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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암 함봉표 지사(환원운동의
지원자) Chronological History of
Bong-Pyo Ham, Supporter
of Restoration Movement
함동진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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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암 함봉표 지사(환원운동의 지원자)
송암 함봉표 지사의 홈페이지 : http://poet.or.kr/hbp
송암 함봉표 지사는 창현
함태영 목사의 선친이시다.
그는 독실한 유림이면서도 기독교로 개종한 함태영 목사의 구령사업에 적극 지원하는 아량을
베풀었다.
창현 함태영 목사가 해방정국과 6.25전쟁의 후유증으로 피폐된 사회환경에서 기독교를 전파하고 교육사업을
하며 기독교환원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송암 함봉표 지사의 후원의 덕이었다고 하여도 과장이 아니다.
그러므로 함봉표 지사는 그리스도의교회의 환원운동지원자이며 間接功勞者임에는 틀림이 없음을 이에
밝혀둔다.
송암 함봉표 지사의
약전
(함봉표-年譜)
(약력) 송암 함봉표의
년보(松庵 咸鳳表의 年譜)
함봉표 /
함동진
1889년 8월 14일 : ☞ 송암 함봉표는 정언관, 의관(正言官, 議官)인 父 명사 함장기(明沙 咸莊基 -
基昊, 兆海)와 母 파주 염씨(波州 廉氏)와의 사이에 七子女 중 次男으로 전남 장성군 황룡면 삼룡리(全南長城郡黃龍面三龍里 - 지금의
와룡리-臥龍里)에서 출생하다. 1894년 : ☞ 동학혁명(東學革命)을 겪다. 1895년 : ☞ 연옹 박선생 문하(然翁 朴先生
門下)에서 2年間 수학(受學)하다. 1897년 : ☞ 죽은거사 김대규 문하생(竹隱居士 金大奎 門下生)으로 2年間 受學하다. 1899년
: ☞ 朴然翁 先生 門下에서 2年間 수학(受學)한 後 16세가 될 때까지 가내(家內)에서 독학(獨學)을 하다. 1903년 : ☞ 광산
김영호(光山 金永鎬) 선생 門下에서 受學하다. 이 때에 社會가 극(極)히 혼란(混亂)하여 의지(意志)를 굳게하다. 1907년 1월 : ☞
장성 황룡면에서"<생즉의사 사즉의귀-生則義士 死則義鬼>-살아서는 의(義)를 위(爲)하여 싸우는 투사(鬪)士요, 죽어서도 義로운
귀신(鬼神)이되어 싸운다."라는 좌우명(座右銘)으로 의지(意志)와 정신(精神)을 삼아 분연(憤然)히 일어나 자위대(自衛隊)를 조직 인솔(組織
引率)하여 호남의용장(湖南義勇將)인 참봉 김태원 막하(參奉 金泰元 幕下)에 가담하다. ☞ 창평 무등촌에서 의병장 김태원 휘하(義兵將
金泰元 揮下)에서 창평 무등촌 전투(昌平 無等村 戰鬪)에 참전, 외적 길전부대(參戰, 倭敵 吉田部隊)와 혈전분투(血戰憤鬪)하여 적장 길전(敵將
吉田-요시다)와 그 부대(部隊)를 총몰살(總沒殺)하고 무기(武器)를 노획하는 전과(戰果)에 가담(加擔)하다. 2월 : ☞ 장성
황룡면에서장성군 황룡면 월암리(月岩里-鼓岩) 전투(戰鬪)에 참전(參戰)하여 일주야간 일본군부대(一晝夜間 日本軍部隊)와 대혈전(大血戰)을 벌여
日本軍을 총몰살(總沒殺)하는 전과 (戰果)에 가담(加擔)하다. 3월 : ☞ 羅州·靈岩·江津·海南에서
군자금조달운반책(軍資金調達運搬責)의 命令을 받들고 義兵 3人을 거느리고 羅州·靈岩·江津·海南 等地를 巡廻, 義兵支援을 꾀하는 元老들의 家宅을
秘密裏에 訪問, 軍資金受領調達의 任務를 完遂하다. 6월 : ☞ 光州(光山) 魚登山에서光州(光山) 魚登山 戰鬪에 參戰하여 日兵과 血戰,
追擊하던 中 不幸하게도 義兵將 金泰元 將軍께서 戰死하므로 哀慕하고 痛哭하다. 같은 때 海山 全垂鏞 將軍과 痴齊 金 將軍이 義兵을 이르켜
軍士를 모으므로 이에 加擔하다. 10월 : ☞ 光州(光山) 大峙里에서光州 大峙里 戰鬪에 參戰하여 日兵과 大血戰을 벌이며 追擊하여 日兵을 總
沒殺하고 武器를 노획하는 戰果에 加擔하다. ☞ 福興面 內東里에서같은 때, 淳昌의 義士 申昌學 將軍이 軍士를 모아 福興面 內東里에서 義兵을
指揮하므로 이 戰鬪에 參戰하여 日兵과 大血戰을 벌이며 追擊하는 戰果에 加擔하다. 11월 : ☞ 長城 自隱谷에서長成의 自隱谷戰鬪에 參戰,
日兵과 大血戰을 벌이며 追擊하는 戰果에 加擔하다. 12월 : ☞ 羅州 古幕浦에서 羅州의 古幕浦 戰鬪에 參戰, 日軍駐屯所를 包圍하여
攻擊하다. 이 戰鬪에서 先鋒將 鄭 參尉의 指揮로 連戰連勝의 攻擊이 繼續되었으나 不幸하게도 先鋒將 鄭 參尉의 戰死로 哀慕하다. 1908년 :
☞ 日將 西村(니시무라)의 捕虜가 되어 拷問을 당하면서도 "生則義士 死則義鬼-살아서는 義로운 鬪士요, 죽어서도 義로운 鬼神이 되어 싸운다."라는
義兵 加擔時의 決意를 되세기며 意志와 節介를 屈하지 아니하다.(木浦刑務所 3個月 受刑) 이로써 가정이 敗家(破産)되어 훗날을 期約하고 杜門不出
隱居生活을 하던 中 參奉 金平淑의 次女인 金月林과 結婚을 하다. 1910년 : ☞ 大韓帝國의 國運이 不幸하여 韓日合邦이 되었다는 消息을
듣고 땅을치며 哀痛학 痛哭하다. 1911년 : ☞ 珍原面 栗谷里로 移住하여 農業에 熱中하는 한편 松沙 奇宇萬(蘆沙 奇正鎭의孫으로 義兵을
이르키고 日本을 排斥한 人物) 先生을 따르며 隱居生活을 계속하다.(義兵決意를 못버림). (註 : 松沙 奇宇萬은 蘆沙 奇正鎭의 손자이고,
노사 기정진은 송암 함봉표의 조부 죽포 함병후(선욱)의 스승이되고, 송사 기우만은 송암 함봉표의 부친 명사 함장기(기호)와 교유함). ☞
같은 때, 大聖敎春秋大祭를 맡음과 아울러 河西 金麟厚 先生의 長成 筆岩書院 春秋大祭를 맡아 執禮하므로 民族正統文化를 지키는데도
앞장서다. ※ ☞ 刑務所 出所後에도 日本 憲兵과 巡査의 繼續監視로 行動과 나들이가 自由롭지 못하다. 이로서 生活苦가 따르고 잦은 移住가
있게 되다. 1913년 10월 15일 : ☞ 부친 함장기(父親 咸莊基, 기호-基昊, 조해-兆海)께서 患憂가 있어 誠心을 다하여 약수발을
하였으나 別世하므로 草土에서 3年間 謹愼으로 보내다. 1914년 5월 24일 : ☞ 장자 태영<영주,창현>(長子
泰英<英柱,唱泫>)을 낳다. <註>: 창현 함태영 목사(唱泫 咸泰英 牧師 1914. 5. 24∼1983. 11. 28
조선일보 인터넷 인물 DB에 수록 - 자세한 인적사항은 www.poet.or.kr/hdj <문학의즐거움>詩人 함동진의 홈페이지 참조.
창현 함태영 목사는 함동진의 父이다. 1915년 : ☞ 동북면 남산리(東化面 南山里)로 이주하여 수년간 농업(數年間 農業)을
경영(經營)하다. 이 때에도 춘추성제(春秋聖祭)를 계속 집례(執禮)하다. 1918년 : ☞ 자산(自産)과 자비(自費)로 本家에
사립학교(私立學校)를 설립(設立)하고, 교사김종운(敎師 金鐘雲)을 임명(任命)하여 자신-봉표(自身-鳳表)가 校長이 되었고, 생도(生徒)의
수(數)는 백여명(百餘名)으로 수년간 교육(數年間 敎育)을 하다. 1919년 3월 1일 : ☞ 기미(己未) 3·1 독립운동(獨立運動)이
일어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를 천지(天地)가 진동(振動)하도록 높이 부르고, 민족(民族)을 교육(敎育)으로 깨우쳐 항일정신(抗日精神)을
기르는데 힘쓰다. 7월 26일 : ☞ 모친(母親)이 별세(別世)하여 동귀산 고조묘소(東貴山 高祖墓所) 아래 부친묘(父親墓)와 쌍묘(雙墓)로
합장(合葬)하고 호천망극(昊天罔極-하늘같이 가없는은혜)하며 초토(草土)에서 근신(謹愼)하다. 1922년 : ☞ 군(郡)의 사회유지회의
요망(社會有志會議 要望)에 의(依)하여 소작상조회 감사(小作相助會 監司)에 피선(被選)된 後, 회장 김경환(會長 金璟煥)씨의 협력하(協力下)에
전답지세(田畓地稅)를 소작인(小作人)이 선세(先稅)로 부담(負擔) 하느냐, 부호(富戶)가 자진납부(自進納付) 하느냐는 일로 각처(各處)의
지주(地主)들 간(間)에 언쟁(言爭)과 다툼이 있으므로 각면(各面)에 설명회(說明會)를 개최(開催)하여 지세(地稅)는 완전(完全)히
지주(地主)의 부담(負擔)으로 하여 소작인(小作人)을 보호(保護)하고 小作人의 離農을 防止하다. 또한 小作料를 6割 增收하느냐 3割
增收하느냐는 일로 富戶들과 討論을 벌여 極力 理解시켜 3割 增收로 完全決定을 봄으로 小作農民을 保護하다. ( 註 : 평생동안 어려운
문제발생시마다 언제나 약자편에서서 선의적으로 정의롭게 해결하므로 후일 "변호사"라는 별명이 따름). 1923년 2월 : ☞ 2月에
求禮地域方面을 돌아보다. 5월 : ☞ 5月에는 구례 봉서리(求禮 鳳西里)로 移住, 土地를 개간 농업(開墾 農業)을 經營하던 中 7年間이나
天災로서 한발(旱魃)이 들다. 1929년 : ☞ 繼續된 凶年으로 因한 生活苦로 不得已 順天郡(昇州) 外西面 長山里 12 番地에 새로히
기반(基盤)을 造成하여 移住하다. 이곳 長山里에서 田畓을 開墾하며 "自力更生"의 意志를 圖謀하여 農業을 經營하다. 1932년 : ☞ 地域區
農民會 會員들의 要望에 依하여 自力更生委員長에 피선(被選)된 後에 뜻하는 바 民風을 改善하고, 農業方法을 改良하며, 靑少年 兒童을 敎育키 爲하여
私設學習場을 運營 民族意識을 고취(高趣)하다. 이로써 向後 13年間 뽕나무 심기와 누에치기를 장려(奬勵)하고, 나무심기를 장려하며,
퇴비증산(堆肥增産)을 奬勵하고, 畜産奬勵運動을 積極 展開하며, 지도하다. 1933년 : ☞ 武科하여 주부-증 병조참판(主簿-贈 兵曹參判)을
지내고 임진왜란(壬辰倭亂)때 義兵을 이끌고 도원수 권율(都元帥 權栗)을 따라 행주전투(幸州戰鬪)에서 戰死하고 선무원종 종훈(宣武原從 從勳)에
참여한 수정공 함덕립(水亭公 咸德立 -승주·구례·보성 地域의 江陵咸氏一家가 모시는 派先祖)의 墓所 神道碑 設立을 위한 모임을 發起한 바 종제
우현(從弟 宇鉉)과 종순(鐘淳)이 協力하여 卽時 設立하고 碑를 刻하고 이름을 넣다. 이러써 日帝末期에도 倭에 抵抗하는 뜻으로 壬辰倭亂
義兵參戰 戰死者 先朝의 碑를 세워 뜻을 기리다. 한편 江陵咸氏 大同譜編纂 南道有司로 委任되어 任務를 遂行하다. 1934년 : ☞
地域區民의 모임인 애림계(愛林契)의 長에 被選되다. 한편 죽천리 都門山에 各祭位의 土地가 不足하여 從弟 宇鉉의 協力과 誠意로 沓 40落을
買入하여 보제(補祭)하므로 祖上에 對한 孝를 發揮하다. 1935년 : ☞ 農民들의 모임인 공려회(共勵會)의 長과 식산계(殖産契)의 主事로
被選되어 營農事業을 改善하여 이에 必要한 資金을 조달하다. 1936년 : ☞ 竹山里 6代祖墓祭位의 沓 2筆地와 증조산위(曾祖山位) 土地 沓
1筆地, 전 1筆地, 垈地 1筆地를 買入하여 호제(護祭)하다. 1937년 : ☞ 農民指導上 必要에 依하여 長城郡의 뽕나무農園의 누에치기를
視察하고, 光州의 모범농장(模範農場)과 방직공장(紡織工場), 제사공장(製絲工場) 等을 視察하다. 1938년 : ☞ 外西國民學校 學務委員에
被選되어 3回 連任하였으며 向後 6年間 校務에 힘쓰다. 3월 : ☞ 水原의 模範農場을 視察하다. ☞ 京城(서울)의 박물관(博物館),
百貨店, 여러 工場 等을 視察하다. ☞ 開城과 평양(平壤)에서 채종재배법(菜種栽培法)을 視察하고 各種物産地의 一般工場을 視察하면서 各
名勝地를 觀光하다. ☞ 新義州에서는 제지공장(製紙工場), 木材工場, 其他 模範生産地를 視察하다. ☞ 滿洲 安東에서는
지나박물관(支那博物館)과 重要物資生産工場을 시찰하다. (<註>: 1930年代 우리 나라는 오늘날과 같이 交通이 發達하지 못한 때에
長距離 坊坊曲曲을 여행한다는 것은 經濟的 負擔도 클 뿐만 아니라 보통사람으로서는 해내기 어려웠던 일이다. 松庵 선생은 八道江山은 勿論 滿洲까지
누비며 視察旅行을 해낸 것은, 많은 見聞으로 新知識을 쌓아 農民啓蒙을 하겠다는 强한 意志의 人間性을 잘 나타내어 주고 있다. ) 1939년
: ☞ 學術指導, 講習指導 功勞로 表彰을 받다. 6월 21일(陰 5월 4일) : ☞ 長孫 東振(唱泫 咸泰英의 長子) 태어나다.
<註>: 함동진 시인-「문학의즐거움」홈페이지 www.poet.or.kr/hdj 참조. 1940년 : ☞ 土地開拓優良成績功勞로
表彰을 받다. ☞ 生活諸般奬勵功勞와 子女 10名 模範養育으로 每日新報社主催 優良多産家庭 表彰을 받다. 1941년 : ☞ 淸日戰爭으로
四海가 분분(紛紛)하다. 1942년 : ☞ 世界大戰宣戰布告와 포성(砲聲)으로 天下가 진동(振動) 地球의 變動이 일어나 초목금수(草木禽獸)가
다 죽어가고 民間人들은 定處없이 흐터져 방황(彷徨)하는 日帝天下의 無情의 歲月 34年을 지내다.( 註 : 日帝天下에서 굴욕적-屈辱的인 生活의
한탄-恨歎 섞인 말이다.) 1945년 8월 15일 : ☞ 日帝天下의 戰亂이 빨리 끝나고 太平스런 平和가 오라고 소리 높여 부르짖을 때에,
우리 大韓國 곧 새로운 大韓民國의 獨立萬歲 소리가 天地를 振動하니 萬物이 춤을 추며 和答하도다. 1946년 : ☞韓國民主黨에 加入하여
建國運動에 노심초사(勞心焦思)하다. 1948년 3월 : ☞ 建國投票區 選擧委員 被選되어 投票를 管理하다. 또한 地域區住民들의 要求에 依하여
地域區農會長에 被選되다. 1949년 : ☞ 本來의 (아호)雅號인 松原을 松庵으로 改號하고 雅號를 따서 長山里12番地 本家 뒷東山 山頂에
松庵亭을 건립하여 子孫들에게 松庵의 意志와 精神을 계승(繼承)토록 하다. 8월 14일 : ☞ 回甲日에는 子女들이 잔치상을 陳設하고 베푼
헌수(獻壽)에 鄕里의 모든 벗들을 招待하여 술을 돌리며 詩 읊기를 3日間 하고 詩集을 이루니 락광세지성사(樂曠世之盛事 - 세상에 비길 바 없는
가장 즐거움)하다. 또한 장산리 山12番地에 자신의 假墓를 準備, 封墳을 만들고 이로 하여금 門中의 山으로 삼도록 하다. 1950년 2월
: ☞ 農民會長에 被選되다. 3월 : ☞ 地域區民 要望에 依하여 殖産契主事에 被選되다. 6월 : ☞
北韓共産集團의 南侵, 6·25事變 戰爭으로 杜門不出 隱居生活을 하다. 鄕里의 指導者이며 共産黨에 非協助한 罪目으로 장자 창현 함태영 목사(親美波
罪目)와 함께 內務署에 연행되어 收監되는 苦痛을 겪었으나 天運으로, 人心 좋은 善行人 인정되어 풀려나다. 向後 別世時까지 鄕里의
靑少年들에게 漢學을 敎育하다. 1953년 4월 2일 : (家族祭日 陰曆3月24日) 午後4時 全羅南道 昇州郡 外西面 長山里
12番地 自宅에서 老患으로 逝去하다.
※ 墓所 : 全羅南道 順天市 外西面 長山里 山12番地. ◈ 出版物 等에 收錄
內容 *1994년「江東글모음집」, 漢詩<世感> 1994. 12. 20 141쪽, 서울강동구청발행 *「순천문학」가을호
제38집, 漢詩<世感>,<懷古感今>,<閑吟> 1995. 9. 25
144∼146쪽,순천문학동우회발행. *「오늘의문학」여름호 제28호, 漢詩<世感> 1994. 6. 1. 70쪽
오늘의문학사발행. *「月刊書藝」1994년6월호 제154호, 漢詩<世感> 1994. 6. 1.
月刊書藝社(美術文化院). *「大韓民國5千年史-제7권 韓國人物史」<송암함봉표 프로필>1990. 12. 30.
4239쪽. *「大韓民國姓氏大譜總覽제6권人物總覽」<송암 함봉표 프로필>1993. 12. 15.
3141쪽. *「항일투사열전제2권」추경화저 <송암 함봉표> 1997. 7. 10. 청학사 발행, 화보43쪽,
공적250쪽. *「江陵楊根咸氏大同譜제3권 甲子譜」32世 鍾宗(松庵 咸鳳表) 江陵楊根咸氏大宗會發行, 1987년 2월, 제1권
272쪽, 제3권 671∼673쪽. *「문학의즐거움」인터넷에 올림(시인), http://www.poet.or.kr <시인 함봉표>로 검색. 송암 함봉지사의 홈페이지 :
http://poet.or.kr/hbp
(註 ; 이 年譜는 松庵 咸鳳表
志士의 親筆 家乘譜를 土臺로 번역작성(飜譯作成)됨. 또 咸 志 士의 계자 태욱(季子 泰昱)의 證言도
따름.)
1993년8월1일 강릉함씨장산리파선조기록 송암회 함동진 편저
2000.
12. 31. 참고 연락처 http://www.poet.or.kr/hdj
환원운동사자료) (그리스도의교회
환원운동-41) *[환원운동]은: 인위적 분파 교파 교회법 신조 등 교리를 초월하여 신약성서 사도행전에 제시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하나가 되자)는 운동이다.
환원운동가 창현 함태영 목사 약력(唱泫 咸泰英 牧師 略歷)
● 창현 함태영(1914.5.24∼1983.11.28) 목사의 年譜
◎
1914년 5월 24일(음력 4월 30일) ☞전라남도 장성에서 강능 함씨 송암 함봉표(松庵 咸鳳表)와 김해 김씨 김월림(金月林)과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
◎ 1919년 (5세 때) ☞선친 송암 함봉표께서 설립한 사립학교에서 초등학문을 닦음.
◎ 1924년
(10세 때) ☞선친의 독립운동(의병전투 참가 여파 등)으로 일본 경찰과 헌병에 쫓기어 가세가 기움. ☞전남 장성에서
구례군 구례면 봉서리로 이주함. 이 때에 생계에 막중한 타격이 있었으나 선친의 독립운동의 뜻은 계속 되었음.
◎ 1931년 (17세
때) ☞7년 후 전라남도 승주군 외서면 장산리로 이주함. ☞보통학교를 졸업.
◎ 1932년 (18세 때)
☞중학과정을 닦기 위해 단신 부산으로 가출, 고학으로 면학의 길에 들어섬.
◎ 1935년 (21세 때) ☞중학을
수료함. ☞건축분야의 미장, 조적. 토목, 조각, 설계 등 기술자가 됨. ☞만주의 봉천, 태래,
지하자루 및 러시아 국경지인 마주리 등지에서 2년을 기거함.(일본군징병 징용기피 목적)
◎ 1936년 (22세 때) ☞전라남도
광주를 잠시 경유하는 중, 전남 담양에서 한국인을 학대하는 일본인 감독을, 한국인 담당 감독자로서 좌시할 수 없어 이를 살해 담양사건을
일으킴으로서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고 평안 북도 신의주로 피신함. (동아일보보도) ☞중학교동창친구인 서씨와 함께 압록강
철교의 철로를 절단키 위해 접근 시도하다가 발각 미수에 그침.
◎ 1937년 (23세 때) ☞평안북도 선천으로 주거지를 옮김.
☞기독교인 하동 정씨 정용옥(鄭觀林과 李鳳女 사이의 장녀)여사와 혼인하고 이의 전도에 의하여 기독교에 입교함.
◎ 1938년 (24세 때) ☞평안북도 선천 북교회에서 독립운동가 백영력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음.
◎ 1939년
(25세 때) ☞평안북도 선천 북교회 집사 피택. ☞ 6월 21일(음,5월4일) 장남 함동진 출생.
◎
1941년 (27세 때) ☞일제의 강압적 신사참배거부문제로 감금된 경찰서에서 탈출. ☞담양사건의 추적 등으로 평안북도
압록강 주변인 자성군으로 피신 후 만포진과 만주 삼강진 등으로 옮겨 은거생활로 2년을 기거함.
◎ 1944년 (30세 때)
☞단신으로 전라남도 순천시로 피신하여 기독교 신앙인으로 은거했으나 일본경찰의 추적에 적발되어 투옥 됨.
◎ 1945년 (31세
때) ☞4월에, 가족들은 평북선천에서 후발(後發)로 순천 외서면 장산리에 귀향.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아 자유를
얻음. ☞순천시에 가옥 한 채를 매입 이주함. ☞해방직후 순천고등성경학교에 입학과 동시에
장로교해룡면교회 전도사로 시무함. ☞별량면에 임차한 셋방으로 주거를 옮김. ☞전라남도 승주군
별량면에 사재를 들여 첫 번째의 개척교회(장로교회)를 설립함.
◎ 1947년 (33세 때) ☞순천성경고등학교를 졸업함.
☞서울 마포 도화동으로 이주하여 38선을 넘어 월남한 정착촌 미군용 천막에 임시기거함. ☞강순명
목사를 도와 월남난민촌 천막학교(공명학교?)를 운영하며 어린이들을 교육하고, 주일이면 교회로 사용, 목회와 복음 전도에
힘씀. ☞일본군의 고사포부대 지하 벙커로 옮겨 임시 기거함. ☞벙커의 임시거처를 월남민에게 양보하고
임차한 집으로 거소를 옮김. ☞도화동산 정상 마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대지를 마련, 점포가 달린 주택을 손수 건축하여
이주하고. 점포를 운영 생계를 유지하며 학비를 조달, 새벽마다 판매할 상품을 매입하랴 신학공부하랴 분주함. ☞예수교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 2년 수료 후 그리스도의교회의 환원 운동이 성서적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인 서울성서신학교(현재의 서울기독대학교)로 학적을
옮김. ☞점포가 달린 주택이 완성되기까지는 생계유지를 위하여 야간에 길거리에서 경찰의 곤봉을 맞아가며 빵을 구어 파는
행상과 임시 구멍가게운영으로 늦깎이 신학공부를 함. ☞본인이 다니고 있는 예수교 장로회 신학교 한국신학대학교교장인
함태영(咸台永-심계원 원장 후일 대한민국 부통령이됨)과 종친으로서 친분을 갖고 아현동 댁에 자주 들러 학문적인 도움을 받았으나 그분이 제의한
공직자리는 사양함.
◎ 1948년 (34세 때) ☞10월 19일「여수·순천반란사건」이 일어났으나 사건 직전에 서울로 이주하여 화를
면함(순천 별량면에 거주 당시, 주민과 신도들 중에도 공산주의자들이 있어 항상 이상한 낌새가 돌았고, 교인의 일가족이 예수 믿고 반동자가
되었다고, 공산주의자의 방화에 의해 몰사한 사건도 있었음. 공산주의자 중 신앙심을 갖고 교화된 신도는 함태영 목사에게 어떤 어려운 사건이 있을지
모르니 떠나라는 귀띰도 주었다 함. 신도 중에서 경찰에 연행된 공산주의자는 경찰을 설득하여 인도 받아 책임지고 교화시킴.)
☞중학동창이며 압록강철로절단미수에 동행한 서씨는 완전한 공산주의자가 되어 도화동에 있는 서북청년단에 끌려가 린치고문을 당한 후 행방불명되었음.
그의 자녀들은 창현의 가족들과 함께 6·25전쟁피난 시 한강을 도강한 후, 노량진 부근 백사장에 이르러 한강철교에 투하되는 폭탄의 화염
속에서 생사를 모르는 채 헤어짐.
◎ 1950년 (36세 때) ☞창현은 6·25 전쟁으로 한강철교가 폭파되기 전 단신으로 전남
순천 외서면으로 본가로 피난하고, 가족들은 서울 함락 2주 후 별도로 피난함 ☞초등학교 친구인 공산주의자의 밀고에 의해
기독교인 및 친미파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외서면 내무서에 투옥 옥고를 치룸. ☞부친 송암 함봉표의 선행 덕분에 죄목을
붙이지 않고, 밤중 남 몰래 풀려나 숲 속의 토굴에 은신 두문불출함. ☞부인 정용옥 여사 역시 38선을 넘어 월남한
동생들을 만나려다 순천 해룡면 내무서에 체포되어 갔으나 감시소홀을 틈타 탈출함. ☞공산주의자들의 감시의 눈을 피하여 단신
부산으로 옮겨 기독신보사 파견, 국방부정훈국 소속 선무원으로 종군함. ☞종군 선무원으로서 군복을 입고 벌교에 야간 잠입하든
중 선박 내에서 빨치산에 의해 포위되었다가 기지로서 탈출에 성공 죽음을 면함. ☞수복과 동시에 전남 광주시 방림동
서병렬(徐炳烈) 목사 댁으로 임시주거지를 옮김.
◎ 1951년 (37세 때) ☞김은석 목사를 비롯하여 창현 함태영, 이신,
최요한, 김재순, 장주열이 그리스도의교회 목사 안수를 받음. ☞사재를 들여, 광주 사직동 공원입구(KBS방송국 앞,
2000년 1월 현재 치과병원이 들어 있음)에 일본의 적산가옥 2층집 을 매입하여 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하고 시무함. ☞같은
교회건물에 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를 개설 김은석 목사, 이신 목사(감리교신학대학 출신인 이신 목사를 환원운동에 동참케 한 데에는 함태영 목사와의
교유에 의한 것임.), 김태수 목사 등이 협력하여 환원운동신학강좌를 실시함. 함태영 목사의 3제 함태중의 재정적 후원으로 신학교 운영에 큰
도움이 됨. (*함태영 목사는 광주에서나 부여에서 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 운영재정 및 교무를 전담하다시피 함) ☞가을, 충남
논산군 부적면으로 이주하여 충곡리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 시무함. ☞같은 시기에 논산군 부적면 신교리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
시무함(현재의 우320-863 논산시 부적면 탑정리 269-13 소재 금성그리스도의교회 담임목사 오광은 전화
(041)733-6591∼2. HP018-451-4445 E-Mail oke4445@hanmail.net ) ☞11월
15일, 신교리의 마을회관을 빌어 복음중학교(후일 후배 이춘식 목사가 인수하여 대명중학교로 개칭)를 설립, 피폐한 농촌 2세들을 교육함. 3제
함태중과 계제 함태욱이 교회와 학교 일에 적극 협력함. ☞복음중학교교사들의 식사문제 등으로 인해서 가족의 거소를
충곡리교회에서 신교리교회로 옮김. ☞이신 목사는 부여 합송리로 이주하여 합송리그리스도의교회에 시무하며 광주에서 운영하던
신학교를 이곳에 옮겨와 김은석 목사, 함태영 목사 등과 함께 신학강좌를 하며 기독교환원운동을 전개함. 김확실 전도사, 정찬성 목사등 많은
환원신학도를 배출하였음. (*함태영 목사는 광주에서나 부여에서 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 운영재정 및 교무를 전담하다시피 함)
☞부여 합송리 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에서는 <로고스(λογοζ)>라는 환원운동신학잡지를 간행 전국 환원교회에 배포함.
◎
1953년 (39세 때) ☞서울 마포구 도화동의 주택을 기증하여 현 도원동그리스도의교회를 창립 개척하는데 도움을 줌.
☞3월 24일(음), 유림이면서도 환원운동과 복음전도에 물심양면 아낌없이 지원하시던 부친 송암 함봉표께서 서거하심.(묘소: 순천시 외서면 장산리
산12 선영) ☞6월 18일 0시를 기해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측이 모르게 반공포로를 석방하므로 논산포로수용소에서 미군의
총격을 받고 탈주한, 겁먹은 5명의 포로를 국가의 손이 미칠 때까지 신교리그리스도의교회에 머물게 하며 의식주를 제공
보호함. ☞7월 13일(음 6월4일), 복음전도의 동반자인 아내 정용옥(鄭龍玉) 여사가 급환으로 소천(32세 요절,
1921년∼1953년)되어 시련이 따름.(묘소: 논산시 부적면 신교리 3구 아개울방죽마을 뒷산 공동묘지) ☞종군을 하였던
관계로 인연이 있는 미8군과 교섭하여 서울로 들어가는 한강도강이 어려운 시기에 교역자들에게 도강이 쉽도록 알선 편의를
제공함. ☞경기도 광주군 분원리로 이주 숭실중학교 교장과 학교 교목을 역임함.
◎ 1955년 (41세 때)
☞서울성서신학교(현, 서울기독대학교)를 제1회 졸업.
◎ 1957년 (43세 때) ☞이리시로 주거를 옮김.
☞이리시에 교회개척장소를 물색하였으나 마땅한 곳이 없어, 주거지를 전주로 옮김. ☞전주 금암동에 주택 한 채를 손수
건축함. ☞전주 인후동 반공포로 정착촌 1세대 분 주택을 매입 이주함. ☞인후동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시무. (반공포로 정착촌 의무실을 운영하며.)
◎ 1958년 (45세 때) ☞전주 금암동의 주택을 매각하고, 완산군 용진면
소양리(현재 전주시편입)에 100여 평의 대형건물을 매입 용진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시무 ☞원광대학교에 다니는 장남
동진(군입대시 까지)과 함께 약종상(藥種商-제약회사에서 포장되어 출하된 완제품만 판매)경영.
◎ 1962년 (49세 때) ☞대전시
가오동에 손수 협소한 집을 짓고 주거를 옮김. 가정교회로 예배를 드림. ☞불럭공장을 운영, 손수 시멘트
불럭을 찍어 생산하는 중노동을 하며 시련을 겪음. ☞생활안정에 도움이 된다할지라도 교파주의는 배격하고.
오직 환원교회만을 선택 고집스레 고수하였음.
◎1963. 12 전주그리스도의 교회(전주시 경원동 3가 37번지 조주희 집사
설립) 제1대 함태영(唱泫 咸泰英) 목사 부임, 1964. 03 사임
◎ 1964년 (50세 때) ☞충북 부강그리스도의교회에서
시무. ☞충북 남일면 방서리그리스도의교회에서 시무함.
◎ 1974년 (60세 때) ☞논산
대명중학교 창립20주년기념일에 설립자에 대한 공로표창과 황금기념메달을 받음.
◎ 1975년 (61세 때)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장남 함동진의 집에서 동료 목회자인 이신, 구강서, 이종만, 조충연, 설하운, 함명덕, 임상규 목사, 박정훈, 백○○ 장로, 김경옥 부평보육원
원장 등과 형제자매 가족들이 모여 조출한 회갑연을 베품.
◎ 1980년 (66세 때) ☞노환으로 목회직을 은퇴함.
◎ 1983년 (69세 때) ☞대전시 가오동 자택에서 11월 28일 01시 30분 소천함. (묘소: 순천시 외서면 장산리 산12
선영)
◈ 인쇄물 등 수록내용 *「조선일보」인터넷 DB(인물정보 데이터베이스)수록
www.hidb.co.kr 또는 www.chosun.com 의 hiDB 인물정보 함태영(咸泰英). *「한국을 움직이는 인물들(WHO'S
WHO IN KOREA)」창현 함태영 목사 프로필, 가나다 順, "함태영"항. 中央日報創刊30週年記念 出刊. *「대한민국5천년사 제7권
한국인물사」창현 함태영 목사 프로필, 1990. 12. 30. 803쪽. *「대한민국성씨대보총람 제6권 인물총람」창현 함태영 목사 프로필,
1993. 12. 15. 3142쪽. *「강능양근함씨대동보 제3권」갑자보 32世 英柱 (咸泰英-唱泫) 1987년 2월, 강능양근함씨대종회,
제1권 272쪽, 제3권 671∼673쪽. * 인터넷「문학의즐거움」www.poet.or.kr/hdj 함동진의 수필 <나의 아버지
밀알로 썩다 -창현 함태영 목사>, 2000. . . 올림. * 인터넷「문학의즐거움」http://www.poet.or.kr/hdj
함동진의 수필 <한 알의 겨자씨앗이 복음의 큰 그늘을 이루다 -우리 가문의 기독교로의 개종 내력>, 2000. . . 올림.
* 인터넷「문학의즐거움」http://www.poet.or.kr/hdj 함동진의 詩 <사부곡-思父曲> 및
<사모화-思母花> 올림.
* 고 창현 함태영 목사의 子 함동진의 연락처 http://www.poet.or.kr/hdj 게시판
및 방명록 hamdongjin@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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