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거짓 메시아 샤베타이 제비(Shabbetai Zevi)에 관해서
On Shabbetai Zevi, a Jewish False Messiah

번역 조동호 목사


자료: http://www.users.globalnet.co.uk/~slocks/asym/zevi.html

 

아래의 글은 저자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스티브 롴스(Steve Locks)라는 사람의 홈페이지에 연결된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일찍이 메시아를 자칭한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발 코크바와 여기서 소개하는 샤베타이 제비라는 사람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예수님도 이 범주에 넣어서 생각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도 거짓 그리스도를 경계할 것을 많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발 코크바와 미륵에 관한 글들은 본 연구소 홈페이지에 소개된 글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의 자손 유대인의 왕 메시아(마 4:1-11)
한국 기독교 성장에 미친 미륵신앙의 영향
이스라엘의 월력

1666년 한 유대인 메시아는 구원이 가까웠다고 선포하였고, 전 세계 유대인들에 의해서 열광적으로 받아드려졌다. 샤베타이 제비는 1626년 소아시아 서머나에 사는 부유한 세파르딕(역자 주: Sephardic -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자손들을 가리키는 말) 유대인에 의해서 출생하였다. 그는 성장하면서 조울증으로 의심될만한 이상한 성향들을 보였다. 그는 깊은 좌절의 시기들을 겪었고, 가족과 멀리 떨어져 격리된 채 살았다. 이런 성향들은 무아경에 근접하자 의기양양하게 지속되었다. 조울증으로 의심되던 시기에 그는 때때로 놀랍게도 고의적으로 모세의 율법을 어기곤 했다. 그는 금지된 음식을 공개적으로 먹곤 했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입에 올렸으며, 특별계시로 그렇게 하라는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이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아라고 믿었다. 결국 랍비들은 그의 행동을 더 이상 보아 넘길 수가 없었고, 1656년 그들은 샤베타이를 도시에서 추방하였다. 그는 오토만 제국의 유대인 공동체들 사이에서 떠돌이가 되었다. 이스탄불에서 이 조울증 환자는 떠들고 다녔는데, 토라가 폐지되었노라고 선포하였고, “금지된 것을 허락하시는 오 주 우리 하나님, 복 받으옵소서.”라고 크게 외쳤다. 카이로에서 그는 1648년 폴란드에서 자행된 유대인학살 때 피신하여 매춘부로 살고 있던 한 여인과 결혼함으로써 스캔들에 휩싸였다. 1662년 샤베타이는 예루살렘으로 향했고, 이 시기에 그는 조울증을 앓고 있었고, 귀신에 사로잡혀 있음이 틀림없다고 믿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에서 그는 젊고 박식하고 축귀(逐鬼)에 능숙한 나단(Nathan)이란 랍비에 관해서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가자(Gaza)에 살 집을 찾기 시작했다.

샤베타이와 마찬가지로 나단도 이삭 루리아(Isaac Luria)의 카발라(역자 주: Kabbalah - 중세 유대교의 신비사상)를 연구하였다. 그가 서머나에서 문제의 유대인을 만났을 때, 그는 그에게 말하기를, 그가 귀신들린 것이 아니며, 그의 침울한 좌절은 그가 진정 메시아임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가 이 깊이에까지 빠졌을 때, 그는 메시아 자신에 의해서 오로지 구출될 수 있는 켈리포트(역자 주: kelipoth - 껍데기, 껍질)의 영역에서 신성한 불꽃들을 방사하면서 다른 세계의 악한 권세들을 대항하여 싸우고 있었다. 샤베타이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구원을 성취하기 전에 먼저 지옥에 내려가야 할 사명을 가졌다. 처음 샤베타이는 이것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으나 결국 나단의 미사여구(美辭麗句)가 그를 설득하였다. 1665년 5월 31일 그는 갑자기 조울증이 주는 어떤 기쁨에 사로잡혔고, 나단의 격려에 힘입어, 그는 그의 메시아적 사명을 선포하였다. 지도급의 랍비들은 그의 모든 주장들을 위험한 난센스일 뿐이라고 해산시켰지만, 팔레스타인의 많은 유대인들이 샤베타이를 추종하였고, 그들 가운데서, 빠른 시기 안에 다시 결집될,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을 심판할 열두 제자들을 뽑았다. 나단은 오토만 제국의 여러 도시들에는 물론 이탈리아, 화란, 독일, 폴란드에 편지들을 띄어서 유대인 공동체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였다. 그러자 메시아가 출현했다는 소식에 대한 흥분이 유대인 세계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수세기에 걸친 박해와 추방은 유럽의 유대인들을 주류에서 고립시켰고, 이 일련의 건강치 못한 상태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미래의 세계는 유대인에게만 의존하게 될 것이라고 믿게 만드는 조건이 되었다. 스페인의 추방된 유대인들의 후손들인 세파르딤(Sephardim)은 이삭 루리아의 신비사상인 카발라를 그들의 가슴 속 깊이에 담았고, 많은 사람들이 임박한 종말을 믿기에 이르렀다. 이 모든 것들이 샤베타이 제비의 이단이 형성되는 것을 도왔다. 전 유대인 역사를 통해서 많은 자칭 메시아들이 나왔지만 그 어느 누구도 샤베타이처럼 대중적인 지지를 일찍이 받아본 적이 없었다. 샤베타이에 관해서 유보적인 태도를 가진 유대인들이 그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위험하게 되었다. 샤베타이의 지지자들은 부유한 사람, 가난한 사람,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을 막론하고 모든 계층에 유포되어 있었다. 팸플릿과 같은 전도용지들이 영어로 화란어로 독일어로 이탈리어로 기쁜 소식들을 전하였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는 그를 치켜세우는 대중행렬들이 있었다. 오토만 제국에서는 예언자들이 거리를 오가면서 샤베타이가 옥좌에 앉은 것을 보았노라고 환상을 설명하였다. 모든 업무가 정지되었고, 불길하게도 터키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안식일 기도들에서 술탄의 이름을 빼버리고 대신에 샤베타이의 이름을 넣었다. 결과적으로 샤베타이가 1666년 1월에 이스탄불에 도착했을 때, 그는 반역죄로 체포되었고, 갈리폴리(Gallipoli)에 투옥되었다.

수세기 동안의 박해와 유배와 굴욕이 있은 후에 희망이 있었다. 전 세계의 유대인들은 내적인 자유와 해방을 경험하였다. 그것은 마치 카발론자들이 세피로트<역자 주: Sephiroth - ‘천체(天體)들’, ‘숫자들’, ‘방사들’을 의미하는 말의 복수형이다. 카발론자들은 생명나무라 불린 도식을 사용하였는데, 이 도식에는 세피로트를 상징하는 열 개의 원들이 포함되어 있다. 세피로트에는 그들의 원형적 의미에서 고려된 1부터 10까지의 숫자가 있다. 각각의 세피라(단수형)는 원형적 개념이다. 또한 세피로트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방사들을 상징하며, 창조의 과정을 기술한다. 물질세계에서 그것들은 고전적인 개념에서 천체들을 상징한다.>의 신비한 세계를 깊이 명상할 때 수분동안 경험했던 무아경과 유사한 것이었다. 이제는 이런 구원의 경험이 단순히 더 이상 몇몇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며, 보통 사람들이 누리는 소유물 같았다. 처음으로 유대인들은 그들의 삶에 가치를 갖게 됐다고 느꼈고, 구원은 더 이상 미래에 대한 애매한 희망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실제적이고 충만한 의미였다. 구원이 도래했다! 이 갑작스런 반전이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만들어내었다. 전체 유대인 세계의 눈들이 갈리폴리에 고정되었다. 거기서 샤베타이는 심지어 그의 체포자들에게조차 인상을 심어주었다. 터키의 장관이 그를 집으로 모셔 상당히 편하게 지내게 해주었다. 샤베타이는 그의 편지에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니라. 샤베타이 제비.”라고 서명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가 심문을 받기 위해서 이스탄불로 이송되었을 때, 그는 다시 한 번 조울증에 넘어졌다. 술탄은 그에게 이슬람에 개종하든지 죽음을 선택하든지 할 것을 명령하였다. 샤베타이는 이슬람을 선택하였고, 그는 즉각 석방되었다. 그에게는 황실연금이 주어졌고, 명백하게 충성스런 무슬림으로서 1676년 9월 17일 사망하였다.

자연적으로 그의 배교에 관한 소식은 그의 지지자들을 황폐화시켰고, 당장에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믿음을 버렸다. 랍비들은 지상에서 그의 기억을 지워버리려고 하였다. 그들은 그들이 발견할 수 있는 샤베타이에 관한 모든 편지들, 팸플릿과 소책자를 파기하였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유대인들은 메시아의 몰락을 난처해하며, 그것에 대해서 다루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안다. 랍비들과 이성주의자들은 동일하게 그것의 중요성을 경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학자들은 죽은 게르솜 쏘렘(Gershom Scholem)을 따랐고, 이 이상한 에피소드의 의미와 그것의 좀 더 중요한 여파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놀랍게도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그의 배교에 대한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메시아에 대한 충성심을 변치 않았다. 구원의 경험은 매우 깊어서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미혹당하는 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단지 사실들과 이성에 우선하는 구원에 대한 종교경험의 가장 충격적인 사례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들의 새로 발견한 희망을 버릴 것인가, 아니면 배교자 메시아를 받아드릴 것인가를 놓고 선택의 기로에 선 모든 계층의 놀랍도록 많은 수의 유대인들은 역사의 견고한 사실들에 굴복하기를 거부하였다. 가자의 나단은 그의 여생을 샤베타이의 신비를 설교하는 일에 헌신하였다. 샤베타이는 이슬람에 개종함으로써 악한 세력에 대항해서 평생에 걸쳐 투쟁을 계속하였고, 또 켈리포트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어둠의 영역에로 내려가려고 그의 백성의 가장 깊은 신성한 의무를 어길 수밖에 없었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의 사명인 비극적인 짐을 받아드렸고, 그것에로부터 무신론의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서 가장 깊은 바닥에까지 내려갔다고 했다. 터키와 그리스에서 대략 2백 가정들이 샤베타이에 충실한 믿음을 보였다. 그가 죽은 후에 그들은 악과의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서 샤베타이의 모범을 따르기로 결정하였고, 1689년 한꺼번에 이슬람에 개종하였다. 그들은 비밀리에 유대주의에 충성스럽게 남아있었고, 랍비들과 긴밀하게 유지하면서 서로의 집들에서, 곧 비밀 회당들에서 모임을 가졌다. 1689년 그들의 지도자 야곱 퀘리도(Jacob Querido)는 메가에 참배순례를 하였고, 메시아의 과부는 그가 샤베타이 제비의 성육신이라고 선언하였다. 아직도 터키에는 돈메(Donmeh)라 부르는 배도자의 작은 그룹이 있다. 그들은 겉으로는 완벽하게 무슬림으로 살지만 비밀리에는 유대주의에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사람들이다.

다른 샤베타이 추종자들은 이렇게 멀리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들의 메시아와 회당에 충실하게 남았다. 한 때 믿었던 사람들보다는 이들 비밀 샤베타이 추종자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19세기 동안에 좀 더 진보적인 형태의 유대교를 받아드렸거나 채택했던 많은 유대인들은 샤베타이의 조상들을 갖게 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였으나, 18세기의 많은 뛰어난 랍비들은 샤베타이가 메시아였었다고 믿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쇼렘(Scholem)은, 비록 이 메시아운동이 유대교에 있어서 대중적인 운동이 결코 되지는 못했지만, 그 숫자들은 과소평가 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스페인 사람에 의해서 기독교로 개종하라고 강요를 받았지만, 결국은 유대주의에 개종한 마라노스(Marranos)에 특별한 호소력을 갖는다. 일종의 신비로써 배교의 개념은 그들의 범죄행위와 슬픔을 누그러뜨린다. 샤베타이주의는 모로코와 발칸 반도, 이탈리아와 리투아니아에 있는 세파르딕 공동체들에서 발전하였다. 레기오의 벤자민 콘(Benjamin Kohn of Reggio)과 모데나의 아브라함 로리고(Abraham Rorigo of Modena)와 같은 몇몇 사람들은 비밀리에 그 운동과 그들의 연결을 유지했던 뛰어난 카발인파들이었다. 발칸 반도로부터 메시아 종파는 동유럽의 반셈족 기류가 거세지면서 사기가 저하되고 고갈되었던 폴란드에 있는 아쉬케나지 유대인(역자 주: Ashkenazi Jews - 독일, 폴란드, 러시아계의 유대인들)들에게 퍼졌다. 1759년 이상하고 불행한 선지자 야곱 프랑크(Jacob Frank)의 제자들은 그들의 메시아의 모범을 따랐고, 비밀리에는 유대교를 고집하면서도 한꺼번에 기독교에 개종하였다.

쇼렘은 기독교와의 설명적인 비교를 제안한다. 1,600여 년 전, 또 하나의 유대인 그룹은 예루살렘에서 흔한 범죄로 처형된 소문이 나쁜 메시아에 대해서 그들의 희망을 버릴 수가 없었다. 성 바울이 십자가의 수치라 불렀던 것은 배교자 메시아의 수치만큼 모든 면에서 쇼킹한 것이었다. 이 두 사례에서 제자들은 옛 것을 대신한 유대교의 새로운 형태의 탄생을 선포하였고, 그들은 역설적인 교리를 신봉하였다. 십자가의 패배 속에 새로운 삶이 있다는 기독교 신앙은 샤베타이 추종자들이 배교는 성스런 신비였다고 확신한 것과 유사하였다. 이들 그룹들은 밀알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 땅에 떨어져 썩는다는 것을 믿었고, 옛 토라는 죽고, 영의 새로운 법으로 대치되었다고 믿었다. 이 두 그룹들은 하나님에 대한 삼위일체와 성육신 개념을 발전시켰다. 17-18세기 동안의 많은 기독교인들처럼, 샤베타이 추종자들은 새로운 세계의 문턱에 서있다고 믿었다. 카발인파들은 마지막 날에 유배 중에는 희미했던 하나님의 참된 신비들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반복해서 주장하였다. 그들이 메시아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었던 샤베타이 추종자들은, 그것이 비록 명백히 신성모독의 신학을 수용하는 것을 의미했다 치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들을 멀리 깨뜨려버릴 자유를 느꼈다.

[참고 ]
Karen Armstrong "A History of God"
Gershom G. Scholem "Sabbati Se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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