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하기 표시로써의 복음: 숫자 6,7,8의 성서적인 의미
The Gospel as Plus Sign: The Biblical Meaning of the Numbers, 6,7,8

조동호 목사


먼 옛날 유대인들은 숫자를 표시할 때 알파벳을 사용하였고, 숫자에 숨은 뜻을 담기도 하였다. 이것을 게마트리아(γεματρια)라 부른다. 성경은 대부분 유대인들에 의해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표기한 숫자에는 이런 저런 뜻들이 숨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계시록 13장 18절에 나오는 666이란 숫자이다. 이 666에 반대되는 숫자가 888이고, 그 사이에 놓인 숫자가 777이다. 성경에 777이나 888이란 숫자들이 직접적으로 쓰인 경우는 없지만, 성경에 자주 쓰인 3,6,7,8의 뜻을 풀어보면 그 사용 가능성을 어느 정도는 짐작해볼 수가 있다.

먼저 숫자 3은 성삼위 하나님을 상징한다. 삼각형은 지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튼튼한 도형이라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숫자 3은 완벽 또는 삼위일체를 뜻한다. 구약성경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개념을 가진 히브리식 표현 방식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아모스 2장 4절(1:6,9,11; 잠 30:15,18 참고)에서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유다의 죄를 힐책하실 때 쓰신 표현을 보면, "유다의 세 가지 범죄를 인하여 또 네 가지를 인하여"라고 하였다. 우리말 성경에는 "유다의 서너 가지 죄를 인하여" 라고 번역되었지만, 원어의 뜻을 충분히 반영했다고 볼 수 없다. 영어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for three transgressions of Judah and for four." 이 말의 의미는 유다의 범죄가 그 한계를 벗어났다는 뜻이다. 숫자 3은 완전수이고, 숫자 4는 그보다 하나가 많다는 것을 말하여 유다의 범죄가 그 정도에 있어서 극에 달하였음을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숫자 666이 갖는 의미는 숫자 6이 갖는 의미가 완벽한 삼위일체를 이룬다는 뜻이 된다. 숫자 777과 888도 마찬가지다. 

숫자 6은 7에서 하나가 부족한 숫자이며, 인간의 숫자이다. 인간은 항상 부족한 존재이다. 그는 제 6일째 날에 만들어 졌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이성의 동물이요, 언어와 도구를 쓸 줄 아는 만물의 영장이다. 감정을 통제하고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킬 줄 아는 동물이며, 의지적인 결단력을 가진  종교적인 동물이다. 그러나 인간은 운명적으로 부족한 피조물이다. 자기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에게 언제나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6이란 숫자는 다른 모든 숫자 위에 있으면서도 완전수 7에는 언제나 하나가 부족한 숫자이다. 그리고 숫자 6은 숙명적으로 완전에 이르지 못한다.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고, 표적을 빗나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숫자 666은 완전한 부족과 실패를 의미한다. 숫자 666은 ‘부족하고 부족하며 또 부족하다’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계시록의 666이 거짓선지자를 의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짓선지자의 가르침이 헛되고 헛되며 또 헛될 뿐 아니라, 그의 가르침은 실패하고, 실패하며, 또 실패할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결코 구원할 수 없다는 뜻이다. 계시록에서 666은 둘째 짐승이자 거짓선지자로 등장한다. 짐승(therion)이란 말 자체가 헬라어로 숫자 666이 된다. 이 숫자는 사람의 숫자이다. 그러므로 666은 역사상에 나타난 어느 특정한 인물이기보다는 거짓종교나 철학을 가르치는 자들을 통칭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을 구원하실 자는 오직 완전하신 하나님 한분뿐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을 완전수 7을 세 번 사용하여 777로 표시할 수 있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하나님을 숫자 7로 표기한다. 7을 완전수와 거룩한 수로 보기 때문이다. 숫자 7을 가장 많이 쓰고 있는 책이 계시록이다. 계시록 전체가 숫자 7로 도배되고 있다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요한복음서에도 숫자 7이 사용되고 있다. 일례로 요한복음서는 예수의 기적을 일곱 개만 소개하고 있다.

유대인들 역시 7을 많이 사용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의 7일 창조사역이며, 메노라(금촛대)가 일곱 가지로 만들어졌다. 그밖에도 70인, 70이레, 70인역 헬라어 성경 등 숫자 7을 많이 사용하였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할 때 상투스(sanctus) 또는 삼성창을 사용한다. 대표적인 예가 이사야서 6장 3절,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와 계시록 4장 8절,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이다. 이 상투스를 숫자로 표시한다면, 777이 된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완전하시고, 완전하시기 때문에 거룩하시다. 그분은 완벽하게 거룩하시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거룩(7), 거룩(7), 거룩(7)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숫자 888은 ‘구원자’를 뜻하는 헬라어 ‘예수’(’Ιησους)에서 찾을 수가 있다. 우리 구주 예수의 이름을 수치로 환산하면 ’Ι(10)+η(8)+σ(200)+ο(70)+υ(400)+ς(200)이 된다. 이 숫자들을 다 합하면 8을 세 번 십진법으로 증폭하는 888(800+80+8)이 된다. 이와 같은 증폭을 트리스메기스토스(trismegistos, '세 번 위대한‘)라 칭한다. 이는 복을 세 번씩이나 중첩하여 받거나 준다는 뜻으로써 완전한 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조철수, {유대교와 예수}(도서출판 길, 2002), 345-346쪽].

고대 시빌린 신탁(Sibylline Oracle 1:324)에서는 예수를 숫자 8로 표기하고 있다. 8은 메시아를 상징하는 숫자이자 구원자를 상징하는 숫자이다. 구원과 복의 상징이기도 하다. 숫자 8이 쓰인 사례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메시아의 예표인 다윗 왕은 8번째 아들이었다.
  • 노아의 방주를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의 수는 8명이었다.
  • 유대인들이 난지 8일 만에 하는 할례는 갓난아기의 복을 비는 의식이었다.
  • 구원의 표인 세례(벧전 3:21)를 베풀기 위해서 중세교회는 물통을 팔각형으로 만들었다.
  • 초기교회 교부들은 ‘주일’(주님의 날)을 '제8일째 날'이라고 불렀다[Justin, Dialogue with Trypho, 41:4.].

숫자 8은 기독교의 복음(7+1)의 성격을 설명하는 숫자이기도 하다. 숫자 8은 완전수 7보다 하나가 많다는 뜻을 갖는다. 따라서 숫자 8은 넉넉한 구원, 넘치는 복을 뜻하며, 살림과 구원, 즉 삶에 플러스를 주는 복음을 뜻한다.

구약성경 미가서 5장 5절에 "그는 그들의 평화가 될 것이다. 앗시리아 사람이 우리 땅을 침략하여 우리의 방어망을 뚫고 들어올 때에, 우리는 일곱 목자, 여덟 장군들을 보내서, 침략군들과 싸우게 할 것이다."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에 쓰인 '일곱 목자'와 '여덟 장군' 즉 숫자 7과 8은 완전한 승리를 상징한다. 특히 숫자 8은 '넉넉히 이긴다. 혹은 이기고도 남는다.' 즉 '플러스 1'의 의미를 갖고 있다. 또 마태복음 5장에는 그 유명한 8복에 대한 말씀이 있고, 13장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과 성격을 설명하는 8개의 비유가 나오며, 22-25장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에 관련된 8개의 비유가 소개되고 있다. 특히 마태복음 13장의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과 성격을 설명하는 비유들에서는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30배, 60배, 혹은 100배의 결실을 맺는 '씨앗 비유', 맨드라미 씨와 같이 아주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된다는 '겨자씨 비유', 밀가루 반죽을 부풀게 하는 '누룩에 관한 비유' 등이 소개되고 있다. 이들 성경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예수를 숫자 8로 표기한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예수야말로 우리의 부족을 채우시며, 우리를 풍성하고 넉넉하게 복 주실 '플러스 1'의 존재이시다. 또 예수는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되 후하게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게 하실 수 있는 '플러스 1'의 하나님이시다. 비록 우리 인간이 부족한 '마이너스 1'의 존재일지라도 예수는 우리가 30배, 60배, 혹은 100배의 결실을 맺는데 필요한 '플러스 1'의 요인으로 작용하실 수 있다. 비록 우리가 겨자씨와 같이 아주 작은 존재일지라도 예수는 우리가 큰 나무로 자라는데 필요한 '플러스 1'의 요인으로 작용하실 수 있다. 비록 우리가 밀가루 반죽에 불과할지라도 예수는 우리가 여러 종류의 맛좋은 빵으로 만들어지는데 필요한 누룩이 되실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예수의 희생을 상징하는 십자가 표시가 플러스 기호인 점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닌 것 같다. 예수는 우리에게 '더하기'가 되신다. 기독교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더하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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