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公)만 있고 나(我-私)는 없다

함동진 아동문학가


(그리스도의교회 환원운동 75주년에)  공(公)만 있고 나(我-私)는 없다  -복음전도 자체가 역사다


   (한국그리스도의교회 환원운동 75주년에)


                 공(公)만 있고 나(我-私)는 없다 

                 -복음전도 자체가 역사다

                                                                                    함동진


날이 가면 갈수록 사람들은 공(公)보다는 사(私-나我)를 위해 목숨을 걸거나 전력투구한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남을 먼저 배려하고 공적인 일에 더 열심이하라는 교육과 교훈을 많이 받고 자랐다. 그 공적인 일에는 국가에 충성하는 일, 사회에 헌신하는 일, 남을 위하여 봉사하는 일 등이다.

  나의 가문 함씨(咸氏) 선조 중에서 나(我-私)를 없애고 공(公)만을 위하여 살다가 가신 세 분(함유일. 함순. 함태영)을 살펴보고자 한다. 

[사진설명: 1952년 5월 19일, 창현 함태영 목사의 자모 김월림(金月林)여사 회갑기념, 6·25 전쟁 중이라 너무나 조촐한 상을 받으심. 뒤에 십자가, 성경 찬송 책자, 태극기 등이 보인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태복음 16장 24절)

 

  그리스도의교회 환원운동으로서의 교회개척은 크게 번창한 것에만 기준을 두지 않는다. 가정교회 또는 작은 모임이 시작되면 교회의 개척이며 교회를 이루는 것이다.

 복음전파(전도) 그 자체가 교회를 이루며 역사이다. 할 수만 있다면 기록하고 간수하는 것은 더 좋은 것이지만 교회의 시작장소와 교회당과 간판이 없어졌다 하여 복음 전파도 함께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목회자(복음전도자)의 삶의 방식과 그의 처지(處地)한 환경에 따라 그 자취나 기록이 있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

  그리스도의교회는 복음을 받아드린 한사람한사람이 교회이며 개교회주의가 "성서로 돌아가자"는 환원운동의 주축이며 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신약성서시대)의 사도들이 세상을 떠난 후 로마 폭정의 갖은 핍박과 억압 속에서도, 성서에 기록된 일곱 교회 이외에도 복음은 전하여졌고 그 복음을 전한 전도자들과 교회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미기록의 교회들과 전도자들이 전한 복음은 무효한 것인가? 아니다.   2세기 속사도시대에서 새 제도권(교권.교파)으로 도달하기까지의 복음전도자들과 교회들이 활동한 기록들은 없다. 온갖 핍박 속에서 순교를 불사하며 정처없이 이동되고 쫓겨다니던 교회들이나 전도자들의 기록이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복음의 전파는 전세계를 누비며 오늘에 이르도록 한 원천이요 밑거름 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만약 기독교 탄압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현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추방당하였다면 그 곳에 전한 복음(교회)은 영원히 없어지는 것인가?  아니다.

  지금 중국이나 북한 그리고 아프칸(탈레반지역) 등지에서 교회당이나 그에 속한 목회자(복음전도자)가 없어도 지하에서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교회당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님)가 유지되고 있다.  이들로부터 훗날 역사를 따지며 기록이나 물증을 대라하면 가능한가?   복음전도와 교회를 그런 것의 물증으로 현장을 일일이 증명하라하면 이를 증명할 수 있겠는가?

  복음전파와 교회는 그런 것의 물증으로만 역사를 삼을 수 없는 것이다. 50-100여 년 전의 후미진 오지(교통 통신 인쇄물 언론매체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의 복음전도와 교회(에클레시아)의 역사를 내어놓으라 하면 이는 어불성설이다.  문화의 기반이 전무하다시피한 열악하고 피폐한 곳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면 얼마만큼의 역사적 기록물과 물증을 내어놓을 수 있겠는가?  기어이 내어놓으라고 요구한다면 이는 무리(無理)이다.    



        양경공  함유일 (良敬公 咸有一)


      강능함씨 6세손으로 휘는 유일(有一), 자(字)는 형천(亨天), 시호(諡號)는 양경공(良敬公), 공부상서와 순충좌명정난공신(純忠佐命靖難功臣)으로 "청고수절 이립문호(淸高守節 以立門戶 : 청렴하여 곤궁울 견디고 절개를 지키며 문호<가문>를 이르킴)"한 청백리일 뿐만 아니라, 교로도감(橋路都監)으로 있을 때에는 무당을 교외로 추방하고 음사(淫祠)를 불지르는 등 철저하게 미신타파에 힘썼던 분이다. 

 함유일은 조실부모하고 15세에 상경하여 재상 이준양(李俊陽)에게 의탁해 있던 중 1126년(인종 4) 이자겸(李資謙)의 난 때에 이부기관(吏部記官)이 되어 이준양을 도와 대궐을 지켰고, 1135년 묘청의 난 때 하급관리로 공을 세워 서경유수녹사(西京留守錄事)가 되었다.  추밀원사(樞密院使) 왕충(王?)의 천거로 선군기사(選軍記事)로서 내시(內侍)에 들어가 군대의 주사(廚事)를 맡았다.

  뒤에 교로도감 감찰어사(監察御使)·황주판관(黃州判官)·삭방도감창사(朔方道監倉使)를 지내고, 1170년(명종 즉위) 병부낭중(兵部郞中)이 되고, 상서좌승(尙書左承) 때에 양온령동정(良?令同正) 노약순(盧若純)이 도적 망이(亡伊)에게 반란 권고의 편지를 보낸 사건에 연루되어 내시의 적(籍)이 삭제되었다. 1179년(명종 9) 공부상서(工部尙書)로 치사(致仕)하였다.

  공직에 충실하며 몹시 가난해 일생을 베옷만을 입고 뚫어진 신발을 신고 질그릇을 쓰며 청빈하게 살았다.  벼슬을 하면서도 곤궁한 생활이 여전하자  아들들이 자라는데 어떻게 할 것이냐고 신세타령을 늘어놓은 부인을 향해 함유일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평생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았으며 근검하고 지조를 지킴으로서 가문의 이름을 지켰소. 자식들도 그저 정직하고  절약하며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스스로의 운명을 기다릴 것이니 어찌 빈곤을 걱정하겠소?"

  함유일이 주사(廚事)를 맡았을 때의 일로, 임금이 신하를 이끌고 장원정(長源亭)에서 활쏘기 대회를 열자 함유일이 과녁을 맞추어 상품(賞品)으로 금백(金帛)을 받았으나 이를 집에 가져가지 않고 모두 팔아 열악한 군주(軍廚-군대의 주방廚房) 집기(什器)를 마련하는데 쓰였다. 그리고 함유일은 "사후에 장사를 지낼 때에는 박장(薄葬)으로 하라"고 유언을 하였다. 참으로 함유일은 '공(公)은 있고 나(我-私)는 없는' 청백리였다.  그의 아들은 화·희·순( 和·曦·淳) 3형제를 두었다.  그러나 함유일이 지어 전해져 오는 시문(詩文)이 전혀 없다.  



        문익공 함순(文翼公 咸淳)


   함순(咸淳)은 양경공(良敬公) 함유일(咸有一)의 아들로 강능함씨(江陵咸氏) 7세 손이다.

   휘(諱)는 순(淳), 자(字)는 자진(子眞), 호는 시은(市隱), 시호(諡號)는 문익공(文翼公)이다.

   고려의 명문장 시인인 이인로(李仁老), 오세재(吳世才), 임춘(林春), 조통(趙通), 황보항(黃甫抗), 이담지(李湛之) 등 7인이 어울려 강좌칠현(江左七賢)을 조직하여 망년지교(忘年之交)로서 교우하며 시주(詩酒)를 즐기면서 뛰어난 재주로 시와 문장을 사랑한 인물이다. 관직으로는 외직(外職)으로 익령(翼領-양양 간성 고성 등의 옛지명) 현감을 지냈고, 내직(內職)으로는 상식직장동정(尙食直長同正)과 증직(贈職)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

    그러나 필자의 소견으로는 함순은 아버지인 함유일로부터 물려받은 청렴정신과 가난 때문에 그의 시문은 거의 전해져오지 않고 있다고 본다 . 의식주 모두가 형편없었기에 보관이 어디 용이하였겠으며  이로 인하여 전수되어 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에는 그와 관련된 글로, 같이 벗하던 임춘(林春)의 저서 <하서집 (西河集)>에 함순에 관한 글이 있기에 소개를 한다. 이글은 필자와 함께한 시인들의 모임인 [새벽동인]의 회원인 시조시인 만취 김유섭(晩翠 金有燮) 선생께서 번역한 것이다.

 

          <익령(翼嶺)에 부임하는 함순(咸淳)을 보내며> 

                                       글: 임춘(林春)  /  번역: 만취 김유섭(晩翠 金유섭)

    도덕은 可히 勉强(면강=힘써 노력함)하여서 얻을 수 있지만 재주에 있어서 그것을 면강(勉强)한다고 얻어지겠는가?

     이제 저(夫) 선비들이 우연히 지은 시문을 方寸(방촌=좁고 짧음)의 종이 위에 綴(철)하여서(써 늘어놓아)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올라간 자들이 대부분이어 마땅히 羽檄(우격=화급한 모병문)을 달려 보내야 할 奔走(분주=위급)한 처지임에도 繁劇(번극=다망함)하고 奔冗(분용=어지럽고 쓸데없음) 한 일을 두려움 없이 행하여 쉽사리(無우) 장군이 되려면 장군이 되고 관리가 되려면 관리가 되니 이는 모두 옳게 힘쓰고 노력하지 않고서 얻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 온 세상에서 그 류(比)를 볼 수 없는 예를 우리 恒陽 咸君에서 찾을 수 있으니 그는 거의 聖人에 가깝게 돈후하고 검소하며 성질이 질박하고 무거워 正道(정도)만을 걷는 것을 책임으로 삼고 孝敬(효경=효도와 경로)과 忠信(충신=과 신의)을 重히 하며 中文尙書(중문상서=책이름)에서 지식을 취하여 學辭(학사=학문과 언어)의 광채가 외모를 수식하니 그 업무에 영향함을 또 추측할 수 있을가보냐! 三刀之榮(삼도지영=관리들의 영진의 꿈)의 꿈이 실현되어 東발(동발=동쪽으로 떠나는 장도를 빔)의 제(祭)에 기호(畿湖)의 동지들이 모여 전별을 함에 咸君은 항상 독립(타에 어깨를 견줄만한 사람이 없음)한 위치였지만 한번 멀리 가게 되었음에 마음에 능히 비감이 없지 않아 말하기를 "내 멀리 떠나는 쓸쓸한 심정을 위로해 주고 나의 부임길의 괴? 恝遲?덜어 주니 고맙소. 나 다정한 여러 친구(吾子)의 존경의 대상이 못되어 이제 막 떠나려 하니 부끄럽소." 하기에 우리는 곧 술잔을 채워 잔을 들어 "지금 天子(임금)께서 君家가 대대로 淸白(맑고 깨끗함)이 이어져 옴을 아시지만 잠간 작은 군(小郡)에 내려(屈) 보내어 피곤해진 백성을 다스리게 하여 조정의 동고(東顧)의 우려(동쪽 왜놈들의 침략의 우려)를 없게 한 것이리니  곧 追鋒車<추봉차=병거兵車인데 차 덮게를 제거하고 포장을 씨워 고속(高速)임>와 질치疾置(빠른 말=馬)로 중앙으로 부르시는(징황徵黃) 조서(도의명령)를 볼 것이니 또 무엇에 권련(眷戀=마음에 두어 사모함)이 있으리까?  조정에서 듣게 되면 어찌 아녀태 (兒女態=어린 여자아이처럼 나약한 태도)를 취하리까? 고 위로했다.

    나 오래 동안 세상의 배척을 받아 여러 유생과 함께 대궐에 가서 항의 상소를 올리어 호소하지 못하고 君의 東편 지방에 돌아왔지만 이미 이 모딤은 예정 된 것임에 可히 한마디 없을 수 없어 여기 끌어 댕기어 삼회를 적고 동석한 사람 몇 사람도 붓을 들어 같이 글을 지어 편지 끝에 적어 장도壯途에 붙인다.   (西河集 券之五 序 五一쪽을 번역함)

                 (원문)     送咸淳赴翼嶺序

     道德可勉强而有矣至於才則其可勉强而得之耶今夫士綴偶屬之文書方寸之紙以取科第

     登朝廷者多矣如使之置羽檄奔走之地而無恐試之繁劇紛穴之事而無우(木+憂=자루우)

     爲吏而吏是皆不可勉强而有者擧今之世罕見其比吾得之於恒陽咸君其庶幾乎敦朴質重

     與直道爲任孝敬忠信資乎中文學辭彩飾乎外則其施於事業者又可量耶今則夢徵三刀東

     발(車+개닫는모양발=노제발)畿湖同志者合而餞焉咸君以常居獨立之下一旦遠去意不

     能無戚而曰慰我離曠之懷祛我行役之勞吾非吾子之望將誰望耶(?)乃崇酒于觴擧而諭之

     曰今天子以君家世淸白暫屈小郡以理疲民故朝정無東顧之憂將見其以追鋒疾置有詔徵

     黃矣又何眷戀庭聞效兒女態耶余久見斥於世不得與諸生詣闕抗疏叫于帝흔(門+召=문지

     기흔)以還君之東也旣預玆會不可無言於是引而序之在坐者凡若干人拔毫同賦紀于末簡

     以황(貝+兄=줄황)其行       (西河集 券之五 序 五一쪽)



        창현 함태영(唱泫 咸泰英) 목사 



  창현 함태영 목사는 生則福音 死則麥粒(생즉복음 사즉맥립 : 살아서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죽어서는 주님의 분부대로 한 알의 밀알로 썩는다. 마28:19∼20. 행1:8. 요12:24.)의 삶으로, 번화한 도시  보다는 주로 후미진 곳 농촌, 난민촌, 빈민촌을 찾아 복음을 전하고 교육사업을 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는 헌금을 받아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하고, 교육사업을 한 것이 아니라 늘 자기의 가진 것을 모두 털어 헌신하였다.

  그때에 농촌과 빈민촌에서 뿌린 복음의 밀알이 지금은 백 배, 천 배 결실을 하여 도시로도시로 향하여 모여들고 있다.

  도시의 교회들은 차고 넘치어 서로 경쟁을 하며 맘모스 교회당을 지으려 하고 부흥사를 동원하여 기성교인을 서로 차지하려고  안간힘 하고들 있다.

  그러므로 어렵게어렵게 복음을 전하여 불신자를 새 신자로 만드는 데는 힘을 덜 쓰려 하는 모습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오늘날 모든 도시의 교회들은 농촌을 돌아볼 때다 .   농촌의 교회들은 얼마나 험난한 가시밭길을 걷고 있는가. 

  도시의 교회는 호화롭다 못해 은혜스럽지 못하고 재물을 가진 자가 헌금으로 천국을 사 놓은 듯 빗나가게 가르쳐지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가장 도덕적이어야 하고, 윤리적이어야 하며 질서가 정연하여야 할 신앙인들이 행동은 멋대로 하고도 교회에 나아가 헌금이나 많이 하고 기도만 하면 천국이 자기의 것이 되는 것처럼 가르쳐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뜻(희생. 봉사)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창현 함태영 목사의 일생을 살펴보면 복음을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전하는 것으로 일관해 왔다.

  창현 함태영 목사 신앙생활의 생애가 신학을 입문하는 신학도나 목회를 지망하는 전도자들에게 지침과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목회자의 길이 높임받는 명예와 영화를 누리기 위한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신학과 목회를 지상에서 누리는 영화(榮華)나 명예욕으로 시작한다면 썩어지는 밀알이 될 수 없고 참된 열매를 결실치 못할 것이다.

  복음 전도자는 자기를 낮추고 농촌의 후미진 곳, 빈민촌, 난민촌과 같은 곳에서 고난을 겪는 자들에게 더욱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로 인해 핍박을 받는 자(마5:1∼12)의 편이시다.

  그리고 사랑은 어떤 것이고 어떻게 실천하는 것인지 고린도전서 13장은 말씀하시고 계신다.

  복음은 가난한 자, 고통받는 자, 병든 자에게 찾아가야 할 것이고, 거기에 더욱 필요한 것이다.

  부(富)는 그러한 곳에 가져가 나누어주어야 할 목적 이외에는 신앙과 교회의 목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창현 함태영(唱泫 咸泰英) 목사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의 사명은 물욕과 탐함이 없이 한국그리스도의교회와 기독교환원운동사에 있어서 순교자적 사도의 정신으로 남이 모르게 그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일생을 주님께 헌신하였다.

  일제로부터 8.15광복을 맞이하고, 6.25전쟁 북한인민군의 남침전쟁으로 인한 암흑시기에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전쟁을 겪고 폐허화된 국토 위에서 묻 사람들이 지나치게 생에 탐하여 서로를 미워하고 보복하며 속이고 저주하던 그 시기에 이 사회에서는 윤리와 도덕과 종교가 땅에 떨어져 사랑이 짓밟히고 있었다.

   창현 함태영 목사는 이때에 십자가를 메고 복음을 전하며 밀알이 되려고(生則福音 死則麥粒) 기도하고 찬송하며 헌신하였다.

   국민들은 무지하고 가난이 찌든 시기에 불신자들은 교회를 향한 핍박이 극심하였다. 교회를 연애당이라 부르고, 교회에 다니는 청소년들을 연애쟁이라 불러 교회를 비윤리적 부도덕한 장소인 것처럼 지칭하며 핍박하였다. 그리고 교회에 다니는 집안은 모두 망한다고 비방하며 핍박을 더욱 가하였다.

   예배시간에 신도들의 신발을 감추고 유리창에 돌을 던지며 오물을 끼얹기도 하였다.  혹시 신도들 중에서 병이 들거나 죽게 되면 예수를 믿어 망한 것이라고 비방을 하였다.

   전등이 없는 석유초롱불 밑에서, 겨울이면 난방이 없는 냉방에서 신도들과 함께 기도하며 예배를 드렸다. 하루에도 수 십리 산을 넘고 물을 건너 험한 길을 밤낮으로 걷고 뛰며 전도하고 심방을 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때로는 불량배들의 핍박과 위협을 받으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열심히 뛰었다. 십자가를 메고 주님께서 가신 그 고난의 길을 따라.....

   이때에 창현 함태영 목사는 복음으로 교육으로 그 해결방안을 찾으려고 동분서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면서 생의 진리 곧 복음을 전파하였다.  때문에 때로는 자녀들 인척들 친구들 친지들로부터 너무나 지나치지 않느냐는 비난도 수 없이 받았다. 이때마다 창현 함태영 목사는 감사하는 기도와 찬송으로 더욱 힘을 내어 사명을 감당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서 생존시 좌우명으로 삼았던 "살아서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죽어서는 주님의 분부대로 한 알의 밀알로 썩는다(生則福音 死則麥粒)" 를 실천함과 아울러 그리스도의 교훈을 따랐다.

   교회를 지키며 교육과 복음을 전하는 일을 자신의 이익과 명예와는 아무러한 관계없이 오직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일념으로 헌신을 하였다.

   봉사와 헌신의 일생, 뛰며 달리는 활동의 생활,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생이었다. 

   창현 함태영 목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운명하였을 때에는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란 말 그대로였다.  손수 찍어 만든 시멘트 블록 몇 장으로 그것도 남의 땅 위에 가까스로 손수 쌓아 올려지어 비가 새는 움막같은 거처였다. 지니고 있던 재산이라고는 손때 묻은 낡은 찬송가와 셩경책 그리고 몇 권의 신학서적 뿐이었다. 그리고 보람으로 간직했던 복음중학교 창립20주년 기념일에 설립자공로로 받은 황금메달도 치료비에 보태기 위하여 이미 팔아 없어진 터였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참으로 육신을 위한 모든 것을,  한 알의 밀알이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한 밑거름으로 주님께 다 헌신하였다.

   창현 함태영 목사는  암흑시기  복음(福音)으로 교육(敎育)으로 그 해결방안을 찾으려고 동분서주(東奔西走) 밤낮을 뛰면서 生의 모든 것을 바쳐 진리(眞理)를 전파하면서 목회와 교육자 생활을 도시보다는 주로 교통 통신이 척박한 벽촌 또는 빈민촌락을 전전하며  살아왔기에, 잦은 이사와 허름한 처소 찌든 가난으로 인하여 그가 남긴 글이나 언론매체를 통한 기사나 유고(遺稿)가 전혀 없다는 것이 한(恨)스러울 정도다.

 함태영 목사는 선친의 유산 몫이나 그에게로 수입되는 모든 재물은 오직 목회와 교육에만 투자하였을 뿐, 가사(家事)의 장래나 가족을 위하여 재산을 형성한다거나 저축하는 일은 없었다. 이로서 가족들의 생활은 몹시 궁핍하였고 내핍된 생활을 강요받은 셈이 된다. 그러므로 자녀들과 인척들로부터 너무하지 않느냐는 비난도 감수하여야 했다.

    이제 창현 함태영 목사의 뜻이 이루어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한국의 기독교환원동사와 더불어 사랑의 실천이 메마르지 않을 것이며 갈보리 산상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더욱 빛날 것이다.

                

                       어리석은 놈, 바보

                  예수쟁이, 멍청이 놀림을 받고

                  신사참배 거부하다가

                  쇠고랑 차고 감옥에 누웠어도

                  야곱의 돌베개 침방으로 여기고


                  돌은 놈, 미치광이

                  예수쟁이, 정신병자 비아냥 받고

                  공산주의 거부하다

                  친미파 반동분자로 몰려

                  내무서 감방에 앉았어도

                  골방의 기도실로 여기고

 

                  알거지같은 놈, 비렁뱅이

                  예수쟁이, 거러지 손가락질 받고

                  배고파 기진하고

                  누더기 걸치고 거친 침실이었어도

                  볶음을 전할 수 있다면

                  어디든 천국으로 여기고

 

                  자나깨나 볶음전도와 교육, 환원운동으로

                  일생을 살아가신 나의 아버지

                  창현 함태영 목사

                  남기신 유산은 오직

                  낡은 성경책과 찬송가 단 한 벌

                  그리고 교훈


                 "生則福音(생즉복음)

                  死則麥粒(사즉맥립)"

                  환원운동이여* 빛나라

                  떨구어진 밀알

                  천배나 만배나 더 결실하소서!

                             * (함동진의 시 <사부곡(思父曲) -나의 아버지 창현 함태영 목사 >전문)


       *生則福音 死則麥粒 : "살아서는 주님의 분부대로 복음을 전하고, 죽어서는 한 알의 밀알로 썩는다."

       *환원운동(還元運動) : "성서적(신약성서 사도행전 시대) 기독교초대교회(基督敎初代敎會)로 돌아가자"는 기독교운동.


  끝으로 기억하여 둘 것은 창현 함태영 목사는 어려움 속에서도 초대교회(初代敎會)로의 성서적 그리스도의교회로 돌아가자는 환원운동(還元運動)에 일관하여 목회를 하여왔고, 이를 회고하여 보면 한국환원운동사(韓國還元運動史>의 한 몫이 그의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2007. 08. 23

깊은산골(長山)

함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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