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세례에 대한 성서적 고찰
들어가는 말
한국 기독교는 지난 반세기 동안 성령운동을 힘입어 양적으로
크게 부흥 성장한 긍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는 반면, 주관적인 체험 신앙의 지나친
강조 때문에 질적인 성장이 함께 이루어지지 못한 부정적인 측면도 갖고 있다. 성령세례를
최일선에서 부르짖고 있는 일부 교회나 지도자들이 성서에 바탕을 둔 체계 있는 성령론을
제시하지 못한 점도 있고, 체험신앙과 기복신앙의 높은 목소리에 밀려 정통적인 성령론이
제 위치를 지키지 못한 점도 있다. 실정이 이렇다 보니까, 한국교회는 이기적 기복신앙의
울타리에 갇혀, 교회 본래의 선교적 사명을 충분히 감당치 못했고, 그 대가로 교회가
점차 사람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있다.
필자는 학창시절 방언 말함과 성령 충만이 크게 강조되는
분위기에서 신앙교육을 받았다. 성령을 받는 데 필요한 모든 교육도 받았고, 또 실제로
남보다 더 열심히 신앙수련에 참여하여 열심히 방언 기도도 하였다. 신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어린 시절 배운 성령에 관한 내용대로 방언이나 신유와 같은 성령의 은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구원과는 전혀 별개의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대학원
때부터는 성령과 은사보다는 성령과 구원에 보다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성령시대로서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시작했다. 성령과 구원, 성령과 교회, 성령과 종말론,
성령과 성례전에 눈을 뜨면서 이제까지 교회가 본질적인 것, 내적인 것, 영구적인
것보다는 비본질적인 것, 외적인 것, 증거적인 것, 일시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어
가르쳐왔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체험은 주정적인 신앙체험에서 출발해서 주지적인
신앙체험에 도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필자는 이 체험을 통해서 거듭나는
신앙체험을 갖게 되었다. 마르틴 루터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신앙적인 발견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의 발견과 비교되듯이 성령께서 주시는
신령한 은사와 구별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으로의 세례의 중요성과 이 성령으로의
세례를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믿음을 통하여 값없이 선물로서 침례의 때에
성화의 삶과 구원의 시작과 하나님의 나라의 선취적 맛봄과 구원의 보증, 인침, 약속으로서
주신다는 발견이 자못 충격적인 것이었음을 고백치 않을 수 없다.
중세기 천주교회가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인위적인 신앙이었다면,
루터의 성서적 발견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시는 신본위의 신앙이라고 말한다.
기독교의 본질은 인간이 신을 찾는 노력에 있지 아니 하고, 하나님이 죄인을 찾아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기독교를 사랑과 계시의 종교라고
말한다. 이 점이 기독교를 타종교와 근본적으로 차이 나게 한다. 성령으로의 세례
혹은 성령세례 역시도 인간이 먼저 이것을 추구한 것이 아니며, 이를 알지 못하던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서 먼저 약속한 것이며, 오순절 성령강림이후
모든 성도들에게 선물로 주시기 시작한 것이 은혜시대의 최대의 선물이며, 또한 이
시대를 종말론적인 시대로 만드는 근본 요인이 되기도 한다. 성령세례는 기독교의
본질이 그렇듯이, 인간이 찾아 추구하는 것이 아니며, 행위로서 얻는 것도 아니며,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침례의 때에, 성화와 구원의 성취를 목적으로 주시는
선물이라는 점에서 신 본위 신앙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성령세례를 새롭게 규명하여 성령의
은사가 성령세례로 잘못 이해되고 있는 점을 성서적으로 바로 잡고, 성령세례가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선물로 주시는 성령으로의 세례란 점과 성령시대로서의
교회시대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그리고 성례전과 관련해서
명료하게 밝히는데 있으며, 그 중요성을 고찰하는데 있다. 이 목적을 효과적으로
이루기 위해서 먼저 성령세례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부터 살펴보고, 계속해서 성서적인
고찰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1. 성령세례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
성령세례에 관한 학자들의 견해는 크게 두 줄기로 나누어진다.
오순절 계열의 성령 운동가들이 그 한 줄기이고, 이들과는 정반대의 견해를 갖고
있는 일부 보수주의 학자들이 다른 줄기이다. 그리고 이 두 줄기는 성령세례가 성령의
신령한 은사와 성령 충만 이라는 원줄기에서 갈라진다. 이들 양대 학자들은 성령세례를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선물로 주시는 성령으로의 세례로 이해하기보다는 성령께서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는"(고전 12:11) 은사들 즉 기적의
권능으로 잘못 이해함으로서 오순절의 축복에 대한 핵심을 바로 잡지 못하고 있다.(1
그리고 이들 두 그룹들은 성령세례를 기적적인 성령의 은사들, 특히 방언 말함과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나, 오순절 계열의 성령
운동가들은 이들 은사들이 모든 시대의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지는 지속적인 것으로
믿고 있는 반면,(2 일부 보수 신학자들은 이들 은사들이 사도들의 손에서 끝났다고
믿고 있고, 성령세례를 사람의 안수에 의하지 않고 하늘로부터 직접 내린 성령강림
사건 즉 오순절 성령강림과 고넬료 가정의 성령강림 두 번의 역사적 사건에만 국한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3 이제 이들의 견해를 직접 살펴보도록 하겠다.
가. 성령세례는 성령의 외적 사도적 능력이라는 견해
성령세례를 성령의 능력 부어 주심으로 보는 견해는 오순절
운동의 일반적인 주장이며, 성령의 은사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들의 견해들을 모아 보았다.
한국 오순절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인 조용기 목사는 성령세례를
중생과 구별하여 강하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보고 있으며, 방언을 성령세례의
표적으로 믿고 있다.(4 그러나 최근에 발간된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신앙과 신학}에
의하면,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일하시는 성령의 사역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도
없고 구원의 역사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성령을 중생의
수단으로, 성령의 내주하심을 중생의 결과로 보고 있다.(5
하나님의 성회 신학대학원의 윌리암 멘지즈(William W. Men-
zies) 교수는 오순절 운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성령세례라 불리는 능력부여의
체험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표적을 동반함으로서 증거
되야 함을 믿는다. 이 체험은 전통적인 성결교회의 '제 2의 축복'으로부터 구분되어야
한다."(6
토리(R. A. Torrey)는 성령세례가 무엇인가를 스스로 묻고
세 가지로 대답하였다. 첫째, 성령세례는 그것을 받았다는 분명한 체험이 있어야
한다. 둘째, 성령세례는 성령의 중생의 사역과 구분되며,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에
덧붙여 주시는 역사이다. 셋째, 성령세례는 권능을 수반하며, 이 권능은 복음의 증거와
봉사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다.(7
토리는 성령의 씻음과 중생의 새롭게 하심을 성령세례라 하지
않고 성령의 외적 증거인 능력과 은사들을 성령세례라 하였다. 토리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신자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내주 동거하심을 인정하면서도 거듭난 자들의
심령 속에 계시면서 구원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신 임마누엘의 종말론적인
성령의 역사를 차별하여 "성령이 내재하심을 의식치 못할 만큼 계신 것과 충만한
것, 즉 성령세례를 받은 것과는 다른 것이라"고 구별하였다. 그는 또 모든 신자가
성령을 소유하고 있지만, 모든 신자가 다 성령세례를 소유한 것은 아니다(8 라고
말함으로서 성령께서 주시는 외적이고 증거적인 또는 일시적인 은사를 내적이고 영구적이며
구원을 성취하시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함께 하심보다도 더 중요한 것으로 강조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성령세례를 성령께서 부어 주시는 은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이는 성령시대의 독특한 특징이 될 수 없으며, 구약시대와 비교해서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논의하기로 하겠다.
오순절 신학에서는 방언 말함을 하나님과 두 번째 만나는
사건이라고 말한다. 첫 번째 만남은 회개의 때에, 두 번째 만남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때에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를 성령세례라 부른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체험의
유무는 방언이 증거가 된다. 방언을 하는 사람은 두 번째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고,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두 번째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구원과 중생의 역사보다는
방언 말함을 더 중요시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방언을 해야 만이 성령을 받은 것이라
하여 성령의 역사와 내재하심이 없는 구원을 주장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초래하였다.(9
오순절 운동의 구원론은 크게 2단계론과 3단계론으로 나누어져
있다. 2단계론은 성결교회와 웨슬리안주의 신앙으로써 제 1단계가 이신칭의의 단계이고,
제 2단계가 성령세례(또는 제 2의 축복)의 단계이다. 전통 보수신학과 달리 성화의
시간과 내용 면에서 회심과 구별하여 완전성화가 명확한 시간에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전통 보수신학은 중생과 초기성화는 동시적이며, 죄와 부패로부터의
이중적인 치유를 믿으며, 중생후 기독교인의 생활은 성령의 도우심 속에서 점진적으로
성화 되며 말씀과 은혜 안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한다고 믿는다.
3단계론은 세이뮤(Seymour)를 중심으로한 오순절 운동가들의
신앙으로써 2단계 구원론에 방언을 지칭하는 성령세례의 단계를 추가한 구원론을
말한다. 이는 중생과 성화와 성령세례가 각각 시간적으로 분리되어 단계별로 이루어진다는
주장이다. 오순절 교회의 더햄(Durham)은 3단계론에 반박하여 그의 독특한 2단계론을
펼쳤는 데, 제 1단계를 중생의 단계, 제 2단계를 방언을 말하는 성령세례와 점진성화를
주장하였다.(10
미국 감리교회의 성결운동은 성화의 동시적 체험 또는 칭의
후 '제 2의 은혜의 사역'을 주장함으로써 칭의와 성화를 시간적으로 별개로 구분하였다.
이것이 오순절 신앙의 핵심 내용이 되었다. 이를 회심후 동시적으로 체험되는 성령세례라
한다. 이것은 구원을 위한 두 가지 별개의 체험을 말한다.
요한 웨슬리는 칭의와 성화가 이루어지는 시간을 별개의 것으로
보았다. 그는 그의 서신에서 "(칭의는 물론 성화의) 사역 그 자체는 틀림없이
동시적이다. 죄의 권세와 유죄성을 점진적으로 깨닫고 일순간에 칭의 되어지는 것처럼,
같은 성질의 죄에 대한 점진적으로 증가하는 깨달음으로 일순간에 성화 되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다수의 오순절 운동가들은 이 웨슬리의 후속적 동시적 체험에 대한 이해를
수용하여 웨슬리의 성화의 교리를 성령세례로 대치 시켰다. 성령세례를 웨슬리의
완전성화와 동일시한 것이다.
감리교 운동이나 오순절 운동이나 성령세례이든 성화이든
칭의 후 어느 시점에서 획득되는 것으로 강조하고 있는 점에서는 모두가 같다. 그래서
오순절 계열의 교회에서는 이 웨슬리의 완전구원과 성화가 성령세례를 받음으로써
성취되며 방언을 이 성취를 입증하는 것으로 가르친다. 그리고 성령세례 체험에 대한
갈망이 성화를 포함해서 다른 모든 교리를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 넣었다. 특히 오순절
운동에 미친 감리교회의 영향은 회심 후에 이루어지는 체험에 초점을 맞추게 하였고,
결과적으로 회심 이상의 어떤 조건들 또는 성령세례를 받기 위한 성화의 믿음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서 성화 또는 성령세례는 칭의와는 별개의 은혜의 사역을 요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를 '제 2의 은혜의 사역'이라고 일컫는다.(11
보드만(W. E. Boardman)은 그의 저서, {더 높은 그리스도인의
삶(The Higher Christian Life)}에서 이를 '제 2의 경험' 또는 '제 2의 회심'이라고
명하였고, 이는 때때로 첫 회심 후(칭의) 수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일어날 수도 있다고
하여, 칭의와 성화의 시간을 별개로 구분하였다.(12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오순절 운동가들의 성령세례론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선물로서 주시는 성령으로의 세례에 중심을 두지 않고,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그 뜻대로 나누어주시는 은사, 특히 방언 말함에 중심을 두고 있는 것이
명백하다.
이들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성령세례는
중생과 구분되며 후속적이다. 둘째, 성령세례는 방언 말함에 의해서 초기에 입증된다.
셋째 성령세례는 성실하게 추구되어야 한다. 이 세 가지를 더욱 간단하게 축약하면,
첫째 후속, 둘째 증거(방언 말함), 셋째 조건들(획득을 위한 요구 조건들)이다.(13
이러한 주장들이 과연 성서적인 구원론과 일치하는 것인지를 모든 신앙인들은 차분히
따져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성실한 노력들은 결코 성령의 은사들의 중요성을 과소
평가하자는 것이 아니다. 은사의 가치와 중요성을 주장하더라도 성서적인 이해에
뿌리를 두고 하자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운동은 사도시대의 초자연적이고 비범한 그리고
가시적인 성령의 사역을 현시대에 그대로 재현한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14 그러므로
이 운동은 자칫 성령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제 2, 제 3의 마술사 시몬이 나오지
않도록 부단한 성서적 점검이 필요하다. 오순절 성령운동가들은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에게 많은 조건들을 제시해 왔다. 그 동안의 부흥집회들로 보아서도 그렇고,
또 그들이 펴낸 서적들의 내용으로 보아서도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이런 오순절 운동의 특징을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1) 후속 교리에 대한 비판
후속 교리란 성령세례가 중생의 체험시간보다 후에 따르는 성령의 사역이란 가르침이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제 2의 축복' 또는 '제 2의 회심'은 중생의 체험후 사람에
따라서 다양한 시간의 격차를 두고 체험하는 것으로 믿고 가르친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최초의 성령강림으로써 아버지의 약속
또는 구약예언의 성취란 점은 누구도 부인치 않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주후 30년
오순절 날은 교회의 창립은 물론 구약의 율법시대와 신약의 은혜시대 또는 성령시대의
분기점으로 믿어지고 있다. 이 날은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를 통해서
시작된 날이요,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이 성도와 함께 하기 시작한 날이다. 이 때부터
성령을 통해서 개인 구원이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성령을 통해서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개개인의 삶 속에서 선취되어지고 맛보아지고, 성령을 통해서 구원의 완성
즉 예수 재림시의 부활을 보증 받고 인침 받고 약속 받게 되었다.(15 이런 점에서
성령체험은 제 2의 체험 또는 후속적인 체험일 수 없다. 성령은 신자의 구원을 성취시키신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물론 성령세례를 방언 말함이나 신령한 은사라고 본다면, 사람에
따라서는 구원받은 후에 이와 같은 체험을 할 수 있다고 보아서 후속성을 인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큰 문제는 토리와 같은 일부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오순절 운동가들이 방언 말함을 성령 받은 최초의 증거라고 말하는 데 문제가 있다.
그리고 은사체험이 반드시 후속적일 수도 없다. 성령의 은사는 외적이고 증거적인
것이기 때문에 신자가 아닌 자들 즉 당나귀나 발람 혹은 하나님의 신이 떠난 사울
왕에게도 임할 수 있었다(민 22-24장; 삼상 19:18-24). 성령의 은사는 구원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며, 일시적인 것이었다. 일시적인 체험으로는 모세를 도와 이스라엘을
지도할 70명의 장로와 유사들에게도 있었다(민 11장).(16
오순절 성령강림은 제 2의 체험 또는 후속적인 체험일
수 없다. 사마리아 교회와 에베소의 열두 제자에게 내린 성령의 은사인 방언을 제외하고는
최초의 유대인 교회 창립과 이방인 교회 창립의 의미를 갖는 오순절과 고넬료 가정의
성령강림은 후속적이라고 볼 수 없다. 오순절의 경우는 아직 교회가 세워지기 이전이며,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한,' 중생의 도가 아직 선포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오순절 체험이 후속적 체험이 될 수 없다. 고넬료 가정의 경우는 복음이 선포되는
도중에 중생의 체험이 있기 전에 성령의 강림이 우선하였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교회에 받으시고 구원키로 작정하셨다는 뜻을 표명하신 것으로서 오순절 교회 창립
때와 마찬가지로 고넬료 가정의 성령강림도 사람을 통하지 않고 위로부터 내린 강한
역사였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강림은 제 2의 체험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오순절 운동가들은 이를 후속체험으로 해석한다. 이를 입증키 위해서 요한복음 20장
22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직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내용이다. 이 말씀을 인용하여
오순절 운동가들은 제자들이 이미 최초로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한다.(17 그리고 이
때에 받은 성령은 중생을 위한 대리자로서의 성령에 의한 것이며,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후속적인 충만한 성령세례라고 주장한다.(18
그러나 요한복음 20장 22절이 대리자로서 성령에 의한 세례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왜냐하면, 이는 예수께서 대리자로서 주시는 세례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대로 오순절 성령강림이 그리스도에 의한 세례라면, 요한복음
20장 22절의 말씀은 같은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이
그리스도에 의한 세례라면, 더 더욱 후속적인 것이 될 수 없다.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선물로 주어지는 성령은 구원을 성취하시는 성령으로의 세례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순절 성령강림과 고넬료 가정의 성령강림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성령으로의 세례와 성령이 주시는 방언(외국어)이 교회창립을 위해서 증거적으로
동시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행 1:4)은 '성령으로의
세례'를 말한다. 이것은 마지막 시대에 이루어질 구약의 3대 예언 가운데 하나였다(사
44:3; 겔 36:25-27; 요엘 2:28-29). 이 약속을 사도들은 받고 있다(요 14:26-27;
15:26; 행 1:4). 이 약속은 성령의 은사와 구별되어야 한다. 구약시대와 예수 때에도
신유, 예언, 방언과 같은 성령의 은사가 이미 존재했었고, 제자들도 이와 같은 체험들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과는 크게
다른 것이 틀림없다.
성령으로의 세례는 내적이며, 개인적이며, 우주적이며, 구원과
성화를 위한 것이며, 항구적이며, 개인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에 성령의 내주 동거의 역사가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증거적이며, 공적이며, 제한적이며, 일시적이며, 공익을 위한
봉사(복음 전파를 도구)를 위한 것이다. 구약시대에도 이러한 역사는 얼마든지 있었고
전혀 새로운 것이 못된다. 구약시대의 성령의 역사의 특징은, 첫째, 외적인 은사와
도구의 역사뿐이었다. 둘째, 특정인에게만 은사가 주어졌다. 셋째, 내적인 구원과
성화의 역사는 없었다. 넷째, 은사가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진 적이 없었다.
다섯째, 은사는 언제나 임시적이었다. 여섯째, 은사와 함께 표적이 따랐다. 그러나
일시적인 것이었다. 일곱째, 은사는 신자가 아닌 자에게도 주어졌다(삼상 10:10;
16:13-14; 19:20-23; 민 11:25; 24:2). 따라서 약속으로서의 성령세례는 성령의 은사와는
다르다.
성령으로서의 세례는 이 시대를 성령의 시대로, 성령의 능력으로
종말을 선취하는 시대로, 우주적인 구원의 시대로, 종말론적인 메시아 시대로,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시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삶 속에서 경험하는 교회시대로
만든다. 따라서 성령으로의 세례는 믿는 자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어진다.
오순절날 사도들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으로의 세례'와 '성령의 은사'를 함께
체험하고 있다.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으로의 세례가 주어짐으로서 이 시대가 우주적인
구원의 시대(은혜 시대)로 돌입하게 되었다. 이 은총이 사도들을 통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도들이 특별한 것은 오순절날에 이들이 특별한 성령의 은사를 받았기 때문이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성령으로의 세례를 성령의 은사와 크게 구별 없이 초대 교회의
시작과 발전이라는 사건 중심으로 보도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오순절의
성령의 강림을 마치 방언이나 신유와 같은 성령의 은사로 오해하고 있다.
성령으로의 세례는 바울서신에서 더욱 자세하게 설명되고
있다. 그 이유는 바울 서신이 교회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가의 사건 보도와 바울의 해석을 통해서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이 우주적인 만인 구원의 시대, 즉 하나님의 나라가 이 지상에 세워지는 교회
시대를 시작한 사건이 였다는 점과 사도들에게 특별하게 내리신 성령의 외적인 은사를
통해서 교회를 창립(30년)하고 성경을 쓰도록 하였다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성령의
외적인 은사는 전달자와 전하는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입증하는 증거적인
역사이다. 교회와 성서는 사도들의 놀라운 능력의 사역과 말씀의 기초 위에 세워졌다.
요한복음 20장 22절을 근거로 오순절 성령강림을 후속적으로
설명하려는 오순절 운동가들의 잘못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에서 계속된다.
부활 직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도마와 맛디아가 빠진 열 명의 제자만이 참석하고 있었다. 도마는 이 때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고, 맛디아는 아직 제자로 뽑히기 전이었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에게 임하였다고
보는 것이 오순절 운동의 일반적인 통례인데, 그렇다면 열 명의 제자를 제외한 110명의
사람들은 언제 누구에게 성령에 의한 중생의 세례를 받았는가?
요한복음 7장 39절에 의하면, 38절의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는 예언의 말씀이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한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 하시더라"고
하였다. 또 요한복음 16장 7절에서 예수는 "내가 떠나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 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교회 창립 이전까지의 시대는 율법시대요, 아직 은혜의 시대가
도래치 아니 하였는데, 제자들이 중생의 세례를 받았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많은 학자들은 요한복음 20장 22절의 말씀을, 첫째 오순절 성령강림에 대한
상징적 예언으로 보기도 하며, 사도 직분을 위한 도구화 즉 사도직분 임직식으로
보기도 한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직분을 인계한 것처럼,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사도직분을 임명하신 거룩한 예식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19
후속성을 주장하는 리그(Rigg)는 사도행전 2장 38절의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의 말씀을 회개 때 성령께서 "그들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례 베풀 것이다(회심). 그러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로 세례를 받음으로서
그리스도를 위해 공중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성령의 선물을 받을 것이다"라고
주석하였다.(20 이는 첫째, 성령에 의해서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몸에로 인도되어
개심 하게 되며, 둘째, 물세례로서 상징되어지고, 셋째, 후속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령 안에서 영적으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라는 의미로 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이들의 주장은 세 가지 세례이다. 첫째, 회심 때에
성령에 의한 회개자들의 세례로서 그리스도의 몸에로 인도되는 것을 말한다. 둘째,
신앙고백과 함께 받는 물세례가 있다. 셋째, 그리스도에 의한 신자들의 세례로서
오순절 경험과 같은 성령 충만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세 가지 단계의 주장에는 상당한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다. 성서적으로 볼 때, 침례와 구원과 성령의 임재는 동시적이며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이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엡 4:5)라고 말하고 있고, 고린도전서에서는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다"(고전 12:13)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례가 하나라는 말은 성령세례와 침례가 시간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성서는 말한다. 이 천년 교회 전통으로 볼 때, 침례를 받은 때로부터
모든 그리스도인이 입교인이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교회론적으로 볼 때, 입교인이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 된다는 말과도 같다. 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는 말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었다는 말인 데, 그리스도의 몸은 곧 교회를 말한다. 이와 같이, 침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는 시간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는 시간이 일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의
말씀은 침례의 때에 죄 사함(중생함)을 받고 같은 시간에 성령으로의 세례를 받는다는
말씀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렇게 믿어왔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지는 세례는 성령으로의
세례를 말하고, 교회로부터 받는 침례는 침수세례를 말한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은
성령에 의해서 주어지는 신령한 은사나 성령에 의해서 채워지는 신령한 열매를 말한다.
이 점이 혼동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구원론과 교회론 그리고 종말론적으로
볼 때, 입교인의 자격이 주어지는 시간이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공식적인
시간이오, 이 시간이 침례의 때이다. 그리고 구원은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개인에게 혹은 교회에 임함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으로의 세례가
없는 구원을 말할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을 말할 수 없으며, 침례 받음이
없이 입교인이 될 수 없는 것처럼, 공식적이고 형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침례 받음이
없이 이 모든 축복을 누린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에 의한 선물
즉 은사의 축복에 국한하지 않고서는 후속성을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데도 없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오순절 운동가들은 구원과 성령세례를
시간적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성령세례가 후속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펄만(Pearlman)은 신약성서가 성령의 소유 없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고, 중생한 사람 치고 성령을 소유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는
점에 동의하면서도, 성령세례 즉 오순절 세례를 받기까지는 성령께서 영구적으로
개인적으로 혹은 충만하게 내주 동거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성령세례를 받아야
비로소 내주 동거하신다고 말한다.(21 오순절 성령강림의 의미를 방언에 두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오순절 운동가들의 생각이 다 잘못된 것만은 아니다. 비중
있는 오순절 신학자들은 성령을 내적이고 개인적인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보지 않고
권능적인 측면에서 이해한다. 체험이 구원에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영적 능력에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 . .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이 종종 이를 입증키
위해서 사용된다. 토리(Torrey)나 윌리암즈(Williams)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면서
남기신 이 약속의 주된 양상을 영생을 위한 중생에 두지 아니하고, 사역을 위한 권능에
두고 있다.(22 토리는 성령의 내주 동거의 축복과 권능으로서의 성령세례를 다르게
보았고, 오순절 운동가들이 다 그렇듯이 토리도 권능의 측면에 더 비중을 두었을
뿐이다.
오순절 신학자인 윌리암즈는 성령세례를 전도나 선교적 차원에서
이해한다. 성령세례는 그리스도인들을 제자화 시키는 권능이지, 개인의 중생을 위한
것이 아니며, 남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지, 자신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23 만일에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가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적용될 수 있는
우주적인 은사가 아니라는 점만 인정한다면, 윌리암즈의 이러한 언급은 대단히 성서적이다.
성령의 은사가 지금도 필요하고, 지금도 수여되는 축복일지라도 모든 성도가 다 같은
은사를 받는 것은 아니며, 또 구해서 받아질 성질의 것도 아니다(고전 12:29-30).
그러나 오순절 운동가들은 은사와 성령의 세례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고 있고, 은사를
받아야 성령세례를 받은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2) 초기증거설에 대한 비판
도날드 지(Donald Gee)는 "오순절 교회들의 특이한 교리는 방언 말함을 성령세례의
초기 증거로 믿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성서적 배경으로는 사도행전
2장 4절, 10장 44-47절, 19장 6절을 인용하고 있다.(24 오순절 성령강림은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현상, 듣는 자가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과
같은 유일하고 반복될 수 없는 현상이 수반된 사례였다. 그러나 오순절 운동가들은
소위 오순절의 반복될 수 있고 형태형성 현상 즉 방언 말함으로 증거되는 성령 충만(행
2:4)으로부터 유일하고 반복될 수 없는 현상(행 2:1-3, 5-13)을 분리한다. 바람,
불, 또는 비교 될 만 하고 주목 할만한 표명들이 구약아래서도 표적으로서 일어났었으나
방언은 결코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방언 말함이 신약아래서 성령임재의 초기 표적임을
의미한다고 결론 짓는다. 이들은 방언 말함이야말로 모든 다른 성령세례에 대한 유일한
권위 있는 형태를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사도들은 오순절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였으며, 방언을 말함으로서 성령 충만의 증거를 가지게 되었고 비로소 성령 충만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브라질에서 가장 큰 오순절교단의 신앙고백 제 8조는 "성령세례는
그 표적으로서 사도들이 받았던 똑같은 증거 즉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이는 세계 오순절 운동의
대다수의 확신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 해주는 성서적 근거로서 사도행전 10-11장을
들고 있다. 여기서 고넬료 가정의 성령강림은 오순절 성령강림과 같은 것이며, 방언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유일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사도행전 19장
1-7절의 에베소의 열두 제자들에게 있었던 사건과 사도행전 8장의 사마리아에서의
사건을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 가정의 사건과 오순절 사건의 맥락에서 보고 있다(25.
마가복음 16장 7절의 "새 방언"은 사도행전 이외의
말씀으로는 유일하게 성령세례의 증거로 인용되고 있다. 이 말씀은 방언을 성령의
은사에 대한 초기의 증거로서 예수께서 주신 약속으로 보며, 사도행전은 역사적으로
입증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고 오순절 운동가들은 믿고 있다.(26
사도행전과 마가복음 16장 17절의 특이한 해석이외에 성령세례의
초기 증거로서는 체험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비오순절 계열에서는 사도시대의 특이한
성령의 표명은 명령적이거나 반복될 수 있는 표징적인 것보다는 시대적이라고 설명한다.
환언하면, 사도시대의 성령강림은 유일한 것이며,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순절 계열의 학자들은 사도시대의 성령세례가 사도들만의 것이 아니며, 모든 신자들의
것이며 합리적이고 필수적이라고 말한다.(27
방언은 성령의 임재를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확신에
필요한 표적으로서 주장된다.(28 그러므로 방언은 성령세례의 초기증거로서 다른
많은 증거들과 구분된다.(29
그러나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세례에 대한 가르침은 네 번의
사건들이 모두 다른 상황임을 설명해 주고, 사마리아에서의 성령강림과 에베소에서의
성령강림을 오순절 성령강림과 고넬료 가정의 성령강림과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없음을
강력히 시사해 주고 있다.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성령강림에 대한 사도행전의 올바른
이해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강림의 세례들을 여기서
대략 하고자 한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이들 네 번의 사건을 올바로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상황, 배경, 섭리, 목적 등을 살펴보아야 하며, 이 때 방언이 성령세례의 표적으로
나타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지도 살펴야 할 것이다.
(가) 오순절 성령강림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초대 교회의 출범과 성장과정을 사건 중심으로 보도하면서 성령으로의
세례와 성령의 은사를 뚜렷하게 구별하지 않았다는 점과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오순절 성령강림을 마치 방언이나 신유와 같은 성령의 은사로 오해하고 있다는 점을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순절 날 사도들이 성령으로의
세례와 성령의 은사를 함께 체험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령으로의 세례가 주어짐으로서
이 시대가 우주적이고 종말론적인 구원의 시대가 되었고, 사도들을 통해서 성령의
능력으로 이 시대가 출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나타난 방언 말함과 신유의
능력은 성령시대의 특징으로서 나타난 것이기보다는 이 시대가 성령의 시대임을 알리는
도구로서 역할 하였다는 점이다.
성서가 기적에 대해서 말할 때는 언제나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이란 세 단어를
함께 쓰고 있다는 사실(행 2:22; 고후 12:12; 살후 2:9; 히 2:4; 롬 15:18)과 반드시
기적의 목적과 관련되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큰 권능'(dynamesi)은 기적의 근원 즉 하나님의 큰 능력
행함을 말한다. '기사'(terasi)는 표적과 함께 쓰이고 언제나 복수형이며, 기적의
결과 즉 하나님의 큰 능력 행함을 눈으로 본 사람들의 마음에 일어나는 결과들, 예를
들면, 놀람, 경악, 기이함 등을 말한다. 표적(semeiois)은 확증, 입증을 의미하며,
기적의 목적이다. 기적은 표적을 보이기 위한 목적으로 행하여 진다.
기적은 메신저가 전한 계시의 진실성을 입증, 증거, 확증하는
표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의 능력 행함은 증거적인 것이다. 전하는
메신저와 전해지는 메시지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모세의
기적은 이스라엘 국가 형성을, 엘리야의 기적은 야훼가 참 하나님이심을 입증하는
것이었으며(왕상 17:24), 예수의 능력 행하심은 그가 그리스도이심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키 위한 것이었다(행 2:22). 이와 마찬가지로, 사도들의 방언과 능력
행함은 그리스도의 교회 창립과 신약성서의 완성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방언과 능력 행함은 성령시대를 알리는 매체였던 것이지, 본질이 아니었던 것이다.
성령시대의 특징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서 교회 안에서 시작되었으며,
중생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따라서 신자들의 구원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 속에서 교회와 신자들은 미래의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며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은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될 수 있다. 하나는
외적, 증거적, 은사적 사역이요, 다른 하나는 내적 구원과 성화의 사역이다. 외적,
증거적, 은사적 사역은 구약시대 때부터 있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구약시대에는
성령의 내적인 구원과 성화의 사역이 없이 오직 외적인 임재뿐이었다.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특정인에게 봉사에 필요한 기술이나 능력으로 도구화시키기 위해서 보내
지셨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그렇지 않다. 신약시대에는 모든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물 붓듯 부어 주시기로 약속하셨고, 이 약속이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이루어졌다. 이 때부터 성령의 내주 동거와 구원과 성화의 사역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어느 특정인에게 국한된 축복이 아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동등하게 주시는 축복이다.
이 두 가지 성령의 사역을 모두 성령세례라는 사람도 있고,
두 가지 중에 하나만을 성령세례라는 사람도 있다. 필자는 성령세례가 기적적인 권능이나
은사가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심이 성령세례 즉 성령으로의 세례라고 믿는다. 성령의
외적, 증거적, 은사적 사역은 성령세례라기보다는 성령충만이란 말이 더 적합하다.
왜냐하면, 성서적으로 볼 때, 세례는 단회적인 반면, 충만은 계속적이며, 세례는
명령이 아닌 반면, 충만은 명령이며, 세례는 배치적이지만, 충만은 경험적이기 때문이다.
또 세례는 반복되는 경험이 아닌 반면, 충만은 반복적이며, 세례는 중생과 함께 주어지지만,
충만은 회심 후의 경험이며, 세례는 모든 신자에게 주어지는 우주적인 것이지만,
은사는 부분적으로 성령께서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이다.(30
성령세례는 또한 고통스런 기도에 대한 응답도 영성에 대한
어떤 증거도 아니다. 성령세례는 성령의 은사가 아닌 성령의 영역 안에서 일어나는
성령이 요소가 되는 세례이며, 세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성령의 은사는
수여자가 성령이시지만, 성령으로의 세례는 수여자가 그리스도이시다.
성령의 네 가지 요소도 구원의 네 가지 요소와 다를 바가
없다. 오순절 운동가들이 성령세례를 중생과 별개의 시간에 후속적으로 많은 기도의
대가로 받는 방언이라고 생각하지만, 사도행전 2장 38절과 갈라디아서 3장 2-5절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성령은 선물로, 믿음으로, 침례 가운데서, 성화를 위해서 주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의 근원이 하나님의 은혜요, 구원의 수단이
믿음이요, 구원의 시간이 침례요, 구원의 목적이 선행인 것같이, 성령세례도 그 근원이
은혜의 선물이요, 믿음을 수단으로, 침례 가운데서 수여되며, 성화를 목적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성서는 가르치고 있다.(31
성령은 성경 여러 곳에서 은사 또는 선물로서 언급되고 있다(요
7:37-39; 행11:17; 롬 5:5; 고전 2:12; 고후 5:5). 은사는 성격상 공로 없이 주어지는
것이며, 선물로서의 성령은 결코 보상으로서 언급된 일이 없다. 사도행전 2장 38절은
믿고 세례를 받는 자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중적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 가진 문제가
이중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범죄로 인해서 유죄하며, 유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타고난 죄성에 의해서 인간은 부패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마치
사고를 저지른 과속 차량의 운전자가 법의 처벌과 의사의 치료를 받아야 하듯, 우리
인간도 하나님 앞에서 법적 문제의 처리와 부패된 인간성의 치유를 받아야 한다.
이 법적 문제를 처리 받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의의 전가에 의한 칭의이다. 이는
외적이며 객관적인 선포에 의한 의이며, 하나님의 의가 전가된 것이다. 이는 죄인이
무죄자가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또 죄인이 재판장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무죄로 선포 될 때, 그 동안의 부패된 인간의 상태도 초기적으로 치유된다. 이를
초기 성화라고 한다. 그러나 칭의와 초기성화 후에도 인간은 죄성의 잔존 때문에(롬
7:15-25) 계속해서 치유되어 져야 하는데 이를 점진성화라고 부른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속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시는 의이며, 보상된 의이다. 이는 내적이며, 개인적인
의이다. 하나님은 치료자가 되시며, 우리의 부패를 치료하시고 감싸주신다.(32
칭의가 죄인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점진 성화는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겉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날마다 죽어 가는 생활이 속 사람이 살아가는
성화의 생활이다. 바로 이 점진성화를 이루시는 하나님이 성령이시다. 이 일을 위해서
성령은 성도의 심령에 내주 하신다.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의에 도달치
못했던 이 쓰라림을 다시 반복치 않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선물로 구원받을
때에 함께 주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제 자신의 노력만으로 살지 아니 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신의 죄성을 넉넉히 이기는 승리자 이상의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롬
8:37).(33
이와 같이 칭의와 중생 즉 초기성화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동시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믿음으로 또한 중생
또는 초기성화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화는 성령의 직접적인 사역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므로 결국 믿음으로 성령세례를 받는다. 이런 맥락에서 갈라디아서
3장 2-5절의 말씀은 믿음으로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입증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 . .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구원과 성령세례를 언제 받느냐 하는 문제는 신학적으로나
교단적으로 논란이 되는 이슈이다. 오직 믿음만 주장하는 일부 교단에서는 믿음을
갖는 순간부터 구원과 성령세례를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서는 어떻게 말하는가?
성서는 침례를 받는 시간이 구원과 성령세례를 받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침례 자체가
구원과 성령세례를 받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침례 자체가 구원을 주는 것도 아니오,
침례 때문에 성령세례를 받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의 장소
또는 시간이 침례일 뿐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사도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이었다. 사도행전 2장 38절의 말씀은, ". . .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라고 말한다.(34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목적은 거룩한 삶과 성화의 삶을 위한
것이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를 은혜로 구원 주시고 죄성을 이기고 믿음으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고, 성도들의 구원을 보증하시고, 인 치시며, 약속하기
위해서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설립된 때에 대해서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공생애와 관련하여 교회 설립시기를
생각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과 관련하여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교회가 시작된 정확한 시기는 예수의 공생애의 출발을 알리는 누가복음의 역사적
진술과 요한복음이 암시하는 예수의 공생애 삼년반을 고려하여 주후 30년 오순절
날 아침 9시경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성령강림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견해가 정설로
되어 있다.
주후 30년이 정확한 연대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성서와 역사적
증언들을 고려해 볼 때, 이 보다 정확한 연대 주장은 없다. 장소 문제는 넓은 범위에서
보면 유대 땅의 수도 예루살렘이 확실하다. 그러나 구체적인 장소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장소를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때 모인 사람의 수를 120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성령강림의 장소를 예루살렘 성전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모임의 장소를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의 행각이라고 생각한다.(35 후자의 견해가 정확한 성서적
이해에 근거한 바른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교회가 시작된 장소라든지 시간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대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더 없이 중요하다. 이런 점들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겠다.
먼저 교회시대가 성령의 강림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바벨론 포로기를 중심으로 싹트기 시작한 메시아 사상은
나라 잃은 민족에게는 둘도 없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이 시대에 사역하였던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과 같은 유명한 예언자들에 의해서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메시아의
출현과 성령강림으로 성취될 것이 예언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회복과 메시아
출현 그리고 성령강림이라는 이 삼대 예언의 성취는 마지막 시대의 출범을 알리는
사건으로 설명되었다. 그리고 이 예언이 예수의 부활사건과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성취된 것으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믿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출범은 성령의 사역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 출범하게
됨을 의미하였으며, 종말적 시대의 출범이 되었다. 성령은 모든 믿음의 식구들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일 뿐 아니라, 거듭남과 거룩함과 새롭게 하심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빠진 교회가 없고, 성령의 사역이 없는 구원이
없으며, 성령의 내주하심이 없는 그리스도인을 생각할 수가 없다. 또 성령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할 수가 없다.
구약의 약속이 처음 성취된 장소는 예루살렘이다. 오순절
날 아침에 성령의 강림이 예루살렘에 모인 사도들에게 임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믿는 순례자들의 고향이다. 그리스도가 나귀를 타고 평화의 왕으로서 입성하신 곳이
예루살렘이며, 만 왕의 왕, 심판주의 주로서 강림하실 곳도 새 예루살렘이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이다. 이 성에 그리스도께서 보내시는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이 성에 교회가 창립되었다는 점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 예루살렘과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같기 때문이다.
성령의 강림 장소는 마가의 다락방이 아니었다. 마가의 다락방은
제자들의 숙식장소였다. 물론 가정에 모여 예배나 기도 모임을 가진 것이 사실이지만(행
5:42, 12:12), 또 초대교회는 주로 가정에서 모였다는 점도 사실이지만(롬 16:5;
골 4:15; 몬2; 고전 16:19), 정작 교회가 처음 시작된 곳은 성전 안에서 였다(눅
24:52-53; 행 2:46; 3:1; 5:12, 42). 앞에서 교회와 예루살렘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
보았는 데,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여기 교회와 성전의 관계는 예배를
드리는 장소라는 관점에서 대조시켜 볼 수가 있다
'저희가 유하는 다락'으로 표현된 마가 요한의 어머니의 집은
이 층집(upper room)이였을 것이다. 유대인들의 집은 슬래브 형태이기 때문에 우리
식 개념의 다락방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거처는 이 층 방이
였을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승천하신 날 감람산에서 내려와 그들이 거처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이 날로부터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신 날까지는 열흘간의 시간이
있었다.
120명이 모여 가룟 유다 대신에 맛디아를 뽑은 날짜는 이
열흘 중 어느 한 날이었다. 한글 개역성경에는 생략되었지만, 누가는 120명이 모여
맛디아를 선출한 날을 헬라어로 '그 무렵에 신도들이 모였는데'(In those days)라고
적고 있다. 따라서 120명이 모인 날은 적어도 예수께서 승천하신 날이 아니란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이 모인 장소는 솔로몬 행각이었다(눅 24:53; 행 3:11; 5:12).
사도행전 1장 12절 이하의 말씀을 잘 읽고 생각해 보면 곧 바로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초대교회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 이상 일곱 번까지
기도하였다. 이 시간은 우리 시간으로 아침 9시, 정오, 오후 3시로 정해져 있었다.
예수의 제자들도 이 시간에 기도하였다(시 55:17; 119:164; 단 6:10; 행 2:15; 3:1;
10:9). 성령이 강림한 시간은 아침 9시 기도하는 시간이었다(행 2:15). 그 장소는
오순절이 되어 수많은 사람이 운집한 성전 안이었다(눅 24:53; 행 3:11; 5:12). 이러한
시간에 성령이 강림하시고 방언의 역사가 있었던 것은 교회창립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였다. 성서가 말하는 기적은 곧 증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들의 방언 말함은 즉시 많은 무리에게 주시가 되었다(행
2:5-13).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이었지만, 방언을 청취한 사람들은
오순절 축제에 참석키 위해서 16개국 이상에서 모인 경건한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입교한 개종자들이었다. 이들이 사용한 언어는 적어도 페르시아어, 시리아어, 아람어,
헬라어, 데모틱어(이집트어) 라틴어, 아라비아어 등일 것이다. 이들은 모두 자기
나라의 언어로 말하는 사도들을 보고 놀랐다. 이 사건으로 베드로가 말씀을 전파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3,000명이 회개하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제자들의 방언 말함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게 되었고, 사람들은 솔로몬 행각으로 모이고(행 3:11), 베드로는 그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인 사실과 그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증거할 수 있었다. 따라서 사도들의
능력 행함은 증거적이며, 복음 전파의 도구였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의 의의는
방언 말함에 있기보다는 하나님이 인간들과 함께 하는 종말론적인 새 시대의 출발점이라는
데 있다. 비록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초대 교회의 출범과 성장과정을 사건 중심으로
보도하면서 성령으로의 세례와 성령의 은사를 뚜렷하게 구별하지 않았다는 데서 혼란의
여지는 없지 않으나 그렇다고 해서 오순절 성령강림의 의미를 방언에 제한해 버리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순절 날 사도들은 성령으로의 세례와 성령의 은사를
함께 체험하고 있고, 방언은 단지 교회 창립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나) 사마리아 교회의 성령강림
사마리아성에 복음을 전한 것은 칠인 중의 한 사람인 빌립이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빌립의 전도를 듣고, 또 그의 행하는 표적과 큰 권능을 보고 놀라기도 하였다. 복음을
들은 사마리아인들은 침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아직 성령이 내리신 적이
없다는 내용으로 보아 중생이 먼저 있고 성령으로의 세례가 주어진 것처럼 보도되고
있으나, 여기서 언급된 성령강림이 성령으로의 세례가 아닌 성령의 권능이나 은사를
의미한다면, 사마리아인들은 이미 침례를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아 씻음과 새롭게
하는 중생을 체험하였으나 성령의 은사는 아직 내리지 않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필요에 따라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12:11).
사마리아 교회의 성령의 역사에는 방언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성령 내리심의 증거로 방언의 역사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능력의 종 빌립이 사마리아인들 앞에서 큰 권능을 행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인들에게 성령 받기 위하여 안수하지 않았다는 점과 하늘로서 직접 안수
없이 내린 성령도 없었다는 것이다. 사도들이 사마리아에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마리아를 방문하게 되었는 데, 그들의 방문 목적이 무엇이었는가를
알려고 하면, 그들이 사마리아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보면 된다. 빌립은 표적과 이적을
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능력을 다른 사람에게 안수하여 나누어 줄 수
없었다. 만일 빌립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다면, 사도들의 내왕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빌립이나 스데반은 사도들로부터 안수를 받기 이전에 이미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안수 받기 이전에는 능력을 행사한 일이 보도되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사마리아 교회에 내린 성령강림도
사마리아 교회 창립을 위한 외적이고 증거적인 표적의 역사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다) 고넬료 가정의 성령강림
하나님의 계획은 온 인류가 복음의 소식을 듣고 구원을 얻는 것이었다(마 28:16-20;
막 16:14-16). 그러나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복음은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전파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어 있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둘째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구원의 조건으로 율법을 온전히 준수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의 교리적인 갈등은 교회가 출범된지
십 수년이 지난 이후에도 계속된 것을 알 수 있다.
'고넬료 가정의 성령강림'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안수례없이 위로부터 부어 주시는 커다란 역사였다(행 11:17). 이와 같이 강한 성령의
증거적인 역사가 없이는 하나님이 이방인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이 받아 드릴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오순절 성령의 역사와 같은 강한 외적이고 증거적인 성령의
은사가 고넬료 가정에 내림은 베드로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확신을 심어 주기
위한 것이었다.
고넬료 가정의 성령의 역사는 오순절 역사와 마찬가지로 침례와
구원의 확신이 있기 이전에 내린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따라서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성령으로서의 선물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케이스의
성령의 역사는 유대인 교회의 창립과 이방인 교회의 창립을 위한 것이 였음을 알
수 있다.
(라) 에베소의 열두 제자들
바울이 에베소에서 만난 열두 제자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였든지, 아니면, 아볼로의
제자였을 것이다. 이들이 예언과 방언의 은사를 받은 과정이 사마리아의 과정과 비슷하다.
사도의 안수에 의한 성령강림이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만난 열두 명의 사람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
19:2)고 물었다. 바울의 이 질문이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성령의 은사를 의미하는 것인지를 밝혀 내야 한다.
바울은 먼저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를
묻고 "그렇지 않다" 라고 대답했을 때에, "그러면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묻고 있다. 에베소의 열두 제자들이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대답하자,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해서 설명한 후에 침례를 베풀었다. 이렇게 볼 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묻는 바울의 심중에는 침례를
염두에 두고 있음이 "그러면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라는 질문에서 드러나고
있다.
이미 사도행전 2장 38절을 통해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침례와
성령으로서의 세례는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침례를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고
베드로가 설교하였다. 만일에 바울이 성령을 받는 문제와 침례를 함께 생각한 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이 묻고 있는 질문은 '성령으로서의 세례' 즉 내주 동거의 성령을
의미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성령으로서의 세례'가 침례와 동시에 혹은 침례
가운데서 성령의 중생의 씻음과 새롭게 하심의 역사가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리고
바울이 바로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심중에 두고 질문을 던졌다 할지라도, 열 두 제자가
바울의 안수를 받고 방언의 은사를 체험한 것은 별개의 사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방언의 은사는 오순절, 사마리아, 고넬료 가정에서 이미 보았듯이
증거적이며, 외적인 성령의 역사이다. 여기서 방언과 예언으로 나타난 표적은 바울의
전도가 진실하다는 것과 바울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표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5절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와 6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는 구분되어야 한다. 5절에서 '성령으로서의 세례'가 먼저 이루어지고
나서 6절에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난 것이다. 히뽈리뚜스의 {사도들의 전승}(36에서도
침례 후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안수례 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에베소 교회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령의 임재를 믿었기 때문이다.
(3) 성령세례를 받기 위한 조건들에 대한 비판
오순절 계열에서는 학자들이 성령세례가 회심후에 특별한 기회에 주어지는 것으로
가르친다. 방언을 성령세례의 초기증거로 보기 때문이다.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구원받은 신자라도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이 된다. 방언을 하지 못하는 것은 그 신자에게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결론에서 나온 것이 바로 성령세례를 받기 위한
조건들이다. 이들 조건들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순절 계열의 학자들은 "신자들이 자동적으로 성령으로 충만케 되지 않으며,"
일정한 조건들에 충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조건들은 각자의 노력으로
채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력 없이는 또한 조건들을 충족하지 않는 한 성령세례는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성령세례는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자동적으로 따라 오는
축복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 특정한 기회에 특별한 체험으로 얻어져야
할 의무라고 말한다. 따라서 성령세례는 선물로써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후 어느 시점에서 노력에 의해서 행위로 받는 것이 된다. 기독교인이 되고 난 후에도
오순절 계열에서 제시하는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비로소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37
스킵스테트(Skibstedt)는 이들 조건들을 예배, 즐거운 믿음,
신실한 기대, 감사와 찬양, 무조건적 순종, 연합, 인내라고 말하고 있고; 콘(Conn)은
죄와의 분리, 회개와 세례, 믿음의 들음, 순종, 강한 갈망, 하나님께 요청을; 펄만(Pearlman)은
바른 태도, 하나님의 종들을 위한 기도, 교회의 연합된 기도, 믿음의 정화, 개인기도,
순종을; 바우르(Baur)는 기도, 믿음, 죄와의 분리, 죄인들과의 분리, 보상과 반환을;
지(Gee)는 회개, 세례, 믿음을; 리그(Rigg)는 중생, 순종, 기도, 믿음을(38 각각
성령세례를 받기 위한 조건으로 열거하고 있다. 토리(Torrey)는 [성령세례를 받는
방법]이란 설교에서 구원, 회개, 신앙고백(간증), 순종, 갈망, 간구, 믿음의 일곱
단계를 설명했다.(39 이들 모든 조건들은 선 조건(先條件)인 회심 또는 중생과 후
조건(後條件)인 순종과 믿음으로 간략하게 요약될 수 있다.
(가) 선 조건(先條件)으로서의 회심 또는 중생
중생을 성령세례의 선 조건으로 본다. 이는 선 중생, 후 성령세례의 공식이다.(40
그러나 고넬료 가정의 성령세례는 이 공식에 맞지 않는다. 고넬료 가정의 식구들은
위로부터 내리는 성령세례를 먼저 받고, 후에 중생의 거듭남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나) 후 조건(後條件)으로서의 순종
순종을 성령세례의 후 조건으로 보고 능동적인 순종과 수동적인 순종으로 나눈다.
죄로부터의 분리, 심령정화, 그리고 기도를 능동적인 순종의 내용으로, 마음 비우기,
성령대망집회, 그리고 믿음을 수동적인 순종의 내용으로 강조한다.
1) 죄로부터의 분리
죄를 가지고는 성령세례를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순종의 주된 임무를 죄의 말살로
본다. 콘(Conn)은 "당신은 성령을 받을 수 있지만, 죄를 가지고서는 안된다"고
말한다.(41 토리(R. A. Torrey)는 성령세례의 축복은 "죄의 포기로부터 온다"고
말한다. 그는 또 휘니(Finny)의 말을 인용하여 어떤 여인의 체험담을 들려준다. 그
여인은 집회가 끝나면 성령을 받기 위해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밤을 새워 기도했지만
성령이 강림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그녀는 자기 머리에 꽂혀 있는 머리핀이
하나님 보시기에 문제가 된 것으로 감동이 왔다. 그녀는 곧 머리 장식핀을 제거했다.
그랬더니 곧이어 성령이 강림했다는 이야기다.(42 이와 같이 내적 태도는 물론 외적
태도까지도 성령세례의 조건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겸손은 성령세례의 절대적 조건이라
주장된다. 콘은 또 성령과 죄는 같은 마음에 거할 수 없다고 말한다.(44
펄만(Pearlman)은 "죄인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도로서 우리는 성령을 영접한다"고 주장한다. 성령세례의 적은 죄라고 말한다.
그는 또 기독교인으로서 순종을 통해 모든 의식적인 죄를 그의 삶 속에서 제거해야만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고 주장한다.(45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얽힌 수수께끼는 과연 우리가 성령을
말하지 않고서 어떻게 구원을 말할 수 있으며, 성령을 받지 않고서 어떻게 죄를 범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을 것인가 이다(롬 8:9). 바울 사도는 로마서
7장 15-24절에서 그리스도인의 죄성의 존속 때문에 - 이 죄성은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거나
변형될 때까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심령 속에 지속된다 - 속사람의 갈등은 인간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없으며, 현실적으로 부정적이다 라는 입장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나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오,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치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오,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삶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말씀은 바울 사도 자신의 고백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말씀이 중생 받기 전의 죄인의 어떤 상태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사람의 현실적인 상태를 두고 한 말씀이다. 어거스틴은 이 말씀에
나타난 '나'를 수사학적 표현이 아닌 바울의 전기적 표현으로 확신했으며, 은혜 아래
있는 바울 자신의 상태를 묘사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바울의
도덕적 윤리적 상태와는 무관하게 내적으로 겪게 되는 육신을 가진 자의 고뇌라고
본 것이다. 루터와 칼뱅도 이 말씀의 주인공을 회심이후의 바울로 보았다.
이 말씀을 본문으로 학위 논문을 작성한 오우성은 '나'는
중생한 자의 관점에서 본 중생 이전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중생한 자로서
성령의 강한 영향력 아래 열린 그의 영적인 눈으로 바라본 자신의 실존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중생을 체험했지만, 그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율 배반적인 갈등 속에서 고뇌하는 모습이다 라고 말한다. 이
상황에서 바울은 율법의 진정한 목적과 의미를 깨닫고 자신의 내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죄의 세력, 그리고 이 세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극복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46
따라서 7장 15-25절은 죄성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탄식이며,
그리스도인이 겪는 죄의 법과 하나님의 법 사이의 갈등을 설명한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죄의 속박상태나 포로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바울은 로마서 6장 1절부터 7장 14절에서
원칙을, 7장 15-25절에서 현실을, 8장에서 능력을 말하고 있다. 6장 1절부터 7장
14절에서 바울은 경건과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원칙 혹은 의무를 확립하였고, 7장
15-25절에서는 현실적인 어려움 혹은 인간의 노력의 한계상황을 경험적으로 고백하였으며,
8장에서는 이 한계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제시하고 있다. 이 능력은 성령의
내주 동거 인도하심 속에서 나타난다.
바울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고 소망 있는 이야기를 8장에서
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현상태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였다(2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3절). 그리스도인은
죄에서 해방된 생활을 살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승화된 삶을 살기 때문에 성령으로
승리에 찬 생활을 살 것이라는 것이 바울 사도의 강력한 주장이다. 37절에서 그는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하였다. 이는 정복자 이상의 정복자(more than conquers)란
뜻이다. 이상과 같이, 성도들은 죄를 없이하고 난 후에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고 그의 도우심으로 죄를 이기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서 죄를 철저히 회개하여야
한다는 가르침은 칭의의 교리에 대한 이해의 문제가 있다고 본다. 칭의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도말 하시고 우리를 의로운 자라고 부르신 것을 의미한다. 이신칭의는
믿음을 유지하는 한 우리의 의로움은 영원하다는 것을 성서는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인을
성도라 칭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의로운 자로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미 하나님 앞에 모든 죄가 용서된 자들이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기 위해서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죄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죄로부터 분리되고 하나님과
연합되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성도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그들의 말대로 죄로부터
분리되어야 성령세례를 받는다니 모든 성도는 이미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구원과 성령세례가 동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을 먼저 받고 나중에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그들의 주장이 옳다면, 구원 후에 범하게 되는 일상적인 죄는
회개해야 할 것이지만, 성령의 역사가 없는 구원을 언급한다는 자체가 구원론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보기 어렵다. 또 오순절 운동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성령세례가 은사나
권능이라면, 성령세례가 후속적일 수 있겠으나, 성령께서 필요에 따라서 자의로 나누어주실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은사나 권능을 소유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고전 12:11).
은사의 속성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배타적인 것이다. 방언이 은사라는 말은
곧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하는 말이다. 이는 마치 모든
사람이 다 신유의 은사를 갖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다. 다 목사일 수 없고, 다 장로일
수 없으며, 다 집사일 수 없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말해야 한다는 주장은 비성서적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성령세례를 중생의 시간에서
분리시킬 수 없으며, 은사나 권능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마지막 시대의 선물이 아니라,
인격신이신 성령을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오순절 운동가들의
말대로 은사나 권능은 후속적일 수 있다. 이는 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성도들의 필요에 따라 주시는 은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사나 권능이 언제나 후속적인
것은 아니다. 성령께서는 심지어 믿지 아니한 사람이나 짐승을 통해서도 종종 권능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2) 심령정화
심령정화는 성령세례를 받기 위한 능동적 조건의 하나로써 순종이나 보상으로서 주어지는
즉 믿음으로 받는 심령정화를 말한다(행 15:8-9). 이는 중생과 동시에 일어나는 성화이며,
이 단계에 이르러야 방언을 말하는 성령세례를 받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의
은혜의 사역을 두 가지로 보지 않고 세 가지로 정의를 내린다. 이들은 중생과 성화(믿음으로
심령정화) 및 방언으로 입증되는 세례들이다.(47
3) 기도
오순절 운동가들도 성령세례를 믿음으로 받는다고 주장한다. 성령을 돈으로 사는
것은 아니지만, 끊임없는 기도와 집중적인 기도가 성령세례를 받는 조건이 된다고
리그(Rigg)는 말한다. 오직 구하는 자만이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성령이 내리지 않은
이유는 구하는 자의 믿음이나 기도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믿음에도 큰 믿음이 있고,
작은 믿음이 있고, 기도에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기도의 종류는 하나님께서 누가 과연 이 값없이 주는 선물을 받기에 합당한가를 결정하게
하시는데 필요한 예선통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강하고 강대한 기도는
앞으로 전진하는 순종이며, 이러한 기도 가운데서 수동적인 조건으로 입문하게 된다고
가르친다.(48
그러나 성서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큰 믿음과 작은 믿음을 하나님께서 따지는가? 하나님께 드리는 순수하고 깨끗한 기도에
단계가 있을 수 있는가? 조건에 통과해야 받는 것을 선물이라고 할 수 있는가? 믿음의
크고 작은 단위는 성령의 은사이기 때문에, 오순절 운동가들이 말하는 크고 합당한
믿음도 은사이다(고전 12:9). 상식적으로 말해서 은사는 구원보다 더 중요하고 큰
것일 수 없다. 그러므로 은사를 받기 위하여 더 큰 믿음이 요구된다는 발상은 비성서적이다.
은사는 전혀 믿음이 없는 자에게도 적용이 된 신구약 성서의 사례들을 보라. 사도행전의
네 가지 사례들도 방언을 말한 자들이 전혀 구원하는 믿음 이외에 부가적인 또는
더 큰 믿음을 요구받은 적이 없다.
4) 마음 비우기
성령을 받고자 하는 자가 이 모든 능동적인 순종의 과정을 거치고 철저히 성령께
그의 마음을 비운다면, 성령세례를 받을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철저히
성령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며 철저히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성령을 받기 원하는 자는 모든 자신의 의지적 조절을 버려야 한다. 어떠한 현상이
자신의 몸에 일어나더라도 거절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완전히 내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49
그러나 이러한 내맡기기식 가르침이 야기하는 큰 문제는 사탄의
역사에 대한 호기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오순절 운동의 방언의 가장 큰 결점은 객관성의
결여에 있다. 내가 하는 방언이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사탄의
장난인지 또는 단순한 자연의 현상적인 작용인지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실제로 무의식적으로 마귀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오순절의 방언은
객관적으로 입증이 되었고, 고넬료 가정의 방언도 유대인들에 의해서 입증이 되었다.
바울 사도가 말한 신령한 방언이 오순절의 방언과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 하나는 마음 비우기 식에는 성서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위험한 발상이다. 성서는
방언을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하는 것이 방언이라고 하였다. 이는
강권적인 뜻이 내포된 말이다.
5) 성령대망집회
정기적인 집회 후에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 특별 기도회로 모이는 집회를 말한다.
이 때 기존의 경험자들이 방언을 하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서 여러 가지로 협조한다.
이와 같이 오순절 순복음식 성령체험은 사적이고 개인적인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일어나기보다는 주로 대중적인 집회를 통해서 일어나고 있다. 물론 대중적인 집회가
주는 많은 장점도 있겠으나, 빠른 템포의 찬송, 강렬한 손뼉치기, 고성의 기도 등은
일방적이고 이드(Id/原慾) 발산적인 기도이며, 대화적이고 사색적인 기도가 이러한
모임에서는 추방을 당하고 있다.(50 언어학자이며 선교사였던 유진 니다(Eugene A.
Nida)는 그의 저서 {문화와 관습}에서 서아프리카의 흑인들도 이와 같은 형태를 통해서
종교적인 무아경에 이른다고 말한다.(51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방언이 결코
기독교의 배타적인 체험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고대 고린도 인근 지역에는 델포이
신전이 있었는데 그곳의 여사제가 방언을 말하였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이 되고
있으며, 그들은 이것을 신탁 받기 위해 사용하였다.
방언을 말하는 이단 사교들도 많이 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유니테리안주의자들도 있고, 인간이 신이며, 인간은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몰몬교도들도 있고, 마리아의 몽소승천이나 교황의 무오설을 믿는 천주교회도
방언을 말하고 있다. 오순절 운동의 방언이 갖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방언이 성령세례의
표본이 됨으로써 교리의 상대성을 지지해 주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환언하면, 방언
하는 사람은 성령께서 인정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믿는 교리도 인정되었거나 아니면
교리나 진리가 전혀 중요치 않거나 이다.
6) 믿음
오순절 운동가들은 두 가지 종류의 믿음에 대해서 말한다. 이들이 강조하는 믿음은
성령을 받기 위해서 순종에 보충하는 부가적인 행동으로서 이해된다. 이러한 믿음은
구원을 받는데 필요한 동의와 신뢰로서의 믿음과 구분된다. 이를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께
향한 믿음이라고 한다면, 능력과 성별을 위한 성령께 향한 믿음이 있다고 펄만(Pearlman)은
주장한다.(52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세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향한 믿음과 성령께 향한 믿음을 나눈다면, 에베소서 4장 5절의 "믿음도 하나이요"라고
한 말씀에 위배된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로서의 믿음도 따지고 보면, 구원하는
믿음이 성령의 간접사역에 의하는 것이라면, 은사로서의 믿음은 성령의 직접적인
사역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이상으로 오순절 운동가들의 성령세례론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약술한 바와 같이 오순절 운동가들은 성령의 외적 역사인 도구화의 사역 즉 성령의
은사들을 성령세례로 이해하고 있고, 중생과 분리하여 후속적으로 체험되어 지며,
그 초기 증거로서 방언 말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 성령세례는 충분히 믿음을
소유한 사람, 죄를 완전히 말살시킨 사람, 완벽하게 순종한 사람, 투쟁적으로 기도한
사람, 완전하게 자신을 굴복시킨 사람만이 성령대망집회를 통해서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오순절 운동가들은 두 개의 믿음과 두 번의 회개, 삼 단계의
구원론을 주장하였으며,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서 행위의 믿음과 순종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도 살펴보았다.
오순절 운동가들은 성령의 외적 사역 즉 도구화의 사역을
절대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성령의 내적 사역 즉 성화와 구원의 사역을 경시하였다.
심지어 은사를 받지 않으면 완전한 성결에 이르지 못한 것처럼 가르쳤으며, 그 반대로
은사를 받은 사람은 완전한 성결에 이른 것처럼 가르치기도 하였다. 방언을 말하는
신자들의 삶이 완전한 성결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인데도, 방언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열등감을 갖게 하였으며, 믿음이 부족한 사람으로
낙인을 찍기도 하였다.
오순절 운동가들이 주장하는 이와 같은 주장들은 전통적인
교리에 위배된다. 그들이 주장하는 두 가지 믿음, 세 가지 세례는 예배소서 4장 5절의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위배된다.
죄인에게 있어서 구원과 성화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구원과 성화는 본질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방언이나 권능의 행함은 구원이나 하나님의 나라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고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이 있을 것에 대해서 예수께서 가르치셨다(마
7:22).
기적적인 권능, 예언, 방언 등의 외적 은사는 결코 기독교만의
독점물이 아니며, 무교에서 바알종교에 이르기까지 각종 사이비 종교 단체에서도
이런 것들을 주장하고 있고, 또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성서도 이러한 사례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모세의 기적과 바로의 술사들의 것처럼 비교가 안되는
것이기는 하다.
오순절 운동의 또 한 가지 특색은 교리적 가르침이나 신학적
바탕 위에 둔 신앙과 실천을 중시하기보다는 오히려 체험 신앙을 강조하고 있고,
신앙적 혼합주의로 기독교 진리를 왜곡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자칫 잘못하면 방언만
말하면 누구라도 방언 안에서 한 형제라는 생각도 가질 수 있으며, 방언을 통해서
이단 사설을 비판 없이 수용하는 교리적 상대론도 나올 수 있다. 현대 은사운동에
우려할 만한 점에 대해서 류제창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의 은사운동은 궤도를 이탈하는 동차와 같이 공포스러운
말기 현상을 보이고 있다.
과거의 은사운동은 개인 신앙이 얼마나 좋으냐에 기준 하였으나
오늘의 은사운동은 누가 얼마나 잘 풀리고 성공하는가 라는데 기준 하는 것 같다.
예나 오늘이나 은사운동은 성경(교리)보다 체험을 앞세워 체험을 중생과 구원의 필요조건으로
삼는데 특징이 있다. 이들은 누구에게 신적 역사가 얼마나 일어났느냐를 중시하다
보니 성령세례나 기적적 사건들로부터 연고한 축복론 형통론을 앞세우기 마련이다.
그리고 편협한 종말론이나 위기의식을 조장하기도 하여 저주나 형벌, 축복과 칭찬을
자유자제로 구사한다.
차라리 과거(1960년대까지)의 간증자들이나 부흥사의 말속에는 중생과 변화가 중심이었는데,
오늘의 중심은 이러 이러 했더니 이렇게 잘 되었다는 평신도, 기고 만장한 자기 자랑
일관의 부흥사, 그러다 보니 예수 믿고 천국 갑시다란 전도 표어가 예수 믿고 축복
받읍시다로 바뀌고 말았다.
이런 말을 들어 본적이 있는가? "나는 X X X 교회에
나가서 병도 낫고 축복도 받아서 아들 낳고, 집 사고, 시동생 서울대학에, 친동생
미국 유학, 아빠는 전무로 승진, 나는 이렇게 날씬하게 됐어요. 당신도 예수 믿고
축복 받아요." 이 말은 내가 꾸민 것이다.
그러나 웃지마는 못할 이런 전도 용어가 교회에서 칭찬 받고
이웃에게 어필한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더욱 가공할 것은 성령체험이 없는 신자는
'쭉정이'이고 성령의 열매(여기서는 방언, 신유, 특수체험)만 있으면 교리나 종교를
초월해서 한 형제란 신앙적 혼합주의 현상이 만연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곳에는 회개보다 많은 양의 기도가, 변화보다
금식, 철야, 산기도가, 전도보다 헌금, 헌물이 강조되어 자기 비만하고, 배금주의,
기복 사상을 배양하고 조장한다는 평을 받고 있는 것이 현대 은사운동이라고 한다면
혹평이 되겠는가? 거두절미하고 현대 은사의 어떤 곳에도 은사는 그리스도와 복음의
방편이라는 표현을 찾을 수 없는 것이 동서양의 공통점이다.(53
나. 성령세례는 사도시대 이후 종결되었다는 견해
일부 학자들은 오순절 운동가들과 마찬가지로 성령세례를
외적인 은사들의 부어 주심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은사들은 오순절
사건과 고넬료 가정의 사건에서 끝났다고 보며, 이 두 사건은 유대인 교회 창립과
이방인 교회 창립의 목적을 갖는다고 본다. 따라서 성령세례는 오순절날과 고넬료
가정에 내린 단 두 번의 사건 속에서 소멸된다. 이런 주장을 단회설이라고 한다.
단회설을 주장하는 유명한 학자들로는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 안토니 후크마(A.
A. Hoekema), 던(J. DG. Dunn), 고재수(N. H. Gootjes), 개핀(R. B. Gaffin) 등이
있다.(54
리즈(Gareth L. Reese)는 누가복음 24장 49절의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의 말씀을 성령세례의 동의어로 보고 성령세례가 단지
두 번의 사건에만 제한된다고 보았다.(55 오순절 성령 강림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만
약속하신 것으로 믿어 오순절 성령체험을 사도들에게만 제한시킨다(마 10:19-20;
눅 21:13-14; 24:49; 요 14:26; 16:13; 행 1:8). 그리고 이방인 교회의 창립의 뜻을
갖는 고넬료 가정의 성령강림이 "위로부터" 내린 성령강림이기 때문에
오순절 성령강림과 동일한 차원에서 성령세례로 본다. 만일 오순절 운동가들이나
리즈의 견해처럼 성령세례의 경험을 능력이나 은사로 본다면, 성서의 성령강림에
대한 상당수의 약속들이 특히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약속들이 사도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제한된다고 볼 수도 있다. 맥가비(J. W. McGarvey)는 사도들의 권위와 권능이
다른 사역자들의 경우보다도 현저하게 크고 놀랍기 때문에 이 견해에 찬성하고 있다.(56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다른 선지자들보다 크고
뛰어난 권능을 부여하셨다. 한번은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하였을 때,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하였다가 그 벌로 문둥병자가 된 사례가 민수기 12장에 기록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암과 아론을 세워 놓고 꾸중하시기를 다른 선지자들에게는 이상이나 꿈으로 말씀하셨으나
모세에게는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말씀하시고 은밀한 말씀으로 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약시대의 성령의 역사도 사도들의 권능과 다른 종들의 권능이
현저하게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들의 권능과 빌립의
권능의 차이이다. 칠인 중 한 사람인 빌립은 능력과 권능의 종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안수하여 성령세례를 내리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도들은 할 수 있었다.
현대 오순절 운동가들이 아무리 오순절 성령강림을 재현코자
하여도 불가능한 것은 하늘로부터 직접 내린 성령강림은 단지 두 번뿐이 였으며,
사도행전에 실린 나머지 두 사례는 사도들의 안수에 의해서 이루어 졌기 때문이다.
성서시대에는 병자가 낫기를 원하여서 주님께나 사도들에게
찾아와 낫지 않고 돌아간 사례가 없었으며, 단계적으로 치유되지 않고, 즉각 완치되었다.
그러나 현대에는 이러한 신유의 역사가 없음을 볼 때, 현대 오순절 운동가들의 신유
은사는 성서시대의 그것과 비교하여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성령세례를 은사에 국한하고 역사적인 두 사례에 제한시키는
것은 성령의 내주 동거를 현시점의 성령의 유일한 역사로 보고, 모든 성령의 은사가
끊겠다고 믿는데서 온 해석일 뿐이다. 이 주장을 하는 학자들은 성령의 역사를 성령세례와
성령의 내주 동거로 국한하고, 성령세례는 역사적인 두 번의 사건으로 끝났고, 현재는
성령의 내주 동거의 역사만 남았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적인 역사인
기도의 응답이나 신병으로부터의 치유 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것을 강하게 믿고 기도한다. 그들은 다만 성령은 어느 특정인에게 더 이상의 신유나
방언이나 예언과 같은 특별한 은사를 허락지 않는다고 믿을 따름이다.
특정인에게 주어지는 은사가 끊겠느냐 아니면 계속 주어지느냐하는
문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논제이다. 우리는 다만 성령의 능력을 제한시켜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본다. 또 그가 하시고자 하시면 아무도 그것을 인간으로서는
막을 수 없다. 성령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을 신학적으로 막아서는 안될 것이다. 이
천년 전에 큰 능력으로 역사하셨던 같은 성령께서 오늘날에도 역사하실 수 있도록
마음을 열고 돕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방언이나 신유와 같은 특별한
은사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세례의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이 점에 대해서 보다 상세하게 연구하고자 한다.
2. 성령세례에 대한 성서적 이해
성령세례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오순절의 축복이
오순절 운동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성령의 은사들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본질을 캐봄으로서 오순절의 축복에 대한 핵심을 바로 잡고 오순절
운동가들이나 일부 전통 보수주의자들이 기적적 권능을 성령세례로 동등시하는 해석을
성서적으로 조명해 보고자 한다.
가. 성령의 내주 동거로서의 오순절의 축복
(1) 약속
오순절 성령강림이 성령의 내주 동거의 축복인지, 아니면
외적인 은사의 축복인지를 판별하기 위해서 먼저 성령에 관한 예언자들의 말씀을
살펴보아야 한다. 예수께서 승천에 앞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아버지의 약속'이란 바로 구약성서에 예언된 성령에 관한 약속을 말한다. 오순절
성령의 오심은 바로 이 약속에 따른 것이다. 여기서는 세 분 예언자들의 예언의 말씀을
살펴보겠다.
이사야는 성령에 오심을 가장 먼저 예언한 선지자이다. 다음은 44장 3절의 말씀이다.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에스겔도 36장 25-27절에서 성령이 주어질 것에 대해서 예언하였다.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요엘도 2장 28-29절에서 성령에 관한 놀라운 예언을 하였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성령에 관한 같은 주제가 오순절 성령강림 이전에 세례 요한이나 예수의 말씀들을
통해서 재확인되었다. 마태는 세례 요한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마태복음 3장 11절에서
보도하고 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누가는 예수의 말씀을 누가복음 11장 13절에서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요한도 예수의 말씀을 요한복음 7장 37-39절에서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신약성서에서 성령의 오심에 관한 이들 예언의 말씀들은 사도행전
1장 4-5절에 기록된 대로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에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말씀에서 재확인되었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구약에서의 성령강림에 관한 예언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메시아의
출현에 관한 예언과 동시에 주어진 아버지의 약속이다. 하나님께서 포로 이전 시대에
이미 이사야를 통해서 유다의 회복을 예언하셨고, 메시아 출현과 성령 강림도 예언하셨다(사
44:3; 32:15). 바벨론 포로시대에도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회복과
메시아 출현, 그리고 성령강림을 재차 확인하셨다(겔 26:27; 39:29). 이 세 가지
예언의 특징은 그 효과가 전체적이며, 내적이며, 종말론적이다. 이는 마지막 시대에
주어질 성령세례가 내적이며, 총체적인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과 직결됨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2) 성취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대로 이 예언의 말씀들은 주후 30년 5월 28일 오전 9시경에
오순절날에 말씀대로 성취되었다. 학자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을 주후 30년 4월
9일 일요일로 보고 있다.(57 그리고 성령이 강림하신 오순절날은 유월절 안식일 다음날로부터
50일째 날이므로 이 날은 주후 30년 5월 28일 일요일이 된다(레 23:15-22). 성령께서
강림하신 시간은 사도행전 2장 15절에 유대시간으로 '제 삼시'라고 했다. 우리 시간으로
오전 9시에 해당된다. 이 날의 성취로 최초의 교회가 창립되었고, 구약 시대와 신약시대,
율법시대와 은혜시대로 갈라지게 되었다.
(3) 성령을 선물로
구약시대에도 성령의 역사는 있었다. 모세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의 종이었다. 엘리야와
엘리사도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는 기적의 종들이었으며, 모세를 도와
이스라엘을 지도할 70명의 장로와 유사들(민 11장), 사무엘의 선지생도들, 하나님의
신이 떠난 사울 왕, 심지어 미물인 당나귀와 바알 선지자 발람조차도 예언과 방언을
하였다(민 22-24장; 삼상 19:18-24).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에 활동하셨던 예수 때에도
신유, 예언, 방언과 같은 성령의 은사가 이미 존재했었고, 제자들도 이와 같은 체험들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것 혹은 특별한 것이 틀림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약의 신자들이 누렸던 축복과
누리지 못했던 축복을 구분해야 한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생하면서부터 신앙인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신앙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교육되는 총체적인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에 성령의 내적인 사역이 필요치 않았다. 오직 성령의 외적인 사역만이 있었다.
이 성령의 외적인 사역은 증거적이며, 공적이며, 제한적이며, 일시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사역의 특징은 첫째, 외적인 도구(봉사)의 역사뿐이었다. 둘째, 특정인에게만
주어졌다. 셋째, 내적인 구원과 성화의 역사가 없었다. 넷째,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진 적이 없었다. 다섯째, 언제나 임시적이었다. 여섯째, 표적이 따랐다. 일곱째,
신자가 아닌 자에게도 주어졌다(삼상 10:10; 16:13-14; 19:20- 23; 민 11:25; 24:2).
주후 70년과 135년의 유대전쟁의 패배로 인한 이스라엘 나라의
멸망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신약시대의 삶의 무대는 이교 문화권이며, 신자들은 이교적인
분위기에 젖어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가 필요하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교 문화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지 모른다.
이교 문화 시대에는 성령의 증거적이며, 공적이며, 제한적이며,
일시적이며, 외적인 사역만으로는 신자들이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기가 쉽지 않다.
이 시대에도 물론 외적이며 은사적인 성령의 사역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에 구약시대에 성도들에게 주시지 않았던 내적이며, 개인적이며,
우주적이며, 항구적이며, 구원과 성화에 필요한 '성령으로의 세례'를 선물로 주셨다.
이로써 이 시대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시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겨 맛보게 하시는 종말론적인 시대로, 은혜시대와 교회시대로
특징 지워 주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성령을 통해서 중생과 성화를 이루게 하시고,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게
하시며, 성령을 통해서 구원의 완성 또는 예수 재림시의 부활을 보증 받고 인침 받고
약속 받게 하셨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에 물붓드시 부어 주시기로 약속하신
성령세례는 성령을 선물로 하나님께서 모든 신자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성령으로의
세례'를 말한다.
성령으로서의 세례는 이 시대를 성령의 시대로, 성령의 능력으로
종말을 선취하는 시대로, 우주적인 구원의 시대로, 종말론적인 메시아 시대로,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시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삶 속에서 경험하는 교회시대로
만든다. 그리고 성령으로의 세례는 믿는 자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어진다.(58
오순절날 사도들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으로의 세례'와
'성령의 은사'를 함께 체험하고 있다.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으로의 세례가 주어짐으로서
이 시대가 우주적인 구원의 시대로 돌입하게 되었다. 이 은총이 사도들을 통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도들이 특별한 것은 오순절날에 이들이 특별한 성령의 은사를
받았기 때문이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성령으로의 세례를 성령의 은사와 크게 구별
없이 초대 교회의 시작과 발전이라는 사건 중심으로 보도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오순절의 성령의 강림을 마치 방언이나 신유와 같은 성령의 은사로 오해하고
있다.
성령으로의 세례는 바울서신에서 더욱 자세하게 설명되고
있다. 그 이유는 바울 서신이 교회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가의 사건 보도와 바울의 해석을 통해서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이 우주적인 만인 구원의 시대, 즉 하나님의 나라가 이 지상에 세워지는 교회
시대를 시작한 사건이었다는 점과 사도들에게 특별하게 내리신 성령의 외적인 은사를
통해서 교회를 창립하고 성경을 쓰도록 하였다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성령의 외적인
은사는 전달자와 전하는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입증하는 증거적인 역사이다.
교회와 성서는 사도들의 놀라운 능력의 사역과 말씀의 기초 위에 세워졌다. 그러나
신자 개개인의 구원과 성화는 성령이 친히 신자들의 마음속에 함께 거하시면서 이루신
축복이며, 모든 신자들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이 축복이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의 특징이다.(59
나. 성령세례의 정의
이제까지는 '아버지의 약속'으로서의 성령세례가 성령께서
그 뜻대로 주시는 은사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이 믿는 자들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시며, 신자들의 마음속에 내주 동거하시는 인격신이신 성령이란 사실을 강조하였다.
지금부터는 무엇이 성령세례이고 무엇이 성령세례가 아닌지를 박스터(Ronald E. Baxter)의
도움을 받아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부정적인 면에서 본 성령세례
먼저 성경이 아니라고 말하는 부정적인 측면에서 성령세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가) 성령세례는 개개인의 삶 속에서 반복되는 경험이
아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과 12장 13절의 말씀이나 갈라디아서
3장 2-5절의 말씀 또는 로마서 5장 5절과 8장 15절의 말씀 등은 모두가 성령세례가
단회적이고 과거적이며, 계속적으로 내주 하시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주후 30년
오순절날에 강림하신 성령은 그 후 영구히 교회에 거하시며, 성도들은 그들의 중생의
때에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에로 세례를 받는다. 성도들은 '한 몸으로', 한 성령
안에서, 한 주님에 의해서, 한 믿음을 통해서, 한 세례로, 한 하나님이시며, 만인의
아버지의 은혜로 말미암아 세례를 받는다(엡 4:4-5). 그러므로 성령세례는 반복되는
경험이 아니라, 단회적이며 영구적인 성령의 내주의 축복을 구원받을 때에 선물로서
믿음을 통해서 받는 것을 의미한다.
박스터는 개개인에게 일어나는 이 단회적인 성령세례의 특징을
오순절 성령강림에까지 소급하고 있으면서, 오순절 성령강림 자체를 역사적으로 단회적인
사건으로 본다.(60
(나) 성령세례는 회심후의 경험이 아니다.
우리는 중생의 때에 성령세례를 받는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로 연합되는 순간에 성령세례를 받는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서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한 몸'이란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를 말한다. 신자가 '한 몸', 교회에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 전통적으로 물로 세례를 받은 자만이 입교인이 된다. 그리고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란 말씀은 물로 받는 세례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딛 3:5) 이루어지는 성례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시간임을 말한다(고전 6:11).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다"는 말씀은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같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임을 말한다. 이로써 우리는 구원을
받는 시간과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의 일원이 되는 시간과 침례를 받는 시간과 성령을
선물로 받는 시간과 하나님의 나라를 종말론적으로 선취하는 시간이 동시적이며 일시적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세레는 회심후에 일정 기간이 지나서 받는 경험이
아니다.
박스터와 모울(Moule)도 이 점에 동의한다. 물세례와 성령세례는
단번에 일어나는 사건이며,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칭의와 중생을 체험하는
시간이라고 말한다.(61
(다) 성령세례는 성령충만과 같지 않다.
사도행전 2장 4절의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의 말씀 때문에,
토리(R. A. Torrey)와 같은 이들은 성령세례와 성령의 충만을 같은 것으로 본다.
토리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성령의 은사와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말하기를,
"성령세례는 중생과는 다르다. 성령세례는 중생이후에 첨가되는 성령의 사역이다.
사람이 성령에 의해서 중생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성령세례를 받은 것은 아니다."(62라고
하였다.
그러나 성서는 성령충만과 성령세례가 상당히 다르다는 점을
지적한다. 몇 가지 내용만을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동사 '세례 받다(baptistheto)' 라는 말은 계속적인
동작의 뜻이 없다. 그러나 동사 '충만(plerousthe)'은 계속적인 뜻이 담겨 있다.
둘째, 성령세례는 명령이 아닌 반면, 충만은 명령이다. 모울(Handley
Moule)은, "성령충만에 관한 언급은 자주 있는 반면, 성령세례는 오순절 성령강림과
고넬료 가정의 성령강림의 경우에서처럼 단지 두 번만 기록되어 있다."(63고
말하면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다르게 보았으며, 성령충만은 성령세례와는 달리
신자들이 구해야 할 축복이라고 주장하였다. 성서 어느 곳에도 성령세례를 구하라는
명령이 없는 반면, "성령의 충만(plerousthe en pneumati)을 받으라."
라는 말씀이 에베소서 5장 18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과 고넬료
가정의 성령강림은 사람의 안수 없이 위로부터 내린 특별한 경우이며,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 창립의 의의를 갖는다.
셋째, 성령세례는 배치적이지만, 충만은 경험적이다. 성서에서
성령세례는 역사적인 사건으로써 또는 신자에게 일어나는 단회적인 사건으로써 성격상
배치적이다. 이름이 생명 책에 기록되는 것이 배치적인 것처럼 성령세례도 배치적이다(빌
4:3). 그러나 충만은 성령의 능력이 경험적으로 유입되는 것이다. 성령충만은 개인의
생활에서 우러나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 . .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 . .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엡
5:19-21) 하는 경험이며,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23)의 열매를 맺는 생활이다. 또 충만은 성화와도
직결된다.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갈 5:24), 성령으로 행하며,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아니 하며, 투기하지 아니하는 생활이다(갈 5:25-26).(64
(라) 성령세례는 선택된 집단의 신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3절은 구원받은 모든 사람이 다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분명하고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다. 비록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모두가 방언을
하지는 못하였지만(고전 12:30), 고린도교회의 성도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성령세례를
받지 아니한 사람은 없다(고전 3:16; 6:19; 12:13; 고후 6:16). 고린도전서 12장
13절의 말씀은 사도행전 2장 39절에 기록된 베드로의 진술과도 일치한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65
(마) 성령세례는 고통스런 기도에 대한 응답이 아니다.(66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은사를 성령세례와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고통스런 기도나 성령대망집회 등을 통해서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누가복음 24장 49절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장 4절에서도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사도행전 1장 14절에 의하면,
제자들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쓴" 것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말씀들 때문에 오순절 운동가들은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많은 인내와 기도가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사도들의 '성령 대망 기간'은 10일간이었다. 유월절 안식일
다음 날부터(주일) 50일째 날(주일)을 오순절이라고 한다. 예수께서 안식일 다음
날에 부활하셔서 40일간 보이셨으므로 승천 후 성령 강림까지는 10일간이다. 이 기간이
성령 대망 기간이었다. 사도들은 이 기간에 기도에 힘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전혀
기도에 힘쓰다'(proskartepeo)는 이 말은 꾸준하고 지속적인 기도를 말한다. 유대인의
기도 습관은 하루 세 번 정해진 시간에 예루살렘을 향해서 기도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우리 시간으로 아침 9시, 정오, 오후 3시에 기도하였다. 특히 오후 3시는 저녁 희생제사를
드리는 시간이었다. 유대인의 하루는 저녁 해질 때부터 시작해서 다음 날 해질 때까지를
말한다(시 55:17; 119: 164; 단 6:10; 행 2:15; 3:1; 10:9).
오순절날에 성령이 강림한 때는 오전 9시 기도 시간이었다.
사도들이 성전에 올라가기도 하던 중에 성령강림을 체험하였다. 이렇게 보면, 사도들이
기도 때문에 성령세례를 받은 것처럼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순절 성령강림은
사도들의 고통스런 기도에 대한 응답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창립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다. 오순절은 유대인의 큰 명절이며, 오전 9시는 기도 시간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운집하는 때다(눅 24:53; 3:11; 5:12). 이런 시간에 성령이 강림하시고
여러 나라의 방언을 말하는 역사가 있었던 것은 교회창립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었다.
(바) 성령세례는 영성에 대한 어떤 증거도 아니다.
성령에 관한 언급이 가장 많은 고린도전후서가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가장 문제가 많은 교회에 쓰여졌다. 고린도 교인들은 분파적이었고(1-2장), 육체적이었으며(3-4장),
부도덕하였고(5장), 사랑이 없었으며(6장), 결혼 파괴자들이었으며(7장), 성별 되지못했으며(8-10장),
주의 만찬을 경홀히 여기는 자들이었으며(11장), 예배가 훈련되지 못하였으며(12-14장),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다(15-16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씻음 받고, 성결되고, 칭의 함을
받은 성도들이었다(고전 6:11). 게다가 그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고전 12:13).
거기에다가 그들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는 자들"(고전 1:7)이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로 볼 때 확실한 것은 성령세례가 영성에 대한 어떤 증거도 아니라는
점이다.(67
(2) 긍정적인 면에서 본 성령세례
이제까지는 부정적인 측면에서 성령세례가 아닌 것을 설명했지만,
이제부터는 긍정적인 측면에서 성경이 말하는 성령세례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다.
(가) 성령세례는 성령의 요소 안에 있는 세례이다.
고린도전서 12장 13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더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한 성령으로'(en eni pneumati)에서 전치사 'en'이 여격과
함께 쓰이고 있기 때문에 'en eni pneumati'를 지역적 의미로 해석하느냐, 도구적
의미로 해석하느냐의 문제가 제기 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경은 도구적 의미로(by
one Spirit) 번역하고 있다. 엉거(Unger)는 "헬라어 전치사 이
도구적 의미인 by를 의미하든, 영역의 위치를 설명하는 in을 의미하든 관계없이 '한
성령으로'는 성령세례를 말한다. 성령세례라는 말의 정확한 헬라어의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성령의 영역 안에서의 세례(in- the-sphere-of-the-Spirit baptism)로서
표현할 수 있다"(68고 하였다.
by는 성령이 세례의 주체자가 되며, in은 세례가 성령의 영역
속에서 이루어짐을 나타낸다. 물세례는 그리스도의 지역적인 몸의 지체가 되는 행사로서
물의 영역 속에서 침수된다. 이는 물이 세례가 일어나는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세례도 성령의 영역 속에서 일어나는 성령이 요소가 되는 세례로
볼 수 있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례를 보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게"(행
2:2) 성령이 내리신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제자들이 성령의 임재 속에 푹 담가짐을
의미한다.
(나) 성령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물세례를 통해서 물은 신자가 침수되는 영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주례자가 있어야 한다. 물은 주례자가 아니며, 세례를 통해서 구성원으로
가입되는 교회도 아니다. 물론 구성원 가운데 주례자가 있지만, 교회 자체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세례도 성령이 요소가 되나 주례자는 아니시다. 삼위일체적인 입장에서
볼 때, 성령께서 세례의 요소도 되시고 주례자도 되실 수 있겠으나, 그 역할로 볼
때, 역시 성령을 보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 14:16; 16:7). 또한 세례 요한의
증언대로 예수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
(다) 성령세례는 근본적으로 지역교회와 연결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서 표현한 한 몸이란 어떤
몸을 지칭하는 것인가? 12장 12절 이하에서 바울은 몸과 지체에 대해서 잘 묘사하고
있다. 특히 27절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하였다.
이는 지역교회를 두고 한 말이다. 1장 2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이라고 정의한다.
지역교회를 한 몸으로 보았을 때, 그리스도가 이 몸의 머리
시요(엡 1:22; 4:15; 5:23; 골 1:18), 교회는 그의 몸이다(엡 1:23; 4:12; 5:23;
골 2:24). 그의 몸은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개개인의 구성원을 말하며,
이 구성원들은 그들의 받은바 은사들로 인하여 각각 특색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이다. 그들이 몸의 지체가 되는 이유는 성령세례때문이다.
구성원의 육체적 의식인 물세례도 성령세례의 근본 위에서 가치가 있다.69)
윌리암즈(John Williams)는 이같은 내용에 동의하며 말하기를,
"성령세례의 실제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이 증거하고 봉사할 힘을 얻게 하려는
것도, 그들에게 황홀한 언어나 경험을 갖게 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많은
사람이지만 한 몸으로 연대하게 하려는 것이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신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려는 것이었다. 이 위대한 사건에 의해서 모든 신자들은 그들의
출생이 아무리 다양하다 하더라도 하나가 되었다"(70고 피력하였다.
(라) 성령세례는 보편적이다.
구약에서는 몇 몇 사람만이 특별한 때에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성령의 능력을 덧입은 반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종말론적인 성령세례는 범우주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 이는 고린도전서 12장 13절의 말씀에 잘 반영되어 있다. 여기서
바울은 ". . .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 주장한다. '다'(pantes) 라는 말은 모든 고린도 교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말인데,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의 신앙상태를 고려해 볼
때, 하나의 충격적인 선언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영적인 미숙함을
꾸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린도전서 3장 1-3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윌리암즈(John Williams)는 이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는 여기서 그들이 '육신에 속한 자'(sarkinois/1절)인 것
같이 영적으로 미성숙할 뿐 아니라, '육신에 의하여 지배받고 있는 자'(sarkikoi/3절)
처럼 비난받아 마땅함을 지적하고 있다. 만일 흔히 주장되는 것처럼 성령세례가 신령한
사람만의 고유한 영역이며, 축복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이 어떻게 의도적으로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들이 모두 성령으로 세례 받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분명 바울은 성령세례에 대해서 알고 있는 만큼, 고린도교회의
상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대답은 간단하다. 신약의 다른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바울에게 있어서 영성이란 것은 성령세례의 선행조건도 아니오, 그것의 필연적인
결과도 아니다. 성령의 선물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조건 없이 주는
축복이다. 바울의 교훈에 대한 앞서 나온 주석에서 언급된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되는 것은 성령으로 세례 받음으로 서이다. 그리스도인이면서 (그가
'육신적인' 사람이냐, '영적인' 사람이냐 하는 것은 여기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성령으로 세례 받지 않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71
월부워드(John F. Walvoord)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령세례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 중의 하나는 그것이 몇 몇
그리스도인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사역이라는 견해이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는 순간에 성령세례를 받는다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과 세례는 공존하며 성령의 이러한 역사가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72
레네 파치(Rene Pache)도 같은 의견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세례를 어떤 특권층의 사람들이나 하나님의
위대한 종들에게만 국한하는 특별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성서는
이 은혜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고 가르친다. 이 사실에 대한 증거는 성령세례가
없이는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도, 그리스도의 몸에 구성원이 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나타난다.(73
또한 성서는 성령세례의 보편성에 대해서 많은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성서적 자료들을 찾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예언의 말씀에서 볼 때, 이사야는 기록하기를,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사 32:15),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사 44:3) 라고 하였다. 여기에 쓰인 '우리에게'나 '네 자손에게'는
전체적인 뜻을 가진 말씀이다.
에스겔도 기록하기를,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겔
36:26),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겔 36:27), "내가 내 신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쏟았음이니라"(겔 39:29) 고 하였다. '너희'나 '이스라엘 족속에게'
라는 말은 전체적이고 보편적인 뜻을 가진 말씀이 분명하다.
요엘서의 말씀도 예외는 아니다. 요엘은 기록하기를,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욜 2:28),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욜 2:29) 라고 적고 있다. '만민에게'나 '남종과 여종에게'도
전체적이고 보편적인 뜻을 가진 말씀이다.
구약의 예언의 말씀에서 뿐 아니라, 신약의 말씀 속에서도
성령세례의 보편성은 강력히 시사되고 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물세례와 비교하여 예수께서 성령으로 모든 사람에게 세례를
주실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다(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 요한복음 3장
5절에서 예수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바꾸어 말하면, 구원받아 천국갈 사람은
모두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란 뜻이다. 박윤선 목사는 이 말씀이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성취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신약시대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시대이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 함은 그의 백성에게 성령을
물 붓듯이 주셔서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를 말함이라"고 하였다.(74
요한복음 7장 38-39절의 말씀도,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남은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킨다고 하였고,
믿는 자가 바로 성령세례를 받는다고 하여 보편성을 시사하고 있다. 사도행전 2장
38-39절의 말씀은 회개하여 세례를 받는 자가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고 하였고, 이는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주신 약속이라고 하였다. '모든 먼 데 사람'은 이방인을 두고 한
말이다. 바울 사도도 에베소서 2장 11-13절에서 이방인을 일컬어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또는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고도 하였다. 이와
같이 약속은 복음을 듣고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복음을 듣고,
믿고, 회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약속이다(갈
3:26-27). 이 약속은 우주적이긴 하나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다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는"
사람에게 주어진 약속이다. 이 약속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셨다고 사도행전
5장 32절은 말씀하고 있다.(75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행 5:32).
로마서 8장 9절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고 하였고, 15절은 로마교회의 성도들이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하였으며, 16절은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 라고 하였다. 또 26절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빌 바를 간구하여 주신다고 하였다.
고린도전서 2장 12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고 하였고, 3장 16절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라고 하였다(6:19; 고후 6:16; 엡
2:22). 12장 3절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다. 12장 13절은 모든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하였다.
고린도후서 1장 22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 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 하였다(5:5). 에베소서 1장 13-14절은
우리가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 하였다(4:30).
갈라디아서 3장 2-5절의 말씀은 우리가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고
하였으며, 요한일서 3장 24절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다고 하였고, 4장 2절은 성육신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 속한 영이라고 하였으며, 4장 13-15절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수많은 성구들이 성령세례의 보편성을 말하고 있으며,
모든 구원받은 신자는 성령을 소유한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성령을
받으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성령을
쫓아 행하라"(갈 5:16, 25), "성령을 소멸치 말라"(살전 5:19),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엡 4:30)고 하였다. 이는 모든 성도가 이미 성령세례를 받았음을
시사하는 것이며, 성령을 심령에 소유하고 있다는 전제하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말씀들이다.
(마) 성령세례는 성령의 내주 동거하심이다.
성령세례가 성령의 은사와 같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다. 은혜시대의 뚜렷한 특징 중의 하나는 중생한 사람들이 성령세례를
받았을 뿐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인격체로서 그들의 심령 속에 내주 동거하시는
것이다. 성령세례의 보편성과 성령의 내주 동거는 거의 같은 맥락에서 볼 수도 있다.
예언의 말씀인 에스겔 36장 26-27절은 메시아 시대로서 성령시대는
성령께서 성도들의 심령 속에 내주 동거하실 것임을 약속하고 있다. 이러한 약속은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와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에 잘
나타나 있다.
요한복음 7장 38-39절의 말씀은 사람의 배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에 비교하여 성령의 내주를 시사하였다. 로마서 8장 9절에서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10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11절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하여 성령의 내주를 입증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 6장 19절, 고린도후서 6장 16절, 에베소서
2장 22절은 믿는 성도의 심령이 성령의 성전임을 힘있게 입증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1장 22절과 5장 5절은 구원의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 하였다. 에베소서 4장 30절도 이와 비슷한
내용으로 말씀하고 있다. "성령을 쫓아 행하라."(갈 5:16, 25), "성령을
소멸치 말라."(살전 5:19),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엡 4:30)
등의 말씀은 성령의 내주 동거를 생각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는 말씀들이다.
(3) 성령세례의 근원, 수단, 시간, 목적
많은 사람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생각 때문에 더
이상 구원에 관련된 시간이나 목적에 대해서는 연구해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근원이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막연하게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고 말한다. 에베소서 2장 8-10절과 골로새서 2장 11-13절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우리가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례 가운데서,' '선한 일을
위하여'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세례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성령세례를
중생과 별개의 시간에 후속적으로 많은 기도의 대가로 받는 방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이상의 성서적인 가르침에 관심을 갖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 38절과 갈라디아서 3장 2-5절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성령은 '선물로,' '믿음으로,'
'세례 가운데서,' '성화'를 위해서 주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의
바탕이 은혜요, 수단이 믿음이요, 시간이 세례요, 목적이 선행인 것 같이, 성령세례도
그 바탕이 은혜의 선물이요, 믿음을 수단으로, 세례 가운데서 수여되며, 성화를 목적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성서는 가르치고 있다.
(가) 성령세례의 근원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의의 전가로 된 것이다.
인간의 의로서는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고,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사항을 충족시킬
수 없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구원의 한 방법으로 제시된 율법의 완성으로 획득되는
구원은 인간의 죄악 때문에 폐쇄되었다(롬 1:18-3:20). 로마서 1장 18절부터 3장
20절까지는 법을 어긴 인간의 무력성과 소망 없는 상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율법을
준수하고 형벌을 피할 길이 있지만,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며, 법을 어기고 징벌을
받을 수 있지만, 이는 무서운 대용책일뿐이다. 이것이 인간의 무서운 현실이다. 우리의
힘과 의로움을 의지할 때는 저주밖에 받을 것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처절한 현실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는 하나님께서 다른 한 방법을 주시는 데, 그것이 로마서
3장 21절부터 5장 21절에서 제시되고 있다. 이는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받는 구원이며,
하나님의 의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구원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죄인의
구원에 바탕이 된다(사 61:10; 롬 3:21; 10:3; 고후 5:21; 빌 3:9). 이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적용되고 간주되고 우리의 것으로 인정된 의이다. 이를 칭의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때문에 율법의 요구는
충족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이 요구를 충족시키시기 위해서 능동적으로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셨고, 수동적으로 인간의 죄의 대가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상에서
형벌을 받으셨다. 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이 하나님의 의로서 우리들에게 전가된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율법의 요구 충족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두 속성인 사랑과 공의가 다 함께 충족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의의 표현인 그리스도의 보혈로 즉 그 크신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은 선물이다(롬 6:23).
성령도 이와 마찬가지로 은혜의 선물로 주신다고 성서는 말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중적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 가진 문제가 이중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범죄로 인해서 유죄하며, 유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타고난 죄성에
의해서 인간은 부패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마치 사고를 저지른 과속 차량의
운전자가 법의 처벌과 의사의 치료를 받아야 하듯, 우리 인간도 하나님 앞에서 법적
문제의 처리와 부패된 인간성의 치유를 받아야 한다. 이 법적 문제를 처리 받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의의 전가에 의한 칭의이다. 이는 외적이며 객관적인 선포에 의한
의이며, 하나님의 의가 전가된 것이다. 이는 죄인이 무죄자가 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또 죄인이 재판장이신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무죄로 선포 될 때,
그 동안의 부패된 인간의 상태도 치료자이신 성령에 의해서 초기적으로 치유된다.
이를 초기 성화라고 한다. 그러나 칭의와 초기성화 후에도 인간은 죄성의 잔존 때문에(롬
7:15-25) 계속해서 치유되어 져야 하는데 이를 점진성화라고 부른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의 속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시는 의이며, 만들어진 의이다. 이는 내적이며, 개인적인
의이다. 성령은 치료자가 되시며, 우리의 부패를 치료하시고 감싸신다.
칭의가 죄인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점진 성화는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겉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날마다 죽어 가는 생활이 속 사람이 살아가는
성화의 생활이다. 바로 이 점진성화를 이루시는 하나님이 성령이시다. 이 일을 위해서
성령은 성도의 심령에 내주 하신다.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의에 도달치
못했던 이 쓰라림을 다시 반복치 않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선물로 구원받을
때에 함께 주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제 자신의 노력만으로 살지 아니 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신의 죄성을 넉넉히 이기는 승리자 이상의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롬
8:37). 이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로마서 6-8장의 말씀이다. 6장은 신자의 이상적인
삶에 대해서 즉 성화의 삶에 대해서 이성적인 이론을 성립시키고 있고, 7장은 순종의
어려움에 대한 슬픔을 다루고 있으며, 8장은 성령의 내주 하심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신다고 하였고(엡
1:14), 구원의 보증이 되시며(고후 5:5), 인 치심의 보증이라고 하였다(고후 1:21-22).
우리의 구원은 이중적이기 때문에 칭의와 성화를 분리할 수 없으며, 성령 없는 성화는
더더욱 생각할 수 없다. 만일 칭의가 선물이라면, 마땅히 성령세례도 선물로 받아야
할 것이다. 초기 성화의 다른 신학적 술어는 중생이다. 중생은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직접적인 사역이다. 육체의 질병은 약으로 치유되지 자신의 믿음만으로 치유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성령은 죄인의 무의식과 그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그의
영혼에 역사하시는 양약이시다. 그러나 그 역사는 효력이 강하여서 그의 부패함을
치료하시고 그의 죄를 사하신다. 비록 죄인이 이 사실을 의식치 못한다 할지라도
성령은 그에게 생명 즉 중생을 부여하신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령은 중생의 시간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성령은 구하여서 얻는 것이 아니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이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필요에 따라서 각양 은사를 나누어주시는 것이기
때문에(고전 12:11) 성령세례를 은사로 볼 수 없다. 어찌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를
성령의 내주보다 더 큰 것으로 여길 수 있겠는가? 이는 은사를 주시는 이를 모독하는
일이 될 것이다.
성령은 성경 여러 곳에서 은사 또는 선물로서 언급되고 있다(요
7:37-39; 행11:17; 롬 5:5; 고전 2:12; 고후 5:5). 은사는 성격상 공로 없이 주어지는
것이며, 선물로서의 성령은 결코 보상으로서 언급된 일이 없다.(76
사도행전 2장 38절은 믿고 세례를 받는 자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했는 데, 이것은 유대인은 물론 이방인들에게까지 주시겠다는
약속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라는 말은 무엇을 말하는가?
"성령을 선물로"(dorean tou hagiou pneumatos)란
말은 선물이 곧 성령이라는 뜻이다. 로버트슨(A. T. Robertson)은 그의 {언어 사전}(Word Pictures)에서 'tou hagiou
pneumatos'를 동일성 소유격으로 보고, 이를 '성령의 선물'로 해석치 아니하고 '성령을
선물'로 풀이하고 있으며, 터너(N. Turner) 역시도 소유격을 물질 소유격으로 보고,
이를 '성령을 선물'로 풀이하고 있다고 배일즈(James D. Bales)는 소개하고 있다.
또한 배일즈는 사도행전 2장 39절에 언급된 '약속'(epanggelia)이 복수가 아니라
단수란 점을 지적하면서 죄사함과 성령세례가 동시적인 것이라고 말한다.(77
로버트 밀리간(Robert Milligan)도 '성령을 선물로'란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그 자신이라고 말한다. 그는 여기에 사용된
'선물'(dorean)이 단수로 사용되었으며, '은사'(karismata)는 복수라고 지적하였다.
이 선물의 특색은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주어지지만, 은사는 때때로 비신자들에게도
주어진다고 하였고, 이 선물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약속된 반면(행 2:39), 은사는
일부 성도들에게 제한되고 있다(겔 36:25-27; 요 7:37-39; 롬 5:5; 8:9-11; 고후
1:22; 갈 4:6; 엡 4:30; 5:18)고 하였다.(78
키텔(Kittel)의 사전에도 사도행전 2장 38과 8장 20절의 dorean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서 성령을 말한다고 하였고, 이 단어의 뜻은 '값없이' '무상으로'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였다.(79
전경연외 4명의 학자들은 교회가 이방사회와 다른 것은 교회가
바로 성령을 선물로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믿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롬 8:9;
갈 3:2; 고후 12:13; 13:13). 또 바울은 성령을 그리스도인에게 준 선물이라고 했고(살전
1:5; 고후 1:6; 롬 9:1; 15:13, 16; 엡 1:13), 그리스도인은 그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 때문에 성전이라고 했다고 적고 있다.(80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는 것은 성서적인
가르침이며, 성령세례를 고행스런 기도와 헌금 그리고 믿음 이상의 것으로 받으려고
하는 것은 이미 받은 바 성령을 깨닫지 못한 처사에서 나오는 어리석은 짓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자전하는 지상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듯이
성령을 모시고 살고 있으면서도 성령의 뜻에 따라 살지 못하고, 성령을 모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많다.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는 이 귀한 가르침은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값진 복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는 이 귀한 사실은 우리의 심령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원하신다면 귀하고
신령한 은사도 주실 것을 믿는 것이며, 그 은사들은 멀리서 구할 것이 아니오,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자신의 심령 속에 계시는 성령께 구해야 할 것이다.
(나) 성령세례를 받는 수단
우리가 구원을 믿음이란 통로를 통해서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인간의 믿음을 통하여 하신다(롬
3:21-23). 그러므로 믿음은 구원을 받는 통로이며 수단이다. 믿음 그 자체가 구원의
근원일 수는 없다.
칭의와 중생 그리고 초기성화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동시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믿음을 통하여 구원 또는 칭의 함을 받는다는 말은 곧 믿음을 통하여
중생과 초기성화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화는 성령의 직접적인 사역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므로 결국 믿음으로 성령세례를 받는다. 이런 맥락에서 갈라디아서
3장 2-5절의 말씀은 믿음으로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입증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 . .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오순절 운동가들은 성령세례의 조건으로 죄의 완전자복과
백퍼센트 순종, 철저한 굴복, 완전한 믿음, 꾸준한 기도 등을 들고 있으나, 성서적인
조건은 '믿음으로'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것이다. 결국 구원과 성령세례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동시적인 사건이며, 한 믿음을 통하여 두 가지를 다 받는 것이다.
성령이 없이는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성령세례와 구원은
하나인 것이다. 에베소서 4장 5절은 한 믿음, 한 세례, 한 주, 한 소망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오순절 운동가들은 두 가지 회개, 두 가지 순종, 두 가지 믿음, 세
가지 세례 등을 가르침으로서 성서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레네 파치(Rene Pache)도
구원과 성령세례가 동시적인 것으로 믿어서 믿음으로 성령세례를 받는다고 주장하였다.(81
(다) 성령세례를 받는 시간
구원과 성령세례를 언제 받느냐 하는 문제는 신학적으로나
교단적으로 논란이 되는 이슈이다. 오직 믿음만 주장하는 일부 교단에서는 믿음을
갖는 순간부터 구원과 성령세례를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서는 어떻게 말하는가?
성서는 세례를 받는 시간이 구원과 성령세례를 받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세례 자체가
구원과 성령세례를 받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세례 자체가 구원을 주는 것도 아니오,
세례 때문에 성령세례를 받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의 장소
또는 시간이 세례일 뿐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사도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이었다. 사도행전 2장 38절의 말씀은, ". . .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라고 말한다.
잘못된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성례를 하나의 구원의
수단으로 보는 견해가 천주교회나 루터교회가 전통적으로 가지고 내려 온 역사적
견해이다. 이들 교단들은 세례가 죄사함을 위한 것으로 믿고 가르친다. 이를 세례가
죄인을 영적 죽음으로부터 일종의 변화를 가져오는 실제적 효과를 가진 것으로 믿는다하여
세례중생자라고 몰아붙이는 교단들도 있지만, 천주교나 루터교는 세례가 수혜자에게
은혜를 실제로 실어온다고 믿는다. 이들에 의하면, 세례는 하나님께서 구원하는 은혜를
부여하시는 하나의 수단이며, 죄사함을 그 결과로 낳는다고 믿는다. 일깨우는 또는
강건한 믿음에 의해서 세례는 중생의 씻음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는다.
천주교나 루터교의 다른 점은 천주교는 수혜자가 영적 방해를
가하지 않는 한 교회의 올바른 성례전 의식 수행이 수혜자에게 은혜를 실어온다는
것이며(ex opere eperato), 성례전 자체로서 구원하는 은혜에 족하며, 작용하는 능력을(virtus
operativa, operative power) 갖는다고 믿는 반면, 루터교나 개신교들은 성례전이
은혜의 수단으로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수혜자에게 믿음이 선행되어야 하며,
단순한 의식 수행만으로는 은혜를 실어오지 않는다고 믿는데 있다.(82
천주교회의 성례전에 대한 가르침이 신학적으로 큰 문제점을
제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세례와 구원을 밀접한 관계로 보는 그들의 견해는 사도적
전통에 따른 것은 물론 성서적 입장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성서는 말하기를,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벧전 3:21)고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는 신성한 은혜의 복음은 우리가 세례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복음의 순수한 본질은
인간이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함으로서 구원받지 어떠한 인위적 선행이라도 구원받기에
족하지 않다는 바울 사도의 가르침이기도 하다(롬 3:28; 엡 2:8-9; 갈 2:16; 딛 3:4-5;
딤후 1:9-10). 문제는 세례를 구원에 족하지 못한 인간의 행위로 보기 때문에 세례는
구원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며, 성서의 세례가 구원에 관련된다는 말씀들을
영적으로 풀이해 버리려는 노력이 강행되고 있다.
그러나 세례가 과연 인간의 행위의 공적이 되는가 하는 문제는
심각하게 논의되어야 한다.
은혜란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을 뜻한다.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바울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였다. 진실로 구원은 어떤 인간도 마땅히 받을 가치가 없으면서도 받게되는 선물이다.
그러나 이 은혜의 선물조차도 그의 은혜를 신뢰하는 자들에게만
주시게 될 것을 약속하셨다. 이 선물도 하나의 약속인 것을 주목하자.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도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하였다. 이것이 은혜이다. 이 약속의 선물을 믿음이란 수단을 통해서 받게 된다는
것이 성서적인 가르침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약속된 하나님의 선물이 죄인에게 주어지는
시간으로서 세례가 은혜와 깊은 관련을 맺게 된다.(83
이는 또한 환원운동가들의 전통적인 신앙이다. 알렉산더 캠벨(Alexander
Campbell)은 세례의 목적에 대해서 1822년 처음으로 세례가 죄사함을 위한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월터 스콧트(Walter Scott)가 캠벨에게 이 깨우침을 준 것이다.
캠벨은 세례가 죄를 씻기 위해서는 믿음의 행위가 따라야 한다고 했다. 1823년 10월
맥칼라(W. L. Maccalla) 목사와의 토론에서 그는 세례는 형식적으로 우리의 죄를
씻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실질적으로 우리의 죄를 씻는다고 했다. 성서에 죄사함에
대한 형식과 실질적 구분은 없지만, 형식을 시간의 개념으로 본다면, 전혀 잘못될
것이 없다. 골로새서 2장 12절의 '세례 가운데서'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씻으시는
장소로 본다면, 세례라는 형식을 빌어 세례 때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혈을 세례
받는 죄인에게 적용시키신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캠벨의 견해는 5년후인 1828년
그의 잡지 {기독교 침례자}(The Christian Baptist)(84와 1849년 역시 그의 신 잡지인 {천년왕국 예고자}(The Millennial Harbinger)에도
나타나 있다.(85
실제로 캠벨은 세례를 시간의 개념으로 본 것이 확실하다.
이 시간을 죄사함과 성령을 선물로 받는 때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는 "죄사함과
하나님의 가족에로 양자 됨에서 오는 다른 축복들이 주어지는 즉각적인 시간과 매체가
있다"고 했는데, 이는 물세례를 두고 한 말이다.(86
캠벨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원천적이고 역동적인 원인이시며(the
original and moving cause),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 구원에 공적인 원인이며(the
meritorious cause), 믿음은 구원을 받는 도구적인 원인이며(an instrumental cause),
세례는 모든 축복 즉 칭의와 중생(초기성화)과 성령을 선물로 받는 시간이었다.(87
근대 환원운동의 기수 포스터(R. C. Foster)는 요한복음 3장
5절의 말씀에서 말하기를, "헬라어 원어에는 '물과 성령'에 대한 전치사가 하나
뿐이며, '물과 성령'에 관사가 붙지 않았다. 이는 각인의 영혼의 구속에 대한 단
한 행위가 있을 뿐임을 말한다."(88고 하였다.
물세례를 받는 시간이나 목적과 관련해서 사도행전 2장 38절의
성구는 매우 중요하다. 이 성구 속에 "eis aphesin ton hamartion hymon"이란
문장이 있다. 이 부분을 '너희의 죄사함을 얻기 위하여'로 해석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의 죄사함을 얻었기 때문에'로 해석하느냐가 전치사 eis에 대한 문법적 해석
때문에 제기되고 있다.
대부분의 개역성서들과 언어학자들이 본문의 eis를 '∼을
위해서'로 번역하고 있다. eis가 대격과 함께 쓰일 때는 목적의 뜻으로 해석해야
문법적으로 옳다는 주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침례교 학자들은 eis가 대격과
함께 쓰일 때에 원인 또는 결과의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면서 '∼때문에'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제임스 브룩스(James A. Brooks)와 칼톤 윈베리(Carlton L. Winbery)는
{신약성서 헬라어 구문론}(Syntax of New Testament
Greek)에서, 마태복음 3장 11절의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를 "나는 너희의 회개 때문에
너희를 세례 준다"로, 사도행전 2장 38절의 "너희가 회개하여 죄사함을
얻기 위하여 . . . 세례를 받으라"를 "회개하라. 그리고 너희가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 . . 세례를 받으라"로 대격과 함께 쓰이는 eis를 유독 여기에서만
원인적으로 해석할 것을 가르친다.(89 한편 요한복음 1장 7절과 마태복음 26장
2절의 말씀은 목적의 뜻으로 해석하고 있어서(90 자기 교단의 교리를 지지하기 위한
아전인수격인 해석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미국 시카고에 위치한 북침례교신학대학원의 만테이(J. R.
Mantey) 교수는 "어느 헬라어 사전도 eis를 원인의 뜻으로 번역치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eis를 원인의 뜻으로 가르치는 유일한 문법책은 {신약성서 헬라어
문법 교본}(A Manual Grammar of the Greek New Testament
)뿐이라고 자랑하였다.(91 그는 eis의 원인적인 사용을
입증키 위해서 주전 2세기경의 폴리비우스(Polybius)의 글을 예로 들었다. 여기서
만테이 교수는 신약성서에 eis를 '∼때문에'로 해석할 수 있는 곳이 9개나 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92
이들의 이러한 주장은 세례를 행위로 보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sola fide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해석임을 다음의 두 저자들의
색다른 주장에서 살 펴 볼 수 있다.
칼 베이스너(Car Beisner)는 사도행전 2장 38절의 해석에서
"죄사함을 얻는 것은 세례가 아니라 회개라"는 사실을 헬라어 문법적인
차원에서 볼 때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너희가 회개하여"에서
"너희는" 복수인데, "각각(너희 중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에서
"각각"은 단수이며, "(너희의) 죄사함을 받으라"에서 "(너희는)"
복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사함을 얻는 것은" 복수로서 역시 복수인
회개함의 결과이지, 단수인 "세례"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복수 명사는
2인칭인 반면, 단수 명사는 3인칭이라면서 죄사함은 회개의 결과라는 억지를 쓰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장 38절은 세례가 구원에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라고 결론 짓는다.(93
고넬리우스 스탬(Cornelius Stam)은, 사도 바울에 의하면,
물세례가 결코 죄사함을 위해 요구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사역 당시 몇몇 사람밖에는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사실을 기쁘게 여겼다는 것이며(고전
1:17-18), 그의 서신서 어느 곳에서도 물세례를 베풀 것을 명령하거나 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울이 에베소서 4장 5절에서 "세례도 하나이요"라고 한 "한
세례"는 곧 영적 세례라고 주장한다.(94
그러나 렌스키(R. C. H. Lenski)의 사도행전 22장 16절의
해석은 스탬의 물세례 부정과 세례의 상징화에 대해서 적절한 해답이 될 것이다.
사도행전 22장 16절의 말씀은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이다. 이 말씀에는 두 개의 단순과거
명령이 원인적 중간 상태 즉 "세례를 받고, 너희 죄를 씻으라"로 되어
있다. 렌스키는 이 말씀이 "침례의 구원하는 능력에 관한 육체적 구절들 중의
하나이다." 라고 말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내적 은혜에 대한
외적 표현이라"는 사실을 믿으려 들지 않고, 단순히 상징적인 예식으로 취급하려
한다. 이에 대해서 렌스키는 사도행전 2장 38절이나 누가복음 3장 3절의 말씀과 함께
사도행전 22장 16절의 말씀도 상징적이거나 비유적인 말씀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세례 받고, 실제적으로 죄 씻음 받은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95
eis의 언어학적 의미는 사도행전 2장 38절의 문맥을 통해서
볼 때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다. 오순절 날 유대인들은 사도들이 방언 말함을 듣고
기이히 여겨 솔로몬 행각에 모여 베드로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였다는 사실과 유대인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고 설교하였다.
이 때 유대인들은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라고 물었다. 이 때에 베드로가 회개하라. 그리고 침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죄사함과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 라고 대답하였다. 한마디로 베드로의 설교의
대상은 죄사함을 아직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하물며, 어떻게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말이 그들에게 적용이 되겠는가?
eis의 언어학적 의미는 마태복음 26장 28절의 문맥을 통해서도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는 예수의 말씀을 "이것은 죄사함을
얻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해석할 수 있겠는가?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는 시기적으로 아직 구속의 교리가
적용되기 이전이었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도저히 결과의 뜻으로 볼 수 없는 말씀이다.
앞에서 소개한 몇 사람의 침례교 학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언어학자들은 사도행전 2장 38절의 를 목적의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보우도인 대학(Bowdoin College)의 헨리 드윙(Henry B. Dewing)
교수와 그리스 아테네 대학(Athens College)의 학장은, "eis는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죄사함을 얻기 위해서 각각 세례를 받으라'로
해석해야 한다. '∼때문에' 라는 해석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96
클라크 대학(Clark College)의 헬라어 교수 헨리 브라케트(Henry
Darling Brackett)는 eis의 본래의 뜻이 '∼안으로', '∼을 향하여', '∼의 방향으로'이며,
'∼으로부터', '∼에서 일어나는' 혹은 '∼때문에'가 아니기 때문에 "eis를
'∼을 위해서', '∼을 목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다(97.
오벨린 신학대학원(Oberlin Graduate School of Theology)의
강사인 프랭크 휴 포스터(Frank Hugh Foster)는 "eis의 의미는 다음의 두 가지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하나는 회개와 세례에 순복하는 이중적 행위의 목적을 지적하든지,
아니면 그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전자는 '∼을 얻기 위해서'로 해석될 것이요, 후자는
'∼의 결과로' 해석될 것이다. 그러나 언어학적으로 전자가 후자보다 더 타당하다.
전치사 eis는 결코 '∼때문에'를 의미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98
에드가 구드스피드(Edgar I. Goodspeed)는 신학적인 견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가 번역한 {구드스피드 신약성서}에서 "사도행전 2장
38절의 eis는 결코 '∼때문에'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하였다.(99
오페크(A. Opeke)는 eis를 "어떤 지정된 목적에로 향하는
행동의 방향을 나타낸다"라고 하였다.(100 아른트(Arndt)와 진그리치(Gingrich)의
헬라어 사전도 eis의 기본 의미를 "사물로 향한 움직임을 지적하는 것"(101이라고
하였다. eis는 대격을 지배하는 데, 대격은 앞쪽을 향한 움직임 자체를 나타내는
확장의 격이다.
시카고 대학교의 랄프 마르쿠스(Ralph Marcus) 교수는 "On
Causal eis"라는 글로써 북침례교신학대학원의 만테이(J. R. Mantey) 교수의
글, "The Causal Use of eis in the New Testament"를 반박하였다.(101
마르쿠스는 eis의 훌륭한 문법이 만테이 교수의 신학적인 선입견을 지지 않는다고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만테이 교수는 eis와 관련된 사도행전 2장 38절과 기타 다른
신약의 성구들에 대한 자신의 해석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비성서 헬라어
문헌에서 원인적 의미로 사용된 eis의 사례들을 본보기로 제시하고 있지만, 이들
사례들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 . . . 그러므로, 만테이 교수가 비언어학적인 논리들에
있어서 옳지 못한 만큼, 세례와 회개와 죄사함에 관한 다른 성구들의 해석에 있어서도
옳지 못하다.(103
마르쿠스 교수는 eis의 최종적 원인과 목적은 거의 같은 것이며,
신약성서의 성구들 가운데는 최종 원인과 목적을 구별키 어려운 부분도 있을 것이나,
영어와 마찬가지로 헬라어도 대화상에서 목적과 결과를 혼돈하기 때문에 hlna나 hos대신에
코이네 헬라어는 hoste를 쓴다고 하였다. 영어에서도 사람들은 종종 "in order
that he might study" 대신에 "I left him so that he might study"와
같은 표현을 쓰는 것과 같다고 한다.(104
만테이 교수가 주장하는 9개의 성구와는 달리 신약성서에서
1,773개나 eis 가 사용되고 있으나, 단지 4곳만이 "∼때문에"로 해석될
수 있다는 논란이 일고 있다.(105 만테이 교수와 같은 교단에 속한 학자들 가운데
셰퍼드(J. W. Shepherd, Handbook on Baptism, pp. 339-359)와 비즐리 머레이(G. R. Beasley-Murray, Baptism in the New Testament)
그리고 화이트(R. E. O. White, The Biblical Doctrine
of Initiation)와 같은 이들은 오히려 eis의 목적의
뜻을 지지하고 있는 입장이다.(106
전치사 eis가 우리말로는 '∼을 위해서'로 밖에 표현할 다른
말이 많지 않지만, 영어로는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1974년 2월자 {환원선구자}(Restoration Herald)에 의하면,
무려 41개의 영어 성경이 eis를 'for'로 번역하고 있으며, 14개의 성서가 'unto'로
27개의 다른 성서가 'in order that,' 'to have your sins forgiven'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한다. 이와 같이 사도행전 2장 38절의 eis는 침례교단의 몇 분의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학자들, 사전편찬자들, 성서 번역가들조차도 '∼을 위해서'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세례가 죄사함을 받는 시간이요, 성령을 선물로 받는 축복의 시간임을 말하는
것이다.
(라) 성령세례를 받는 목적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목적은 거룩한 삶과 성화의 삶을 위한
것이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를 은혜로 구원 주시고 죄성을 이기고 믿음으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고, 성도들의 구원을 보증하시기 위해서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롬 8:12-17). 성령의 내주하심은 성도를 도와서 성화를 이루어 나가도록 도우시며,
종국에는 구원의 성취를 이루게 하신다. 성경은 성령의 내주하심을 '구원의 보증'
또는 '기업의 보증'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바울은 이신칭의가 율법을 폐하기보다는 오히려 율법을 크게
세운다고 로마서 3장 31절에서 가르치고 있다. 이신칭의는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며, 율법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였다(갈 5:1이하). 또한
율법은 구원이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고, 이로써 율법의
사명은 완수되었다.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죄인을 의롭다 하시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어 성령의 도움으로 율법을
지킬 힘을 주신다. 성도는 의무로써 하지 아니하고 구원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써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한다.
로마서 1-5장에서 바울은 이신칭의 교리를 설명하였고, 율법의
행위로써는 죄 때문에 어느 인간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6-8장에서는
성결과 거룩한 삶에 대해서 즉 성령에 의한 성화의 삶에 대해서 강조하였다. 여기에서
바울은 이신칭의를 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신앙인의 삶을 살아 가야할 의무를 제시하였고,
이러한 성도의 삶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한 것임을 강조하였다.
바울은 구원의 목적을 '선한 일을 위한 것'이라고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22-26절에서 성령의 열매와
성령으로의 삶을 설명하고 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하라"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신학과 윤리 또는 믿음과 실천이 적절하게 안배된 균형 잡힌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성서는 구원을 받기 위한 선행을 부정적으로 말하였지만,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할 의무를 면제하지 않았다. 오히려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사람답게 성령 안에서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성령이
없이는 누구도 성화의 삶을 살수가 없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을 주시고,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목적은 거룩한 삶을 위한 것이다(롬 8:12-17). 야고보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다(약 2:14-26).
나오는 말
필자는 이 글을 통해서 두 가지를 목적으로 삼았다. 첫째는
성령세례가 오순절 운동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성령의 은사나 충만이 아니라, 성령으로의
세례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축복임을 강조하려 하였다. 성령론의
중요성은 외적이고 증거적인 은사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에 의한 구원, 성령에 의한
성화, 성령에 의한 하나님의 나라의 체험과 같은 내적이고 개인적인 축복에 있다.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현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은 현실 속에서 신자들은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 역사 하심과 말씀하시는 경험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도 중요하다. 초대교회 때처럼 성령의 충만한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크게 확장될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러나 보다 본질적이고 중요한
성령에 관한 가르침은 성령의 내주 동거하심에 있다고 본 것이다.
둘째는 성령세례가 인간이 구한다고 받아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때에 선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아, 침례의 때에, 성화를 목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점을 강조하려 하였다.
성령 충만이나 성령의 은사를 사모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은사의 소유가 신앙생활의 최상도 아니며, 성령 충만의 조건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열매 맺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창조적인 질서의 회복이요, 이차적으로는
인간답게 살아가는 인간성의 회복에 있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높이며, 질서와 법도를 알고, 상식과 순리를 알고,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빌립 샤프의 지적대로, 기독교인의 삶은 그 자체가 "초자연적인 삶의
표명이요, 정결과 평화의 삶이요, 성부 성자 성령과의 연합이며, 교제의 삶이다.
그것은 중생으로 시작하고 부활에서 누적되는 삶이다."(107
[각주]
1) Jack Cottrell, "Are Miraculous Gifts the Blessing
of Pentecost?" The Christian Standard (Cincinnati: Standard Publishing Co., May 1982), p. 9.
2) Cottrell, p. 10.
3) Gareth L. Reese, New Testament History: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Book of Acts(Joplin,
Missouri: College Press, 1983), pp. 92-94.
4) 국제신학연구원,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신앙과 신학}(서울서적, 1993), 67-68쪽;
황승룡, {개혁교회와 성령}(성광문화사), p. 69.
5) 국제신학연구원, 56-57쪽.
6) 이재범, {성령과 선교}(보이스사, 1986), p. 73.
7) R. A. Torrey, {성령의 사역}(기독교 문서 선교회, 1984), 이성강 역, 157-163쪽;
{성령론}(대한기독교서회, 1989), 심재원, 김수진 옮김, 112-122쪽.
8) R. A. Torrey, {성령론} op. cit., 117-118쪽. See also Frederick Dale Bruner,
A Theology of the Holy Spirit: The Pentecostal
Experience and the New Testament Witness(Grand
Rapids: WM. B. Eerdmans, 1982), p. 46.
9) {성령과 선교} pp. 122-123.
10) 이재범, {성령운동의 역사}(보이스사, 1985), pp. 121-122.
11) Bruner, op. cit., pp. 37-38.
12) Ibid., p. 43.
13) Ibid., p. 61.
14) Ibid., p. 20. 15) Gerhard Kittel and Gerhard Friedrich, ed., The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anslated by Geoffrey W. Bromiley(Grand Rapids: WM. B. Eerdmans,
1981), vol. 1, s.v. " "(p. 475);
안토니 A. 후크마, {개혁주의 종말론} 유호준 역(기독교문서선교회, 1986), 80-96쪽;
김균진, {기독교 조직신학} Ⅲ권(연세대학교 출판부, 1987), 13-81쪽.
16) C. F. Keil and F. Delitzsch,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in Ten Volumes, vol. 1: The Pentateuch(Grand
Rapids: WM. B. Eerdmans, 1986), s.v. "Numbers 11:16-30."
17) Bruner, op. cit.,
p. 60.
18) Ibid., p.
63.
19) 조동호, {성령론 교재}(한성신학교), p. 26.
20) Bruner, op. cit.,
p. 64.
21) Ibid., p. 73.
22) Ibid. R. A. Torrey,
{성령론} op. cit.,
120, 137쪽..
23) Bruner, op. cit.,
p. 74. 24) Ibid., p. 76.
25) Ibid., pp. 79-80.
26) Ibid., p. 81.
27) Ibid., p. 83.
28) Ibid., p. 84.
29) Ibid., p. 85.
30) Ronald E. Baxter, The Charismatic Gift of Tongues(Grand Rapids: Kregel Publications, 1981), pp. 19-28.
31) Jack Cottrell, His Truth(Cincinnati:
The Standard Publishing Co, 1980), pp. 70-75.
32) 조동호, {로마서와 구원}(서진출판사, 1994), 79-93쪽.
33) Ibid., pp. 79-97.
34) 조동호,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서진출판사, 1994), s.v. "알렉산더
캠벨의 침례론".
35) J. W. McGarvey, New Commentary on Acts of Apostles(Cincinnati: The Standard Publishing Co, n.d.) p. 21.
36) 히뽈리뚜스, {사도전승}(분도출판사, 1992), pp. 53-55, s.v. "21. 거룩한
세례의 전통에 대하여"(127-141쪽). 37) Bruner, op. cit., pp. 87-88.
38) Ibid., p. 92.
39) R. A. Torrey, {성령론} op. cit., 155-194쪽.
40) Bruner, op. cit.,
p. 93.
41) Ibid., pp.
93-94.
42) Ibid., p.
94; R. A. Torrey, {성령론} op. cit., 164-165.
43) Bruner, op. cit.,
pp. 94-95.
44) Ibid., p. 95.
45) Ibid., pp.
95-97.
46) 오우성, {바울의 갈등과 회심: 로마서 7장 14-25절의 주석사}(대한기독교서회,
1992).
47) Bruner, op. cit.,
pp. 97-98.
48) Ibid., p. 99.
49) Ibid., p. 100.
50) Ibid., p.
101.
51) Eugene A. Nida, Customs and Cultures(California: Williams Carey Library, 1975), p. 156.
52) Bruner, op, cit.,
pp. 104-105.
53) 류제창, {개혁주의 은사론}(성광문화사), 46-47쪽 54) 차영배, {간략한 성령론} (총신대학교, 1989년 2월 5일),
9-20쪽.
55) Reese, op. cit.,
pp. 92-94.
56) J. W. McGarvey, New Commentary on Acts of Apostles(Cincinnati: The Standard Publishing Co., n.d.), p. 21. 57) 안문기, {노 양과의 대화로 풀어보는 즐거운 전례: 계절과
축제}(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2), 271쪽.
58) {개혁주의 종말론}, 80-96쪽; {기독교 조직신학} Ⅲ권, 13-81쪽.
59) Jack Cottrell, "Are Miraculous Gifts the Blessing of Pentecost?"
p. 9. 60) Ronald E. Baxter, The
Charismatic Gift of Tongues(Grand Rapids: Kregel
Publications, 1981), p. 19.
61) Ibid., p.
20.
62) Ibid., p. 21.
63) Ibid., pp. 21-22.
64) Ibid.
65) Ibid., pp.
22-23.
66) Ibid., pp.
23-24.
67) Ibid., p. 24. 68) Ibid., p. 25.
69) Ibid., pp.
27-28.
70) John Williams, {성령(The Holy Spirit, Lord,
and Life Giver)} (로고스, 1986), 143쪽.
71) Ibid., p. 140.
72) John F. Walvoord, {성령(The Holy Spirit)} (생명의 말씀사, 1987), 이동원 역, 187쪽; Don DeWelt, {성령의
능력(The Power of Holy Spirit)}
(태광출판사, 1975), 차원봉 역, 33쪽; 황승룡, op. cit., pp. 70-71.
73) Rene Pache, The Person and Work of the
Holy Spirit(Chicago: Moody Press, 1979), p. 75.
74) 박윤선, {성경주석: 요한복음} (영음사, 1979), 114쪽.
75) Walter J. Chantry, Signs of the Apostles: Observations
on Pentecostalism Old and New(Carlisle, Pennsylvania:
The Banner of Truth Trust, 1979), pp. 82-95. 76) Walvoord, op. cit., p. 202.
77) James D. Bales, The Holy Spirit and the Christian(Shreveport, Louisiana: Lamber Book House, 1966), p. 6.
78) Robert Milligan, Exposition and Defense
of the Scheme of Redemption As It Is Revealed and Taught in the Holy Scriptures(Nashville: Gospel Advocate Co., 1977), pp. 276-284.
79) Gerhard Kittel and Gerhard Friedrich, ed., The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anslated
and abridged in one volume by Geoffrey W. Bromiley(Grand Rapids: WM. B. Eerdmans,
1985), p. 167.
80) 전경연외 4명, {신구약성서신학}(대한기독교서회, 1963), 218-220쪽.
81) Pache, op. cit.,
p. 74.
82) Millard J. Erickson, Christian Theology(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5), p. 1090. See also Richard
A. Muller, Dictionary of Latin and Greek Theological
Terms(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6), p.
108.
83) Andrew Paris, "Baptism and Grace," The
Restoration Herald(Cincinnati: The Christian Restoration
Association, February 1977), p. 14.
84) Alexander Campbell, The Christian Baptist(1828): reprint ed.,(Nashville: Gospel Advocate, 1955), pp. 128,
222, 256.
85) Alexander Campbell, The Millennial Harbinger(1849): reprint ed.,(Joplin, Missouri: The College Press, n.d.),
p. 130.
86) The Christian Baptist(1828), op. cit., pp. 254-255.
87) Alexander Campbell, The Christian Baptism with
Its Antecedents and Consequents(Nashville: Gospel
Advocate, 1951), pp. 205, 221, 229. See also The
Millennial Harbinger(1849),
op. cit., p. 611 and The
Christian Baptism(1828), op.
cit., p. 255.
88) R. C. Foster, Studies in the Life of Christ(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71), p. 371.
89) James A. Brooks and Carlton L. Winbery, Syntax
of New Testament of Greek(Washington, D.C.: University
Press of America, Inc., 1979), p. 56.
90) Ibid., p. 54.
91) 저자는 1950년대를 두고 한 말이다.
92) J. R. Mantey, "The Causal Use of EIS in the New Testament,"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LXX(March 1951), pp. 45-48.
93) Car Beisner, Is Baptism Necessary for Salvation?(Santa Ana: Caris, 1980), pp. 14-15.
94) Cornelius Stam, Things That Differ(Chicago: Berean Bible Society, 1951), pp. 23-31.
95) R. C. H. Lenski, The Interpretation of
Acts of the Apostles, pp. 909-910.
96) Donald A. Nash, "For the Remission of Sin," The
Christian Standard(Cincinnati: The Standard Publishing
Co., March 30, 1975), p. 6.
97) Ibid.
98) Ibid.
99) Ibid.
100) Gerhard Kittel, s.v. "eis."
101) Arndt and Gingrich,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s,
s.v. "eis."
102) Ralph Marcus, "On Causal EIS,"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LXX(June, 1951), pp. 129-130.
103) Ralph Marcus, "The Elusive Causal EIS,"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LXX(March, 1952), pp.
43-44.
104) "On Causal EIS," p. 130.
105) Nash, op. cit.,
pp. 6-7.
106) Jack Cottrell and Andrew Paris, "Is Salvation a Process?" The Christian Standard(Cincinnati:
The Standard Publishing Co., November 2, 1975), pp. 7-8.
107) 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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