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CCS 홈페이지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
main_5.GIF main_6.GIF main_7.GIF main_8.GIF

 

 

 

 

 

 

 

 

 
작성일 : 13-08-06 14:33
그리스도의 교회의 정체성: 21세기 속에서 1세기 교회되기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1,728  

그리스도의 교회의 정체성: 21세기 속에서 1세기 교회되기(눅 1:1-4)

조동호 목사(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1. 미국교회들의 방문소감

2013년 7월 2일부터 7월 31일까지 만 12년 만에 30일간의 미국방문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방문은 미국인 교회들의 초청으로 이뤄졌고, 3곳의 교회에서 세 번씩 총 9번 설교하였다. 내용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정체성에 관한 것으로써, 제목은 “전하여진 그대로”(Just As Things Were Handed Down, 눅 1:1-4)였다. 미국 방문의 목적은 연로한 지인들을 뵙고 안부를 여쭙는 것이었고, 한국의 교회들과 미국의 교회들이 공유한 환원정신, 즉 신약성경교회에 대한 신념과 사명과 비전의 동질성과 일치성(Consensus)을 나누는데 있었다.

미주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정신적 지주인, 147년의 역사를 가진 주간지 <크리스천 스탠더드>(1866년 창립)의 편집인을 오랜 기간(1978-2003) 지낸 샘 스톤(Sam Stone)이 사모와 함께 필자의 설교들을 경청하였고, 기꺼이 교제의 악수를 청하였으며, 그분의 아들 내외와 함께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그 분의 아들 가운데 한 분이 2만여 명이 출석하는 교회의 담임목사이고, 점심을 사준 아들은 필자가 방문하여 설교한 1천여 명이 넘게 출석하는 교회의 담임목사이다.

설교한 교회들 이외에도 추가로 6곳의 교회들과 한 곳의 크리스천 서비스 캠프(Camp Rudolph)를 방문하여 내부 시설들을 살펴보고 설명을 들었다. 그 가운데는 앞서 언급한 2만여 명이 출석하는 교회(Southeast Christian Church)와 5천여 명이 출석하는 교회(University Christian Church)도 있었다. 다른 두 곳은 1천여 명 이상 모이는 대형교회였다. 탐방한 교회들 가운데 두 곳은 제자들 그리스도의 교회였고, 한 곳이 아카펠라 그리스도의 교회였다.

9곳의 대학 및 대학원들을 탐방하였고, 2곳의 대학원 총장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 가운데 한 분은 포트워스(Fort-Worth)에 소재한 텍사스 크리스천 대학교(Texas Christian University)내 브라이트 신학대학원(Brite Divinity School)의 총장, 뉴웰 윌리엄즈(D. Newell Williams) 박사로서 함께 사진도 찍고, 친필로 사인한 대사전 한권도 선물로 받았으며, 20여 분간 담소를 나눴다. 이 분은 <그리스도의 교회 운동 대사전>(Stone-Campbell Movement Encyclopedia)과 <그리스도의 교회 운동 세계사>(Stone-Campbell Movement Global History)의 집필책임자였다. 이 두 권의 책의 번역과 한국 출판에 관해서 또 우리가 방문한 제자들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소감과 그곳에 얽힌 이야기들을 주제로 즐겁게 담소를 나눴다.

켄터키 주 루이빌에서 개최된 7천여 명이 참석한 북미주 그리스도인 컨벤션(North American Christian Convention)에 처음으로 3박 4일간 참석하였고, 부스(booth)를 설치하여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사업을 소개하였다. 한국과 어떤 형태로든 관련이 있는 분들만 찾아와서 인사할 뿐, 전반적으로는 냉랭한 편이었다.

지난 10여 년간 미국의 독립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큰 변화를 겪어왔다. 가장 큰 변화는 컨템퍼러리(contemporary) 음악의 도입으로 인한 세대 간의 갈등, 기성세대가 따라 부르기 어려운 경배와 찬양들로 이뤄진 컨템퍼러리 예배와 찬송가를 부르는 전통예배로 오전예배의 나뉨, 공식적인 저녁예배들의 사라짐, 주중과 주일 저녁에 모이는 다양한 소 모임들, 목회자와 찬양 팀의 공동 예배인도, 많은 교회들에서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정장차림의 후퇴 등이었다. 일부 노년층 성도들은 장례식에서조차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정장차림을 하지 않지 않는다고 탄식하였다. 한편 필자가 방문한, 진보적 성향의, 두 곳의 제자들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경우 예배당의 분위기나 주일예배가 매우 전통적이었고, 십자가 탑을 매우 높게 세운 우드몬트(Woodmont) 그리스도의 교회의 경우 성도들이 정장차림을 하였으며, 예배 인도자(장로, 집사)들은 명찰까지 달고 있었다.

2. 절대성과 공리성의 문제

컨템퍼러리 찬양에 대한 기성세대들의 입장은 이렇다. 그것들은 대중이 함께 따라 부를 수 있는 찬송이기보다 개인이나 그룹이 특별찬양으로 부를만한 것들이라는 것이다. 컨템퍼러리 찬양 팀이 예배를 인도함으로써 교독문도, 성가대도, 특별찬양도, 피아노도 예배에서 설 자리를 잃고 있다. 그것들을 대신하고 있는 것들이 키보드, 드럼, 기타, 찬양 팀 등이다. 따라서 전면적으로 컨템퍼러리 예배를 도입한 교회들에서는 노년층 교인들의 불평이 커지고 있고, 인근의 다른 전통교회들로 교적을 옮기고 있다.

컨템퍼러리 예배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목회자들과 장로들은 청장년층을 교회로 이끌어 들이기 위한 시대적 요청이라고 말하고 있다. 교회의 지향(목적)성과 지속성을 염려한데서 나온 말이다. 이에 반해서 노년층은 음악목사의 편중되고 시끄러운 음악의 도입을 불평한다. 노년층에게 컨템퍼러리는 가사의 호불호를 떠나서 따라 불을 수가 없다는 단점이 있다. 부르는 노래들이 새롭고 가사와 곡에 익숙하지 못할 뿐 아니라, 스크린에는 가사만 뜨고 음표가 없어서 찬송가처럼 음표와 가사를 미리 볼 수 없는데다가 엇박자와 예측 불가한 높낮이 및 뜬금없이 반복되는 후렴구 등에 도저히 은혜를 받을 수 없다고 불평한다. 미국은 저작권이 강한 나라인 만큼 음악사용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면이 있다. 컨템퍼러리 예배의 또 다른 특징은 사회자가 없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봐야할 점은 절대주의와 상황주의 또는 공리주의이다.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가 처한 현실이 절대주의(Absolutism)를 요구하는가, 아니면 상황주의(Situationism)나 공리주의(Utilitarianism)를 요구하는가이다. 기독교는 이들 문제들을 늘 고려해왔고, 윤리적으로 어느 것이 옳은가를 늘 고민해왔다. 보수 그리스도의 교회들, 즉 아카펠라 그리스도의 교회들(Churches of Christ)과 유악기 독립교회들(Christian Churches and Churches of Christ)은 절대주의자들로서 모든 결정을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맡긴다. 그렇지만, 분명하게 정리된 원칙이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 원칙은 신약성경이 본질에 대해서 말하면 일치된 견해를 말하고, 비본질에 대해서 말하면 자유로운 견해를 허용하며, 모든 일에 사랑으로 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늘 유동적이고 비관적이며, 비용과 편익 분석에 따른 공리성(principle of utility, 유용성 혹은 실용성)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종교의 특성상 공리성, 유용성, 실용성 또는 상황성에 매몰된 진보적 교회들일수록 교인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 급기야 문을 닫는 사례들이 속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유럽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생기는 현상이다. 종교의 분명한 현상은 보수적일수록 양적으로 늘고, 진보적일수록 감소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도 할 말은 있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항상 양보다 질을 중시하고, 양적 성장이나 숫자에는 연연하지 않는다.”

절대성이든, 공리성이든, 보수든, 진보든, 교회의 양적 질적 성장과 함께 항상 문제가 되는 부분이 교회의 정체성이다. 이 부분이 무너지면 사공이 많아져 배가 산으로 가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게 된다. 신천지 추수꾼들이 유입된 교회들이 입는 피해들에서 보듯이, 교회가 정체성에 관심을 갖지 아니하면, 외부에서 유입된 교인들, 즉 정신을 함께 나눈 적도 없고, 나눌 의사도 없는 타 교단의 교인들의 거센 파도에 교회가 방향을 잃고 난파당하는 사례들을 볼 수 있다. 본 교단과 교회에 속했더라도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만한 특성이나 경험이 없으면, 보다 큰 교회, 보다 조직적인 교회들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다. 구성원들을 붙들어둘만한 끈들이 우리에게 절실하다. 미국의 교회들은 구성원들 스스로가 이 끈을 만든다는 점에서 한국교회들보다 훨씬 성숙하다.

3. 정체성의 중요성

정체성은 미국 교회들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십여 년 전 3백여 명이 출석하던 미국의 한 교회가 1천여 명이 훌쩍 넘는 교회로 성장하면서 겪는 고통을 고스란히 지켜본바가 있다. 새로 유입된 교인들에 의해서 그토록 사랑받고 존경받던 음악과 설교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목회자가 교회를 떠나야했고, 작금에는 음악문제로 많은 수의 노년층이 교회를 떠났으며, 잔류를 결정한 노년층도 불평을 접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지난 십여 년 동안 이 교회는 대학교 총장을 지낸 탁월한 설교가요, 대를 이어 지도자들을 배출한 명망 있는 집안의 목사를 교육목사(teaching minister)로 두고 있고, 신학대학원의 존경받고 탁월한 교수들을 초대하여 집중교육을 시켜왔다. 앞서 언급한 <크리스천 스탠더드>지의 전 편집인 샘 스톤과 같은 인물들이 꾸준히 교육과 설교에 참여함으로써 성장하는 교회가 겪는 고통들을 완화시켜왔고 방향키의 역할을 감당하여왔다.

정체성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체성은 교회론과 맞물려 있다. 교회론은 세 가지 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첫째, 교회론은 안내표식과 같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교회를 배라고 한다면, 그 배가 어디로 갈 배인지, 어떤 목적지를 향해 떠날 배인지, 승선을 해도 좋을 배인지, 승선을 해서는 안 될 배인지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표식과 같은 것이다. 이점에서 교회론은 배에 오르지 아니한 교회밖에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 승선해야할 사람과 승선해서는 안 될 사람이 나눠진다. 또 승선하지 아니할 사람이라도 그 배의 성격이나 목적지를 알 수 있게 해줌으로써 불필요한 오해를 미리 막을 수가 있다.

둘째, 교회론은 배의 방향키와 같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교회론이 정립되어 있을 경우, 우왕좌왕할 필요가 없다. 배에 오른 사람들은 가는 방향과 목적지를 알고 승선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도중에 회항하겠다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교회가 불필요한 곳에 힘을 쏟지 않아도 된다. 또 목적지가 다른 사람을 붙잡고 불필요한 힘을 쏟지 않아도 되고, 이런저런 핑계로 승선치 않겠다는 사람들 때문에 쓴맛을 보지 않아도 된다.

셋째, 교회도 복음도 하나의 상품으로 볼 필요가 있다. 굳이 배와 연관 지어 생각한다면, 천국행 여행상품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어떤 교회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자한다면, 먼저 자기 교회가 파는 상품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자기 상품을 잘 모르고서는 고객의 마음을 끌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교회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자한다면, 먼저 자기 교회만이 갖는 특성화된 상품 또는 차별화된 상품이 있어야 한다. 남들이 잘 파는 상품이라고 해서 무조건 그쪽에 끌려가게 되면 실패하게 된다. 남들이 상품을 잘 파는 이유는 상품의 질이 좋아서이기보다는 그들이 자기 상품에 대한 지식과 자긍심을 갖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남들보다 더 좋은 상품을 갖고 있으면서도, 비록 브랜드 이미지가 떨어진 탓도 있지만, 남들보다 더 많이 팔지 못하는 데는 자기 상품에 대한 연구나 자긍심이 부족한 탓일 수 있다.

넷째, 자기 상품에 대한 연구와 자긍심이 필요하다. 우리의 것이 좋다는 확신과 신념이 있어야 고객을 설득시킬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것을 인정하지 않고 외면하고 있는 동안, 남들은 우리 것의 진가를 알아채고 우리의 것을 가져다가 발전시키고 있다. 그 대표적인 상품이 아마 주의 만찬일 것이다.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제자들(Christian Church/Disciples of Christ)은 성만찬 엠블럼(emblem, )을 사용한다. 만일 교회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자한다면, 작은 일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짚신을 삼아 팔던 부자(父子)가 있었는데, 아버지는 잔털을 제거한 후에 시장에 내다 잘 팔았고, 아들은 잔털을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 팔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상품의 포장과 진열은 상품의 질 못지않게 판매에 중요하다. 좋은 상품이라도 시장에서 팔면 싸구려로 취급받고, 백화점에서 팔면 고급상품으로 취급된다. 성도들이 다니고 있는 교회에 자부심을 갖기 시작할 때가 바로 교회가 부흥할 수 있는 때이다.

4. 전하여 준 그대로

3년 반 전에 “하나님이 명한대로”란 글을 써서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홈페이지에 소개한 바가 있다. 그 글에서 필자는 네 개의 소주제들을 다뤘는데, 그것들은 “랍비가 명한대로,” “교황이 명한대로,” “교리가 명한대로” 그리고 “신약성경이 명한대로”이다. 이 글, “하나님이 명한대로”와 관련 글인 “전하여 준 그대로”는 합해서 3천회 가량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누가복음 1장 1-4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다.

누가복음 1장 1-4절은 복음서의 기록목적을 설명한 구절이다. 1절에서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은 주전 586년 유대왕국의 멸망 전후에 활동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약속하셨던 것들이 예수님의 일생을 통해서 이뤄진 사실들을 말한다. 2절에서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았다”는 진술은 몇 가지 귀중한 사실을 밝혀준다. 첫째는 누가복음이 기록되기 이전에 이미 복음서 성격의 다른 글들이 존재했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저자들이 직접자료인 목격자들의 증언에 철저히 의존했다는 점이다. 셋째는 저자들이 목격자들의 증언을 “전하여 준 그대로” 저술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3-4절은 누가 자신도 전해진 증언들을 처음부터 세세하게 조사한 것들을 차례대로 저술함으로써 이미 듣고 배운 것들이 틀림없는 사실이란 것을 밝히려 했다는 점이다(공동번역).

누가의 이 짧은 진술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목격자들의 증언 위에 세워졌다는 점 또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진 기초가 목격자들의 증언이란 점을 밝혀주는 매우 귀중한 내용이다. 가장 신뢰할만한 목격자들은 사도들이다. 사도의 반열에 들지 못한 수많은 제자들도 목격자들에 포함될 수 있다. 목격자들의 증언이란 목격자들이 선포한 설교와 교육을 말한다. 그들의 증언들은 종종 ‘사도들의 전통’이라 불리는데, ‘사도들의 전통’이란 사도들의 가르침에 사도들의 실천까지를 포함한 표현이다. ‘실천’이라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불렸고(행 11:26), “안식 후 첫날에 ... 떡을 떼려 하여 모였으며”(행 20:7),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고”(행 2:42), “물 있는 곳”(행 8:36)에서 침례를 베푼 것들을 말한다. 그리고 이들 사도들의 가르침과 실천내용들이 글로 옮겨진 것이 신약성경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어떤 가르침과 실천이 정통(옳음)인지를 명확하게 추론할 수 있게 된다. 신약성경 27권이 정경으로 확정지어질 당시 수집된 책들의 정경여부를 결정짓는 잣대는 사도들의 전통이었다. 바울은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다”(엡 2:20)고 했다. 모퉁잇돌은 유대인들의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돌이었다. 건물이 모퉁잇돌 위에 세워졌고, 건물의 네 방향과 각이 모퉁잇돌에 의존되었기 때문이다. 만일에 모퉁잇돌이 작거나 든든하지 못하다면, 전체 건물이 불안정할 수 있었다. 그래서 큰 돌을 각 모퉁이에 확고하게 놓는 데에 크게 신경을 썼다. 만일 중요한 문서나 값어치 있는 물품을 건물의 기초에 저장한다면, 그것들은 모퉁잇돌에 놓여졌다. 예수님은 중요한 모퉁잇돌로 불렸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분 위에, 그분의 가르침 위에, 그분의 실천과 그분이 이루셨던 것들 위에 놓였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너희는”은 에베소 교회를 지칭한 것이고, “모퉁잇돌”이란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 즉 예수님의 일생을 통해서 이뤄진 사실들을 말한다. 그리고 그 사실들을 목격한 자들의 가르침과 실천이 교회가 세워진 기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순종하라고 권하였고(롬 6:17),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잘 지키고 있다고 칭찬(고전 11:2) 하였으며, 심지어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다”(고전 11:23)고 하였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는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9)고 말씀하였다. 왜 교회가 신약성경 위에 바로 서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밝혀주는 말씀들이다.

5. 하나님이 명한대로

사도행전 6장 14절에서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고소할 때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함을 우리가 들었다”고 분노하는 것을 읽을 수 있다. 그들은 모세가 전하여 준 규례 즉 모세오경에 실린 613개의 계명들과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의 계명들을 범하지 못하도록 만든 수없이 많은 규례들을 주어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을 목표로 삼아왔다. 그렇게 하는 것이 거룩함이었고 의로움이었기 때문이다(눅 1:6).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에게서 문제점을 발견하고 질타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보호할 목적으로 울타리 법들을 수없이 만들어 계명들에 겹겹이 방어막을 침으로써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을 헛되이 지키게 할뿐 아니라, 외식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규례들은 “장로들의 유전”이라고 불렸다. 이 “맹인된 인도자들”(마 23:24)은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사람들의 전통을 지키게 하려고 하나님의 계명들을 버리게 하였다(막 7:7-9). 이와 비슷한 사례가 전통교회들에 남아있다. 예수님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신자들이 중보자이신 예수님께 직접 기도하지 못하고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에게 기도하게 한 것과 신자석보다 상당히 높고 먼 곳에 주의 만찬 상인 제단을 배치하여 사제의 권위를 높인 것이다.

성막건축에 관한 출애굽기의 말씀에서 거듭 강조된 구절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하였다”이다. 출애굽기 39장에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하였다”는 이 구절이 무려 10번이나 쓰였다. 32-33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이와 같이 성막 곧 회막의 모든 역사를 마치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고, 그들이 성막을 모세에게로 가져 왔다”고 했고, 42-43절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이 모든 역사를 마치매, 모세가 그 마친 모든 것을 본즉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되었으므로 모세가 그들에게 축복하였더라.”고 하였다.

성막제작의 핵심사상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just as the LORD had commanded) 행하고 이루는 것이 복을 받는 길이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장점은 하나님의 계명을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신 6:5) 문자적으로 지키려하는데 있다. 토라의 613개의 계명들뿐 아니라, 계명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랍비들이 만든 수많은 울타리 법들(Gezeiroth laws)까지 성심을 다해서 지키려한다. 그러나 단점은 하나님의 계명들의 근본취지와 뜻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는데 있다. 그래서 그들은 내적인 것, 영적인 것보다는 외적인 것, 문자적인 것, 형식적인 것에 치우쳤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에서 말한 지상의 가나안땅이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약속된 하늘 가나안땅의 그림자였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지상의 성막이 하늘 성전의 그림자였다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였다. 또 유대인들은 지상의 성막이 일시적이요, 하늘 성전이 영원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무엇보다도 구약성경의 성전이 다가올 신약성경교회의 모형이요 그림자였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이것을 제대로 파악한 것이 신약성경 저자들이다. 그들이 새롭게 이해한 것은 지상 가나안땅이 하늘 가나안땅의 그림자라는 것, 지상 가나안땅은 옛 언약이요, 하늘 가나안땅은 새 언약이라는 것, 지상 성막은 하늘 성전의 그림자라는 것, 지상 성막은 일시적이요, 하늘 성전은 영원하다는 것, 또 구약성경성막은 신약성경교회의 예표요, 모형이며, 그림자란 것이었다. 여기에 유대교와 기독교의 중요한 차이가 있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이 실패한 길을 걷고 있다. 공리주의적 성공주의에 빠져서 신약성경의 가르침대로 하지 않고, 신약성경 저자들이 구약성경을 이해했던 방식대로 이해하지 않고, 신약성경 저자들이 구약성경을 해석했던 방식대로 해석하지 않고, 유대교의 랍비들이 유대교에 했던 것처럼 기독교에 하고 있다. 그 결과 많은 교회들이 구약성경교회로 또는 유대교적기독교에 치우쳐 있다. 공리주의적 성공주의와 유대교적 권위주의에 빠져서 신약성경교회의 사도전통을 멋대로 왜곡시키고 있다. 기독교가 선민(특권)의식과 교조주의에 매어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만과 자기우상숭배로 인해서 응보를 받지 않을까 우려된다.

6. 신약성경이 명한대로

유대교의 폐단을 고치려했던 것이 기독교였고, 가톨릭의 폐단을 고치려했던 것이 개신교였다. 그러나 개신교의 폐단은 누가 고칠 것인가, 무엇으로 고칠 것인가? 이 물음에 답을 줄 곳이 과연 있기는 한가? 다행히도 200여 년 전, 정확하게는 ‘알렉산더 캠벨’이 27살의 젊은 나이에 화려한 목회경력을 자랑하는 레드스톤 침례교 협의회의 목사들 앞에서 1816년 9월 1일 행한 ‘율법에 관한 설교’를 시발로 1823-30년까지 7년간 발행한 <크리스천 뱁티스트>(Christian Baptist)지와 1830-70년까지 40년간 발행한 <밀레니얼 하빈저>(Millennial Harbinger)지에 발표한 “옛 질서의 것들의 회복”(to restore the ancient order of things)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신 목사님이 주장했던 “근본”에로 돌아가는 것, 신약성경에로 돌아가는 것이 기독교계의 문제점들의 해결책이라고 강하게 확신한다. “신약성경교회로 돌아가자”는 호소는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과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3세기에 걸쳐서 호소했던 것이다.

오늘날 개신교는 개혁주의니 복음주의니 하는 말들이 무색할 정도로 각종 폐단과 분열이 심각하고 상호비방이 난무한다.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가 속한 집단에만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이름이 다르고 조금만 다르게 실천해도 이단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침례가 이단이 되고, 매주 행하는 주의 만찬이 이단이 되고, 신성한 ‘그리스도의 교회’란 이름조차 이단이 되는 게 현실이다. 유대교나 가톨릭교회와 마찬가지로 개신교에서조차 하나님을 독점하려는 폐단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 상황, 이 나쁜 상황은 고쳐졌어야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개신교 교회들의 폐단을 고치시려고 신약성경교회운동을 택하셨다. 개신교의 본래 의도는 성경적 진리에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좋은 취지와 뜻이 지난 6세기 동안 심각한 분열과 유대교적 기독교란 왜곡된 결과로 드러나고 말았다. 더 심각한 것은 개신교가 앓고 있는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데 있다. 원인을 지적하고 해결방도를 제시하면 의심부터 하고 그 알량한 지식과 전통을 꺾으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분명한 사실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신약성경교회로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이 구약성경을 이해한 방식으로 구약성경을 이해하고, 신약성경이 말한 것을 말하고, 행한 것을 실천하고, 침묵한 것을 자유로 하고,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해야 한다. 신약성경이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불렀으면 그렇게 부르고, ‘그리스도인’이라 불렀으면 그렇게 부르고, 침례를 행하였으면 그렇게 행하고, 매주일 주의 만찬을 행하였으면 그렇게 시행하여야 한다.

둘째는 “오직 그리스도인”(Christians Only!)이 우리의 호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핵심사상은 만인사제론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민족의 차별, 남녀노소의 차별, 빈부귀천의 차별, 계급과 신분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주님의 형제요 자매요, 일군들이다. 하나님의 집의 한 가족이다. 그리고 그들의 신성한 이름이 그리스도께 소속됨이란 뜻의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교회들이다.

셋째는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실천아래서 지상의 모든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를 빙자한 분열은 죄악이다. 분열은 진리가 죄인 것처럼 가장한다. 분열의 가장 큰 원인은 유대인들의 문자적 구약성경해석방법을 채용하는 것이고, 신약성경저자들의 모형(예표)적 영적 구약성경해석방법을 채용하지 않는데 있다. 옳은 구약성경해석방법에 대해 우리의 분명한 입장은 이렇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그것의 성취를 위해서 신약성경을 길잡이로 사용하여 해석한다. 우리가 구약성경구절들을 읽고 사용할 때, 예수님과 관련지어서 해야 하며, 신약성경에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전통을 따라야한다.

신약성경이 본질에 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연합을 위해서 신약성경에 호소해야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필수이다. 비 본질에 대해서 우리는 연합을 목적으로 자유를 허용해야한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 행해야한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인들로서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시행하는 패턴이다.

알렉산더 캠벨은 그 자신을 천년왕국의 선구자로 인식하였다. 마찬가지로 발전 스톤도 자신을 새천년왕국의 도래를 재촉하는 그리스도인 메신저로 인식하였다. 그들은 천년왕국 때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신약성경에 실린 옛 질서들로 온전하게 회복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운동을 하나님의 섭리의 보다 큰 설계위에 자리매김하였다. 환원운동의 신성한 소명은 기독교를 본래의 순수성과 능력에로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사명은 신약성경교회시대의 도래를 재촉하는 것이었고, 그리스도의 교회시대의 도래는 곧 천년왕국시대의 도래가 될 것이었다. 그들은 천년왕국시대에는 분열과 당파심과 교권과 노예제도와 같은 비 성경적인 관행들이 존재치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새천년시대가 가까이 있다고 믿었다.

우리는 모두 알렉산더 캠벨을 본받아 한국에서의 천년왕국의 선구자 혹은 발톤 스톤을 본받아 한국에서의 그리스도인 메신저들이 되어 새천년시대의 도래 즉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과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시대를 재촉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들의 신성한 소명이요 목표라고 확신한다. 예수님께서 사도행전 26장 17-18절에서 바울에게 말씀하셨다. “[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그리스도의 교회의 정체성은 신약성경에 입각하여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예수님을 믿어 성도들 가운데서 기업(천국)을 얻게 하는 것이다.

7. 그리스도의 교회의 신조

1)‘신약성경교회’로 돌아간다.

‘탱크주의’란 광고 전략을 채택하여 선풍적인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전 정보통신부 장관이자 대우전자 사장과 회장(91-97) 및 KAIST교수(72-74)를 역임한 배순훈 박사는 평소의 지론이 ‘기본으로 돌아가자’(Back to the Basic)이었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평소의 지론은 무엇인가? ‘단순한 신약성경에로 돌아가자’(Back to the Simple New Testament)이다. 이는 잘못된 교회전통을 고치고, 기독교의 기본인 사도전통에로 돌아가자는 뜻이다.

2)사도들의 가르침과 전통을 존중한다.

어떤 교회가 참된 교회인가? 크다고 참된 교회인가? 역사가 길다고 참된 교회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마르틴 루터와 쟝 깔뱅과 같은 개혁가들이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을 펼친 때에 이미 기독교는 1,500년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었고, 지중해와 흑해 연안의 온 동?서방 세계가 서방가톨릭교회와 동방정통교회를 국교로 하는 거대한 교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시급히 요구됐던 것은 성경으로 돌아가 참된 교회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구원을 받고 받지 못하는 열쇠가 교회의 크기나 역사의 길고 짧음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통과 비정통의 잣대가 교회의 크기나 역사의 길고 짧음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교회가 참된 교회인가? 참된 교회는 사도성에 있다. 사도성은 처음부터 정통과 이단을 구별하는 잣대였을 뿐 아니라, 정경과 외경을 구별하는 잣대였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전통 위에 세워진 교회이다. 에베소서 2장 20절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고 하였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다.”고 하였다.

3)사도들의 예배전통을 따른다.

사도행전 2장 42절에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는 말씀이 나온다. 오순절 성령강림이후 교회가 세워진 다음에 사도들이 전적으로 헌신했던 일은 네 가지였다. 이 네 가지 일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들 네 가지는 모두가 서로 동일하게 중요한 동등한 요소들이다(Things that are equal are equal to each other). 사도들이 어느 것을 더 힘쓰고 어느 것은 덜 힘쓴 그런 것들이 아니라, 동일하고 동등하게 힘썼던 예배의 내용들이며, 이들 네 가지 요소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와 예배를 완성시키는 네 모퉁이 돌들이다.

사도행전 2장 42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에 전혀 힘쓰니라.
  • 저희가 교제에 전혀 힘쓰니라.
  • 저희가 떡 뗌에 전혀 힘쓰니라.
  • 저희가 기도에 전혀 힘쓰니라.

이들 네 가지 요소들은 교회의 모퉁이 돌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의 가르침과 전통이므로 그리스도의 교회와 예배를 완성시키는 네 모퉁이 돌들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이들 네 가지 요소들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예배에서 소홀히 된다면, 그 예배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또한 성만찬이 빠진 예배는 불완전한 예배요, 하나님의 뜻대로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없다. 성만찬을 자주 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자주 하니까 경건성이 떨어진다고 말한다. 미국 사람들은 “too common”하다고 말한다. 매주일 설교하면 경건성이 떨어지거나 너무 흔한 일인가? 매주일 헌금하면 경건성이 떨어지거나 너무 흔한 일인가? 매주일 기도하면 경건성이 떨어지거나 너무 흔한 일인가?

4)하나님이 제정하신 신약성경의 명칭을 사용한다.

‘그리스도인’(Christian), ‘제자들’(Disciples), ‘형제들,’ ‘그리스도의 교회’(Church of Christ), ‘장로,’ ‘집사,’ 혹은 ‘권사’(행 4:36, 롬 15:14; 고전 2:4; 살전 5:12; 딤전 4:13) 등 신약성경에 나오는 명칭을 사용한다(No name but the Divine).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명칭은 성경적인 명칭일 뿐 아니라(롬 16:16),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교회라 부름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는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공동체를 '~ 그리스도의 교회'(~ Church of Christ) 혹은 ‘~ 그리스도인의 교회’(~ Christian Church)라고 부르는 것은 지극히 성서적이다.

5)인위적인 신조나 견해를 따르지 않는다.

오직 복음만 주장한다(No plea but the Gospel). 오직 그리스도만 신조로 삼는다(No creed but the Christ). 그리스도의 교회는 신약성경의 신조를 구원하는 믿음의 조건으로 삼는다. 이 신조는 마태복음 16장 16절과 로마서 10장 9절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두 구절의 말씀에는 예수님의 신성과 부활을 믿는 신앙고백이 나타나 있다. 성경 말씀대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하였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침례를 받기 전에 이 신앙을 고백한다. 구원하는 믿음은 성경해석의 결과물인 장문의 신앙고백서나 특정교리를 이해하고 믿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라 교리로써의 믿음이기 때문이다(딤전 4:1,6; 유 3; 갈 1:23). 교리의 믿음은 ‘믿음의 내용’, 즉 ‘지식의 믿음’을 말한다. 신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믿음이다. 그러나 신학체계로써의 이 믿음은 종종 참 신앙을 억압하는 도구로 쓰이기도 하였다.

6)신약성경의 명령을 지킨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 의하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서 계획되고, 아들 하나님에 의해서 창설되고, 성령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권능이 부여된 신성한 조직이다. 그러므로 이 공동체는 모여 예배하고, 교육하며, 교제하며, 흩어져 전도하며, 봉사하며, 구제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 공동체의 목적은

첫째,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막 16:15; 행 8:4). 이 복음은 전도자와 개개인의 성도들에 의해서 전파되며, 어느 장소에서나 이루어진다(행 20:20; 5:42; 11:12-15).

둘째, 제자를 삼는 것이다(마 28:19). 제자 양육은 남녀노소 불신자들에게 접촉하여 교육을 통해서 이들을 신앙인으로 또는 전도자로 육성하는 일이다.

셋째, 침례를 베푸는 일이다. 침례는 복음을 듣고, 믿고, 회개하고,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자신의 구세주로서 입으로 고백한 자들에게 베푸는 성례이다(마 28:19).

넷째, 주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다(행 5:20; 마 28:20). 이는 그리스도인의 계속적인 성장과 성결의 생활을 위한 것이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7)성경을 믿음과 실천의 규범으로 삼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와 영감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실천의 규범임을 믿는다(No book but the Bible).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곳에서 우리는 말하고, 성경이 침묵하는 곳에서 우리는 침묵한다"(Where the Bible speaks, we speak; where the Bible is silent, we are silent.). 다만 그리스도의 교회는 신약성경을 구약성경보다 우선시 한다. 구약성경은 유대인들의 희망(Ha-Tikvah)인 문자적인 지상 가나안땅의 성취와 실패 그리고 회복에 관한 글이다. 총신대학교의 정훈택 교수의 지적대로, 구약성경은 유대교의 경전으로써 기독교에서는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과 예표로서 기능하며, 해석에 있어서 기독교의 경전인 신약성경에 제한 받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구약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구약성경이 탄생했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하는지를 제한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구약성경을 신약성경이 말하는 대로 해석하지 않고 다르게 읽는다면, 그는 구약성경을 오해하는 것이다.”<정훈택, ??신약개론??(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1998), 15쪽.>

8)하나님이 정하신 신약의 의식을 지킨다.

하나님이 정하신 의식들, 즉 교회와 관련된 신약성경의 의식들을 지킨다(No ordinances but the Divine). 하나님이 정하신 신약성경의 의식이란,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아들 예수님의 가르침과 명령을 따라 제자들이 세운 교회의 예배전통을 말한다. 하나님이 정하신 의식을 세우는 방법에는 세 가지, 즉 ‘직접적인 명령,’ ‘승인된 사도전통,’ 그리고 ‘필요한 추론’을 적용한다. 직접적인 명령(direct command)은 “세례를 베풀라.”(마 28:18-20)와 같이 주님께서 친히 명령하신 것을 말한다. 승인된 사도전통(approved apostolic example)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주의 만찬(행 20:7)에 참례하기 위해서 함께 모이던 날짜나 방법과 같은 승인된 전통을 말한다. 필요한 추론(necessary inference)이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마 3:16)에서 주께서 받으신 세례가 침례였다는 추론을 가능케 하는 필요를 말한다.

9)“우리만이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인뿐이다.”고 믿는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단순한 신약성경에로 돌아가자’(Back to the Simple New Testament)는 분명한 사명을 갖고 시작되었다. 16세기 종교개혁정신을 받들어 잘못된 교회전통을 고치고, 기독교의 기본인 사도전통에로 돌아가자는 의지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운동의 결과에서 볼 수 있듯이, 신약성경기독교에로의 환원은 자칫 남들을 이단으로 몰아세우는 배타성을 강하게 띨 수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19세기에 이미 이러한 경험을 겪었다. 그 결과 “우리만이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인뿐이다.”(We are not the only Christians, but Christians only.)라는 중대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10)신약성경이 본질을 말하는 곳에서는 일치를 추구하고, 비 본질을 말하는 곳에서는 의견차를 존중하며, 모든 일에는 사랑으로 행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때에 제자들의 일치를 위해서 기도하셨던 점을 상기하면서 분열이 난무하던 19세기 초 미국에서 교회일치와 연합을 사명으로 처음 출발하였다. 그러나 성도들의 일치와 연합은 신약성경으로 돌아가는 문제와 성경해석의 문제들로 인해서 풀기 어려운 난제 중의 난제이다. 이에 그리스도의 교회는 신약성경이 본질을 말하는 곳에서는 일치를 추구하고, 비 본질을 말하는 곳에서는 견해차를 존중하며, 모든 일에는 사랑으로 행할 것을 주장한다(In essential unity, in nonessential liberty, in all thing charity).

8. 성장하는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정체성

주일 예배에 2만여 명이 출석하는 사우스이스트 그리스도의 교회(Southeast Christian Church)의 담임 목사인 데이브 스톤(Dave Stone)은 설립 50주년 기념지 인사말에서 지난 50년간의 사우스이스트 교회의 특징으로써 7가지를 열거하였다.

  • 종의 마음을 가진 자원자들(Servant-minded volunteers)
  • 경건한 평신도 지도자들과 직원들(Godly lay leaders and staff)
  • 믿을만한 예배와 성경적인 설교(Authentic worship and Biblical preaching)
  • 최상에의 헌신(A commitment to excellence)
  • 변화에 대한 융통성(Flexibility to change)
  •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정(Passion for God's Word)
  •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불굴의 충성(And an unyielding allegiance to Jesus Christ)

사우스이스트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 뿌리를 신약성경교회(New Testament Church)와 오직 그리스도인(Christians only) 운동을 추구한 1801년 켄터키 주 캐인리지에서 개최된 부흥운동과 동 장소에서 1804년에 시작된 환원운동에 두고 있다. 여기서 시작된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는 2만3천여 개 교회와 3백50여 만 성도를 갖는다. 이 가운데 협의회와 총회가 소속된 미국의 독립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2009년 <교역자 수첩>(Directory of Ministry)에 의하면, 5,300개 이상의 교회들에 120만 이상의 성도들이 출석하고 있다.

미국에서 성장하는 독립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밝히고 있는 정체성을 살펴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교회(Love God, love people, impact the world) 혹은 더불어 주님께 예배하고, 더불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누며, 더불어 성장하기 위해서 수준 높은 돌봄을 베푸는 교회를 사명으로, 21세기 속에서 1세기 교회가 되는 것(To be a 1st century church in the 21st century)을 비전으로 밝히고 있다. 또 멤버십의 조건 또는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God's plan of salvation)으로 다섯 가지를 요구하고 있다.

  • 예수님을 믿고(Believe in Christ as your Lord and Savior: 엡 2:8-9)
  • 죄를 회개하고(Repent of your sins: 행 3:19)
  • 믿음을 고백하고(Confess your faith: 롬 10:9)
  • 침수세례를 받고(Be baptized by immersion: 행 2:38)
  •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하늘 가나안땅을 향한 광야 길을 걷는다. 광야 길에서 성도들은 신실한 믿음을 견지(마 24:13, 벧후 1:5-12, 계 2:10-12)하고, 주일을 성수(행 20:7)하여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주의 만찬(마 26:26-28, 고전 11:27-30)에 참여한다.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출애굽사건에서 그 모형과 그림자를 찾을 수 있다.

첫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최초로 문자적으로 지상 가나안땅에 대한 희망(Ha-Tikvah)을 품었고, 약속을 받았다. 신약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조상이 되며, 그가 희망했던 가나안땅은 영적으로 하늘 가나안땅이 된다.

둘째,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의 후손이 이집트에서 (바로의 노예로서) 중노동에 시달렸다. 야곱의 후손들은 잠재적인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혈통에 의해서 문자적으로 지상 가나안땅을 상속받을 자들이었다. 마찬가지로 잠재적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서 (사단의 노예로서) 죄악에 눌려 산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영적으로 하늘 가나안땅을 상속받을 자들이다.

셋째, 문자적 의미에서 첫 번째 메시아이자 하나님의 종인 모세가 잠재적 문자적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는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의미에서 두 번째이자 참 메시아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잠재적 영적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는다. 여기서 문자적 이스라엘은 유대민족을, 영적 이스라엘은 민족과 혈통과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초월한 열방의 그리스도인들을 말한다. 유대인들의 종교인 유대교는 지상 가나안땅에 희망을 둔 종교이며, 그 땅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 613개의 계명이다. 구약성경은 그 땅의 얻음과 잃음에 관련된 글이다. 한편 열방의 종교인 기독교는 하늘 가나안땅에 희망을 둔 종교이며, 그 땅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 복음이며, 신약성경은 그 땅의 얻음과 잃음에 관련된 글이다.

넷째, 잠재적 문자적 이스라엘 백성은 지상 가나안땅을 얻기 위해서 모세의 인도를 받아 홍해를 건넌 후 45일 만에 시내산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5일 후 즉 이집트 탈출 50일 만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계약, 즉 지상 가나안땅을 놓고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이 되었다. 그들은 계명들을 지키기로 약속하였고, 하나님은 그들을 열방민족들의 제사장의 나라로 세우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열방민족들의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독점하였으며,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열방민족들을 하나님이 없는 이방인으로 취급하였다. 여기에 그들의 실패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라를 주신 목적은 열방민족들의 제사장의 나라가 되어 열방민족이 그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의 실패로 인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잠재적 영적 이스라엘 백성을 하늘 가나안땅에로 인도하여 드리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침례를 받도록 하였다. 바울은 침례를 홍해도하의 실체로 설명하였다(고전 10:1-4). 침례를 받기 전에 (1)예수님을 믿고, (2)죄를 회개하고, (3)믿음을 고백하게 되는 데, 여기서 믿음을 고백하는 행위(confession of faith)는 시내산 계약에 대한 실체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침례는, 바울이 에베소서 2장 19절에서 언급한 대로, 그리스도인, 즉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fellow citizens with God's people)이 되고, 하나님의 가족의 식구(members of God's household)가 되기 위한 하나님과의 계약식이다.

다섯째, 잠재적 문자적 이스라엘 백성이었던 히브리인들이 홍해를 건넌 후 시내산에서 계약식을 치른 후부터 즉 이집트 탈출 50일(오순절) 후부터 옛 언약에 의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그 후로 광야에서 구름기둥의 인도를 받았으며, 성막예배(물두멍=침례, 등대=성령, 떡상=주의 만찬, 분향단=찬양과 기도, 법궤=말씀과 보좌)를 드렸고, 만나를 먹고 반석의 샘물을 마신 후에 광야순례를 마치고서도 전쟁과 기근과 지진과 질병과 배고픔과 목마름이 끝없이 지속되는 지상 가나안땅에로 들어갔지만, 그것조차도 하나님과의 계약을 어김으로써 빼앗기고 말았다. 다른 한편 잠재적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었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죄를 회개하고, 믿음을 고백하고, 침례를 받음으로써 새 언약에 의한 하나님의 백성(주후 30년 5월 28일 오순절에 시작됨)이 되었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으며, 성령님(구름기둥)의 인도를 받으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속하여 주일(안식일)예배를 성수하고, 주의 만찬을 먹으며(만나와 반석의 물), 지상 순례를 마친 후에는 하늘 가나안땅에로 들어가 영원한 안식을 취하게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교회 구원론과 예배의 핵심이다.

글을 마치면서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성장하는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정체성 확립을 위해서 교회의 뿌리(heritage), 신념(beliefs), 소명(calling), 사명(mission), 비전(vision)이 무엇인지를 진술하고 지속적으로 교육한데 있다. 무엇보다도 그 바탕을 신약성경에 두고, 평신도 중심의 민주적 교회론, 즉 신약성경교회를 확립한데 있다. 이뿐 아니라, 그들은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복장, 예배, 봉사자, 성경공부반, 아이들 돌봄 서비스, 주차 지도자 등 사람들이 궁금해할만한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고, 안내와 봉사, 지도자선출 등의 세세한 내용들을 소개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대자>에서 수행자가 또 다른 수행자를 만들 수 있는 세 가지 덕목을 피력하였는데, 의식주와 생사를 하나님께 맡길 때, 자기 속의 밑불이 뜨겁게 타오를 때라고 하였다. 이것은 신념과 열정이 가득한 사람 앞에서 더러움이 닦이지 않고, 고집이 꺾이지 않으며, 마음이 녹아지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