아니라, 시기와 질투심이 농후함으로 상대하는 입장에 소원(疏遠)함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성서 중 에베소서 4장 3~6절 말씀과 같이 칠종(七種)을 통일하자는 신앙으로, 첫째 몸도 하나요 하였으니, 몸은 즉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리킴이라(엡 1:23; 골 1:24). 교회의 명칭을 기독의 교회라고 통일하기 위하여 기독의 복음으로 동민에게 전하였다(성낙소, 자서전 제2장).

그러나 안타깝게도 화수리에 세워진 「기독지교회」(基督之敎會)는 그 소중한 역사를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담임자 성낙소 목사가 서울로 옮겨가고, 처가도 세도면 해촌으로 이사를 가면서 그만 문을 닫고 말았다. 성낙소의 처가가 이사 간 다음, 화수장로교회(기장)의 조용희 장로가 그 집에서 살았으나 지금은 헐리고 공터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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