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
요한(John Hill) 선교사는 테네시 주에 소재한 유서 깊은 존슨성서대학(현
Johnson University)을 1936년 졸업하였으며, 버틀러 대학교 신과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63년에는 또 다른 신학대학원으로부터 신학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세계 제2차 대전 중에 미시간, 웨스트버지니아, 인디애나 등지에서 목회활동을 했고, 미 육군 군목(대위 예편)으로 미국, 필리핀, 일본에서 복무했다.
힐
요한 선교사는 존슨성서대학 4학년 재학시절 요한 T. 채이스(John T. Chase)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아 한국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대학 졸업 후 2년간 온타리오 지방에서 목회하다가 한국에 선교사로 나오기 위해서 1938년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하였다. 1939년에는 에스더 비보스(Esther Beavaus)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또 같은 해 미국에서 일본 동경에서 활동했던 W. D. 커닝햄(William D. Cunningham, 1864-1936) 선교사 부부의 일생기(一生記), <타오르는 횃불>을 읽고, 특히 한국 선교에 관련된 부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1924년 이후 한국에는 동경주재 커닝햄 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일하는 한국인 전도인이 있었으나 그 활동이 미미했고, 1935년 3월에 최초로 미국교회에서 파송된 마이클 쉘리(J. Michael Shelley) 선교사와 그의 가족이 입국하였으나 가족의 건강문제로 그해 11월에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그 후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출신의 토마스 G. 힛치(Thomas G. Hitch) 선교사와 그의 가족이 입국하였으나 그들 역시 1939년 힐
요한 선교사 부부가 한국에 도착한 직후 수개월이내에 출국한 상태였으며, 1936부터 1940년까지 약 4년 동안 한국에서 활동했던 채이스 선교사 부부도 한국을 떠날 채비를 하는 상태여서 외국인 선교사들의 활동이 거의 없던 불모지나 다름없던 때에 입국하여 1972년 6월
은퇴할 때까지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던 선교사가 바로 힐
요한 선교사 가족이다. 특히 힐 선교사는 1959년 이후 대전시 가장동에 한국성서신학교(Korea Bible Seminary)를 세워 많은 목회자들을 배출하였으며, 신학교 안에 선교 본부를 두고 충청도와 전라도에 집중적으로 교회들을 세우고 후원금을 알선한 공이 지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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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선교사가 한국에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사로 입국하게 된 데는 퇴임을 앞둔 채이스 선교사의 발탁에서 비롯되었다. 채이스 선교사는 한국에 오기 전에 이미 동경의 커닝햄 선교부에서 7년간 일한바 있는 경력자였으며, 서울에 한국인 크리스천 미션(the Korean Christian Mission)을 설립하였다. 그는 1936년부터 1940년까지 일군 모든 선교업적을 힐
요한 선교사에게 인계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힐
요한 선교사는 1940년 가을부터 채이스 선교사가 설립한 목회자 양성소를 개교하였으나 일제 말기의 발악적인 기독교탄압으로 인해서 수개월도 유지시키지 못한 채, 그해 11월 짐을 꾸려서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서울주재 미국 대사관의 권고를 받아들여 대부분의 다른 미국인들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인들의 철수 후 일 년 정도 지나서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미국이 일본과 전쟁에 휘말리는 불행한 일이 발생되었다.
힐
요한 선교사는 1948년 2월 18일에 한국으로 되돌아왔고, 서울 연지동에 살면서 1949년 3월 15일 서울성서신학교(Korea Bible Seminary)를 개교하여 본격적으로 목회자 양성에 들어갔으나 불행히도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의 갑작스런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일본으로 피난하였다. 일본에 머무는 일 년여 동안 힐
요한 선교사는 한국어 공부에 주력하였다. 그해 11월에 한국에 돌아와 5주간 머무는 동안 서울 장충동의 임대건물에서 신학교를 개교하였으나 전쟁의 악화로 그해 12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다음 해인 1951년 7월 3일 한국에 돌아온 힐
요한 선교사는 서울 송월동에서 1951년 8월 4일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크리스천 미션 고아원을 시작하였고, 이어서 인천과 대전 판암동 그리고 대구에 각각 고아원 설립을 도왔고 후원하였다.
그 후 힐
요한 선교사는 가정문제로 1955년 한국을 떠났다가 제인 키넷트 선교사와 재혼하고 1959년 여름에 돌아왔다. 힐 선교사와 결혼한 제인은 중국, 범마, 일본을 거쳐 한국에서 활동하다가 1955년 귀국한 미혼여성 선교사였다. 한국에 돌아온 힐
요한 선교사는 서울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대전시 가장동에 한국성서신학교와 한국 크리스천 미션을 세워 1972년 6월까지
10여년 넘게 교장으로 봉직하였다.
이밖에도 대전시 가장동에 버지니아 고아원을 설립하였으며, 1959년 이후 세 곳의 고아원들, 곧 부산의 성광원, 연무대의 에덴보육원, 인천 그리스도의 교회 고아원에 지속적으로 후원금을 보냈다. 또 1951년부터 1955년까지 서울과 인천과 대전과 대구에 각각 고아원 세우는 일을 도왔거나 운영하였고, 1959년부터 1972년까지 인천을 제외한 다른 네 곳의 고아원 설립을 도왔거나 운영하였다.
힐
요한 선교사는 1939년에
시작한 파란만장한
한국에서의 대역사를
마치고, 1972년 6월에
은퇴하였으며, 귀국
후에도 소천하실
때까지 미자립 교회들을
후원하였으며, 한국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불철주야
기도했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산 증인이자
역사였다. 2009년
11월 4일 오후 4시
58분 96세로 소천하시다.
2011년
11월 19일 추모 2주기를
맞이하여 유품(사집첩 2개와 다수의 슬라이드 사진 및 네거티브 필름)이 그리스도의 교회 총회 산하 한성신학원에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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