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Material on Korean Christian Church or the Church of Christ

조동호 목사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는 한자로 ‘기독교회’란 뜻으로써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는 교회(Church of Christ)란 뜻이고, 둘째는 교회의 구성원인 그리스도인을 주체로 삼는 교회(Christian Church)란 뜻이다. 이렇게 교단명칭을 정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전 세계 모든 주님의 교회들이 이 ‘그리스도의 교회’(Church of Christ)란 통일된 이름아래서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전 세계 모든 주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인’(Christian)이란 통일된 이름아래서 일체가 되는 모범을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범을 바르게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는 올바른 행동지침이 필요한데 그것이 신약성경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두 가지 운동을 펼친다. 첫째는 ‘그리스도인 운동’(Christian Movement)이요, 둘째는 ‘신약성경교회 운동’(New Testament Christianity Movement)이다. 우리는 이러한 운동을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믿어 ‘환원운동’(Restoration Movement)이라고 부른다. 200년전 이 운동을 처음 시작한 미국과 캐나다에는 2만3천여 교회와 4백만 성도들이 있고, 최근에 와서 우리나라에 알려지기 시작한 켄터키 주 루이빌 시에 있는 주일평균 1만8천명이 모이는 ‘사우스이스트 그리스도의 교회’(Southeast Christian Church)가 대표적인 교회이다. 우리나라에는 5백여 교회가 전국에 흩어져 있고, 교육기관으로는 서울에 그리스도대학교와 서울기독교대학교, 등촌 중학교, 대전에 한민대학교(구 한성신학교), 부산에 동서대학교와 경남정보대학 등이 있다.

이 운동이 처음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일본주재 미국인 윌리엄 커닝함(William D. Cunningham) 선교사가 1924년 10월에 파송한 한국인 전도인 이완건에 의해서였다. 자생적으로는 구세군 사관 출신의 성낙소 목사가 1927년 충남 부여군 세도면 화수리에 '기독지교회'(基督之敎會)를 세웠고, 1931-1932년까지 일 년여 동안 커닝함 선교부의 조선포교책임자로 활동하였으며, 1932년부터는 이인범 전도인이 조선포교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35년에는 최초로 미국인 제이 마이클 쉘리(J. Michael Shelley)가 선교사로 입국하여 일 년 남짓 머물렀고, 1936년에는 커닝함 선교부에서 일하던 죤 채이스(John T. Chase) 선교사가 입국하여 4년간 활동하였으며, 1939년에는 힐 요한(John Hill) 선교사 부부가 입국하여 채이스 선교사의 뒤를 이어 1971년까지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1930년부터는 하와이 이민자이자, 3.1운동민족대표로 서명까지 했던 독립 운동가이며,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와 게레트 신학교를 나와 한국에서 감리교 목사로 활동했던 동석기 전도자가 재차 도미하여 1929년 신시내티 기독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1930년 11월부터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1936년부터는 역시 감리교 출신이자, 일본 관서학원 신학부와 미국 밴더빌트 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한 강명석 전도자가 합세하였고, 연희전문학교 제1회 졸업생이며, 한 때 <신학세계>의 편집을 맡아보았던 최상현 목사가 가세하였다. 50년대 이후에는 감신대학교와 밴더빌트 대학교 신학부를 마친 이신 박사 등이 합세하여 활동하였으나 왜정말기의 어려운 정세와 6.25사변으로 선교사들이 철수하는 등 발전하지 못하다가 50년대에는 장로교 목사였던 김은석 목사를 비롯한 수많은 지방의 교역자들이 합세하여 남부지방에 큰 부흥의 역사를 자생적으로 이뤘으며,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선교사들인 힐 요한(John Hill), 해롤드 테일러(Harold Taylor), 최수열(L. Haskell Chesshir), 말콤 파수리(Malcolm E. Parsley), 배도은(Gorden Patten), 미국에서 공부한 최윤권 목사와 이신 목사와 국회부의장을 지낸 장성만 목사, 그리고 70년대에는 역시 미국에서 공부한 김찬영 목사 등이 가세하여 대학들을 세우고 목회자들을 배출함으로써 비로소 발전의 기회를 타게 되었다.

대전에는 1959년 개교한 한성신학교를 통해서 초교파적으로 수많은 목회자들을 배출하였으며, 이런 영향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일찍부터 대전기독교연합회에 회원교단으로 가입하여 협력하였으며, 1988년에 김찬영 목사, 1995년에 편무해 목사가 연합회 회장직을 역임하였다.

특히 38대 연합회 회장으로 수고하셨던 김찬영 목사는 한성신학교 교장, 충청남도 도정자문 위원, 대전직할시 시정자문 위원, 대전 YMCA 이사장, 사회복지법인 대전 생명의 전화 설립 이사장, 충남 경찰국 교목, 국제 와이즈멘 한국서부 지구 총재 등을 역임하였으며, 1998년 이후로는 중국에 거주하면서 중국에 장애자학교와 외국어학교, 북한에 빵공장과 염소목장, 염소젖가공공장, 그리고 베트남에 고아원 등을 설립하여 운영하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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