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현 함태영 목사 전기

함동진 아동문학가


(그리스도의교회 환원운동 75주년) 창현 함태영 목사 전기

                            목      차

                서문

                     창현 함태영목사 략전(전기) 서문

                 본문내용 (구분 - 年間別)  

                         유림가문(儒林家門)에서 (1914~1931) 
                         청운의 꿈을 품고 (1932~1936) 
                         기독교로의 개종과 항일(抗日) (1937~1948)
                         그리스도의교회로 환원과 6․25북괴군남침전쟁 (1950~1952) 
                         환원운동(還元運動) (1953~)
                          -슬픔은 시험이 되나 / 선친 함봉표 지사와 사목 정용옥 여사 소천 
                         생즉복음 사즉맥립-生則福音 死則麥粒 ……한 알의 밀알로 썩다(1962~1983)

                부록

                        그리스도의교회 환원운동의 지원자 송암 함봉표 지사  
                        함태중(咸泰仲 -그리스도의교회 환원운동 숨은 후원자)
                        [환원운동] 창현 함태영목사 략전(전기-2) / 함동진
                        (함태영-2)


                  창현 함태영목사 략전(전기)
                  唱泫 咸泰英牧師 略傳(傳記)


 서문

                     [환원운동] 창현 함태영목사 략전(전기-1) / 함동진
                     (함태영-1)

                  창현 함태영목사 략전(전기) 서문
                  唱泫 咸泰英牧師 略傳(傳記) 序文

 

창현 함태영 목사

   창현 함태영 목사는 生則福音 死則麥粒(생즉복음 사즉맥립 : 살아서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죽어서는 주님의 분부대로 한 알의 밀알로 썩는다. 마28:19~20. 행1:8. 요12:24.)의 삶으로, 번화한 도시 보다는 주로 후미진 곳 농촌, 난민촌, 빈민촌을 찾아 복음을 전하고 교육사업을 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는 헌금을 받아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하고, 교육사업을 한 것이 아니라 늘 자기의 가진 것을 모두 털어 헌신하였다.

그때에 농촌과 빈민촌에서 뿌린 복음의 밀알이 지금은 백 배, 천 배 결실을 하여 도시로도시로 향하여 모여들고 있다.

도시의 교회들은 차고 넘치어 서로 경쟁을 하며 맘모스 교회당을 지으려 하고 부흥사를 동원하여 기성교인을 서로 차지하려고 안간힘 하고들 있다.

   그러므로 어렵게어렵게 복음을 전하여 불신자를 새 신자로 만드는데는 힘을 덜 쓰려한다.

   오늘날 모든 도시의 교회들은 농촌을 돌아볼 때다 . 농촌의 교회들은 얼마나 험난한 가시밭길을 걷고 는가.

   도시의 교회는 호화롭다 못해 은혜스럽지 못하고 재물을 가진 자가 헌금으로 천국을 사 놓은 듯 빗나가게 가르쳐지고 있다.

   그리고 가장 도덕적이어야 하고, 윤리적이어야 하며 질서가 정연하여야 할 신앙인들이 행동은 멋대로 하고도 교회에 나아가 헌금이나 많이 하고 기도만 하면 천국이 자기의 것이 되는 것처럼 가르쳐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뜻(희생. 봉사)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창현 함태영 목사의 약전(略傳-傳記)을 통하여 보면 복음을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전하는 것으로 일관해 왔다.

   창현 함태영 목사의 전기가 신학을 입문하는 신학도나 목회를 지망하는 전도자들에게 지침과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신학과 목회를 지상에서 누리는 화(榮華)나 명예욕으로 시작한다면 썩어지는 밀알이 될 수 없고 참된 열매를 결실치 못할 것이다.

   복음 전도자는 자기를 낮추고 농촌의 후미진 곳, 빈민촌, 난민촌과 같은 곳에서 고난을 겪는 자들에게 더욱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로 인해 핍박을 받는 자(마5:1~12)의 편이시다.

   그리고 사랑은 어떤 것이고 어떻게 실천하는 것인지 고린도전서 13장은 말씀하시고 계신다.

   복음은 가난한 자, 고통받는 자, 병든 자에게 찾아가야 할 것이고, 거기에 더욱 필요한 것이다.

   부(富)는 그러한 곳에 가져가 나누어주어야 할 목적 이외에는 신앙과 교회의 목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끝으로 기억하여 둘 것은 창현 함태영 목사는 어려움 속에서도 초대교회(初代敎會)로의 성서적 그리스도의교회로 돌아가자는 환원운동(還元運動)에 일관하여 목회를 하여왔고, 이를 회고하여 보면 한국환원운동사(韓國還元運動史>의 한 편을 보는 듯 하다.


(칼럼)

   날이 가면 갈수록 사람들은 공(公)보다는 사(私-나我)를 위해 목숨을 걸거나 전력투구한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남을 먼저 배려하고 공적인 일에 더 열심이하라는 교육과 교훈을 많이 받고 자랐다. 그 공적인 일에는 국가에 충성하는 일, 사회에 헌신하는 일, 남을 위하여 봉사하는 일 등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태복음 16장 24절)

   그리스도의교회 환원운동으로서의 교회개척은 크게 번창한 것에만 기준을 두지 않는다. 가정교회 또는 작은 모임이 시작되면 교회의 개척이며 교회를 이루는 것이다.

   복음전파(전도) 그 자체가 교회를 이루며 역사이다. 할 수만 있다면 기록하고 간수하는 것은 더 좋은 것이지만 교회의 시작장소와 교회당과 간판이 없어졌다 하여 복음 전파도 함께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목회자(복음전도자)의 삶의 방식과 그의 처지(處地)한 환경에 따라 그 자취나 기록이 있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

   그리스도의교회는 복음을 받아드린 한사람한사람이 교회이며 개교회주의가 "성서로 돌아가자"는 환원운동의 주축이며 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신약성서시대)의 사도들이 세상을 떠난 후 로마 폭정의 갖은 핍박과 억압 속에서도, 성서에 기록된 일곱 교회 이외에도 복음은 전하여졌고 그 복음을 전한 전도자들과 교회(교회당=예배당건물)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미기록의 교회들과 전도자들이 전한 복음은 무효한 것인가? 아니다. 2세기 속사도시대에서 새 제도권(교권.교파)으로 도달하기까지의 복음전도자들과 교회들이 활동한 기록들은 없다. 온갖 핍박 속에서 순교를 불사하며 정처없이 이동되고 쫓겨다니던 교회들이나 전도자들의 기록이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복음의 전파는 전세계를 누비며 오늘에 이르도록 한 원천이요 밑거름 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만약 기독교 탄압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현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체포, 구금, 폭행, 고문, 순교당하거나 추방당하였다면 그 곳에 전한 복음(교회)은 영원히 없어지는 것인가? 아니다.

   지금 중국이나 북한 그리고 아프칸(탈레반지역 등) 등지에서 교회당이나 그에 속한 목회자(복음전도자)가 없어도 지하에서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교회당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님)가 유지되고 있다. 이들로부터 훗날 역사를 따지며 기록이나 물증을 대라하면 가능한가? 복음전도와 교회를 그런 것의 물증으로 현장을 일일이 증명하라하면 이를 증명할 수 있겠는가?

   복음전파와 교회는 그런 것의 물증으로만 역사를 삼을 수 없는 것이다.  50-100여 년 전의 후미진 오지(교통 통신 인쇄물 언론매체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의 복음전도와 교회(에클레시아)의 역사를 내어놓으라 하면 이는 어불성설이다. 문화의 기반이 전무하다시피한 열악하고 피폐한 곳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면 얼마만큼의 역사적 기록물과 물증을 내어놓을 수 있겠는가? 기어이 내어놓으라고 요구한다면 이는 무리(無理)이다.

   문명과 물질과 문화가 미개하거나 외부와의 소통도 원활치 않는 열악한 지역에서 순교적 사명으로 복음전파와 전도에 온 정성을 다 쏟아 부었어도 그에 관한 기록이나 유물이 없으면 그가 전한 복음 전도와 환원운동이 인정되지 않는 업적이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당시의 교회당이 남아 있고, 당시에 기록된 활동기록이 있어야만 하고, 그 밖에 당시의 자료와 유물이 현존하여야만 하고, 당시에 목격한 인물들이 증언하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를 들어 오늘날의 어떤 교회는 자체교회에서 전도한 신자는 없다시피하고, 타교회 타전도자의 전도에 의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분, 또는 그 후손들이 이주하여 와 그 교회의 신도가 된 경우가 있다. 이렇게 이주하여 온 성도들 중에 섬기던 前교회는 없어지고 그때의 복음전도자(목회자)도 세상을 뜨고 없다. 그렇다면 이주하여오기 전의 교회(교회당)와 그 교회 복음전도자(목회자)가 전파한 복음은 무효한 것인가? 무효하다면 이주하여온 이 신도들 또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여야 하지 않겠는가? 필자는 참으로 부끄러운 우문(愚問)을 남기게 되었다.

   복음 전도에는 명예나, 자랑이나, 자기의 이익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복음그리고 십자가만이 우선할 뿐이다.

   복음전도의 진정한 역사는 주님의 나라인 천국의 생명록에 다 기록되어 있다. 
*[함동진의  칼럼 <공(公)만 있고 나(我-私)는 없다 -복음전도 자체가 역사다 > 全文]    
 

    <한국그리스도의교회 환원운동 : "성서적 초대교회로 돌아가자!(基督敎 初代敎會로의 還元運動)">

                      19991년 6월 11일 (음력 4월 30일)
                       -창현 함태영 목사 탄생 77주년-
                                  함동진 삼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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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 부

             창현 함태영목사의 선조들

   창현 함태영목사의 휘(諱)는 영주(英柱)이며, 초휘(初諱)는 태영(泰英)이고, 호는 창현(唱泫)이다.

   *(江陵咸氏 33世孫임 : 강능 .양근咸씨 대동보(갑자보) 제3권 671쪽. 1987. 2월 강능.양근 함씨 대동보편찬회 간행에 수록)

    창현 함태영 목사의 선조(先祖)는 아래와 같다.

시조 :

   휘는 규(規), 시호는 양후공(襄厚公), 고려의 개국공신이다.

6세조 :

   휘는 유일(有一), 자(字)는 형천(亨天), 시호(諡號)는 양경공(良敬公), 공부상서와 순충좌명정난공신(純忠佐命靖難功臣)으로 "淸苦守節 以立門戶(청고수절 이립문호 : 청련하여 곤궁울 견디고 절개를 지키며 문호<가문>를 이르킴)"한 청백리일 뿐만 아니라, 사당을 불사르고 무당들을 교외로 내쫓으며 철저하게 미신을 타파하신 분이다.

7세조 :

   휘는 순(淳), 자는 자진(子眞), 호는 시은(市隱), 시호는 문익공(文翼公), 증직(贈職) 예부상서를 지냈다.

당대의 명시인 이인로(李仁老), 오세재(吳世才), 임춘(林椿), 조통(趙通), 황보항(黃甫抗), 이담지(李湛之) 등 7인이 어울려 강좌칠현(江左七賢 또는 竹林七賢)을 조직하여 시주(詩酒)에 열심하며 뛰어난 재주로 시와 문장을 즐기셨던 분이다.

13세조 :

   휘는 승경(承慶), 자는 선여(善餘), 청백리로서 의정부 영의정 집현전 대제학(議政府 領議政 集賢殿 大提學)을 지내신 분이다.

14세조 :

   휘는 부림(傅霖), 자는 윤물(潤物), 호는 난계(蘭溪), 시호는 정평공(定平公), 이조판서(이조판서), 8도도백(八道道伯),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을 추증 받으신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포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포은의 행장기를 지었고, 만경두곡삼선생서원(萬頃杜谷三先生書院 : 杜谷書院)에 배향됬다.

15세조 :

   휘는 우치(遇治), 자는 문명(文命), 호는 송담(松潭), 시호는 평양(平襄), 또는 문희공(文僖公), 7도도백(七道道伯),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내고 동편군(東平君)이 되신 분이다.

16세조 :

   휘는 영훈(永勳), 자는 성도(聖道), 함경도감사, 공조판서, 호조판서, 의정부좌찬성정헌대부를 지냈다.

17세조 :

   휘는 이정(以正), 자는 원식(元植), 음충훈도사를 지내신 분이다.

22세조 :

  휘는 덕립(德立), 호는 수정(水亭), 무과주부(武科主簿), 증 병조참판(贈兵曹參判), 임진란순절의사선무종훈(壬辰亂殉節義士宣 武從勳)으로 곧, 의병을 모집 이끌고 도원수 권율(權慄) 장군을 따라 행주전투에서 싸우다 전사하여 행주대첩의 공훈을 세운 임진란순절의사이시다.

  # 수정공의 임람시 의병참전을 위한 <通文>,<擧義文>과 詩文이 전해져 오고 있다. 함동진편저<부림 정평공后 강능함씨장산리파 선조기록>과     함동진 홈 http://hamdongjin.kll.co.kr/   함동진 카페 http://blog.daum.net/hamdongjin/   창현 함태영 목사 카페  http://cafe.naver.com/hamdongjin.cafe/  상에서도 볼 수 있다.

30세조 :

   휘는 병후(炳후), 자는 선욱(善郁), 또는 자윤(字潤), 호는 죽포(竹圃), 창현 함태영 목사의 증조부이시다. 참봉(參奉), 생원(生員), 남부도사(南部都事)였으며 당대에 깊은 학문으로 문장에 특출하였으며 문집(文集)이 있고, 효성 도한 지극한 분이시다.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의 문인으로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과 교분을 갖고,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선생이 배향된 필암 서원(筆岩書院)의 춘추대제(春秋大祭)를 집례한 유림이다.

 # 죽포공의 詩文이 전해져 오고 있다. 함동진편저<부림 정평공后 강능함씨장산리파 선조기록>과    함동진 홈 http://hamdongjin.kll.co.kr/   함동진 카페 http://blog.daum.net/hamdongjin/   창현 함태영 목사 카페  http://cafe.naver.com/hamdongjin.cafe/  상에서도 볼 수 있다.

31세조 :

   휘는 장기(莊基), 자는 기호(基昊), 호는 명사(明沙), 창현 함태영 목사의 조부이시다.

의관(議官)을 지냈고, 문장에도 뛰어나 문집이 있다. 효성 또한 지극하여, 손가락을 두 차례나 물어뜯어 그 피를 위독한 부친의 목에 넘겨 환생시킨 일이 있어 효행상을 받기도 했다.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 선생과 교분을 갖고 하서 김인후 선생이 배향된 장성의 필암서원 춘추대제를 집례한 유림이다.

# 명사공의 詩文이 전해져 오고 있다. 함동진편저<부림 정평공后 강능함씨장산리파 선조기록>과   함동진 홈 http://hamdongjin.kll.co.kr/   함동진 카페 http://blog.daum.net/hamdongjin/   창현 함태영 목사 카페  http://cafe.naver.com/hamdongjin.cafe/  상에서도 볼 수 있다.

32세조 :

   휘는 종종(鍾宗) 또는 종현(鍾鉉), 자는 봉표(鳳表), 호는 송암(松庵), 창현 함태영 목사의 선친이시다.

유교를 근본으로 삼았으며 구한말(舊韓末)의 의병으로서 좌우명을 "生則義士 死則義鬼(생즉의사 사즉의귀: 살아서는 의롭게 싸우는 투사(의병)요. 죽어서도 의로운 귀신이 되어 싸운다)"로 삼고 왜병(倭兵)들과 목숨을 걸고 싸웠고 포로가 되어 고문을 당하고 목포형무소에 3개월 수형(受刑) 했다.

   교육, 농민계몽운동, 개척운동 등으로 자력갱생을 부르짖으며 일생을 보냈고, 조상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였던 분이다.

송암공은 조부 죽포공과 부친 명사공에 이어 노사 기정진 선생의 학문을 따랐고, 송사 기우만 선생의 문인이 되었다. 그리고 하서 김인후 선생이 배향된 장성 필암서원의 춘추대제를 맡아 집레한 정통 유림이었다.

   그러나 송암 함봉표공은 유림이면서도 장자인 창현 함태영 목사의 목회활동과 기독교복음전파 환원운동에 끊임없는 재원조달로 크게 이바지하였다. 

   # 송암 함봉표의 詩文이 전해져 오고 있다 . 함동진편저<부림 정평공后 강능함씨장산리파 선조기록>   함동진 홈 http://hamdongjin.kll.co.kr/   함동진 카페 http://blog.daum.net/hamdongjin/   창현 함태영 목사 카페  http://cafe.naver.com/hamdongjin.cafe/  상에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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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2 부

                    창현 함태영목사 략전(전기) 
                 唱泫 咸泰英牧師 略傳(傳記)


(수필)

   한국그리스도의교회 환원운동사박물관이 개관되면 이것만은 꼭 그곳에 전시되기를 염원하며 이 글을 쓴다.

   한국그리스도의교회의 환원운동 초기의 목회자들은 예배처소, 먹는 것, 입는 것, 잠자리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고난 받는 생활이었다. 세(勢)가 있는 교파도 아니요 조직이 있어 후원이라도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직 믿음 하나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환원운동의 기치(旗幟)를 반겨 들고 스스로 뛰어든 가시밭길 고난의 길이었다. 오늘날의 환원운동의 그리스도의교회와 교인들이 이를 들여다보고 과거를 돌이켜 보고 신앙의 거름으로 삼는 계기가 되기를 염원하여 본다.

   위에서 지적한 '이것만'은 극히 일부로 수집된 자료이지만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당시의 목회자의 상황이다.

   이는 1960년대 - 1970년 초에 기록된 창현 함태영(唱泫 咸泰英 1914.5.24<음력4.30일>-1983.11.28) 목사의 <요약설교원고>들이다. 그 이전의 자료들은 없어졌기에 더욱 궁금하다.

   매장마다 모두 종이 지질과 두께가 다르며 규격도 다르다. 거의가 휴지로 버려야 마땅할 종이조각들을 사용하여 작성한 것이다. 경리장부이면, 요금고지서이면, 영수증이면, 선전물이면, 카렌다이면, 받은 전보지이면, 누가 낙서해 놓은 종이이면, 결혼청첩장(아들 함동진 결혼)이면 등 일일이 지질과 형태와 모양을 이 글에 표현하여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가지런하게 재단한 종이나 수첩, 노트 등을 사용치 못하여 비참할 정도의 휴지조각 같은 여러 종류의 모양새들이다. 이런 종이 종이조각들 위에 <요약설교원고>를 만들었음을 보면 그 목회자의 생활이 궁핍하면서도 얼마나 알뜰하였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이런 형편과 상황으로서는 가족의 의식주문제와 자녀들의 교육은 어떠하였겠는가? 독자들께서 미루어 상상하기를 바랄뿐이다.

   창현 함태영 목사는 젊은 시절 한때이기는 하지만 토목건축기술자로서 화폐가치의 단위가 높은(일제시대) 때에 금전을 부대에 담아가지고 다닐 정도로 수입이 좋은 넉넉한 생활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인인 아내 정용옥 여사와 결혼한 후 기독교로 개종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후로는 세상의 부나 명예를 분토(糞土)만도 못하게 여겼고, 초기의 장로교파의 목회와 신학공부를 접고, 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로(서울성서신학교-<현서울기독대학교>제1회) 옮겨 졸업을 하였고 오직 그리스도의교회 환원동에만 생의 전부를 걸었다.

   이제는 함태영 목사의 <요약설교원고>들이 만지면 부스러져 버리는 것들도 있고, 색이 바래고 잉크가 번져 탈색되는 것들도 있다. 이들은 충분히 박물관에 소장될 가치가 있고, 후세들이 거기에서 교훈을 받고, 교육의 장이 될 수가 있다고 생각을 한다.

   그 뿐인가. 함태영 목사가 사용하던 성경책을 살펴보면 성경책 갈피마다 깨알 같은 글씨로 요약설교 내용이나 참고사항들이 빼곡히 기록되어 있어 진기하게까지 느껴진다. 이 또한 박물관에 전시되어야할 감이다.

   잦은 이사와 가난으로 유품하나 남김이 없는 형편이다. 함태영 목사의 유일한 유품인 <요약설교원고>와 <성경책> 그리고 <찬송가책>은 나에게는 보물이요, 어느 것에 비길 바 없는 유산이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물려받은 것이 없다. 가난과 맨주먹뿐이었다.

   가난하였던 것이 무슨 자랑거리가 될 리가 없지만 이 가난은 한국그리스도의교회의 환원운동("성서로 돌아가자!" / "초대교회로 돌아가자!")으로 인함이었기에 나에게는 소중한 것이며 값진 것이 된다. 창현 함태영 목사 그분은 세상적으로 볼 때에는 이름도 빛도 없이 가셨지만 <요약설교원고>와 <성경책> 그리고 <찬송가책>은 꼭 환운동사박물관에 수장 전시되기를 우리구주 예수그리스도께 간구하는 바이다.

   그리고 빛도 이름도 없이 환원운동을 하다가 먼저가신 선구자 목회자들이 오늘날 그리스도의교회의 주춧돌이 되어 떠 밭치고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함동진의 수필<함태영 목사의 요약 육필설교문을 보면서(2) 전문> 

1914년 :

   5월 24일(음4월30일)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와룡리(全羅南道 長城郡 黃龍面 臥龍里) 3번지에서 부친 송암 함봉표(松庵 咸鳳表)와 모친 김월림(金月林) 사이에서 장자로 출생하다.

1915년 :

   (1세때) 전남 장성군 동화면 남산리(東化面 南山里)로 이주하여 성장하다.

이후 5세가 되기까지 참봉이며 면장인 외조부(김평숙金平淑) 댁에서 교육받으며 유아기를 보냈으며, 영특하여 한글을 하루만에 깨우쳤다.

1919년 :

   (5세때) 나라안에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선친 송암 함봉표께서 설립한 사립학교(장성역전에 위치하였음)에서 선친과 교사 김종운(金鍾云)으로 부터 초등 학문을 닦았다.

1923년 :

   (9세때) 전라남도 구레군 봉서리로 이주 선친께서 농토를 개간, 농업을 경영하였으나 7년 간의 천재(天災)의 가뭄으로 극심한 궁핍을 겪고 일제의 감시를 받았다.

1929년 :

   (15세때) 구례지방의 극심한 가문과 흉년으로 인한 생활고와 더불어 끈질긴 일제의 감시를 받음으로 인하여 선친 송암 함봉표는 전라남도 숭천군(현재의 순천시) 외서면 장산리 12번지에 기반을 조성키 위해 이주하고, 전답을 개간, 자력갱생의지로 개척하며 청소년 아동을 위한 사설 학습장을 운영하였다. 일제천하에서도 민족정기를 불어넣기 위함이었다.

1931년 :

   (17세때) 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32년 :

   (18세때) 중학과정을 닦기 위하여 단신으로 부산 타지에 나아가 고학으로 면학의 길에 들어섰다. 이때에 만난을 극복하면서 굳은 의지로 부산공고를 수학하였으며 추운 겨울에는 동상으로 손톱이 빠지는 역경과 고초를 겪으며, 토목건축의 공사장에서 일을 하고 기술을 배우며 면학을 하였다.

   이로서 습득한 미장술, 조적술, 조각술 등 기타 건축기술 분야에 능통하게 되었다.

   이때에 일본에서 공전(工專)을 수료한 서(徐 00)씨와 친교를 맺고 부산, 벌교, 외서, 광주, 서울, 평양, 선천, 신의주, 만주 등지에서 학교와 은행 등의 건축물 토목공사를 비롯 당시 최첨단의 조각건축물들을 축조하였다.

1935년 :

   (21세때) 만주의 봉천, 태래, 지하자루 및 소련(지금의 러시아)국경지대인 마주리에서 2년을 기거하였다.

일제천하에서 일본천황을 위한 강제징집과 지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1936년 :

   (22세때) 전라남도 광주를 잠시 경유, 토목건축 공사장의 작업책임조장으로 활동을 할 때에 전남 담양에서 담양선 철도부설당시 토목공사 현장에는 한국인조와 일본인조가 같이 공사에 투입되었는데 항상 일본인들이 우월한 것처럼 한국인들을 멸시하고 있어 이에 격분 일본조의 조장과 격투를 하게 되었는데 일본인 조장이 칼을 빼어들자(당시 일본인은 칼을 소지할 수 있었고 한국인은 소지불가 하도록 일제가 법으로 정하였다) 다 도망가고 한국인 조장 창현 함태영이 단독으로 대항하다가 일본조의 조장이 휘두른 칼을 맞자 굉이를 들어 방어하는 중 그 일본조장을 살해케 되었다.

   이와 같이 한국인을 학대하는 일본인을 좌시할 수 없어(선친께서 의병참전시 좌우명으로 삼으신"生則義士 死則義鬼 : 살아서는 의로운 투사요 죽어서도 의로운 귀신이 되어 싸운다"는 말씀이 생각나 젊은 피를 끓게 하였다.) 담양사건을 일으킴으로서 일본 경찰에 의해 고소되어 재판결과 정당방위로 판결을 받았으나 일인들이 복수를 노림으로 평안북도 신의주로 피신을 하였다.

이때 일본인 조장과의 격투 중에 그가 휘두른 칼에 부상을 입은 턱의 상처 흉터가 평생 가시지 않고 남아있게 되었다. 담양의 사건은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신의주 압록강 철교의 철로를 끊기 위하여 徐씨 친구와 함께 잠입하였다가 일본군경비병에게 발각되어(장비는 수하 즉시 강물 속에 던져버림) 총격과 추격을 받아 검문 당하여 고문을 받고, 압록강에 놀러 나왔다고 계속 주장하여 무사히 풀려 나와 철로절단 계획은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그 후에도 신의주와 만주사이의 압록강을 넘나들며 친구와 함께 독립운동을 꾀하였다.

   일화로서 담양사건이 있었던 시기에는 보성군 벌교읍 등지에서 토목건축 기술이 뛰어나 많은 활동을 하였고, 전라남도 승주군(지금의 순천시) 외서면 금성리에 비각 조각품을 남겨 향리의 지역인들이 이를 보고 경탄하였다.

   또한 재정적 수입이 많아 돈을 부대에 담아 가지고 다녔다.(이 시기의 화폐단위는 가치가 희소해서 한 부대의 돈이라면 대단한 거액임을 짐작케 한다.)

   그 분만 아니라 신체가 건장하고 미남형이어서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주고, 호방하고 방탕하기도하여 술을 말술로 마시고, 많은 여인들이 따랐다.

토목건축기사시절 압록강변 나들이 앞줄 左부터 차남 성원,정용옥 사모. 뒷줄 左부터 -장남 동진, 창현 함태영 목사 

1937년 :

   (23세때)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주거지를 선천으로 옮겨 기독교인 하동정씨 관림(河東 鄭觀林)과 이봉녀(李鳳女) 사이의 장녀인 정용옥(鄭龍玉) 여사와 혼인하여 기독교에 입교하므로 인하여 후일 목사가 되었다.  기독교 입교에는 이봉녀 권사의 전도에 크게 힘입었다. 정용옥 여사의 본가는 평안북도 선천군 선천읍 천남동(川南洞) 191번지이었다.

右-정용옥 사모.  左-이봉녀 권사

창현 함태영 목사의 약혼사진

1938년 :

   (24세때) 평안북도 선천 북교회에서 독립운동가 백영력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939년 :

   (25세때) 평안북 선천북교회 집사로 직분을 받았다.

이때에 깊은 신앙심으로 인해 신도 중에서 종양을 앓고 있는 환자의 환부의 고름과 종양근(腫瘍根)을 입으로 빨아 뽑아내어 쾌유케 하였다. 이때의 직업은 건축업과 건재상경영)

만삭이 된 부인 정용옥 여사를 고향인 전라남도 순천시 외서면 장산리 본가로 보내어 장남인 동진(東振-시인․아동문학가)을 출생케 하였다.(음력 5월 4일)

1943년 초. 앞줄 -左부터 성원, 동진. 뒷줄-좌부터 정용옥 사모, 창현 함태용 목사  

1941년 :

   (27세때) 일본의 강압적인 신사참배 강요에 대부분의 목사들과 장로들이 일제에 굴복, 신사참배에 응할 때에 단독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한 문제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나 고문 받기 직전 기지를 발휘하여 화장실에 간다고 핑계하고 순사의 눈을 피하여 탈출하였다.

   늠름하고 건장한 인물의 생김새에 정문경비 순사들은 다행히 검문치 않았다. 이리하여 펴안북도 압록강 주변인 자성군으로 피신한 후 만포진과 만주 삼강진 등으로 옮겨 은거생활로 2년을 기거하였다.

일제의 압박으로 고난을 당할 때마다 선친 송암께서 남기신 말씀 "生則義士 死則義鬼 : 생즉의사 사즉의귀"를 되새기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고난을 생각하며 견디어 내었다.

1944년 :

   (30세때) 다시 전라남도 순천시로 단신 이주하여 기독교인으로 은거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추적에 적발되어 투옥되었으나 옥중에서 8.15광복을 맞아 자유를 찾았다.

<수필>

   벌교(伐橋)읍을 벗어나 북쪽으로 널따란 들판이 있다. 들판을 따라 도로가 곧게 뻗어 있고, 그 중간 지점에 낙안(樂安)으로 갈라져 들어가는 갈림길도 있다. 들녘 곳곳에 파릇파릇한 풋보리가 자라고 곧 패어나려는 듯 보리이삭이 통통하게 배어 있었다. 푸른 들판에서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파아란 하늘 속으로 종달새가 솟구쳐 올라 재잘거렸다. 아마도 아들 딸 낳고 환희에 넘치는 기쁨을 알리는 코러스인 듯 싶었다.

   들녘을 꿰뚫고 곧게 뻗어나 있는 도로(현지 인들은 신작로라 일컬었음)는 미루나무 가로수 사이로 원근을 그리고 있어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도로가 지나는 마을마다 주민들이 부역(負役)에 동원되어 할당된 몫의 자갈을 제각기 깔고 닦아 놓곤 하였는데, 자갈을 밟고 걸을 때마다 발목이 이리 휘고 저리 꺾이어 발바닥이 아프고 시큰거렸다. 곧은 도로는 백이산(白耳山) 줄기 아래에서 갑자기 멈춰선 듯 급경사의 고갯길이 되어 오르막으로 전개된다. 널따란 들녘에서 갑자기 솟아난 가파른 줄기인지라, 도로는 마치 큰 구렁이처럼 이리 구불 저리 구불 산허리를 휘어 감아 돌고 돌아 올라갔다. 이 재를 석거래재라 부르고 있다. 도로를 따라 석거래재를 넘는 다면 발과 다리는 편하겠지만 쉬엄쉬엄 오르다보면 한 시간 반 이상은 족히 걸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삼 사십 분이면 쉽사리 넘을 수 있는 지름길인 골짜기를 택하여 고갯길을 오르내리곤 하였다.

   아름드리 적송(赤松)이 빼곡한 밀림인 솔숲 속으로 수아- 솨아- 봄바람이 스쳤고, 바람이 스칠 때마다 송홧가루가 흩날리며 그윽한 솔 향내가 풍겼다. 솔 향이 노곤한 행려객(行旅客)의 발길을 가볍게 하였으며, 산새들이 지저귀고 야생화가 미소를 지으며 길손들을 반겼다.

   나는 이 때에 여섯 살, 단오 때가 되면 일곱 살이 되는 1945년, 일제로부터 광복이 되던 해 어느 늦은 봄날이었다. 보퉁이를 머리에 인 어머님의 손을 꽉 잡은 나는 콧등에 땀이 송송 이슬 맺히듯 올라 있었고, 어머님 역시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땀이 흘러내린 뺨에 가닥가닥 붙어 있었다.

   “어머니, 할아버님 댁이 아직 멀었어요?”
   “음, 이제 거의 다 왔어. 이 고개만 넘으면 할아버님 댁이야.”
   “엄마, 할아버님 댁에 가면 아버지도 뵐 수 있겠지요?”
   “그래……, 어서 가자.”

   아버님은 풍운아(風雲兒) 같은 분이셨다. 담양에서 일본인이 한국인을 괄시(恝視)함에 분개하여 그 일본인을 살해한 후 평안북도 신의주로 피신 하셨다가 선천(宣川)으로 옮겨 하동 정씨(河東 鄭氏)인 어머님을 만나 결혼하신 후 열열한 기독교인이 되셨다. 아버님은 신사참배(神社參拜) 거부문제로 투옥되셨다가 탈옥하여 압록강을 넘나들며 은거생활도 하시었다. 그러던 중 고향인 순천 지역에 잠입했다가 다시 체포되어 재 투옥되셨다.

   어머님께서는 내심으로 조부님댁에 아버님이 안 계신 것을 알고 계시면서 도 어린 나에게는 숨기셨던 것이다. 나는 자주 집을 떠나 계신 아버님의 얼굴 모습조차 기억하지 못하였다. 그러면서도 석거래재를 넘는 순간 아버님을 곧 만나 뵐 수 있다는 기분에 들떠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지치지도 않았다. 석거래재를 오를 때에는 가파르고 높았지만 고개 너머 내림 길은 나지막한 산등성이처럼 길이 구불구불하지도 않았다. 완만한 비탈길이 곧 끝나버리는 지점에 다다르면, 대나무 숲에 쌓여있어 초가지붕만 보이는 곳이, 할아버님 댁이 있는 장산리(長山里) 마을이다. 동구 밖에서, 어머님께서는 “저기 대나무 숲 울타리에 가려져 지붕만 보이는 저 초가집이 할아버님 댁이란다.”고 하시었다. 나는 큰 소리로 “할아버지! 아버지!” 하고 부르며 앞서 달려갔었다. 사립문 앞에 다다랐을 때에 아버님은 보이지 않고 긴 수염을 늘어뜨린 할아버님과 인자스런 할머님만이 “아이고, 내 새끼!” 하시면서 번쩍 들어 안아주시고 볼을 비벼주셨다.

   나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외서(外西)초등학교로 입학하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일본식의 학교 교육에 익숙치 못하고 학교 다니기에 늘 두려움이 따랐다. 몇 개월이 지나가도 아버님은 보이지 않았다. 어른들의 말씀은 늘 ‘멀리 돈벌려 가셨단다.’라는 말씀뿐이었다. 평안도 도시 태생인 어머님은 심한 평북사투리를 쓰셨다. 어머님은 아버님이 계시지 않는 농촌에 오셔서 농사일을 거들 줄 몰라 동기간 사이에 눈치 보느라 서러움과 함께 마음 고생이 크셨다. 아마도 어머님은 어린 자식인 나를 바라보며 사시는 것이 외로움을 달래는 길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무더운 여름날, 늘 그리워하던 아버님께서 초췌한 모습으로 갑자기 돌아오셨다. 한없이 기뻤다. 그때 아버님께서 출옥으로 인하여 돌아오시게 된 것과 8․15 광복으로 해방이 되었다는 것도 철이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지금은 석거래재의 도로가 넓혀지고 아스팔트로 잘 포장되어 대중교통수단인 버스 등이 빈번히 오르락내리락한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하던가, 그 골짜기의 지름길은 억새풀과 밀림 속에 흔적도 없이 감추어져 버렸다.

   지난 봄 사촌의 결혼식에 참석, 석거래재의 마루에 올라앉았다.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봄바람은 나의 귀에 진하디진한 사모곡(思母曲)으로 스치어 왔다. 어머니의 환영이 시야를 가리우는가 싶더니 눈시울이 뜨거워져 오는 가운데 나도 모르게 “어머니……!”하고 불러보았다. 그러자 백이산에서 “오냐……!”하고 분명한 어머님의 음성이 메아리져 왔다.
*(함동진의 수필<석거래재에 스치우는 사모곡> 전문) 

1945년 :

   (31세때) 일제의 압박으로부터 8.15해방을 감격으로 맞이한 후 순천고등성경교에 입학함과 아울러 승주군(지금의 순천시) 해룡면 교회의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이때에 정용옥 여사는 어려운 가정살림의 보탬이 되기 위하여 깊은 산속에서 여름이면 송충이와 독충에게 물려가며, 엄동의 겨울에는 어름구덩이에 빠지고 미끄러지면서 땔감 나무와 나물을 뜯어 머리에 이어 날랐다.

   그리고 들과 산에서 뜯어 온 나물로 죽을 쑤거나 나물 반찬을 만들었다.

   이때 38선 이북 평안북도 선천에서 거주하던 장인 어른과 처남 정윤익, 정윤신, 처제 정용삼이 소련군의 총부리를 피해 사선(死線)의 38선을 넘어 월남하여 옴으로 순천시 저전동(당시는 昇州 楮田里,/ 지금의 順天市 楮田洞)의 자택에서 함께 기거하였다.

   후일 처남 정윤익은 외서초등학교 등의 교사와 순천, 광주, 서울 등지에서 한국상업은행의 행원을 거쳐 공인회계사와 세무사에 이르고, 둘 째 처남 윤신은 전남대를 졸업하여 고등학교 교사에 이르고 처제 정용삼은 순천의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다 출가한 후 전라남도 고흥군 남양면의 보건소장으로 근무하다가 정년이 되었다.

   창현 함태영 은 같은 해에 전라남도 승주군 상사면과 별양면에 , 순천시(順天市 楮田洞)에 있던 사재인 자택을 처분하여 첫 번째 개척교회(장로교회)를 설립하였다.

   별량면 교회에 시무할 당시 신앙심 깊은 집사 한 분이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야습을 받아 살해되고 그의 가옥이 불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살해를 당한 그 집사는 살해를 당하기 전 무렵, 공산주의자들의 난동이 있을 것이니 생명에 위협이 있을 것임으로 멀리 피신하는 것이 좋겠다고 창현 함태영 목사에게 비밀스레 귀띰하여 주었다.(교회 안에도 공산주의자들이 있었는데 사형 직전에 공산주의자들을 책임지고 교화시키겠다고 교회 안으로 데려다가 같이 생활하며 복음으로 교화시키기도 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그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여수-순천반란사건(麗順反亂事件)의 예언이었음을 누가 알았으랴?

1947년 :

   (33세때) 순천고등성경학교를 졸업함과 아울러 서울 마포구 도화동산(용산구 도원동과 접경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서울로 이주하자 심계원장인 함태영(咸台永/1873-1964-종교가․법조인․정치가 : 별주 참조)씨를 찾았는데 함 심계원장은 창현에게 지방국장(地方局長)자리를 권유했으나 이를 사양하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기를 고집하였다.

   그 후 예수교 장로회 신학교인 한국신학대학(당시의 학장은 훗날 대한민국 부통령이 된 松岩 咸台永)에 입학하고 장신대(長神大) 등을 2년 수료 후 그리스도의교회의 환원운동이 성서적인 신학이며 참 신앙적인 기독교교리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의교회의 신학교인 서울성서신학교(현재의 서울기독대학교). 당시의 학장은 미국인 선교사 죤․제이․힐 목사)로 전학하였다.

이 무렵 강순명 목사와 만나 같이 인연을 맺게되며, 함께 천막학교도 운영, 북한으로부터 월남한 불우한 난민의 학동들을 교육하고, 겸하여 천막교회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창현 함태영과 그의 가족들은 자택의 집을 마련하기 위한 잠시동안은 북한에서 38선을 넘어 월남한 난민들과 함께 서울 마포구 도화동산(麻浦區 桃花洞山))에 있는 일본군이 사용하다 버리고 간 대공포대 벙커 지하굴에서, 또는 임시 천막촌에서 기거하였다.

   이 때에 북한에서 월남한 정희건, 김00씨와 사귀었는데 이 두 분은 신앙심이 매우 돈독한 재건교회파 신자로서. 함께 그리스도의교회로 환원하여 서울성서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고 그리스도의교회에서 사역하였다.

정목사와 김목사는 신학공부를 위하여 주경야독을 하였는데 주간에는 나무 젓가락(일어로 와리바시)을 만드는 공장을 차려 사업을 하였다.

   이곳에서 창현 함태영의 아우인 태무(泰武)도 동업을 시작으로 토목 건축 등의 사업을 하며 형인 창현과 함께 기거하였다.

창현 함태영은 같은 해에 손수 지은 자택의 건축이 완료되어 안주하게 되었고, 신축한 자택에는 방 2칸, 서재 1칸, 부엌 1, 점포 1개가 있어 상점을 경영하며 신학공부를 할 수 있었다.

   서재는 방과 겸용으로 사용했는데 이 서재에 마련하였던 장서들이 6.25전쟁 때에 모두 분실되거나 훼손되어 무엇보다도 애통해 하였다.

상점이 마련되기 전 까지는 용산역 등 시장거리와 도로변 등지에서 손수레에 풀빵틀을 싣고 다니면서 행상을 하였다. 이렇게 빵을 구워 판 수입으로 학비를 마련하고 가족의 생계를 어렵게 꾸려 나아갔다.

   빵틀을 손수레에 끌고 행상을 할 때에는 자주 경찰관의 단속에 걸려 끌려가 경찰봉으로 구타당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창현의 내외가 새벽에 상품구입차 도매시장에 장보러 가며 숯불 풍로에 밥짓는 것을 장자인 동진에게 맡겨두고 나갔는데, 동진은 추위에 숯불 풍로를 끌어안고 쪼이다가 숯불에서 나오는 일신화 가스를 마시고 사경을 헤매다 12시간 후에야 간신히 깨어난 일도 있었다.

   또한 차남인 성원은 뇌염질환으로 식물인간이 되어 1년 이상을 누워 앓다가 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슬픔의 시험이 컸고 충격 또한 컸다. 새벽부터 낮 동안은 상품을 구입하고 장사를 하며, 밤에는 공부를 하는 주경야독의 세월이었다.

   또한 이 시절에는 아현동에 있는 한국신학대학장 송암 함태영(松岩 咸台永) 목사댁에 가끔식 방문하여 사제지간으로서 또는 강능함씨의 일가로서 문안인사도 드리고 신학에 관한 의견이나 진로에 관한 조언을 듣기도 했는데 때로는 장자인 동진을 데리고 가 함씨 일가의 어른께 문안드리는 것을 이르기도 하였다.

   그 후 송암 함태영(松岩 咸台永) 목사는 6.25전쟁 등으로 생활거처가 멀어지고, 부통령으로서 분주하였으므로, 창현 하태영 목사도 역시 자신의 목회일로 분주하기도하여 방문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

1948년 :

   (34세때) 전라남도 승주군 별량면 개척교회에 시무 할 때에 공산주의자의 방화와 살해로 순교한 집사 한 분의 예언대로, 한국민족의 비극인 동족상잔의 여수․순천반란사건(여순반란사건1948.10.19)이 일어났다.

   온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하여 난을 피하고 신학공부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이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이었다고 믿게 된다.

이 무렵 일제시대에 압록강철교의 철로를 절단키 위하여 동행했던 친구 서00씨는 공산주의 사상을 가졌다고 하여 서북청년단에 끌려가 수 차례 구타 등 린치를 당했는데, 후일 6.25 인민군남침전쟁발발 직전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었다.

   서씨에게는 서울에 부인과 일남일녀가 있었다. 그 당시 서울 마포구 도화동산(도원동과 경계부근)에는 서북청년단이 있었는데 거의 매일과 같이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자들을 불러 들여 구타할 때에 들리는 고통의 비명소리가 들렸었다. 참으로 이 나라 이 민족의 크나큰 비극이었다.

   후일 6,25남침전쟁이 발발하면서 서씨의 가족들은 창현 함태영 목사의 가족들과 함께 피난길 에 올랐다. 한강의 여의도 강변 모래 벌에 도달했을 때에 한강철교를 끊는 유엔군 폭격기가 폭탄을 투하하자 각각 가족끼리 끌어안고 강변 모래 벌(지금의 여의도 - 대방역건너)에 엎드렸다가 폭격이 멈추어 모래 먼지와 폭탄의 검은 연기가 살아졌는데도 서씨의 가족은 보이지 않았다. 이 후 영영 만날 수 없었다.

1950년 :

   (36세때) 6.25북한인민군의 남침전쟁이 발발하여 서울이 북한공산인민군의 수중에 함락되어, 공산주의자들이 살상을 자행되는 새벽, 창현 함태영은 가족 5인을 남겨 둔 채 먼저 한강을 도강하여 고향인 승주군외서면 장산리로 피신을 하였다.

   이 때에 기독교인 및 친미파라는 죄목으로 전라남도 승주군(순천시) 외서면 소재 공산통치의 내무서에 투옥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당시에는 한 번 체포되면 살아 남는 사람이 거의 없는 때인 데에도 옥중에서 찬송과 기도를 계속하였다..

   이 때 아우인 태호의 부인인 제수는 옥에 면회를 갈 때마다 시숙인 창현 함태영의 기도하는 모습에 질색하였다고 하였다. "나는 기독교인이요" 하고 목숨을 재촉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친인 송암(松庵 咸鳳表)을 비롯해서 모든 형제가 그 지역 사회에서 인심을 얻고 추앙 받는 형편이었으므로 죽임을 면하고,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 밤중에 기적적으로 풀려 나와 은신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뒷산의 대나무 숲 동굴이나. 앞산의 숲 속에서 두문불출하였다.

   서울에 남아 있던 가족들은 6.25남침전쟁 발발 3주 가까이 되어서 서울을 출발 천리 길을 도보로 더위와 공습과 굶주림 등 온갖 위험과 죽을 고비의 고초를 겪으며 승주군(순천시) 외서면 장산리 까지 피난하여 재회하였다.

   장산리 본가에는 40~50여 명의 대소가(大.小家)의 대식구가 피란처로 모여들어 먹을 것, 입을 것 등 합심 협력으로 고통을 이기는 기나긴 날들이었다.

   한 편 창현 함태영의 부인인 정용옥 여사는 역시 피난 중인 친정동생 정윤익 등 3남매를 찾아 승주군 해룡면에 갔다가 그 곳 내무서원의 검문에 걸려 꿈에도 그리던 동생들을 상면도 못한 채 내무서에 투옥되는 불운을 만났다.

   공산당원의 심문에서 기독교인이며 공산주의를 배반하고 월남한 반동사상분자로 죄목이 씌워졌다. 왜냐하면 정여사는 평안도 사투리를 썼기 때문에 삼팔선 이북의 출신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동생들에 대한 사항은 함구하였으므로 동생들은 안전하였다.

   정여사는 내무서원들이 한눈을 파는 틈을 타서 만 하루가 지난 다음날 탈출하는 데에 성공하여 외서면 장산리로 돌아왔다. 이 어찌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랴?

   인민군들은 창현 함태영의 집 소유의 앞산에 있는 밤나무를 베어 무쇠솥에 삶아 무명베옷에 물을 들여 군복으로 삼아 입었고 식량과 가축들을 무조건 약탈하여 현지서 조달하였다. 한마디로 병참보급로가 끊기고 군수물자가 없는 엉터리 군대였다.(지역 인민위원장을 앞세워 약탈할 물자가 있는 집들을 미리 알고 있었음)

   그 해 9월초 공산주의자들은 벼이삭을 낱알과 벼 포기까지 세어 경지 면적당 생산량을 예측하여 농작물을 수탈하려고 계획을 세워 현지실사 계량을 하였다.

   그러나 1950년 9월 15일 UN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므로 인민군들은 패잔병이 되어 4~5명 정도 식 떼를 지거나 흩어져 갈 수도 없는 북쪽을 향하여 가거나 지리산 속으로 들어갔다.

   이 때 승주군(순천시) 외서면 장산리도 수복되었으나 공산군의 잔당들이 빨치산이 되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마을 주민들은 물론 경찰서 등 관공서를 공격하여 공방전이 계속 되었고 빨치산들의 약탈 방화 살인(총살 도끼살인 죽창살인 등 흉악했음, 또는 약탈한 재물을 양민들의 등에 지게 하여 강제로 끌고 가 행방불명.)이 끊임없었다.

   지방관공서인 경찰지서와 면사무소가 낮에는 대한민국 아군이 밤에는 빨치산이 접수하는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경찰지서 등은 하다못하여 대나무를 죽창 식으로 깎아 2중3중으로 성곽을 쌓듯 울타리를 치고 경계하였다.

창현 함태영은 토굴과 밀림의 은신처를 빠져나가 안전지대인 부산으로 피신 1951년 2월 29일 기독교신보사가 주관이 되어 조직된 기독교선무원으로 발탁되어 국방부정훈국 산하에 파견되어 종군군목이 되었다. 전선에서는 계속 북진을 하며 전쟁은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군목으로서 군복장(軍服裝)을 한 채 승주군 외서면 본가에 잠시 다녀가는 야간 여행 중 벌교나루에서 빨치산들의 습격을 받고 발각되었는데 벌교지방 유지들이 다 떨며 끌려 나가는 중 창현 함태영은 혼자 군복차림으로 당당히 앉아있자 빨치산 대장이 나타나 "동무 수고합니다."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가자 선박 밑으로 숨는 등 어려운 피신 끝에 살아남게 되었다.

 

1951년2월9일 기독교신보사 선교원파견기념(국방부정훈국소속으로) 앞줄 右부터 2번째가 창현 함태영 목사

 (수필)

   6월은 밤꽃의 계절이다. 밤나무는 시골 어디를 가나 산언저리 동네주위 개천이나 강가에 많이 심겨져있다. 유실수로서 지방 곳곳에 밤나무 단지를 조성하여 6월이면 절정인 밤꽃의 자욱함은 안개가 서린 듯 장관이다. 구수하다고나할까? 이상야릇한 밤꽃의 향이 코끝을 간지르는 계절은 고향을 생각케 하는 특유의 냄새이다. 어떤 이들은 밤꽃의 향을 남성이 발정하는 냄새라고도 한다. 남성이 발정을 한다함은 생식을 위한 단계가 아닌가. 생식은 곧 인간의 고향이다. 그러기에 밤꽃의 향기는 맡을수록 향수에 빠지게 하는 은근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나의 고향, 순천 외서의 선산인 넓다란 안산에는 밤나무 단지가 무성하다. 너무나 넓은 밤나무단지인지라 해충방제를 할라치면 살충제를 헬리콥터로 공중살포 하여야한다. 농촌계몽가이신 나의 조부께서는 일찍이 1930년대부터 우량종 또는 개량종의 밤나무를 손수 접목번식하여 단지를 일구어 왔다. 조부께서 타계하신 이후 숙부께서 이어받아 경영하신다. 밤은 영양가가 높은 열매로 산골의 아이들에게는 좋은 간식거리이며 농촌에는 농가소득의 효자수(孝子樹)가 된다.

   6월, 밤꽃의 계절이 오면 고향생각은 물론이려니와 조부님 생각이 간절하다. 항상 객지에 머물러 살던 나는 8․15 해방 무렵과 6․25전쟁 피란 중 약 2~3년 정도(4~7세 때 잠간씩과 11세 때) 짧은 기간이나마 조부님 슬하에 머문 적이 있다. 조부님은 나를 장손이라고 많은 관심으로 엄하게 훈육하시려고 애를 쓰셨다. 조부님 댁에는 사랑채와 칙간채를 사이에 두고 대문을 달아놓았는데, 대문 안쪽의 칙간은 가족용이고, 대문 밖쪽의 칙간은 손님이나 길손들의 용도였다. 1950년 겨울 어느 날 대문 밖쪽의 칙간문 기둥모서리에 기대어 개머리판 닮은 밤나무토막을 들고 총을 겨누는 시늉을 하며 “탕, 탕, 탕” 소리를 질렀더니 마침 용변을 보시던 조부님께서 청천벽력의 고함과 함께 그만두라고 외치시더니 집 울타리의 낭창한 개나리 가지를 손자 손으로 직접 꺾어 가지고 사랑방으로 당장 오라고 호통치셨다. 여느 때에나 마찬가지로 나에게 잘못된 행실의 벌칙인 종아리 걷어올리고 목침 위에 올라서서 회초리 맞기 벌이 시작되었다. 나는 어찌나 고집이 세었던지 엄살도 없이 잘못하였다고 빌지도 않으니 매맞기 시간이 길어졌다. 종아리는 뱀이 휘어 감듯 피멍줄기가 수없이 많은 가닥으로 얽혀 있었다.

   조부님께서는 구한말(舊韓末) 의병에 가담하시어 치열한 전투에서 수많은 왜병들을 사살하였고, 수많은 의병들 역시 왜병들의 총칼에 의해 전사 희생되는 것을 보셨기에, 총으로 사람 죽이는 짓은 인간으로서 참아 못할 행위임에 치를 떠시는 것이었다. 적군이든 아군이든 생명의 존귀함을 아셨기에 총 쏘는 흉내가 가없이 가슴 떨리는 죄악으로 보이셨기 때문이었으리라.

   나의 조부(송암 함봉표)께서는 인간생명의 존엄성이 무너지는 6․25 전쟁 중에 아래의 시를 남기셨다.

  존폐와 합분이 각기 때가 있는 것이니
   앞으로의 길흉을 어찌 알리요.
   산간 폐옥은 밥지은 연기 끊어지고
   야외의 벽촌에 사람, 개도 드물다.
   남을 해친 너희 무리 빨리 가거라.
   백성 건질 우리 님 언제 오려나
   동서(우익과 좌익)에서 공작하느라 쉬는 땅이 없으니
   언제나 벼개 높이고 편한 잠을 자리요.

   [ 世感 ]

   存廢合分各有時    존폐합분각유시
   到頭吉凶豈人知    도두길흉기인지
   山間廢屋炊烟絶    산간폐옥취연절
   野外僻村人犬稀    야외벽촌인견희
   害物爾徒去亦速    해물이도거역속
   濟民我后來何遲    제민아후래하지
   東西工作無休地    동서공작무휴지
   何日安眠高枕支    하일안면고침지
   (松庵 咸鳳表의 시 世感<이 세상은 -6․25를 겪으며> 전문)

   그렇다. 인간의 생명은 참으로 존귀하고 고귀한 것이다. 산간벽촌까지 인적이 끊일 정도로 인명이 살상된 6․25 전쟁은 참으로 끔직하지 않은가. 고향을 생각케 하는 밤꽃의 계절 6월에는 「현충일」이 있고 「6․25전쟁기념일」이 있다. 이 두 기념일이 인간의 목숨이 희생된 것과 관련된 기념일이기에 그 날이 오면 심정이 더욱 숙연해진다.

   지금도 고향에 들르면 조부님의 산소와 밤나무를 번갈아 쓰다듬으며 조부님을 회상한다. 가을이면 사촌아우가 형님 맛보라고 햇 밤 한 박스를 택배로 부쳐온다. 이웃과 함께 나누어 먹으며 내가 태어난 흙에서 난 밤이 제일 맛있다고 고향 자랑을 한다.

   선영에 올라
   할배 묘소 앞에 무릎을 꿇고
   더디게 찾아 뵙는 참회의 묵념을 드린다

   네 살 적 할배 수염 끄들어 잡으면
   네 이놈! 하시곤
   머리 쓰다듬던 할배

   저만치 밤나무 한 그루
   할배의 혼이 배었나
   엣다, 또 끄들어 보아라
   밤꽃은 할배의 수염이 되어
   머리 위서 하늘거린다.|
   ( 1994. 10. 1. 작 졸시 <밤꽃> 전문)

   다시 밤꽃의 계절 6월이 왔다. 6월은 밤꽃으로 고향을 생각케도 하지만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숭고한 순국영령들과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으로 얼룩진 6․25 전쟁을 잊을 수 없게 하는 계절이기도하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지붕 위로 굉음을 지르고 지나가는 비행기소리에 등줄기가 오싹해진다. 생사를 건 6․25 전쟁 피난 중 폭격기의 공습에 놀란 가슴이 지금도 가시지 않고 뛰고 있기 때문이다. 그 뿐이랴 푸른 하늘 흰 구름 사이로 비행기가 벗어 나와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지금 내가 살아있는 목숨은 거저 얻어 지니고 있는 목숨이 아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남북교류는 그런 의미에서 무조건이 아니라 신중을 기하면 좋겠다.

   밤꽃의 계절에 고향과 조부를 생각하며, 개나리회초리의 엄하신 훈육의 덕으로 사람됨으로 인간답게 살고 있는 지금이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함동진의 수필 <밤꽃의 계절 6월이 오면> 전문)

1951년 :

   (37세때) 3월, 창현 함태영이 전라남도 광주시 방림동의 서병렬(徐炳烈) 목사댁으로 옮겨 거주하는 동안 여러 친척 젊은이들도 배움에 불타 함께 이주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감리교신학대학출신인 이신(李信)목사(후일 미국에 유학을 하여 신학박사가 됨)를 만나게 되며, 이신 목사가 그리스도의교회로 환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광주 학동에 제일 큰 교회당 건물이 있었는데 창문틀까지 축조된 상태에서 6.25전쟁을 만나 중단상태로 있었다. 여러 곳에서 모여든 젊은이들이 함께 이곳에서 그리스도의교회 환원운동 신학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충북 부강그리스도의교회에서 시무하는 김은석 목사를 중심으로 성경공부를 하던 전라도지방교회 젊은이들이 많았는데 이들과 합치기에는 장소 등 문제가 많았었다. 5월에 이르러 창현 함태영의 부친 송암(松庵)공의 지원과 창현의 사재처분금과 영광의 임00 장로의 헌금으로 광주의 양림동(공원,방송국입구) 일본적산가옥인 큰 도로변에 위치한 대형 2층 건물을 매입, 그리스도의교회 신학교 간판을 제작(화가이기도 한 이신 목사가 일곱 촛대의 도안을 그려 넣어 직접 그려 넣어 제작하였다. 후일 이신 목사는 대전 한국성서신학교<지금의 연산 한성신학교의 전신>의 간판의 도안도 이와 같은 일곱촛대 문양을 넣어 제작함) 현판하고 여러 곳의 신학도들을 합병하여 신학강좌를 시작하게 되었고, 또한 이 건물에 신학교와 병행하여 광주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 시무한 바 마치 오순절의 역사를 재현한 듯 큰 부흥의 불길이 일었다.

   이 때에 김은석목사 집례로 함창현․이신․최요한․김재순․장주열 이 그리스도의교회 목사로 안수를 받고, 일심으로 협력하여 각자가 맡은 환원운동 신학교수(강좌)에 열심함으로 큰 성과를 올렸으며 많은 환원운동 전도자들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환원운동을 하는 그리스도의교회는 비조직 비통치적이므로 새로운 전도자들을 붙들고 뒷밭침 할만한 재정이 없어 부득불 교파교회로 되돌아가 사역하는 일꾼이 많이 있어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였다.

   아직 6.25전쟁이 종결되지 못한 때라 큰 문제중의 하나가 젊은 청년 전도자들의 통행제한 문제가 있었다. 창현 함태영 목사는 종군당시 사귀었던 미8군 군목을 찾아가 통행증에 사인을 받아 환원운동전도자들의 통행에 불편이 없도록 하여 환원운동에 커다란 보탬이 되었다.

이 때에 김은석 목사의 가족과 김태수 목사의 가족들도 광주 양림동의 같은 건물에 입주하였다.

한 편 의술을 지닌 창현 함태영 목사 의 셋째 아우인 태중(泰仲)이 자금과 식량 공급으로 신학교와 신학강좌운영에 경제적 후원을 하였다.

  이 후 김은석 목사는 오순절성령운동을 지나치게 신비주의적으로 주장하며 예배에까지 도입하므로 잠시나마 동료 목사들로부터 지적을 받는 바가 되기도 하였었다.

   이 해의 가을 창현 함태영 목사는 충청남도 논산군 부적면 충곡리로 이주하여 충곡리그리스도의교회와 논산군 부적면 신교리그리스도의교회를 동시에 개척하여 시무하였다.

   따라서 이 무렵 셋째 아우 태중, 넷째 아우 태욱(泰昱)과 이신 목사는 충남 부여군 합송면 난민촌으로 이동하고, 광주의 환원운동 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를 이곳으로 이동하고 감확실 여전도사와 정찬성 목사를 비롯한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 환원운동신학공부를 하며 로고스(λογοζ )의 잡지를 제작 전국교회로 발송하였다.

   이신 목사는 합송리그리스도의교회를 담임 시무하였고, 이신 목사․김은석 목사․창현 함태영 목사 등이 교수가 되어 합송리 환원운동 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 강좌에 열심하였다.

김은석 목사

 (수필)

해마다 거듭되는 6․25 음식체험장에서 젊은 청소년들은 6․25 음식이 ‘먹을만하다’할 것이다. 아니면 ‘맛이 있다’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6․25 음식체험행사를 매년 소식을 접하고 목격면서 이질감을 느낄 뿐만 아니라 그때에 악식(惡食)을 하며 허기지고 긂주렸던 어지럼증이 되살아난다. 
  6․25남침전쟁 초기에는 식량이 조금은 남아 있어 급히 피난을 하거나 장거리 이동을 할 때에 주먹밥을  삼베보자기(도시락 그릇조차 귀하기에) 같은 것에 싸서 휴대하였다.
  전투가 한창인 전장에서는 야전식품인 건빵, 씨 레숀 등이 개발되기 전에 취사가 불가능한 군인들에게 지급한 급식이 주먹밥이기도하다.
  주먹밥은 전쟁시가 아니었더라도 평상시에 민가에서 장보러가기, 땔감나무 하러가기, 먼 밭에 농사 하러가기 등에서 활용되었다. 당시 주먹밥은 야외이동시 휴대하기에 편리한 상급식품上級食品었다.
  6․25남침전쟁이 시일을 끌면서 식량은 고갈되고 양식을 구할 길이 없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초근목피草根木皮로 구황救荒을하며 목숨을 부지했다.  6․25전쟁시에 주먹밥이나 민가의 밀가루수제비 음식 등은  누구나 상식한 것이 아니고 전장터의 군인들, 혹은 극히 일부 부유층이나 부농들이 취식하든 음식이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전장의 폐허와 피난살이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거나 끼니를 거르는 굶주림으로 지내야 하는 실정이었다. 6․25남침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 설상가상으로 3년 내내 가믐까지 겹치고 청장년들의 참전으로 농사를 그르쳐 식량부족과 굶주림은 극에 달하였었다.
  다행스럽게도 전쟁의 끝 무렵부터 U․N의 식량원조 곡물배급 덕분으로 그나마 풀죽을 쑤어 구황할 수 있었다.
  매년 벌이고 있는 6․25 음식체험장에서의 주먹밥 또는 수제비등의 음식은 그때의 굶주림으로 인한 고통의 면모를 6․25후세대 청소년들에게 보여주기에는 적절치 않는 넉넉한 음식이며 고급?에 속한 음식들이다.
  진정한 6․25음식들은 곡기(풀기) 없는 밀기울개떡, 쑥범벅 또는 쑥개떡, 칡죽, 소나무껍질밥, 콩잎죽, 무죽, 시래기죽, 김치우거지죽, 물말죽, 등 물과 다를 바 없는 멀겋고  거치른 죽 들이다. 이러한 음식들은 개에게 주어도 먹지 않는 음식들이었다.
  매년 찾아오는 6․25 음식체험장에서의 맛을 보여주는 음식은, 실제 6․25전쟁시의 음식과는 거리가 먼 좋은 음식들인 것이다.
  6․25 음식체험이라하여 먹을만하고 맛도 그런대로 좋은 음식을 체험시킴으로 허기지고 굶주리며 살아남기 위해 악식惡食을 하던 참상의 6․25전쟁을 자칫 가리거나 흐리게 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게 하고 있다.
  6․25남침전쟁으로 인하여 폭탄과 포화로 산하가 초토화 됐고,  초근목피를 마구 벗기고 캐어내 이것으로 허기를 채워 연명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땔감으로 남벌하여 산과 들이 황토黃土로 변하고 말았었다. 오죽하면 헐벗은 산야에 ‘나무를 심자’는 노래를 교과서에서 가르치며 식목운동을 벌여왔겠는가.
  일반인들도 굶주렸지만, 그때의 피난민생활을 하던 목회자 가정의 식생활은 더욱 혹독할 정도로 기아(飢餓)현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먹을 거리를 생산할 논 밭이 없었기에 더욱그러하였다. 
  6․25 음식체험음식들을  다시 고증하여 제대로 체험토록 하자는 바램이 크다. *(함동진의 수필 <6․25 음식체험의 허와 실> 全文)

1952년 :

   (38세때) 11월 15일 6.25전쟁으로 어려워진 사회에 교육의 뜻을 두고 농촌발전을 위하여 또 배움에 굶주린 농촌 2세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논산군(논산시) 부적면 신교리에 공회당을 빌어 복음공민중학교를 설립인가를 득하였다.(후일 창현의 후배 겸 제자인 이춘식 목사께서 인수하여 대명중학교로 개칭한 바 있음) 이때에 셋째 아우인 태중은 학교 재단운영과 교회운영의 후원자로 뒷밭침 하였고 막내아우인 태욱은 영어 강사로서 도왔다.(태욱은 후일 서울성서신학교를 거쳐 한국성서신학교를 나와 여러 교회에서 목회함) 그밖에도 부여의 환원운동 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 신학도 여러 교사들이 태중․태욱 형제와 함께 신교리로 주거지를 옮겨 무보수(식사 대접만 받고) 교사로 교육에 헌신하였다. 창현 함태영 목사의 사모 정용옥은 교사들의 식사제공과 세탁 등으로 헌신하였다.

   이로서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높여 성서로 돌아가자!" 고 외치며 "성서로 돌아가자!"는 그리스도의교회 환원운동은 맹렬히 타는 불길처럼 활활 타올랐다.

 

                              한국그리스도의교회환원운동
                              성서적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基督敎 初代敎會로의 還元運動)

                                                      환원운동지침

                                              1. 책은 성경만
                                              2. 신조는 그리스도만
                                              3. 명칭은 하나님의 것으로만
                                              4. 주장은 복음만
                                              5. 일체의 근거는 성경적으로만
                                              6. 기본교리에는 통일을
                                              7. 의견에는 자유를
                                              8. 매사에는 사랑으로 한다

                                                      환원운동정신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우리가 말하고
                                              성경이 말씀하지 않는 것은 우리도 말하지 않는다
                                              우리의 신조는 성경말씀의 가르침뿐이며
                                              우리가 믿는 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우리의 신앙의 결정은 성경말씀의 가르침에만 의한다.
                                              (딤후3:13~17. 벧후1:20,21. 히13:8. 히7:26~28. 마16:18. )

   부여 귀암면 합송리에서 배운 젊은 신학도들은 서울이 수복된 후 서울성서신학교(현재 서울기독대학교와의 통합전 신학교의 명칭)로 옮겨 (그 밖의 다른 교단으로 가기도 함) 기독교환원운동가 전도자 목사로서 배출되었다.

   창현 함태영 목사가 충곡리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하며 가족과 함께 기거하던 논산군(논산시) 부적면 충곡리는 논산의 황산벌을 기름지게 하는 수원지인 대단위 논산저수지를 마을 아래에 두고도 앞뒤로 황토가 흘러내리는 민둥산(6.25전쟁당시 땔감이 없어 나무뿌리 풀뿌리까지 모두 캐어다 땔감으로 쓴 결과) 골짜기에 위치하고있었다.

   6.25 전쟁이 나던 1950~1952년은 가믐이 계속되어 이 지역은 밭곡식은 물론 얼마 안 되는 다락논들에서 곡식과 쌀이 생산되지 않아 그야말로 동리 사람들이 초근목피(草根木皮), 독새풀씨, 저수지의 물말이란 풀을 뜯어다 풀기(호糊=곡기)를 찾아 볼 수 없는 거친 것을 끓여 음식으로 삼아 연명하였다. 사람들이 먹어 탈만 안 나면 어떠한 풀도 가리지 않고 먹었다, 이런 음식과 먹거리는 개에게 주면 입도 안대는 거친 음식이었다.

   온 마을이 전쟁의 불안과 기근으로 황폐화되다시피 하여 굶어 죽거나 영양실조로 죽은 사람이 많이 나왔다. 하물며 땅 한 평이 없는 창현 함태영 목사의 가족은 오직하였으랴. 연거퍼 사흘씩 굶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주민들은 전쟁의 시달림에서 가문과 기근의 시달림으로 이어져 시련의 세원을 보냈다. 그러나 기존의 신도들은 더욱 산앙심이 깊어져 밤낮으로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며 기도하였다.

그 때의 신도들의 피땀 나는 순교자적 눈물의 기도가 오늘날 한국기독교의 눈부신 성장을 낳게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굶주리던 그때에 어떤 신도들은 창현 함태영 목사의 사택에 와서 초근목피로 끓인 죽 한 사발로 배를 채우는 이와 어린이도 있었다. 창현 함태영 목사는 서울에서 피난을 왔으므로 피난민으로 등록되어 유엔이 보내준 얼마 안 되는 피난민 구호 양곡인 통밀과 알랑미(또는 안남미라고도 함)를 배급받아 통째로 빻아 늘여 먹기 위하여 쑥, 모시잎, 물말, 콩닢 등과 철철이 나오는 야생초 나물과 혼합하여 풀기(가루기)가 거의 없이 버무려 개떡을 찌거나 죽을 쑤어 먹었다. 개떡의 경우 가루기가 너무나 희소하게 배합되어 뭉쳐지지 않고 부슬부슬 하였다. 이는 영양부족을 일으키는 음식들이었다.

   이로 인하여 창현 함태영 목사의 사모인 정용옥 여사는 영양실조로 몸이 붓고 자주 앓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 어디엔들 안 그랬을까마는 유독히 충곡리 지역은 기근이 극심했었다. 아마도 창현 함태영 목사가 이곳에서 개척교회를 시무하지 않았다면 정용옥 여사가 더 오랫동안 생존해서 더 많은 주님의 일을 해낼 수 있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을 남기게 하였다.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은 창현 함태영 목사의 바로 아래의 아우로서 쌍동이인 태호 태무(泰浩 泰武) 두 형제가 넓은 농토와 임야의 논과 밭농사, 과수 축산 등을 힘들게 해내면서도 극진히 봉양하였다. 이 두 형제는 한 없이 선량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께 순종하고 대대로 이어지는 여러 대의 선조들 제향을 올리면서, 참된 독농가로서 현지주민들의 모범과 선망이 되었다.

창현 함태영 목사의 자당 김월림 여사의 회갑(6.25남침전쟁 중이라 조촐한 床을 받음)

(수필)

   흰눈이 깊이 쌓인 마을에 교회당이 있고 종탑이 우뚝 솟아 있는 그림의 성탄절 카드나 달력을 보면 평화로움이 느껴지며 교회의 종소리가 그리워진다.

   종소리가 울려 퍼져 고요한 마을과 산천을 돌아 메아리로 이어져 올 때 아름다운 서정 속에 은혜로움으로 잠기며 마음이 온화하여졌던 시절이 생생하다.

   8․15해방과 6․25전쟁을 전후한 시기에는 도시나 농촌을 불구하고 시계가 귀한 시시였다. 더구나 시각을 알리는 괘종시계는 부유하다고 인정되는 집 이외에는 그것을 소유한 가정이 매우 드물었던 시절이었다.

   이 시절에 시각을 알리는 고마운 것이 있었으니 교회당의 새벽 종소리였다. 경우에 따라 정오의 종소리도 있었고 주일과 수요일에는 저녁 종소리도 있었다. 마을마다 집집마다 이 종소리에 의하여 일과의 시작과 끝나는 시각을 가늠할 수 있었던 종소리였다.

 

   1951년 가을 6․25전쟁 피난시절에 목사(창현 함태영)인 아버지를 따라 새로 개척한 목회지인 충남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에 소재한 충곡리그리스도의교회로 이사를 하였었다. 새로이 개척한 교회임으로 신도의 수도 적고 재정 또한 목사인 아버지의 개인 사비로 운영되었다. 자그마한 교회당이었음으로 종탑이 없었으며 또한 종이 달려 있을 리가 없었다.

   아버님은 교회에 부임하신지 얼마 안되어 학교종을 닮은 은색의 커다란 종 하나를 구입하여 오셨다. 종은 양은(알미늄)으로 주조하여 만들진 것이었으며, 동그란 쇠뭉치에 긴 줄을 매어 달아 타종을 하였다. 종탑이 없었음으로 교화 앞에 있는 큰 소나무의 높은 가지에 매어 달아놓고 있었다.

   이 종의 종지기는 내가 담당하였다. 눈이오나 비가오나 새벽종을 타종하여 울렸고, 주일저녁 수요일 저녁에도 어김없이 타종하여 울렸다. 그러나 불행한 일이 벌어졌다. 전시였음으로 물자가 귀한 탓으로 폐품의 불량한 알미늄으로 주조되었고 기술 또한 부족한 터이라 종에 금가 종소리가 곱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날이 갈수록 깨어진 종소리가 털털거림이 심하여지더니 그 깨어진 조각이 떨어져 내렸다. 조각을 들여다보았더니 빵 속이나 스펀지처럼 기포가 들어있듯 엉성한 조직이었다. 종이 깨어져 나간 후 산골 마을의 곡곡으로 울려 퍼지던 종소리가 사라지게되어 아쉬웠을 뿐만 아니라 마음이 쓰리고 아팠다. 
*(함동진의 수필 <충곡리그리스도의교회의 종소리> 전문)

(수필)

   연일 맑은 날씨로 하늘은 파랑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하였고, 구름 한 점 없는 그 하늘은 코발트빛으로 눈이 부시었다. 고개 숙인 벼이삭은 누릿누릿 황금물결로 일렁이기 시작하고 참새 떼들이 무리를 이루어 바쁘게 들판을 누비고 날아다녔다. 어찌 평화로운 풍경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아직도 전선에서는 매우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1952년의 가을이었다.

논산시 부적면 마구평리에 소재한 부적초등학교 운동장에서는 전쟁의 상흔을 잊은 채 청군 백군으로 나뉘어 운동회 연습이 한창이었다. 남자아이들 가운데 런닝셔츠를 걸친 아이들은 몇 안 되고 검정 팬티, 흰 팬티만 입은 아이들이 맨발로 운동 연습에 열중이었다.

   이제 내일이면 기다리던 운동회날이다. 모두들 총연습에 돌입했다. 머리에는 각각 흰색과 청색의 띠를 두르고 새 팬티를 입고, 새 운동화를 신고 나왔다. 그들 중에 운동화를 신지 못한 아이가 한 둘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나였다.

   오늘은 기다리던 운동회날, 모든 아이들은 꽁보리밥 도시락, 울긴 감과 찐 고구마 몇 개, 과자, 눈깔사탕 등을 책보자기에 싸서 메고 신나게 학교로 향하였다. 그러나 나는 운동회에 나아가지 않고 집에 머물러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나의 센 고집을 꺾을 수 없어 1학년인 여동생만을 데리고 운동회에 나가셨다.

   아버지께서는 부여군 규암면 합송리에 개설한 신학교 일로 늘 출타하시고 수요일과 주일에만 집에 계셨다. 6․25전쟁 피난살이 중 약 2년 남짓 보낸 곳이 충곡리교회였는데, 아버지께서 개척하신 교회였다.

   논산군 부적면 충곡리란 곳은 백제 의자왕 19년(서기660년)에 당나라 소정방이 10만 대군과 신라 김유신 장군의 5만의 군대가 연합군을 형성하여 백제를 침공하므로 계백장군이 결연한 의지로 결사대 5천을 이끌고 황산벌에서 최후 결전을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충곡리 부근 구릉지대까지 퇴패하여 장렬한 최후를 마친 곳이다. 이곳에는 충곡서원이 있는데 계백장군을 비롯한 사육신 등 충신만을 배향하고 있는 특별한 서원이 있으며 또 가까이에는 그의 무덤이 있고, 백제군(百濟軍)들의 시체를 묻었다하여 시장동(屍葬洞)이란 지명이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6․25전쟁 당시 2,3년은 한발이 극심하였다. 충곡리 그 고장이 한발을 가장 많이 겪은 곳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논밭과 민둥산들은 붉게 타 들어가 불모지(不毛地)로 변하여 갔었다. 충곡리 마을 아래로 지척인 곳에 그 당시로서는 한국 굴지의 논산저수지(수문은 탑정리에 있음)가 있었는데도 물 한 방울 끌어올려 쓸 수가 없었다. 전기며, 양수기며, 수로가 발달되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러나 그 저수지가 바닥이 나도록 물을 끌어다 쓰는 논산벌, 연산벌(황산벌)은 한발을 모르는 기름진 땅이었다.

   아버지께서 개척한 충곡리교회의 교인들은 전쟁과 한발 때문에 너무나 빈한한 생활을 하였다. 오히려 우리의 가족들이 서울 피난민으로 등록된 덕택에 배급받아 온 구호양곡인 안남미, 겉보리, 밀 등을 갈아 죽을 쑤어 교인들과 나누어 먹어야할 처지였다.

   우리집은 돈 한 푼, 땅뙈기 한 평 없는 가난한 개척교회 목사의 집안이었다. 그러므로 운동회날이 왔어도 운동화는커녕 검정고무신 한 켤레 살 돈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어린 마음에 부모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하고 새 운동화 한 켤레 사 주실 것을 조르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운동회에 불참하고 만 것이다.

   충곡리에서 부적초등학교가 소재한 마구평리까지는 20리 가량의 거리였다. 학교 가는 길의 절반가량은 대전-연산-논산으로 이어지는 국도가 있는데 비포장 도로에 자갈을 깐 길이었다. 전쟁 중이어서 미군의 군용차들이 쉴새 없이 황토 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하곤 했다. 나는 이 길을 거의 맨발로 통학을 하였다.

   물자 부족으로 질이 좋지 않은 검정고무신은 생고무 배합량이 적어 힘껏 잡아당기면 찢어지거나 구부리면 부러질 정도였다. 더군다나 통학길이 멀고 자갈길인 국도를 걷고 나면 몇 날이 못되어 검정고무신의 밑바닥은 해져서 마치 뜀박질하다가 지친 개의 길게 늘어진 혓바닥처럼 널름거렸다. 그러면 실을 여러 겹으로 꼬아 밀납을 문질러 먹인 후 검정고무신을 꿰매 신고 다녔지만 길이 험하여 곧 떨어져 너덜거렸다. 몇 차례 그렇게 하다가는 꿰매어 신기 싫어서 아예 신발을 손에 들고 맨발로 다니곤 하였다. 그때에 새로이 등장한 신발이 있었으니, 페타이어를 얇게 켜 발에 맞게 재단하고 밀납 먹인 실로 꿰맨 신종 신발이었다.

   고무는 질겼으나 실밥이 닳아 터지는 것은 매 한가지였다. 신종 타이어 신발은 값싸고 질긴 반면에 발뒤꿈치를 갉아먹어 물집이 생기고, 허물이 벗겨지고 피가 흐르며 곪기까지 하여 신고 다니기 힘들었다. 차라리 아프라카의 부시맨처럼 맨발로 다니는 편이 더욱 편안하였다.

   운동회가 있던 날은 더없이 맑고 좋은 날씨였다. 하늘은 파아란 보석처럼 빛났다. 동생을 데리고 운동회에 가시는 어머니께서는 고구마를 한 솥 씻어 안쳐 주시며 해질녘에 삶으라고 이르시고 가셨다. 저녁해가 서산에 기울 무렵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땔감은 논두렁 밭두렁 야산 등지에서 베어 말린 풀을 갈퀴로 긁어모은 것이었다. 아궁이 앞에 지켜 앉아 한줌씩 타는 대로 연속 집어넣으며 부지깽이로 위로 아래로 젓기도 하고 밀어 넣기도 했다. 불장난을 하면 오줌을 싼다는 속담이 있던가? 아궁이 불에 쏘인 나의 얼굴과 몸뚱이는 화끈 달아오르고 느른해지더니 급하게 오줌이 마려웠다. 부엌밖에 나아가 무 배추 심은 밭두둑에 시원히 오줌을 누고 있는데 갑자기 등뒤가 뜨거워 오는 것이 아닌가. 뒤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불길이 부엌을 감싸고 맹렬히 치솟았다. 불이야! 불이야! 소리를 지르니 근처 논에서 일하던 ○○집사께서 논에 달린 둠벙(웅덩이)의 물을 물통에 담아왔으나 이미 부엌은 한줌의 재로 사그라진 후였다. 그 청명하고 파란 보석처럼 빛났던 하늘이 노오랗게 변하여 보였다. 타버린 부엌은 교회와 붙어있는 숙소의 밖에 있었는데 서까래용 나무 몇 개로 얼기설기 덮어 씌워만든 것이었다. 불은 아궁이 앞에 흐트러진 마른 풀더미를 타고 이엉에 삽시간에 옮겨 붙었던 것이다.

   나는 운동회날 부엌을 태우고 어머니의 마음까지 태운 것이다. 어머니께서 개척교회의 목사 사모로 오지인 충청도 양반골(?충곡리)까지 따라오셔서 핍박과 기근과 싸우며 봉사하시고 복음을 전파하시다가 마음까지 태우신 것이다. 올갠도 없는 빈한한 교회에서 꾀꼬리같이 아름다운 천사의 음성으로 독창을 하시고 청소년들에게 손수 가르쳐 찬양대를 이끌어 가시더니, 그 다음 해 여름 부황(浮黃)으로 32세 젊은 나이로 요절하셨다. 계백장군이 구국의 일념으로 속을 태우면서 전사한 고장 충곡리를 뒤로하고 내 어머니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속을 태우시면서 순교하신 것이다.

   지금도 '불이야' 소리만 들어도 어머니의 마음이 타들어 가는 소리를 듣는 것만 같고, 가을 운동회 철이 다가오면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을 잊을 수가 없어 불효자 마음은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그때의 개척자들이 갖은 핍박과 헐벗음과 굶주림의 고난을 겪으면서 기도의 눈물과 함께 뿌린 복음의 밀알이 오늘날 천 배로, 만 배로 결실 하였다. 밤하늘의 뭇 별들처럼 반짝이는 교회의 종탑들이 이 땅위에 우뚝우뚝 무수히 솟아나 있지 않은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 (함동진의 수필 <어머니 마음을 태운 운동회날> 전문)

<수필>

   한 인간이 심중을 예리하게 찌르고 남긴 상처가 반세기를 지나도록 아물지 못하고 아직도 골 깊게 남아 아린 상처로 작용하고 있다.

주말이나 공휴일에 잠시 짬을 얻어 TV 앞에 앉아 시청하다 보면, 느닷없는 함성과 환호성이 터져 나와 자괴감을 느끼도록 섬칫해진다. 큰 경기장이 메어 터질 정도로 운집한 스포츠 애호가들의 발작에 가까운 몸짓과 괴성은 온통 나를 향하여 비수로, 화살로 꽂히고 창으로 쑤셔대며 조롱하고 희롱하고 멸시하는 것 같이 크로즈업 되어 덮쳐온다. 즉시 채널을 바꾸어 보지만 다른 곳도 역시 광란과 난장판 같은 소란스러움으로 한 술 더 떠셔 직격탄으로 몰려온다.

   야구, 축구, 농구, 배구, 정구, 탁구 등의 경기가 동시 다발로 중계되고 있는 것이다. 뉴스 시간 말미에도 모든 채널이 동 시간대에 기관총을 소사 하듯 스포츠 뉴스를 경쟁적으로 내뱉는다. 이 정도면 재빨리 스위치를 끄고 뒤로 물러날 수 빢에 별도리가 없다. 정신조차 아찔하다.

   1952년 봄, 6․25 한국전쟁은 극에 달하여 수많은 전상자를 내며 비극을 더하여 가고 있을 무렵, 우리 가족이 피난민으로 찾아든 고장인 충남 논산시의 시골 조그마한 B초등학교에서는 전쟁의 참화가 훑고 지나간 후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각 학년의 학급마다 빈자리가 채워지고 열악한 환경 가운데 UN의 원조로 박아 낸 교과서와 공책을 지급 받아 고마운 마음으로 아껴 쓰며 공부를 하였다. 전쟁 중이어서 거의 모든 학생들이 헐벗고 굶주리고 영양실조까지 겹쳐 허연 버짐이 낀 몰골로 꾀죄죄한 모습들이었다. 농사를 많이 짓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도시락을 싸오지 않아 모두들 점심을 굶는 처지였다.

   전쟁으로 인해 피폐한 사정으로는 학생들이 운동을 하거나 놀이할 기구와 도구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학교측에서도 철봉대 하나마져도 제대로 세워주지 못하는 열악한 사정이었다. 돼지 오줌통에 바람을 불어넣어 공같이 만들거나 새끼줄을 둥글게 감아 공 모양으로 만들어 축구 시합을 하였고, 오재미를 만들어 던지기 놀이를 하거나, 나무 도막을 가지고 자치기를 하거나, 나무를 깎아 만든 팽이치기를 하거나, 기마놀이를 하는 것 등이 운동과 놀이의 전부였다.

   어느 날 내가 속한 2반(1반과 2반이 있었는데 2반은 남녀 혼합반임)은 학급 회의를 열고, 학급생 전원이 공동 출자하여 축구공을 구입하기로 결의하였다. 구입총액과 모금 기일을 정하여 실행키로 하고 모금이 시작되었다. 나는 형편이 어려워 등하교길 10~20리를 맨발로 다니는 주제에 축구공(이 다 무엇이냐?) 분담금을 도저히 낼 수가 없었다. 학급반 아이들은 ‘목사의 아들이 그 돈도 못 내느냐? 비아냥 조로 조롱하다시피 했고, 심지어는 담임 선생님도 같은 말로 거들었다. 더군다나 못 견딜 것은 여자아이들 앞에서 조롱 당하는 것이 어린 심정이었지만 더욱 창피하게만 느껴졌다.

   어찌된 일인지 반장과 몇몇 아이들은 J라는 아이를 시켜 더욱 조롱 조로 욱박질렀다. J는 나보다 20cm는 더 컸고 잘 생긴 남자 아이였다. 평상시에는 별로 말도 없고 얌전한 아이였는데 분담금을 조를 때에는 나를 가난하고 제일 꾀죄죄한 여자아이에게 떠다밀며 수모를 주는 것이었다. 나는 화가 치밀어 주먹을 휘두르려다 참고 안정 자세를 취하자 반장과 몇몇 아이들이 J를 더욱 꼬드겨 나를 가만히 두지 않도록 유도했다. 결국에는 점심 휴식 시간에 운동장에 나가 격투하기로 결론을 내고 말았다. 12시가 되자 서부영화 「하이 눈」의 한 장면처럼 운동장의 복판에 나아가 많은 아이들이 둘러선 가운데 나와 J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대결 상태에 들어갔다. 못된 녀석들은 당연히 J의 편이 되어 한방에 KO시키라고 응원하며 조롱하였다. 먼저 J의 주먹이 날아와 나의 안면에 꽂히며 눈 안에서 번개 불 같은 것이 번쩍 튀었다. ‘엣다, 나도 모르겠다.’ 주먹에 온 힘을 가하여 J의 면상 정면에 한 방 날렸다. 이게 웬일인가? J는 나가떨어지더니 코에서 시뻘건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구경하던 악동들은 슬금슬금 물러섰고 나는 J를 일으켜 세워 종이로 코피를 닦아주었다. 나의 승리로 끝난 격투였다. 난생 처음의 격투요, 일생 일대의 마지막 결투였다.

   나는 그 이후로 축구는 물론 모든 구기 경기를 싫어한다. 슬픈 날에는 둥근 해와 달조차도 축구공으로 보여져 싫어질 정도일 뿐만 아니라 모든 스포츠도 덩달아 싫어졌다. 많은 관중이 운집하여 편을 가르며 승부와 내기와 상금을 걸고 함성을 지르는 스포츠 경기가 싫어졌다. 따라서 스포츠를 다루는 스포츠 잡지나 스포츠 신문도 보기 싫고 그 기사를 읽고 있는 독자까지도 미워졌다.

   물론 스포츠를 통하여 국민의 건강을 증진시키고, 국제적으로 국위를 선양한다는 뜻이 있기는 하겠지만, 나로서는 색다른 견해와 안목으로 보게 된다. 88서울올림픽은 숙성되지 않은 샴페인을 터뜨린 것과 같은 모양새다. 올림픽이 진행되는 동안이나 종료된 후에도 사치와 낭비와 퇴폐 등이 성행되도록 부추기고 조장되었으며, 먹기 문화와 놀이 문화만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경제성장만이 치달아 오르는 가운데 국민의 마음과 정신은 숙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치러진 올림픽 잔치인 까닭에 3D 기피 현상만이 만연하였고, 결과적으로 IMF로 가는 통로가 되어 나락에 이르는 쓴잔을 마시게 했다고 본다. 군사 독재 정권들이 국민의 눈을 한데로 돌리기 위한 방편으로 국민의 정신적 성숙도나 경제적 기반의 형편을 무시하고 스포츠를 부추겼다. 밤낮없이 대형 운동장이나 체육관으로 몰려가 경기에 몰입 환호하며 열광을 하니(다수의 서민과 농민과 저임금의 노동자들을 무시하고) 생산적인 일은 누가 할 것인가? 정신적인 면으로는 이기적이고 승부욕에 치달아 양보와 양해심이 없어지고 육체만이 비육 되는 방향으로 치닫게 되었다. 일확천금의 꿈으로 속은 곪고 겉으로만 화려하게 한 회칠한 무덤 식의 스포츠 왕국을 건설하였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벅찬 기대와 새 희망 속에 새천년이 도래했다. 새천년의 개시 원년인 2천년에는 시드니 오림픽이 있고, 2002년에는 이 땅 위에서, 주최국으로서 월드컵 축구경기를 치르게 되어 있다. 우리의 국토는 물론 지구촌 전체가 온통 열광하며 날이면 날마다 열병을 치를 것이다. 바라건 데 이러한 대형 스포츠 행사가 건전한 국민 정서와 도덕적 정신 함양에 큰 몫으로 기여하며, 생산적으로 기획되어 진행되기를 기대하여 본다.

   그 날 이후 반세기가 흐른 지금 J는 어디에 있으며 스포츠를 어떻게 생각하며 보고 있을까? 새천년에는 축구공 하나에 얽힌 한이 풀리고 스포츠와 친근해지면 좋겠다.

   해도 달도 이미 아름답게 떠있지 않은가.   *(함동진의 수필<주먹한 방에-새 천년에는 한이 풀리려나>전문)

1953년 :

   (39세때) 3월24일(음) 창현 함태영 목사의 선친이신 송암 함봉표(松庵 咸鳳表 志士)께서 세상을 뜨셨다.

   평생을 10자녀를 위하여, 사회활동을 위하여, 안일할 날이 하루도 없이 수고롭기만 하시던 선친의 서거를 가슴 깊이 슬퍼하였다.

   유교와 기독교의 갈림길(송암은 유림이었으며 창현은 기독교인임)에서 넘나들던 부자간의 정신적 갈등 속에서도 창현목사의 교육사업과 교회개척 설립 등 기독교환워운동에 있어서 없는 것 잇는 것 할 것 없이 털어서 뒷밭침 함으로 장자인 창현 함태영 목사의 앞날을 축복하며 사랑으로 지원하였던 아량 넓으신 분을 사별하신 것이다.

   6월 18일 0시를 기하여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측이 모르도록 극비리에 반공포로(북한인민군)들을 석방하였는데, 말이 석방이지 총격을 받으며 수용소의 철조망을 넘은 논산포로수용소의 반공포로들은 야반도주의 신세와 다를 바 없었다. 흙탕에 범벅이 되어 찢긴 옷(P.W표 낙인이 된 군복)을 입고, 동이 트는 아침 일찍 보기에도 가련한 5인의 반공포로들이 창현 함태영 목사가 시무하는 신교리그리스도의교회에 찾아들었다. 겁과 두려움에 가득차고 허기진 그들은 정부의 조치가 있는 날까지 옷을 갈아 입히고 먹여 따뜻한 보살핌을 받다가 돌아갔다.

   7월13일(음6.4) 불신자 청년, 방종하였던 창현 함태영 목사를 기독교인으로 만들고 목사가 되기까지 그 많은 시련과 고초를 겪으면서도, 늘 기쁨 속에서 찬송과 할렐루야 기도로서 봉사하며 목회의 반려자가 되었던 아내 정용옥 여사는 6.25전쟁과 가뭄 기근에 의한 찌든 가난과 굶주림 등에 의하여 영양실조와 병고로 충남 논산군(논산시) 부적면 신교리 농촌집 모퉁이 셋방에서 32세(1921~1953년)의 젊은 나이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정용옥 여사는 목회의 뒷바라지로 자신의 몸을 돌보고 추스릴 사이도 없었다.

   창현 함태영 목사는 전도와 환원운동 신학강좌로 부여군 귀암면 합송리에 출장중이어서 사모인 정용옥 여사의 임종을 맞지 못하였다. 정여사는 장남 동진에게 " 내가 죽은 후에 동생들을 잘 돌보고 아버지를 극진히 모셔라"고 유언으로 당부하였다. 남편인 창현 함태영 목사가 홀로되어 목회에 크게 지장이 있을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었으리라. 1살, 4살, 5살, 8살, 13살 되는 어린 자녀들을 두고 감기지 않는 눈을 뜨고 천사들과 함께 찬송을 불렀다.(운명의 시간이라 아주 나즈막한 음성으로 고요히 불렀다. 그러나 천군천사의 대합창 속에 승천하는 듯 평화로웠다. 아래의 찬송가 가사는 운명시 그 순간 자녀들과 천사들과 함께 부른 찬송가)

                                              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송하게 합소서
|                                              한량없이 자비하심 측량할 길 없도다
                                              천사들의 찬송가로 나를 가르치소서
                                              구속하신 인해함을 항상 찬송합니다
 

                                              주의 도와주심 받아 이때까지 왔으니
                                              이와 같이 천국에도 이르기를 바라네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에 빠진 우리를
                                              예수 구원하시려고 보혈 흘려주셨네

                                              주의 귀한 은혜 받고 일생 빚진 자 되네
                                              주의 은혜 사슬되사 나를 주께 맵소서
                                              우리 맘은 연약하여 범죄하기 쉬우니
                                              하나님이 받으시고 천국인을 치소서

   천사들의 찬송이 합창으로 들린다며 자녀들에게 천사들의 찬양을 들어보라고 하면서 또 함께 찬송을 부르면서 심장의 박동이 점점 멀어져 갔다.

   천사들의 호위와 함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창현 함태영 목사는 정용옥 여사의 운명 소식을 듣고 부여에서 신학강좌 도중 급히 달려 왔다.

   평상시 그 어려움 속에서도 낯빛 한 번 변함없었던 목회의 반려자 정용옥 여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다니? 주일이면 아름다운 목소리(쏘프라노)로 찬양을 하여 신도들을 은혜롭게 하던 아내, 천사 같기만 하던 정용옥 여사를 떠올리며 두 눈에 눈물이 주루루 흘러내렸다. 아니 마음속으로 한없이 울었다. 저 어린것들을 어찌할꼬? 주님! 어찌하여 저에게 이렇게 어려운 시험을 주시나이까?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신교리그리스도의교회와 충곡리그리스동의교회의 두 교회 교인들이 합심하여 꽃상여를 정성 것 만들어 출상을 하였다. 이 때 꽃상여 뒤에는 많은 교인들과 복음중학교학생 그리고 교직원들이 뒤를 따랐고,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찬송가를 부를 때마다 모두들 흐느꼈다. 뒤에는 어린 자녀들 사랑하던 신도들, 아끼던 신교리그리스도의교회와 충곡리그리스도의교회 그리고 복음중학교를 남겨두고 주님의 보좌 곁으로 떠나갔다.

   정용옥 여사의 유해는 충남 논산시 부적면 신교리3구 아개울방죽마을 뒷산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정용옥 여사의 장례식준비는 정여사의 운명소식을 제일 먼저 듣고 달려와 정여사의 눈을 감겨주었던 복음중학교 교감인 김00 목사와 교직원 학생들 신교리그리스도의교회의 현00 장로와 교인들, 충곡리그리스도의교회의 최00 집사(형제 집사), 신00 집사와 교인들, 가족으로는 창현 함태영 목사의 아우이며 복음중학교재단이사장 태중, 영어강사인 태욱, 여동생 옥기 등 여러분들이 수고를 하였다.

   이때에 막내였던 동신(1살 젖먹이 유아)은 논산의 유아원(원장 노00 장로)에 맞겨졌다가 후일 충남 공주의 장로 신00씨 집안에 양자로 입양되어 신00으로 개명하고 장성한 후 충청남도 금산군 소재 금산고등학교 와 충청남도 장항읍의 장항공업고등학교의 지리교사로서 건실한 생활을 하고 있다(1983년 11월 현재).

 

정용옥 사모의 소천 수개월 전 사진

(시)

                                              생후 8개월 막내, 그 위로 세 자매, 그 위로
                                              맏인 나 13세 어린 소년일 적에
                                              천상으로 이끌리며 천사들 함께
                                              노래하시는 울엄니 보았네
                                              차마 눈감지 못하는 두 눈의
                                              마지막 눈물도 보았었네

                                              선녀 되어 하늘 가신 울엄니
                                              내 가슴에 백합송이 심어
                                              순결한 향으로 감쌌네
                                              우리들 남매 부활의 날을 소망하며
                                              그 향을 품고 자랐네

                                              엄니 보고픈 날은
                                              백합송이 화병에 꽂아
                                              방안 가득한 젖냄새
                                              나, 엄니 품 소록소록
                                              청아한 천상의 소리
                                              엄니의 노래를 듣네.

                                              * (함동진의 시 <사모화(思母花)-백합․1>전문)

(수필)

   어머니께서 우리 어린것들의 눈에 눈물을 머금게 하고 32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후 40여 년 더 지난 세월, 회갑을 바라다보며 늙어 가는 아들이지만 어머니 생각을 하면 언제나 눈시울이 화끈거리며 마음은 울먹거린다. 어린것들 때문에 차마 눈을 못 감고 숨지기 괴로워 하시던 그 순간을 어떻게 표현하랴. 생후 8개월 된 젖먹이 막내, 그 위로 세 자매와 제일 맏이로 13세 된 소년인 나, 어머니의 운명과 함께 세상은 깜깜하게 무너져 내렸었다. 6․25전쟁으로 피난살이 객지에서 굶주림과 헐벗음의 고생이 우리들의 어미를 앗아가게 한 비운이었다.

나의 어머니 그 분은 나리꽃 같은 분이시다. 비록 체구는 작았지만 예쁘장한 여인으로 목소리가 청아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일구어 내는 가창력을 지녔었다.

   우리 가족들이 피난생활을 하던 논산 부적 충곡리는 개척교회를 시작하신 아버지를 따라 든 곳이다. 그 곳은 전쟁 중 몇 년째 계속된 가뭄과 흉년으로 기근이 극에 달해 인간들조차 고갈되어 가던 곳으로 만 내 기억 속에 남아 넘나든다. 바로 그러한 곳에서 나의 어머니는 나리꽃 같은 품새로 32년의 인생을 아물어 버리고 졌다. 그때의 아버지는 40대가 채 못된 혈기왕성한 청년말기로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성으로 복음전파에 열을 올렸다. 나는 주일날이면 산이 헐벗어 황토흙이 흘러내리는 주위의 야산에서 끈질긴 생명력으로 자생하는 나리꽃을 한 묶음 꺾어다 교회의 화병에 꽂아 강대상 위에 얹어 놓았다.

   나리꽃은 연주하는 황금나팔 모양으로 향기가 있는 듯 없는 듯하면서도 예배드리는 교회당 안의 분위기를 한껏 살려냈다. 어머니의 찬양송은 백합향이 퍼지듯 매끄럽게 신도들의 심금을 울리며 감동으로 흐르는 선율로 찾아들었다.

나리꽃은 "순결'이란 꽃말을 지녔듯 매우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을 풍기면서도 깔끔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꽃은 성경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꽃이기도 하다. 예수는 인간의 존귀함과 그 가치성을 나리꽃을 들어 비유하였다. 부강의 상징이요, 영화의 극치인 솔로몬왕의 영광으로 입은 화려한 의상일지라도 나리꽃의 아름다움과는 비교될 수 없다고 했다.(마태복음 6:28, 어느 성서학자들은 이 꽃을 팔레스타인들에서 가장 아름답게 피는 붉은 색 아네모네꽃을 지칭한 것이 아니냐는 해설도 있기는 하지만…….)

   어머니는 평안북도 선천사람으로, 조선인을 학대하는 일본인 감독을 살해한 후 도피생활을 하던 풍운아 아버지와 만나 결혼을 했다. 아버지는 잘 생긴 미남형 청년이며 바람둥이이고 술고래였다. 그러한 아버지는 외조모의 전도에 의해 기독교인으로 개종케 하고 목사가 되게 하였다.

   어머니는 아버지께서 목사가 되기까지 온갖 시련을 극복하며 내조하였고, 목사가 된 후에 가난하고 쪼들리는 살림에도 목사의 선량한 사모로 인상 한 번 흐트림 없는 후원자였다.

   나리꽃은 백합과에 속하는 초본으로 참나리라고도 부르며 산과 들에 자생하고 관상용으로 정원에 재배하기도 한다. 잎은 가는 댓잎 모양새이고, 꽃은 T자 모양의 수술 아래에 씨방을 두고 종을 닮았다. 그 당시 시골에는 흰 나리꽃을 가꾸는 집을 찾기 힘들었고 흰 나리 자체를 만나기도 힘들었다. 그러므로 야생나리꽃이 흰나리 대신에 자리매김을 했던 것이다.

   나는 나리꽃을 볼 때마다 사모하게 된다. 나의 사모화인 한국의 흰 나리꽃은 구미의 사람들에게 성모백합으로 대량 수출을 하기도 한다. 성모백합은 성모마리아가 부활한 예수의 무덤에 찾아왔을 때에 그 무덤에 피어 있었다는 전설이 있고, 그로 인해 백합은 성모를 상징하며 부활의 꽃으로 교회를 장식하는 꽃으로 각광을 받는다고 한다. 이러한 흰 나리는 한국에 있어서 외화 달러벌이 꽃으로 농촌의 소득을 증대하는데 기여하기도 한다.

   중국의 전설에, 조래산(阻來山)에서 유생인 한 선비가 수도하던 중 묘령의 여인에게 밤마다 유혹당하는 몽유병에 시달리다가 백합뿌리를 캐어 달여먹고 정신질환을 고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노이로제, 정신이상, 집착병 등을 백합병이라 하고 이를 나리뿌리로 다스리는 것이다.

   왕유라는 사람은 그리움과 사무침에 그칠 줄을 모르는 눈물을 마르게 하고자 백합을 취하였더니 눈물이 그쳤다고 한다. 나리는 지루제(止淚劑)로도 효험이 있다는 것이다. 백합은 각종 감정이나 정신이상에 효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종기나 종독에도 효험이 있다고 초본강목에는 기록하고 있다.

   최근에는 현대의 과학이 합성해 낸 기존의 항암제보다도 1백 배 가까이 더 강력한 항암효과를 지닌 성분의 물질을 백합에서 추출해 냈다는 것이다. 암이란 것은 억압을 받은 사람의 오장육부 속에서 또는 기타 인체부위 속에서 생기는 종기가 아니겠는가. 백합은 이러한 정신적 고통에서 비롯된 질환들을 치유했다는 전설이 그르지 않음을 현대의 과학도 입증한 셈이다. 다른 의미로 본다면, 예수가 인류의 질고와 죄로 인한 사망의 고통을 대신 짊어져 죽고 다시 부활한 것은 무덤 속에 피어난 백합의 전설을 합리화 시켜주는 이야기 같기도 하다.

우리 어린 형제들은 어머니를 잃고 슬픔, 배고픔, 정신적 방황 속에서 별 탈 없이 장성한 것은 나의 사모화(思母花)인 나리꽃이 저 천상에서 우리를 굽어보고 지켜주셨기 때문일 것이라고 믿는다.

   나의 사모화 나리꽃은 전세계의 사람들도 공통으로 사모하는 꽃이 아닌가 하고 생각케 된다. 백합은 한국에서는 '나리', 일본에서는 '유리', 중국에서는 '마리', 영어로는 '릴리'라 부른다. 희한하게도 '리'자로 끝나는 이름을 기진 꽃이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길쌈도 아니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다. 오늘 있다가 아궁이에 던질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신약성서 마태복음 6장 중에서)

   나는 어머님이 그리운 날에는 나의 사모화 나리꽃을 화병에 꽂는다. 방 안 가득히 퍼지는 향그런 어머니의 젖냄새…….

                                                               * (함동진의 수필 <백합꽃-사모화(思母花)>전문)

   8월 4일 존 제이 힐 선교사는 통역 역할을 하는 최순국 목사와 함께 순회차 개척교회인 신교리그리스도의교회(지금의 금성그리스도의교회)와 복음중학교를 순방하였다.

존제이 힐 선교사

 

최순국 목사  

   8월 00일 창현 함태영 목사는 경기도 광주군 분원리로 이주하여 숭실중학교 교장직을 역임함과 아울러 숭실중학교 교내 교목으로 시무하며 교육에도 열성을 다하였다. 이 때에 불행하게도 부여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와 복음중학교에 물심양면으로 후원하여 힘이 되어 주었던 아우 태중이 중병으로 사경(死境)을 헤매다가 소생케 되는 역경이 엄습했었다.

    숭실중학교 재직시에 존 제이 힐 선교사와 이신 목사가 격려차 방문하였다.  

   11월 0일 서울 마포구 도화동산에 있던 자택 1동을 그리스도의교회 전도사(여전도사 김00 씨)에게 기증하여 환원교회를 개척케 하여 오늘날 도원동그리스도의교회의 출발점이 되게 하였다.

 

숭실중학교 교장및 교목으로 재직시 사진 뒷줄 중앙 부분 검은양복

숭실중학교 교장재직시 졸업생들과 함께한 창현 함태영 목사   

숭실중학교 교장재직시 남자교사들과 함께한 창현 함태영 목사   

1955년 :

   (41세때) 서울성서신학교(지금의 서울기독대학교)를 제1회로 졸업을 하였다. 북괴군의 6.25남침전쟁으로 인하여 학사행정의차질?로 졸업장이 늦게 수여된 것으로 간주된다.(제1회 졸업생 : 함태영 조국형 김봉석 성수경 김태수 김현숙 이종윤 유현성 정희건 변승택 이홍미 최병식 1955.3.3.)

   같은 때에 막내아우인 태욱은 서울성서신학교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1955.3.3. 서울성서신학교(현 서울기독대학교) 제1회 졸업사진. 앞줄 중앙 흰코트를 착용한 이가 교장인 존 제이 힐 선교사

 

1955.3.3. 제1회 졸업생들  : 함태영 조국형 김봉석 성수경 김태수 김현숙 이종윤 유현성 정희건 변승택 이홍미 최병식  

 1957년 :

   (43세때) 전라북도 이리시에 교회 터를 매입 신축을 계획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전주로 이동 전주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 시무하였다. 전주시 인후동에 있는 반공포로 정착촌에 의무실(醫務室)을 개설 운영하면서 그리스도의교회 환원운동을 전개하였다.

1958년 :

   (44세때) 전주시의 경계지역인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면 소양리(지금은 전주시에 편입됨)에 200여 평의 대지와 100여평의 대형가옥 건물을 매입하여 전주그리스도의교회를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이곳에서 큰길 도로변에 별도의 점포를 임차하고 약종상(제약회사에서 포장한 약품인 기성약품만을 매약)을 매입하여 장자인 동진으로 하여금 운영케 하였다.

   동진은 전북일보사 서무원, 시사통신전북지사 무전사 , 합동통신 전북지사 부무전사(副無電士) 등 주경야독을 하면서 전주공업고등기술학교 무선통신학과를 졸업하고 원광대학교 법학과를 입학하였다. 그리고 교회와 주일학교도 돌보아 창현 함태영 목사의 목회에 큰 도움이 되었다.

   창현 함태영 목사의 전주 목회시절 절친한 친구사이이자 동료 목회자인 이신 목사는 수시로 찾아와 부흥집회도 열고 목회일도 협의하였었다.

전주에서 완주군 용진면 소양리로 그리스도의교회를 이전하고 부흥강사로 이신목사(사진 좌측)를 초빙하였다. 

전주 인후동에서 완주군 용진면 소양리로 그리스도의교회를 옮기고 부흥강사로 이신목사(사진중앙 모자를 쓴이)를 초빙하고 소양천으로 침례세례차 행하고 있다(창현 함태영 목사는 끝에서 2번째).  

1960년 :

   (46세때) 청주에서 양로원을 운영하며 교회를 개척하였다. 

1962년 :

   (48세때) 목회를 쉬며 시험받다. 대전시 가오동 천변(川邊)에 하늘만 가려지는 판자 움막을 짓고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키 위하여 시멘트블럭공장을 운영 중노동을 하며 시험과 연단을 받았다. 이 때에 방금 육군에서 만기 제대를 한 장자 동진이 공장 일을 열심히 도왔으나 공장운영이 부진하였다.

   환원운동을 시작한 후 타 교파주의교회로부터 목회자로서의 생활보장을 받고 육신이 조금은 편해질 수 있는 교회의 담임을 제안 받고도 물리치고, 고집스럽게도 가난의 고통을 당하는 경우에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되는 신앙노선을 지켰다.

   환운동과 환원교회사역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는 모든 시험을 이기자는 주장이었다.

1964년 :

   (50세때) 충청북도 부강그리스도의교회와 남일면 방서리그리스도의교회를 담임 시무하였다.

   자신이 청년시절에 익혀두었던 건축기술로 교회를 손수 아름답게 꾸미고 보수하면서 목회를 하였다. 한 번은 혼자서 교회의 지붕을 보수하다가 낙상하여 옆구리의 갈비뼈가 상하는 중상의 위험도 무릅썼다. 

1070년 :

   (56세때) 1970년1월 25일 장남 함동진이 최윤권 목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거행함.

1974년 :

   (60세때) 논산대명중학교(창립시명칭: 복음중학교) 설립20주년 기념일에 설립자에 대한 공로표창과 부상으로 황금메달을 기념으로 받고, 밀알이 되어 뿌리를 내리고 많은 제자를 길러낸 보람에 잠겨 어려웠던 시련과 고난과 희생의 세월을 잊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고난의 세월을 함께 한 얼굴들을 그리며 두 눈의 눈시울이 뜨거워 옴을 느꼈다.

1975년 :

   (61세때) 서울시 서대문구 홍제동 장자 동진의 집에서 동료목회자들인 이신․구강서․이종만․조충연․설하운․함명덕․임상규(이상 목사), 박정훈․백00(이상 장로) 등 친지 여러분들과 형제자매 자손들과 함께 조촐한 회갑연을 가졌다. 이날 회갑기념예배의 사회는 조충연 목사께서 축하설교는 이신 목사께서 축하찬양은 설하운 목사 사모인 김경옥 여사(부평그리스도원 및 유치원 원정)께서 맡아 하였다. 작은 회갑연의 자리였지만 기쁨으로 가득한 자리였다.  

회갑날의 창현 함태영목사 (이이를 안고있는 이)

1980년 :

   (66세때) 부강그리스도의교회와 방서리그리스도의교회 담임을 마지막으로 하여 노환을 얻어 하나님을 위한 사역인 거룩한 목회직을 은퇴하였다.

   반신마비와 당뇨환으로 투병할 때 아우인 태욱이 모시고 침 뜸(鍼灸)과 약으로 간병하며 한없는 헌신으로 형제의 우애를 바쳤다.

이 세상의 재산과 육신을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교육을 위하여 바치고 남은 것은 맨주먹과 뿌려서 썩어진 밀알 정신 뿐, 이제 마지막 병든 육신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짐 지고 가는 고난과 고통의 시험을 견디어 내는 것이었다. 오직, "감사합니다!" 이 한마디 뿐 십자가상의 가시관을 쓰시고 옆구리가 창에 찔리시고 양손과 양발에 박혀있는 대못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대속의 피를 보며 자신이 주님을 위하여 완전히 썩어진 밀알이 되었는지 확인하였다.(평생의 좌우명 <生則福音 死則麥粒> : 살아서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죽어서는 주님의 분부대로 한 알의 밀알로 썩는다. 마28:19~20. 행1:8. 요12: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1983년 :

   (69세때) 11월 28일 01시 30분 충청남도 대전시 가오동(지금의 대전광역시동구 가오동)에서 주님의 보좌 곁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운명한 후에는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있는 듯 화평하고 깨끗한 얼굴의 모습을 하여 가족들이 기이히 여기고 평안을 얻어 끊임없이 찬송을 하였다.

   김치연 목사께서 위로의 유가족 예배를 인도되었고 이춘식 목사의 집례로 영결예배를 드렸다. 출상 후 하관예배는 이영호 목사의 집례로 장례절차가 마무리되었다.

   묘소는 전리남도 순천시 외서면 장산리 12번지 선영에 소재하고 있다.

   아우 태호는 형인 창현 목사의 무덤 앞에 춘란을 심어 난초로 십자가를 만들어 사시사철 늘 푸른 십자가가 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형님. 이산의 과수에서 나오는 복숭아 감 밤 을 마음 것 드시면서 편안히 쉬십시요"하며 눈시울을 붉히며 유족인 조카들을 등뒤로 돌리고 눈물을 감추었다. 형인 창현 함태영 목사를 참으로 존경하고 사랑하였다. 창현 함태영 목사도 장자인 자신을 대신하여 고향을 지키며 부모를 섬기며 가산을 일구는 어질고 어진 아우 태호를 늘 고맙게 생각하여 왔었다.

   이상과 같이 창현 함태영(唱泫 咸泰英) 목사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의 사명은 물욕과 탐함이 없이 한국그리스도의교회와 기독교환원운동사에 있어서 순교자적 사도의 정신으로 남이 모르게 그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일생을 주님께 헌신하였다.

   일제로부터 8.15광복을 맞이하고, 6.25전쟁 북한인민군의 남침전쟁으로 인한 암흑시기에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전쟁을 겪고 폐허화된 국토 위에서 묻 사람들이 지나치게 생에 탐하여 서로를 미워하고 보복하며 속이고 저주하던 그 시기에 이 사회에서는 윤리와 도덕과 종교가 땅에 떨어져 사랑이 짓밟히고 있었다.

   창현 함태영 목사는 이때에 십자가를 메고 복음을 전하며 밀알이 되려고(生則福音 死則麥粒) 기도하고 찬송하며 헌신하였다.

   국민들은 무지하고 가난이 찌든 시기에 불신자들은 교회를 향한 핍박이 극심하였다. 교회를 연애당이라 부르고, 교회에 다니는 청소년들을 연애쟁이라 불러 교회를 비윤리적 부도덕한 장소인 것처럼 지칭하며 핍박하였다. 그리고 교회에 다니는 집안은 모두 망한다고 비방하녀 핍박을 더욱 가하였다.

   예배시간에 신도들의 신발을 감추고 유리창에 돌을 던지며 오물을 끼얹기도 하였다. 혹시 신도들 중에서 병이 들거나 죽게 되면 예수를 믿어 망한 것이라고 비방을 하였다.

   전등이 없는 석유초롱불 밑에서, 겨울이면 난방이 없는 냉방에서 신도들과 함께 기도하며 예배를 드렸다. 하루에도 수 십리 산을 넘고 물을 건너 험한 길을 밤낮으로 걷고 뛰며 전도하고 심방을 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때로는 불량배들의 핍박과 위협을 받으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열심히 뛰었다. 십자가를 메고 주님께서 가신 그 고난의 길을 따라.....

   이때에 창현 함태영 목사는 복음으로 교육으로 그 해결방안을 찾으려고 동분서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면서 생의 진리 곧 복음을 전파하였다. 때문에 때로는 자녀들 인척들 친구들 친지들로부터 너무나 지나치지 않느냐는 비난도 수 없이 받았다. 이때마다 창현 함태영 목사는 감사하는 기도와 찬송으로 더욱 힘을 내어 사명을 감당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서 생존시 좌우명으로 삼았던 "살아서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죽어서는 주님의 분부대로 한 알의 밀알로 썩는다(生則福音 死則麥粒)" 를 실천함과 아울러 그리스도의 교훈을 따랐다.

   교회를 지키며 교육과 복음을 전하는 일을 자신의 이익과 명예와는 아무러한 관계없이 오직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일념으로 헌신을 하였다.

   봉사와 헌신의 일생, 뛰며 달리는 활동의 생활,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생이었다.

창현 함태영 목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운명하였을 때에는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란 말 그대로였다. 손수 찍어 만든 시멘트 블록 몇 장으로 그것도 남의 땅 위에 가까스로 손수 쌓아 올려지어 비가 새는 움막같은 거처였다. 지니고 있던 재산이라고는 손때 묻은 낡은 찬송가와 셩경책 그리고 몇 권의 신학서적 뿐이었다. 그리고 보람으로 간직했던 복음중학교 창립20주년 기념일에 설립자공로로 받은 황금메달도 치료비에 보태기 위하여 이미 팔아 없어진 터였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참으로 육신을 위한 모든 것을, 한 알의 밀알이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한 밑거름으로 주님께 다 헌신하였다.

   이제 창현 함태영 목사의 뜻이 이루어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한국의 기독교환원동사와 더불어 사랑의 실천이 메마르지 않을 것이며 갈보리 산상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더욱 빛날 것이다.

1984년 11월 27일 홍제중앙그리스도의교회 담임 조충연 목사가 창현함대영목사 소천 1주기 추모예배를 함동진 댁에서 집례함.

   ◎ 2007년 한국그리스도의교회 75주년 기념대회(The 75th Aniversary Covention of Korea Christian Churches and churches of Christ)에서 환원상: [환원헌신상(메달)] 수상.

                                              어리석은 놈, 바보
                                              예수쟁이, 멍청이 놀림을 받고
                                              신사참배 거부하다가
                                              쇠고랑 차고 감옥에 누웠어도
                                              야곱의 돌베개 침방으로 여기고

                                              돌은 놈, 미치광이
                                              예수쟁이, 정신병자 비아냥 받고
                                              공산주의 거부하다
                                              친미파 반동분자로 몰려
                                              내무서 감방에 앉았어도
                                              골방의 기도실로 여기고

                                              알거지같은 놈, 비렁뱅이
                                              예수쟁이, 거러지 손가락질 받고
                                              배고파 기진하고
                                              누더기 걸치고 거친 침실이었어도
                                              볶음을 전할 수 있다면
                                              어디든 천국으로 여기고

                                              자나깨나 볶음전도와 교육, 환원운동으로
                                              일생을 살아가신 나의 아버지
                                              창현 함태영 목사
                                              남기신 유산은 오직
                                              낡은 성경책과 찬송가 단 한 벌
                                             그리고 교훈
                                              "生則福音(생즉복음)
                                              死則麥粒(사즉맥립)"

                                              환원운동이여* 빛나라
                                              떨구어진 밀알
                                              천배나 만배나 더 결실하소서!

                                               * (함동진의 시 <사부곡(思父曲) -나의 아버지 창현 함태영 목사 >전문)

   위의 <창현 함태영 목사 략전(전기)>는 창현 함태영 목사 탄생77주년일인 1991년6월11일(음력4월30일) 초판 발행하였고, 재판은 창현 함태영 목사의 아우인 태욱의 증언과 협의를 거쳐 창현 함태영 목사 탄생79주년일에 수정 증보되었다 .

                                   장자 장산 함동진(長山 咸東振 <炯振 : 咸氏大同譜인 甲子譜上登載名>) 엮고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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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현 함태영 목사 카페<카페자료실>란] http://cafe.naver.com/hamdongjin.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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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그리스도의교회 환원운동)  송암 함봉표 지사(환원운동의 지원자)

        송암 함봉표 지사(환원운동의 지원자)
                      송암 함봉표 지사에 관한 글(詩文 등)은  http://hamdongjin.kll.co.kr/ 

                    또는   http://cafe.daum.net/hamdj?t__nil_cafemy=item  에서 검색하여 볼 수 있다.


   
     송암  함봉표 지사

  송암 함봉표 지사는 창현 함태영 목사의 선친이시다. 그는 독실한 유림이면서도 기독교로 개종한 함태영 목사의 구령사업에 적극 지원하는 아량을 베풀었다. 창현 함태영 목사가 해방정국과 6.25전쟁의 후유증으로 피폐된 사회환경에서 기독교를 전파하고 교육사업을 하며 기독교환원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송암 함봉표 지사의 후원의 덕이었다고 하여도 과장이 아니다. 그러므로 함봉표 지사는 그리스도의교회의 환원운동지원자이며 間接功勞者임에는 틀림이 없음을 이에 밝혀둔다.

          송암 함봉표 지사의 약전                  

(함봉표-年譜)

(약력)
송암 함봉표의 년보(松庵 咸鳳表의 年譜) 

                                                                                    함동진

1889년 8월 14일 : ☞ 송암 함봉표는 정언관, 의관(正言官, 議官)인 父 명사 함장기(明沙 咸莊基 - 基昊, 兆海)와 母 파주 염씨(波州 廉氏)와의 사이에 七子女 중 次男으로 전남 장성군 황룡면 삼룡리(全南長城郡黃龍面三龍里 - 지금의 와룡리-臥龍里)에서 출생하다.

1894년 : ☞ 동학혁명(東學革命)을 겪다.

1895년 : ☞ 연옹 박선생 문하(然翁 朴先生 門下)에서 2年間 수학(受學)하다.

1897년 : ☞ 죽은거사 김대규 문하생(竹隱居士 金大奎 門下生)으로 2年間 受學하다.

1899년 : ☞ 朴然翁 先生 門下에서 2年間 수학(受學)한 後 16세가 될 때까지 가내(家內)에서 독학(獨學)을 하다.

1903년 : ☞ 광산 김영호(光山 金永鎬) 선생 門下에서 受學하다. 이 때에 社會가 극(極)히 혼란(混亂)하여 의지(意志)를 굳게하다.

1907년 1월 : ☞ 장성 황룡면에서"<생즉의사 사즉의귀-生則義士 死則義鬼>-살아서는 의(義)를 위(爲)하여 싸우는 투사(鬪)士요, 죽어서도 義로운 귀신(鬼神)이되어 싸운다."라는 좌우명(座右銘)으로 의지(意志)와 정신(精神)을 삼아 분연(憤然)히 일어나 자위대(自衛隊)를 조직 인솔(組織 引率)하여 호남의용장(湖南義勇將)인 참봉 김태원 막하(參奉 金泰元 幕下)에 가담하다.
      ☞ 창평 무등촌에서
          의병장 김태원 휘하(義兵將 金泰元 揮下)에서 창평 무등촌 전투(昌平 無等村 戰鬪)에 참전, 외적 길전부대(參戰, 倭敵 吉田部隊)와 혈전분투(血戰憤鬪)하여 적장 길전(敵將 吉田-요시다)와 그 부대(部隊)를 총몰살(總沒殺)하고 무기(武器)를 노획하는 전과(戰果)에 가담(加擔)하다.
     2월 : ☞ 장성 황룡면에서장성군 황룡면 월암리(月岩里-鼓岩) 전투(戰鬪)에 참전(參戰)하여 일주야간 일본군부대(一晝夜間 日本軍部隊)와 대혈전(大血戰)을 벌여 日本軍을 총몰살(總沒殺)하는 전과
(戰果)에 가담(加擔)하다.
     3월 : ☞ 羅州·靈岩·江津·海南에서 군자금조달운반책(軍資金調達運搬責)의 命令을 받들고 義兵 3人을 거느리고 羅州·靈岩·江津·海南 等地를 巡廻, 義兵支援을 꾀하는 元老들의 家宅을 秘密裏에 訪問, 軍資金受領調達의 任務를 完遂하다.
     6월 : ☞ 光州(光山) 魚登山에서光州(光山) 魚登山 戰鬪에 參戰하여 日兵과 血戰, 追擊하던 中 不幸하게도 義兵將 金泰元 將軍께서 戰死하므로 哀慕하고 痛哭하다.
같은 때 海山 全垂鏞 將軍과 痴齊 金 將軍이 義兵을 이르켜 軍士를 모으므로 이에 加擔하다.
     10월 : ☞ 光州(光山) 大峙里에서光州 大峙里 戰鬪에 參戰하여 日兵과 大血戰을 벌이며 追擊하여 日兵을 總 沒殺하고 武器를 노획하는 戰果에 加擔하다.
福興面 內東里에서같은 때, 淳昌의 義士 申昌學 將軍이 軍士를 모아 福興面 內東里에서 義兵을 指揮하므로 이 戰鬪에 參戰하여 日兵과 大血戰을 벌이며 追擊하는 戰果에 加擔하다.
     11월 : ☞ 長城 自隱谷에서長成의 自隱谷戰鬪에 參戰, 日兵과 大血戰을 벌이며 追擊하는 戰果에 加擔하다.
     12월 : ☞ 羅州 古幕浦에서 羅州의 古幕浦 戰鬪에 參戰, 日軍駐屯所를 包圍하여 攻擊하다. 이 戰鬪에서 先鋒將 鄭 參尉의 指揮로 連戰連勝의 攻擊이 繼續되었으나 不幸하게도 先鋒將 鄭 參尉의 戰死로 哀慕하다.

1908년 : ☞ 日將 西村(니시무라)의 捕虜가 되어 拷問을 당하면서도 "生則義士 死則義鬼-살아서는 義로운 鬪士요, 죽어서도 義로운 鬼神이 되어 싸운다."라는 義兵 加擔時의 決意를 되세기며 意志와 節介를 屈하지 아니하다.(木浦刑務所 3個月 受刑) 이로써 가정이 敗家(破産)되어 훗날을 期約하고 杜門不出 隱居生活을 하던 中 參奉 金平淑의 次女인 金月林과 結婚을 하다.

1910년 : ☞ 大韓帝國의 國運이 不幸하여 韓日合邦이 되었다는 消息을 듣고 땅을치며 哀痛학 痛哭하다.

1911년 : ☞ 珍原面 栗谷里로 移住하여 農業에 熱中하는 한편 松沙 奇宇萬(蘆沙 奇正鎭의孫으로 義兵을 이르키고 日本을 排斥한 人物) 先生을 따르며 隱居生活을 계속하다.(義兵決意를 못버림).
(註 : 松沙 奇宇萬은 蘆沙 奇正鎭의 손자이고, 노사 기정진은 송암 함봉표의 조부 죽포 함병후(선욱)의 스승이되고, 송사 기우만은 송암 함봉표의 부친 명사 함장기(기호)와 교유함).
     ☞ 같은 때, 大聖敎春秋大祭를 맡음과 아울러 河西 金麟厚 先生의 長成 筆岩書院 春秋大祭를 맡아 執禮하므로 民族正統文化를 지키는데도 앞장서다.
     ※ ☞ 刑務所 出所後에도 日本 憲兵과 巡査의 繼續監視로 行動과 나들이가 自由롭지 못하다. 이로서 生活苦가 따르고 잦은 移住가 있게 되다.

1913년 10월 15일 : ☞ 부친 함장기(父親 咸莊基, 기호-基昊, 조해-兆海)께서 患憂가 있어 誠心을 다하여 약수발을 하였으나 別世하므로 草土에서 3年間 謹愼으로 보내다.

1914년 5월 24일 : ☞ 장자 태영<영주,창현>(長子 泰英<英柱,唱泫>)을 낳다. <註>: 창현 함태영 목사(唱泫 咸泰英 牧師 1914. 5. 24∼1983. 11. 28 조선일보 인터넷 인물 DB에 수록 - 자세한 인적사항은  http://hamdongjin.kll.co.kr/  <문학서재>詩人 함동진의 홈페이지 및 http://cafe.daum.net/hamdj 함동진의 카페 참조.  창현 함태영 목사는 함동진의 父이다.

1915년 : ☞ 동북면 남산리(東化面 南山里)로 이주하여 수년간 농업(數年間 農業)을 경영(經營)하다. 이 때에도 춘추성제(春秋聖祭)를 계속 집례(執禮)하다.

1918년 : ☞ 자산(自産)과 자비(自費)로 本家에 사립학교(私立學校)를 설립(設立)하고, 교사김종운(敎師 金鐘雲)을 임명(任命)하여 자신-봉표(自身-鳳表)가 校長이 되었고, 생도(生徒)의 수(數)는 백여명(百餘名)으로 수년간 교육(數年間 敎育)을 하다.

1919년 3월 1일 : ☞ 기미(己未) 3·1 독립운동(獨立運動)이 일어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를 천지(天地)가 진동(振動)하도록 높이 부르고, 민족(民族)을 교육(敎育)으로 깨우쳐 항일정신(抗日精神)을 기르는데 힘쓰다.
     7월 26일 : ☞ 모친(母親)이 별세(別世)하여 동귀산 고조묘소(東貴山 高祖墓所) 아래 부친묘(父親墓)와 쌍묘(雙墓)로 합장(合葬)하고 호천망극(昊天罔極-하늘같이 가없는은혜)하며 초토(草土)에서 근신(謹愼)하다.

1922년 : ☞ 군(郡)의 사회유지회의 요망(社會有志會議 要望)에 의(依)하여 소작상조회 감사(小作相助會 監司)에 피선(被選)된 後, 회장 김경환(會長 金璟煥)씨의 협력하(協力下)에 전답지세(田畓地稅)를 소작인(小作人)이 선세(先稅)로 부담(負擔) 하느냐, 부호(富戶)가 자진납부(自進納付) 하느냐는 일로 각처(各處)의 지주(地主)들 간(間)에 언쟁(言爭)과 다툼이 있으므로 각면(各面)에 설명회(說明會)를 개최(開催)하여 지세(地稅)는 완전(完全)히 지주(地主)의 부담(負擔)으로 하여 소작인(小作人)을 보호(保護)하고 小作人의 離農을 防止하다.
또한 小作料를 6割 增收하느냐 3割 增收하느냐는 일로 富戶들과 討論을 벌여 極力 理解시켜 3割 增收로 完全決定을 봄으로 小作農民을 保護하다.
     ( 註 : 평생동안 어려운 문제발생시마다 언제나 약자편에서서 선의적으로 정의롭게 해결하므로 후일 "변호사"라는 별명이 따름).

1923년 2월 : ☞ 2月에 求禮地域方面을 돌아보다.
     5월 : ☞ 5月에는 구례 봉서리(求禮 鳳西里)로 移住, 土地를 개간 농업(開墾 農業)을 經營하던 中 7年間이나 天災로서 한발(旱魃)이 들다.

1929년 : ☞ 繼續된 凶年으로 因한 生活苦로 不得已 順天郡(昇州) 外西面 長山里 12 番地에 새로히 기반(基盤)을 造成하여 移住하다. 이곳 長山里에서 田畓을 開墾하며 "自力更生"의 意志를 圖謀하여 農業을 經營하다.

1932년 : ☞ 地域區 農民會 會員들의 要望에 依하여 自力更生委員長에 피선(被選)된 後에 뜻하는 바 民風을 改善하고, 農業方法을 改良하며, 靑少年 兒童을 敎育키 爲하여 私設學習場을 運營 民族意識을 고취(高趣)하다.
이로써 向後 13年間 뽕나무 심기와 누에치기를 장려(奬勵)하고, 나무심기를 장려하며, 퇴비증산(堆肥增産)을 奬勵하고, 畜産奬勵運動을 積極 展開하며, 지도하다.

1933년 : ☞ 武科하여 주부-증 병조참판(主簿-贈 兵曹參判)을 지내고 임진왜란(壬辰倭亂)때 義兵을 이끌고 도원수 권율(都元帥 權栗)을 따라 행주전투(幸州戰鬪)에서 戰死하고 선무원종 종훈(宣武原從 從勳)에 참여한 수정공 함덕립(水亭公 咸德立 -승주·구례·보성 地域의 江陵咸氏一家가 모시는 派先祖)의 墓所 神道碑 設立을 위한 모임을 發起한 바 종제 우현(從弟 宇鉉)과 종순(鐘淳)이 協力하여 卽時 設立하고 碑를 刻하고 이름을 넣다.
이러써 日帝末期에도 倭에 抵抗하는 뜻으로 壬辰倭亂 義兵參戰 戰死者 先朝의 碑를 세워 뜻을 기리다.
한편 江陵咸氏 大同譜編纂 南道有司로 委任되어 任務를 遂行하다.

1934년 : ☞ 地域區民의 모임인 애림계(愛林契)의 長에 被選되다.
한편 죽천리 都門山에 各祭位의 土地가 不足하여 從弟 宇鉉의 協力과 誠意로 沓 40落을 買入하여 보제(補祭)하므로 祖上에 對한 孝를 發揮하다.

1935년 : ☞ 農民들의 모임인 공려회(共勵會)의 長과 식산계(殖産契)의 主事로 被選되어 營農事業을 改善하여 이에 必要한 資金을 조달하다.

1936년 : ☞ 竹山里 6代祖墓祭位의 沓 2筆地와 증조산위(曾祖山位) 土地 沓 1筆地, 전 1筆地, 垈地 1筆地를 買入하여 호제(護祭)하다.

1937년 : ☞ 農民指導上 必要에 依하여 長城郡의 뽕나무農園의 누에치기를 視察하고, 光州의 모범농장(模範農場)과 방직공장(紡織工場), 제사공장(製絲工場) 等을 視察하다.

1938년 : ☞ 外西國民學校 學務委員에 被選되어 3回 連任하였으며 向後 6年間 校務에 힘쓰다.
     3월 : ☞ 水原의 模範農場을 視察하다.
              ☞ 京城(서울)의 박물관(博物館), 百貨店, 여러 工場 等을 視察하다.
              ☞ 開城과 평양(平壤)에서 채종재배법(菜種栽培法)을 視察하고 各種物産地의 一般工場을 視察하면서 各 名勝地를 觀光하다.
              ☞ 新義州에서는 제지공장(製紙工場), 木材工場, 其他 模範生産地를 視察하다.
              ☞ 滿洲 安東에서는 지나박물관(支那博物館)과 重要物資生産工場을 시찰하다. (<註>: 1930年代 우리 나라는 오늘날과 같이 交通이 發達하지 못한 때에 長距離 坊坊曲曲을 여행한다는 것은 經濟的 負擔도 클 뿐만 아니라 보통사람으로서는 해내기 어려웠던 일이다. 松庵 선생은 八道江山은 勿論 滿洲까지 누비며 視察旅行을 해낸 것은, 많은 見聞으로 新知識을 쌓아 農民啓蒙을 하겠다는 强한 意志의 人間性을 잘 나타내어 주고 있다. )

1939년 : ☞ 學術指導, 講習指導 功勞로 表彰을 받다.
     6월 21일(陰 5월 4일) :長孫 東振(唱泫 咸泰英의 長子) 태어나다. <註>: 함동진 시인-「문학서재」홈페이지 http://cafe.daum.net/hamdj

함태중(咸泰仲 -그리스도의교회 환원운동 숨은 후원자)

  창현 함태영 목사의 셋째 아우인 함태중(咸泰仲)은 교회의 직분이나 외모로 보아 열렬한 신앙인으로 비춰 보이지 않으면서도 창현 함태영 목사의 구령(救靈)사업에 적극적인 후원자였고, 한국 전통적인 형제우애를 발로한 분이다.
  6.25를 전후한 시기에 폐허와 한발과 기근으로  한국인들의 생활사정은 전반적으로 열악하고 피폐하였다.
  함태중은 창현 함태영 목사를 뒤따르며 아래와 같이 교회개척이나 운영에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1951년 전남 광주시에서의 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 운영과 병설된 교회를 운영할 때에 적극적으로 헌신.
    *1952년 부여 귀암면 합송리 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 운영과 병설된 교회를 운영할 때에 적극적으로 헌신.
    *1952년 논산 부적면 충곡리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하고 운영할 때에 적극적으로 헌신.
    *1952년 논산 부적면 신교리그리스도의교회(명칭변천 : 탑정-> 현재의 금성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하고 운영할 때에 적극적으로 헌신.
    *논산 부적면 신교리에 개설한 복음중학교에 재정적으로 적극적 후원.
  함태중이 헌신적으로 후원하였다함은 금전적인 지원은 물론이지만 특히 6.25전란 중에는 식량조달이 큰 문제였다. 신학교와 중학교의 교수와 교사들에게 제공하는 식량의 문제, 교회의 부흥회와 행사에 오가는 목사들의 접대에는 재정적 부담이 컸다.
  함태중 그는 자기를 위한 재물은 전혀 축적하지 않고 오직 창현 함태영 목사의 구령사업에만 전력하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사진에서 뒤 右측의 분이 함태중(咸泰仲 -검은회색양복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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