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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11-28 08:03
스톤-캠벨운동의 분열사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1,379  
   스톤-캠벨운동의 분열사.pdf (366.9K) [19] DATE : 2018-10-05 00:28:47

스톤-캠벨운동의 분열사

A History of Schisms among Christians(Disciples) of the Stone-Campbell Movement

조동호 목사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스톤-캠벨운동만으로 따진다면, 이 운동은 3세기 째에 들어서 있고, 오켈리와 라이스 해거드의 공화감리교회운동 등을 포함하면 4세기 째에 들어서 있는 셈이다. 그러나 햇수만으로 따진다면, 2백년이 조금 넘었다. 그 운동의 절반이자, 20세기가 되는 1900년에 스톤-캠벨운동은 미국인구 증가율의 두 배나 더 빠르게 성장하여 한 해 동안 무려 1천 개 교회가 추가되었다고 한다. 교회가 한 주에 거의 20개씩 증가한 셈이다. 만일 뒤따른 분열이 없었다면, 50년 후인 20세기 중반까지 이 운동은 기하급수적으로 퍼져 미국에서의 교인수가 4천에서 6천만 명에 도달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1900년은 다른 한편에서는 이 운동이 두 갈래로 갈라진 분수령(1906년)에 몇 걸음만 남긴 해였다.

조직은 뭉쳤다가 흩어지고, 흩어졌다가 뭉치면서 발전한다. 흥망성쇠에서 흥성(興盛)은 뭉칠 때이고, 망쇠(亡衰)는 흩어질 때이다. 그렇다고 조직의 분열이 반드시 망쇠의 길인 것은 아니다. 필요한 분열은 분가(分家)와 같아서 흥성으로 이어지는 성장통에 해당된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것이 분열이지만, 좋은 분열은 자식이 분가하는 것과 같아서 생산적이고 발전적이다. 오늘날 교계에서 쓰는 ‘연합’이란 말은 교리와 신념의 일치가 아니라, 다양한 교리와 신념들의 생산적이고 발전적인 연합이다. 일치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연합도 중요하다.

A. 1906년까지의 분열

1906년은 스톤-캠벨운동(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출범한지, 대략 100년 만에 그리스도의 교회들과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쪼개진 해이다. 알렉산더 캠벨(Alexander Campbell)이 ‘제자들’이란 말을 선호하고, 발톤 스톤(Barton W. Stone)과 제임스 오켈리(James O'Kelly), 애브너 존스(Abner Jones, 의사)와 엘리아스 스미스(Elias Smith)는 ‘그리스도인’을 선호하였지만, 스톤-캠벨운동의 그리스도인들을 흔히 ‘그리스도의 제자들’ 혹은 줄여서 ‘제자들’이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 미국의 백악관자료는 20대 대통령 제임스 가필드의 종교를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명기하였는데, 이는 가필드가 그리스도인의 교회(그리스도의 제자들) 소속이란 뜻이 아니다. 그는 알렉산더 캠벨과 동시대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알렉산더는 개인적으로 “제자들”(Disciples)을 선호하였지만, 공식적인 호칭에서는 “그리스도인”(Christians)을 썼다. 예: 그리스도인 침례, 그리스도인 침례자, 그리스도인 체계 등.

1. 스톤-캠벨운동은 초기부터 분열 속에서 발전하였다.

첫째, 스톤의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스프링필드 장로회(Springfield Presbytery)를 결성했다가 1804년 6월 28일 해체를 선언한 「스프링필드 장로회의 유언서」(Last Will and Testament of Springfield Presbytery)에 서명했던 5명 가운데 스톤만 남고 4명은 떠났다. 리차드 맥니마(Richard McNemar)와 존 던래비(John Dunlavy)는 1805년 봄에 서부에 파송된 셰이커교도(Shaker) 선교사들과 접촉한 후 그들의 추종자들과 함께 셰이커 교도가 되었다. 이후 규정집의 채택을 요구한 존 톰슨(John Thompson)과 로버트 마샬(Robert Marshall)이 이를 반대한 스톤과 결별하여 1811년 3월 장로교회로 회귀함으로써 스톤만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지도자로 남게 되었다.

둘째, 캠벨의 ‘제자들’ 운동의 경우, 그리스도인들의 연합보다 신약교회로의 환원에 더 강한 의지를 표출하였다. 부친 토마스가 1809년에 㰡”선언과 제언㰡•을 발표할 때만 해도 아들 알렉산더는 그 내용에 전적으로 공감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부자간에 견해의 차이가 생겼다. 1809년 8월 17일 창립된 ‘워싱턴 그리스도인 협의회’(Christian Association of Washington)는 교회 연합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지, 교회나 교단은 아니었다. 그러나 협의회는 1811년 5월 4일 브러쉬 런에서 4명의 집사와 함께 토마스를 장로로, 알렉산더를 설교자로 선출함으로써 교회로 전환하였고, 1815년 가을에는 ‘레드스톤 침례교 협의회’(Redstone Baptist Association)에 가입하였다. 1823년에 알렉산더는 동 협의회에서 탈퇴하고 웰스버그 교회(Wellsburg Church)란 이름으로 ‘마호닝 침례교 협의회’(Mahoning Baptist Association)에 가입하여 「그리스도인 침례자」(Christian Baptist)를 발간하였다. 1812년에는 약식세례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재침례를 받았으며, 1816년 “율법에 관한 설교”를 하였다. 이런 일련의 행적은 토마스가 추구했던 연합에서는 멀어지고, 신약교회회복에는 다가서는 것이었다. 40대말이었던 부친 토마스는 신약교회회복이라는 교회개혁을 추구하는 20대 초반의 아들 알렉산더에게 주도권을 내주고 그의 뒤로 물러섰다. 교회연합을 추구했던 토마스는 워싱턴 그리스도인 협의회가 독립교회인 브러쉬 런 교회로 재편되는 것에 대해서 실망과 서운한 마음을 금치 못하였다. 알렉산더는 1830년에 침례교단에 엄청난 타격을 입히면서 탈퇴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이끌었다. 침례교회로부터 밀려난 것은 알렉산더와 그의 ‘그리스도인들’ 혹은 ‘제자들’에게는 기회였다. 이처럼 두 개의 환원의 이상인 일치와 환원은 처음부터 갈등을 겪었다.

셋째, 시드니 리그돈(Sidney Rigdon)은 1825년 초에 캠벨의 「그리스도인 침례자」에 실린 32개의 시리즈 기사, “옛 질서[사도적 전통]에로의 회복”(Restoration of the Ancient Order of Things)에 영향을 받고 캠벨의 신약교회 운동에 합류하여 큰 힘을 보탠 인물이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의 지속성과 공산주의식 공동체를 주장함으로써 캠벨과 충돌하였다. 결국 그는 1830년 10월에 네 명의 모르몬교 선교사들을 만난 후, 1844년까지 조셉 스미스(Joseph Smith)의 가장 영향력 있는 측근이 되었고, 여러 회중들을 모르몬교에 가입시켰다. 그러나 1844년 일리노이 주 카르타고에서 스미스가 군중들에게 살해된 후, 브리검 영(Brigham Young)과의 주도권 쟁탈에서 밀려나 생애 마지막 26년을 불행하게 보냈다.

넷째, ‘다섯 손가락 시연’의 복음전도자로 유명세를 탄 월터 스코트(Walter Scott)는 전천년설과 윌리엄 밀러(William Miller)의 휴거설을 지지함으로써 캠벨과 갈등을 겪었다. 스코트는 스톤-캠벨운동에 “그리스도인들”이란 이름을 쓸 것인지, “제자들”이란 이름을 사용할 것인지를 놓고 대립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스코트는 캠벨이 자신을 환원운동권내에서 2등 시민처럼 대우하고 있으며, 옛 복음(사도적 전통)을 회복하는 일에 끼친 자신의 역할이 적절히 대우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심지어 스코트는 밀러의 전천년설을 지지하면서 동료 제자들에게 1842년 10월에 “그들이 예언의 말씀에 무지하다”며 꾸짖었다. 그러자 캠벨은 1843년 1월에 “지성과 영향력이 남다른 우리의 형제들 가운데 몇 사람이 밀러의 사색에 빨려들었다”고 탄식하였다. 밀러의 휴거설에 대한 1차 예언(1843년 3월 21일)과 2차 예언(1844년 10월 22일)이 모두 빚나가자, 월터 스코트는 캠벨보다 한층 더 후천년설의 지지자가 되었다. 1830년에 시작한 「천년왕국의 선구자」(Millennial Harbinger)에서 보듯이, 캠벨은 스톤-캠벨운동이 새천년왕국을 이 땅에 개방하는 사역이라고 보았다. 캠벨의 「천년왕국의 선구자」와 함께 스톤의 「그리스도인 전령」(Christian Messenger)은 이들 초기 개혁가들의 후천년설적인 역사인식을 들어다보게 하는 제호들이다.

다섯째, 뉴잉글랜드 주에서 침례교인 애브너 존스와 엘리아스 스미스는 ‘그리스도인 연맹’(Christian Connection)을 설립하여 그리스도인들 운동을 펼쳤다. 특히 스미스는 자신이 1808년에 창간한 「복음 자유의 전령」(Herald of Gospel Liberty)에서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신약성서만을 받아들임으로써 유럽에서 건너온 교단들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동년에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버지니아 주와 켄터키 주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제임스 오켈리의 ‘그리스도인들’(1794)과 발톤 스톤의 ‘그리스도인들’(1804)이었다. 오켈리와 라이스 해거드(Rice Haggard)는 감리교 목회자들로서 감독 애즈버리(Asbury)의 독재에 반발하여 노스캐롤라이나 주 매나킨타운(Manakin Town)에서 1793년 공화감리교회를 조직하였으나 새로운 교단이 교회분열의 해결책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기존교단들에 또 하나의 교단을 추가하는 것으로 여겨 1801년에 해체하였다. 그들은 신약성서만으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실천에 충분함으로 더 이상의 신조나 규율이 필요 없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이외에 교회의 머리가 없으므로 회중정치를 표방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을 단순히 ‘그리스도인’으로 불렀다. 뉴잉글랜드 주 버몬트에서는 1800-1803년에 침례교인 애브너 존스가 뉴햄프셔에서는 침례교인 엘리아스 스미스가 ‘그리스도인’ 이외의 다른 이름과 성서이외의 어떤 법규도 부정하였고, 켄터키 주 버본 카운티 케인 릿지에서는 발톤 스톤이 1804년에 자신들을 단순히 그리스도인으로 불렀으며, 그들의 모임을 ‘그리스도인의 교회’라 칭하였다. 1810년에 이들 그룹들은 자신들이 하나임을 선언하였고 지지자들이 2만 명에 달하였다. 그들 교회의 명칭은 ‘그리스도인의 교회’(Christian Church)였다. 그러나 1817년에 엘리아스 스미스는 만인구원론자가 되어 떠났고, 애브너 존스는 의사로 활동하면서 ‘뉴잉글랜드 그리스도인 연맹’(New England Christian Connection)의 교회를 세웠다. 1832년 1월부터 스톤의 서부지역 그리스도인들이 오하이오 밸리의 캠벨-스코트 그리스도인들과 연합을 시작하였을 때, 동부지역의 오켈리와 존스-스미스 운동의 그리스도인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이들 동부지역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은사(회심)체험, 연4회 주의 만찬 시행, 반(反)삼위일체를 강조하였기 때문에 캠벨-스코트 운동과 갈등을 빚었다. 같은 이유로, 스톤의 그리스도인들 중에 약 절반정도가 캠벨과의 합류에 동참하지 않았다. 이 연합에 가장 크게 반대한 사람은 오하이오 주의 매튜 가드너(Matthew Gardner)였다. ‘그리스도인 연맹’은 1931년에 회중교회와 합병하여 ‘회중 그리스도인의 교회’(Congregational Christian Church)가 되었고, 1957년에 ‘복음주의 개혁교회’(Evangelical and Reformed Church)와 합병하여 최종적으로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United Church of Christ)가 되었다. 오늘날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교회(그리스도의 제자들)와 합병을 전제로 많은 부분에서 연합하고 있다.

2. 스톤-캠벨운동은 이탈세력에도 불구하고 더 큰 연합세력을 키워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환원의 이상과 호소들은 일치의 조건을 재고시켰다.

첫째, 스톤의 그리스도인들과 캠벨의 제자들이 켄터키 주 렉싱턴에서 만난 것은 1831년 12월 31일 힐 스트리트(Hill Street) 그리스도인의 교회에서였다. 이 무렵 스톤의 운동은 ‘그리스도인 연합’(union of the Christians)이었고, 캠벨의 운동은 ‘개혁자들’(Reformers) 혹은 ‘제자들’(Disciples)로 알려져 있었다. 이날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한 인물은 존 로저스(John Rogers)였고, ‘제자들’을 대표한 자는 “라쿤(너구리)” 존 스미스(John Smith)였다. 이날 모임에서 연합을 강조한 스미스의 감동적인 설교가 있은 후 스톤이 몇 가지 코멘트만을 한 다음, 양측의 대표들이 악수를 나눔으로써 역사적인 스톤-캠벨운동의 시작을 선포하였다. 이 두 진영의 교회들 사이의 연합을 증진시키고 새로운 교회들을 세우기 위해서 존 스미스와 존 로저스는 여러 해 동안 함께 교회들을 순회하였다.

둘째, 1830년에 캠벨의 제자들이 침례교회와 완전히 결별하고, 1832년 1월 1일부터 스톤의 그리스도인들과 합류하기 시작한 스톤-캠벨운동은 이후 빠르게 성장하였고, 선교증진을 위해서는 교회들 간의 협력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1849년에 신시내티에서 창립된 ‘미국 그리스도인 선교회’(American Christian Missionary Society, ACMS)는 이런 시대적 요구에 대한 응답이었고,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선교를 위한 조직이었다. 알렉산더 캠벨은 병으로 참석하지 못하였으나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이 선교회 조직은 강제성을 띈 조직이 아니었다. 편의성과 견해의 문제였고 복음전도를 위한 수단이고 방편이었다. 개 교회가 선교회를 후원하고 안하고는 자유였다. 하지만, 선교회조직에 대한 반발이 이듬해인 1850년에 악기사용(예배 때)과 함께 터져 나왔고 논쟁으로 이어졌다. 논쟁은 교회주의와 교파주의를 경계하는 보수주의와 지나친 개인주의와 파벌주의를 우려하는 진보주의로 갈라졌다. 진보주의자들은 교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협력사역들의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회중의 권위를 위협하는 비성서적 조직은 미국의 개척자정신과 자유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뿐 아니라, 보수주의자들은 지역교회 이외의 조직은 그 어떤 것도 성서적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 와중에 ACMS가 1863년에 연방군(북군)을 지지하자 데이비드 립스콤(David Lipscomb), 톨버트 패닝(Tolbert Fanning)과 같은 보수주의자들의 비판의 목소리는 더욱 커져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74년 ‘그리스도인 여성 선교회’(Christian Women’s Board of Missions, CWBM)와 1875년 ‘해외 그리스도인 선교회’(Foreign Christian Missionary Society, FCMS)가 조직되었다. 연이어 ‘교회 확장 위원회’(Board of Church Extension), ‘전국자선협회’(National Benevolent Association), ‘목회 구제 위원회’(the Board of Ministerial Relief)와 같은 선교단체들(agencies)과 선교회들(societies)도 설립되었고, 이로 인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불화는 1906년이 될 때까지 지속되고 심화되었다.

셋째, 1892년 가을 예일대에서 수학하는 5명의 스톤-캠벨운동의 제자들이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들끼리 조직을 하나 만들자는 뜻을 모았고, 이들 대부분이 시카고대학으로 옮겨 학위과정을 밟고 있었다. 1894년에 시카고대학에 제자들교회신학원(Disciples' Divinity House)이 세워져 시카고대학 신학원에 재학하는 스톤-캠벨운동의 제자들에게 숙식장소를 제공함과 동시에 교단에 필요한 교육을 받게 하였다. 그리고 1896년 10월 19일 일리노이 스프링필드에서 14명의 창립회원들로 캠벨교육기관(Campbell Institute)을 세웠다. 이는 과거 25년간 큰 대학교들에서 진행된 신지식, 즉 합리주의와 이성주의의 산물인 성서비평과 재해석의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스톤-캠벨운동을 현대신학의 결과물로 재편하겠다는 것이 캠벨교육기관이 설립된 목적이었다. 따라서 캠벨교육기관은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톨버트 패닝, 데이비드 립스콤, 모세스 라드(Moses E. Lard), 다니엘 서머(Daniel Sommer) 등의 보수주의자들에게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들에서 분리시킬 명분을 제공한 셈이었다.

넷째, 불화의 중심에는 예배 때 악기를 사용하는 문제가 있었다. 1850년에 점화된 이 불화는 1906년에 그리스도의 교회들을 이끈 데이비드 립스콤과 몇몇 지도자들이 미국 종교인구조사국에 무악기 교회들을 ‘그리스도의 교회들’(the Churches of Christ)이라는 명칭으로 따로 기재해 줄 것을 요청함으로써 분열의 방점을 찍었다. 동년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몇몇 지도자들도 미국 종교인구조사국에 요청하여 남아 있는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들과 그리스도인의 교회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들’(the Disciples of Christ)이란 명칭아래 열거시킴으로써 스톤-캠벨 운동은 출발한지 1세기만에 ‘그리스도의 교회들’과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갈라졌다. 그러나 처음 1세기 동안은 여러 쟁점과 불화에도 불구하고, 서두에 언급한바와 같이 매력적인 환원의 이상과 호소들로 인해서 미국 내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종교개혁운동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3. 스톤-캠벨운동권에서 제기된 제반 문제들은 우파에 속한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당파성(편가름)을 강화하여 분열을 낳았다. 우파 개혁가들이 촉발시킨 분리는 거짓 연합(평화)에 대한 선전포고라는 신념에서 비롯되었다.

첫째, 신학적 논쟁들 가운데 한 가지가 성서가 침묵하는 것, 성서가 명령하거나 승인하지 않은 것을 신앙과 실천의 본질로 보아 금지할 것이냐, 아니면 비 본질로 보아 허용할 것이냐는 것이었다. 여기서 데이비드 립스콤과 「복음 주창자」(Gospel Advocate)는 본질로 보아 금지할 것을 주장하였고, 아이작 에레트(Isaac Errett)와 「그리스도인 표준」(Christian Standard)은 비 본질로 보아 허용(자유)을 주장하였으며, 에레트의 허용의 범위를 개리슨(J. H. Garrison)과 「그리스도인-복음전도자」(Christian-Evangelist)는 침례에까지 확대시켰다. 벤자민 프랭클린, 톨버트 패닝, 데이비드 립스콤, 모세스 라드, 다니엘 서머 등으로 대표되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예배 시 악기 사용, 선교회, 주일학교 등을 본질로 보아 엄격하게 금지한 반면,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비 본질로 보아 허용하였다. 여기에 노예제도문제와 남북의 문화사회적 갈등까지 더해져 1906년에 스톤-캠벨운동은 그리스도의 교회들과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갈라섰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다시 진보와 보수로 나뉘었다. 1968년에 ‘그리스도인의 교회(그리스도의 제자들)를 위한 가(假)계획’을 채택한 진보진영은 비 본질의 범위를 느슨하게 확대시켜 성서비평, 열린 회원제, 에큐메니즘, 교단재구성 등의 좌파적인 행보로 환원정신을 버리고 연합에 치중하였고, 1920년대 말부터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진보적인 행보에 환멸을 느껴 그들로부터 독립한 보수주의 중도파들은 비 본질의 범위를 엄격하게 인정하는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세워나갔다.

둘째, 스톤-캠벨운동의 두 가지 이상은 환원과 일치 또는 연합과 환원이다. 달아나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가 어렵듯이, 환원과 일치를 동시에 충족하기가 쉽지 않다. 기독교는 과거 2천년 동안 진리의 내용을 공동체의 울타리의 폭과 회원의 자격을 결정하는 도구(test of fellowship)로 삼아왔다. 이런 이유 때문에 보수진영은 연합이란 말보다 일치란 말을 선호해왔다. 연합이 자기 울타리 바깥사람들까지 포함하는 반면, 일치는 울타리 내부 사람들의 믿음과 실천의 일치를 의미할 수 있다. 그 단적인 예가 모세스 라드(Moses Lard)로서 그는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 형제’를 침수세례자에 국한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연합보다는 환원을 통한 일치에 목표를 두고 있고, 근본주의에 가까우며, 그리스도인의 교회(그리스도의 제자들)는 환원보다는 연합을 통한 하나님의 선교, 즉 정의, 평화, 창조보존(JPIC)의 실현에 목표를 두고 있는 진보주의에 가깝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은 진리 안에서의 연합(union in truth)에 목표를 두고 있는 보수주의에 가깝다.

셋째, 성서가 침묵하는 것들을 금지로 보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입장을 가장 잘 보여준 사례가 일리노이즈 주, 셀비(Shelby) 카운티, 샌드 크리크에서 1889년 8월 18일 주일 오후에 선포된 “제언과 선언”(Sand Creek “Address and Declaration”)이다. 이 성명서는 「옥토그래픽 리뷰」(Octographic Review)의 편집자이자 보수 중에 보수였던 다니엘 서머(Daniel Sommer)의 주도아래 샌드 크리크 교회 장로들이 참여하여 작성한 것으로써 신약성서가 침묵하는 신제도들의 도입을 지지하는 형제들로부터 분리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그 같은 신제도들에는 성가대, 선교회, 유급지역교회설교자, 주일헌금 이외의 기금모금 등이었다. 이날 주강사로 나선 다니엘 서머는 교회가 수행하는 사역에 편의를 제공하는 인위적인 이름(조직)들을 그 어떤 것도 수용할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만일 신제도들의 수용을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을 형제로 간주할 수도 없고 간주하지도 않을 것이다.”고 선언하였다. 연합을 주창한 토마스 캠벨의 「선언과 제언」에 상반된 선언이었다.

넷째, 성서가 침묵하는 것들을 금지로 보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입장을 가장 잘 보여준 또 다른 사례는 예배 때의 악기 사용에서 나타났다. 텍사스 주 포트워스에 복음전도자이자 사업가였던 조셉 클라크(Joseph Addison Clark)란 인물이 있었는데, 그에게 두 아들 애디슨(Addison)과 랜돌프(Randolph)가 있었다. 그들은 1871년에 쏘프대학(Thorp College)을 매입하여 1873년에 ‘애드런 남녀공학 아카데미’를 설립하였다. 20년 후 이 대학은 학생수가 445명이었다. 이 무렵 텍사스의 교회들에서는 예배 시 악기사용에 대한 논란으로 불화가 심화된 때였다. 이 논쟁은 부자지간인 조셉과 애디슨까지 갈라놓았다. 부친 조셉은 무악기파로서 1893년 10월 26일「복음 주창자」(Gospel Advocate)에 악기도입을 비난하는 글을 실었다. 그러나 아들 애디슨은 악기도입을 찬성하는 입장이어서 1894년 2월 애드런 대학 전도 집회 때 학생들의 요구를 받아드려 오르간 사용을 허용하였다. 2월 20일 애디슨이 인도하는 전도 집회 때 오르간 반주자가 반주를 하려고 오르간 앞에 앉아있었다. 이에 부친 조셉은 아들 애디슨에게 악기를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청원하였고, 아들은 거절하였다. 그러자 78세의 조셉 클라크는 140여명을 데리고 즉시 그 자리를 떠났다고 전한다. 결국 악기 사용을 찬성하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의 교회들”(Christian Churches)이라고 불렀고, 반면에 아카펠라를 주장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들”(Churches of Christ)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이 불화로 인해서 학생 수가 급감하여 대학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다섯째, 성서가 침묵하는 것들을 금지로 보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입장을 교리적인 면에서 보여준 사례로는 아이작 에레트와 모세스 라드에게서 나타났다. 1862년에 아이작 에레트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믿음과 실천의 개요”(A Synopsis of the Faith and Practice of the Church of Christ)라는 소논문을 발표하였다. 1870년에는 “우리의 입장”(Our Position)으로 제목을 바꿔 출판하였다. 이것은 스톤-캠벨 운동의 주요 신앙들을 10개 항목으로 기술하고, 에레트가 당시 설교했던 디트로이트의 제퍼슨 애비뉴(Jefferson Avenue)와 보빈 스트리트(Beaubien Street) 교회의 회칙을 포함시킨 것이었다. 부임한 회중에게 환원운동의 주요 교리를 소개하기 위한 것으로써 구약과 신약성서의 권위; 신약성서 용어로 진술된 “삼위일체 하나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위대한 사실들”은 진정한 기독교종교의 본질이 됨; 침례의 전제조건으로 믿음과 회개; 죄 사함을 위한 침례; 침수에 의한 세례, 교회 그리고 마지막으로 개요의 목적을 설명하였다. 에레트는 자신이 쓴 “믿음의 개요”가 신조가 아니며, 단지 중요한 종교의식에서 우리의 신앙과 목적을 선언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신조가 아니라는 분명한 천명에도 불구하고, 몇몇 영향력을 가진 편집인들은 에레트와 그의 “믿음의 개요”를 공격하였다. 1863년 9월, 모세스 라드(Moses Lard)는 “40년 동안 분열적이고 악한 신조들의 성향에 반대하여 일해 왔던 사람들에” 대한 공격을 야기하는 에레트를 비난하면서 그의 「계간지」(Quarterly)에 그 논문 전체를 다시 실었다. 라드는 그것은 표지 없는 신조, 즉 “풀밭 속에 있는 진짜 뱀”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에레트는 자신에 대한 비판을 대부분 무시하였다.

여섯째, 남북전쟁은 스톤-캠벨운동의 그리스도의 제자들끼리 총부리를 겨눠야하는 비극을 초래하였다. 그리스도의 제자들 구성원들의 대부분은 반전내지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였으나, ‘미국 그리스도인 선교회’(American Christian Missionary Society, ACMS)가 1863년에 북군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한 것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전후에 공화당원으로서 하원의원과 20대 대통령을 지낸 제임스 가필드(James A. Garfield)는 알렉산더 캠벨과 가까운 사이로써 북군으로 참전하여 소장에까지 올랐던 인물이었다. 그가 지휘한 연대에는 그가 모병한 수백 명의 그리스도의 제자들 소속의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의 단점은 남부에 대한 강한 반감에 있었다. 마지막 통나무집 출신이었던 가필드는 대통령이 된지 200여일 만에 역시 통나무집 출신이었던 링컨에 이어 두 번째 피살자가 되었다. 반면에 발톤 스톤의 아들, 발톤 스톤 2세는 남군으로 참전하여 대령에까지 올랐고, 복음전도자 존 알렌 가노(John Allen Gano)의 아들 리차드 M. 가노는 1863년 말 준장으로 제대 후, 안수를 받고 목회자가 되었다.

일곱째, 1830년 미국의 인구는 대략 1,280만 명이었고, 그 가운데 노예가 2백만 명 정도였다. 스톤-캠벨운동권내에서 남북전쟁이나 노예제도가 분열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지만, 분열을 가속시킨 많은 요소들의 일부였던 것은 사실이다. 노예제도와 궁극적으로 남북전쟁 자체에 대한 논쟁은 악화되고 있는 이념적 문화적 요소들의 일부였으며, 그것들은 메이슨-딕슨 선(Mason-Dixon Line: 남북전쟁이 임박하면서 오하이오 강과 함께 남부의 노예주와 북부의 자유주를 나누는 경계선)의 전역에서 스톤-캠벨 교회들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그리스도의 교회들 사이의 분열을 한층 가속시켰다. 그만큼 노예제도를 놓고 찬반양론이 뜨거웠던 것이다. 노예폐지론자들 중에는 버틀러 대학교의 설립 총장이었던 오비드 버틀러(Ovid Butler) 변호사와 토마스 캠벨(Thomas)의 넷째 딸 제인이 있었다. 버틀러는 알렉산더 캠벨과 ‘미국 그리스도인 선교회’가 스톤-캠벨운동권의 분열을 막으려고 노예제도문제에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자 크게 반발하였다. 그는 1859년에 강경한 노예폐지론자였던 캔자스 주 선교사 파디 버틀러(Pardee Butler)를 지원하기 위해 「복음 발광체」(Gospel Luminary)의 편집인 존 보그스(John Boggs)와 연대하여 ‘노스웨스턴 그리스도인 대회’(Northwestern Christian Convention)를 소집하여 별도의 ‘그리스도인 선교회’(Christian Missionary Society, CMS)를 조직하였다. ACMS의 회장이었던 아이작 에레트(Isaac Errett)가 파디 버틀러에게, 만약 그가 노예철폐에 대한 설교를 멈추지 않는다면 더 이상 선교비를 지원하지 않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에 버틀러는 ACMS가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대항해서 부자와 권력 있는 사람들” 편에 섰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1861년에 ACMS가 비공식적으로 연방군(북군)을 지지할 뿐 아니라, 1863년에 남부지역사람들을 무장한 배신자로 비난하는 강한 결의문을 통과시키자. CMS을 해산하고 ACMS와 통합하였다. CMS의 짧은 생존은 노예제도와 남북전쟁이 스톤-캠벨운동에 끼친 악영향을 보여준 것이었다. 제인은 남편 매튜 맥키버(Jane Campbell and Matthew McKeever) 및 시댁 식구들과 함께 노예탈출을 돕는 비밀조직(underground railroad)의 안전가옥(stations)을 운영하였다. 반면에 베이컨대학, 미주리대학교, 컬버-스톡튼 대학(Culver-Stockton College)에서 학장과 총장을 지낸 제임스 섀넌(James Shannon)은 노예제도를 성서적이고 사도적이라고 옹호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4.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일치의 중요성을 재고하기 시작하였다.

첫째, 그리스도의 교회들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비제도(noninstitutional) 교회들에 소속된 데이비드 에드윈 하렐 2세(David Edwin Harrell, Jr.)는 분열과정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취한 교리적 입장들은 신약교회 회복(환원)에 대한 헌신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속한 남부 시골 교회들이 직면했던 사회적 상황과 남북전쟁 및 지역파벌주의가 그들의 특질(ethos)을 형성한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둘째,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역사가 빌 험블(Bill J. Humble)은 선교회논쟁에서 이슈가 지역 당파성을 강화시키고 분열시키는 일에 남북전쟁의 역할이 컸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 파벌적 이슈들의 쟁점이 환원운동의 이상인 일치와 환원의 대립관계였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목표는 일치보다는 사도적 교회의 복원이었다.

셋째, 하버드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마친 그리스도의 교회들 소속의 리로이 개리트(Leroy Garrett)는 ‘스톤-캠벨 운동’(Stone-Campbell Movement)이란 학명을 처음 자신의 책 제목(1981)에 사용한 인물로서 일치보다는 환원이 스톤-캠벨 운동의 최우선의 신학적 동력이었다는 주장에 반발하면서 캠벨의 강조가 일치의 끈으로써 사도전통의 본질들 위에 있었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상관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수많은 비본질 항목들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넷째, 리로이 개리트, 리처드 휴즈(Richard Hughes), 게리 홀로웨이(Gary Holloway), 더글라스 포스터(Douglas A. Foster)와 같은 그리스도의 교회들 소속의 학자들은 점차 일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다.

B. 1906년 이후의 분열

1906년에 스톤-캠벨운동(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들과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갈라진 이후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또 다시 1968년에 완전히 두 지류, 즉 그리스도인의 교회(그리스도의 제자들)[Christian Church(Disciples of Christ)]와 그리스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Christian Churches/Churches of Christ)로 갈라졌다. 그밖에도 그리스도의 교회들에서 국제 그리스도의 교회, 한 컵(One Cup)교회와 같은 그룹들이 새로 파생되었고,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에서도 그리스도의 교회 펠로십(Christ's Church Fellowship)이 파생되었다.

1.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내부 분열

첫째,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1만3천여 개이고, 교인들은 1백3십만 명 정도이다. 그 가운데 1천명이상 출석하는 교회가 60개, 5백에서 1천명 사이의 교회가 250개이다. 교회들 가운데 주류에 속하는 그룹이 전체 교회 수의 75 퍼센트, 전체 교인 수의 87퍼센트를 차지한다. 나머지 교회들은 4개의 소그룹으로 나뉘는데, 그 구분은 신학적인 것보다는 실제적 관행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첫 번째 소그룹은 1960년대에 분리된 비제도(Noninstitutional) 교회들로서 2,055개의 교회들을 차지한다. 그들은 교회이외의 모든 선교단체들과 시설 및 특수 사역을 거부하는 극단에 빠짐으로써 주류 그리스도의 교회들로부터 고립되었다. 주류 교회들과 비제도 교회들의 분열은 1950년대의 변화된 사회적 정치적 현실에서 비롯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미국의 주류 사회로부터 어느 정도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에서 분파적이고 종파적인 기질을 보였다. 그렇지만, 1950년대에는 양상이 달라져,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가장 빠른 성장세를 보였고, 도시교회들은 상향지향의 중산층 대학졸업자들로 채워졌다. 그들은 출석하는 교회의 능률과 위상을 높이려고 힘썼다. 수백채의 예배당들이 신축됨으로써 확신에 찬 새 이미지와 자부심이 넘쳐났고, 신구제도들의 진흥, 선교후원, 미디어선교가 이뤄졌다. 반면에 비제도 교회들은 이 전환기에 스톤-캠벨운동에서 가장 갖지 못하고 가장 배우지 못한 계층에 주로 흥미를 끌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들에서 일어난 1963년의 분열은 그들이 처한 사회적 노선에 따라서 이뤄졌다. 두 번째 소그룹은 1,100개의 교회들을 차지하고 있으며, 공동예배이외의 모든 분반활동에 반대하기 때문에 어린이들도 성인들과 함께 공동예배에 참여해야한다. 세 번째 소그룹은 한 컵(One Cup) 교회로서 550개의 교회들이 여기에 속한다. 그들은 주의 만찬 때 사용하는 분잔에 반대한다. 또 일부 교회들은 분반활동에도 반대한다. 네 번째 소그룹에는 130개의 교회들이 속해 있다. 그들은 한 사람이 대부분의 설교를 맡아하는 것에 반대하며, 교회 내 다양한 지도자들이 상호 덕을 세우는 것을 강조한다. 이들 네 개의 소그룹들은 규모면에서 작은 교회들이고, 대부분 다른 그룹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둘째, 국제 그리스도의 교회들(International Churches of Christ)은 그리스도의 교회들에서 1993년에 갈라져 나온 피라미드식 위계체제하에서 담당 훈련파트너에게 절대복종케 하여 제자훈련을 시키는 교회들이다. 국제 그리스도의 교회는 전 세계 주요 도시들에 430개의 교회들과 교인 수 135,000명을 갖고 있다. 플로리다 주 게인스빌(Gainesville)에 소재한 크로스로즈(Crossroads) 그리스도의 교회의 척 루커스(Chuck Lucas)의 캠퍼스사역을 통해 시작되었고, 그의 제자 킵 맥킨(Kip McKean)이 1979년 매사추세츠 주 렉싱턴(Lexington)으로 옮겨가 시작한 보스턴 그리스도의 교회의 이름을 따서 ‘보스턴운동’이라 불린다. 이 운동의 특징은 그리스도의 교회들에 침투해서 교회 내 지도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보스턴으로 가서 재침례를 포함한 ‘개조’(restructuring) 훈련을 받게 하는 것이었다. 주류 그리스도의 교회들과의 차이점들로는 피라미드식 위계구조, 훈련파트너에 대한 절대복종, 여성들을 섬기는 여성들의 사역, 예배 때 악기사용, 타 그룹 불인정 등이다.

셋째, 19세기말의 재침례 논쟁은 그리스도의 교회들 내부에서 있었던 것이었지만, 1906년의 분열뿐만 아니라, 1993년의 내부 분열로까지 이어졌다. 이 논쟁은 1890년대 오스틴 맥게리(Austin McGary)의 「확고한 터전」과 데이비드 립스콤(David Lipscomb)의 「복음 주창자」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써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로부터 갈라서게 하는데 일조하였다. 오스틴 맥게리는 죄 사함을 받는다는 분명한 지식을 갖고 침례를 받아야 옳은 침례라고 주장하였고, 심지어 그리스도의 교회들에서 베푼 침례까지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재침례를 주장하였다. 반면에 립스콤은 말씀대로 순종하고 침례를 받았다면, 침례를 어느 교단에서 받았던 상관하지 않았고, 재침례를 요구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침례교회처럼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 사함(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받는, 즉 교단에 가입하기위한 침례라면, 그것이 비록 침수세례일지라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 립스콤의 입장이었다. 그런데 오스틴 맥게리를 비롯한 재침례파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들에서 행하는 침례를 침례교회와 같은 타 교단에서 행하는 침례와 동일한 것으로 싸잡아 비난하였다.

넷째, 이밖에도 세대주의 천년왕국설, 어린이집, 양로원, 캠퍼스사역, 체육관, 식당설비, 방송선교, 구제와 섬김 센터들에 대한 반대, 교회에서의 여성의 역할, 컨템퍼러리 예배, 성령의 은사 등으로 내부 몸살을 겪어왔다. 일찍이 알렉산더 캠벨과 월터 스코트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성령론에 동료 로버트 리처드슨(의사)은 실망을 금치 못하였고, 그의 베다니대학의 제자 러셀(W. S. Russell)은 성령사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캠벨을 비판하여 비난을 산바가 있었다. 전통적으로 스톤-캠벨운동은 은사적 현상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캘리포니아 주를 시작으로 1960년대를 휩쓴 은사적 현상들은 1960년대 말에 이르러 그리스도의 교회들과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젊은이들에게까지 관심을 갖게 하였다. 1960년대 중반에,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소속 젊은이들은 내슈빌, 휴스턴, 로스앤젤레스, 에빌린기독대학(ACC), 네브래스카의 요크(York)대학, 아칸소 주 서시(Searcy)에 있는 하딩대학 등에서 방언의 은사를 주장하였다. 1970년대 초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가수 팻 분(Pat Boone)은 은사에 관심을 갖게 됐고, 돈 핀토(Don Finto)가 설교했던 내슈빌 소재 벨몬트(Belmont) 그리스도의 교회에 출석하는 다양한 사람들도 팻 분과 마찬가지였다. 이런 움직임들은, 비록 전체 성도들의 약 5퍼센트 정도 밖에 되지 않았지만, 교회 지도자들과 대학관계자들의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고 결국 그들 대부분은 새롭게 부상하고 있던 은사주의자 교회로 떠나갔다. 일부 대학생들은 오랄 로버트대학교(Oral Roberts University)나 리전트대학교(Regent University)로 전학하였다.

2. 그리스인의 교회(그리스도의 제자들)와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의 분열

첫째,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1968년에 진보진영의 교회들이 가칭 ‘그리스도인의 교회(그리스도의 제자들)’이란 이름으로 교단을 재구성하였고, 보수진영의 교회들은 1920년대부터 점진적으로 진보진영의 교회들에서 빠져나와 독립교회의 형태를 취하다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그리스도인의 교회란 교명을 쓰지만, 더러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교회란 교명을 쓰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은 중도를 표방하며 독립파로 불린다.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에서 갈라선 것은 신학적 이유보다는 도농(都農)간 격차, 노예제도문제, 남북전쟁과 같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지리적인 이유가 더 컸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에서 떨어져 나온 것은 크게 세 가지 이유, 즉 성서비평과 같은 진보신학, WCC의 전신이자 교단재구성의 과정으로 여겨진 연방교회협의회 조직 및 열린 회원제 때문이었다. 19세기 말부터 예일대, 시카고대, 하버드대와 같은 곳에서 신학을 전공한 제자들이 현대신학의 내용을 교회와 신학교들에 유입시켜 스톤-캠벨운동에 접목시킴으로써 불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이 일에 크게 공헌한 초기 인물들이 허버트 록우드 윌렛(Herbert Lockwood Willett)과 에드워드 스크라이브너 애임즈(Edward Scribner Ames)이었고, 단체로는 캠벨교육기관과 선교회 조직들이었다. 1907년 버지니아 주 노폭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진보주의자들은 연방교회협의회에 가입하는 문제를 본회의가 아닌 별도의 집회에서 변칙으로 통과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연방교회협의회의 창립교단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는 교단조직도 없고, 보수주의자들의 심한 반발로 인해서 부담금을 수년간 내지 못하였다.

둘째, 그리스도의 제자들 가운데 최초로 성서신학분야의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독일에서 수학한 윌렛은 베다니대학을 나와 예일대에서 천재 구약학자 윌리엄 레이니 하퍼(William Rainey Harper) 밑에서 공부하다가 하퍼가 1891년 시카고대학교의 초대 총장이 되어 전근하자 그도 시카고대학으로 옮겨가 1896년에 그곳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었다. 하퍼의 권유로 윌렛은 시카고대학교 신학대학원(Divinity School)에서 공부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 학생들을 위해 제자들교회신학원(Disciples Divinity House)이 설립되도록 하였다. 윌렛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역사적, 사회과학적 성서해석 방법론을 소개한 인물로서 「그리스도인-복음전도자」(Christian-Evangelist)와 「그리스도인 표준」(Christian Standard)에서 보수주의의 보류였던 J. W. 맥가비(McGarvey)와 악의에 찬 논쟁을 펼쳤다. 보수주의자들은 1909년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서 열린 ‘그리스도의 제자들 100주년’ 대회 프로그램에서 윌렛을 빼려고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고, 오히려 대회기간에 일부 연사들이 대중연설에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부활이 신화라고 주장하여 대회가 혼란에 빠지기도 하였다. 자유주의 신학의 기수역할을 했던 에드워드 스크라이브너 애임즈(Edward Scribner Ames)는 그리스도의 제자들 소속 목회자의 아들로서 드레이크대와 예일대를 거쳐 1895년 시카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철학과 교수, 제자들교회신학원 원장, 유니버시티 제자들 교회를 섬겼다. 존 듀이에 영향을 받은 애임즈는 기독교 신앙에 성서고등비평 및 경험주의와 실용주의의 원리들을 적용시켰고, 열린 회원제 논쟁에 개입되었다.

셋째, 베다니대학의 출신들 가운데 로버트 밀리건(Robert Milligan)과 J. W. 맥가비는 성서의 무오설을 주장하였다. 맥가비는「그리스도인 표준」(Christian Standard)과 자신의 여러 저서들을 통해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켄터키 주 렉싱턴에 소재한 성서대학(College of the Bible)의 학장이었던 맥가비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맥가비 세대가 모두 은퇴하자, 대를 이어 교수가 된 이들은 하버드에서 박사를 취득한 맥가비의 후계자 칼훈 홀(Calhoun Hall) 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성서고등비평에 동조하였다. 맥가비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6년 후인 1917년, 칼훈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성서대학에서 몰아내려고 하였으나 실패에 그쳤고, 오히려 그 자신이 교수직을 사퇴해야만 했다. 그 전에 일어난 다른 사건들과 더불어, 이 사건은 그리스도의 제자들 내부의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오랜 갈등의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이후 칼훈이 겪어야했던 힘겨웠던 삶은 보수주의가 애써 키워온 대학들과 교회들에서 밀려난 긴 여정의 축소판이었다. 1921년 12월에 보수주의자들은 “기독교의 근본 원리들”을 밀어붙이기 위해서 켄터키 주 루이빌에서 “환원 대회”(Restoration Congress)를 소집하여 진보주의자들을 맹렬히 비판하였다. 1922년 1월에는 캘리포니아 주 성서대회에서 R. C. 포스터(Foster)가 스톤-캠벨 운동 계열의 대학교수들이 지역교회들을 기만해서라도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이게끔 만들라고 학생들을 부추겼다고 말함으로써 불화를 키웠고, 동년 4월에는 피츠버그 성서대회에서 칼훈이 성서고등비평을 “파괴적인 비평학”으로 비판함으로써 극한 대립으로 치달았고, 마침내는 그리스도인의 교회(그리스도의 제자들)와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로 나눠지게 만들었다. 이후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제휴된 대학들, 즉 밀리건 대학(Milligan College)을 제외한 모든 인문대학들과 다수의 신학교들이 진보주의자들의 손에 들어갔다. 보수주의자들은 현대신학에 편중된 이들 대학들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되어 대안으로 성서대학(Bible College)들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스톤-캠벨 대사전에 성서대학으로 소개된 대부분의 대학들은 2000년대에 이르러 더 넓은 세계로 뻗어나갈 목적으로 더 이상 성서대학이 아닌 기독대학(Christian College) 혹은 기독대학교(Christian University)로 정관을 변경하였다.

넷째, 열린 회원제(Open Membership)란 약식세례를 받은 신자들을 지역 교회에서 회원 자격으로 받아드리는 제도를 말한다. 스톤-캠벨운동에서 약식세례자의 그리스도인 지위는 잠정적이었거나 거부되었거나 수용되었다. 캠벨과 스톤과 에레트는 잠정적이었다. 캠벨은 약식세례자들에게 “경건한 미침수 그리스도인”이란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루넨버그 서신”(Lunenburg Letter, 1837) 논쟁을 촉발시켰고, 발톤 스톤은 침례를 수용할 때까지 포용하였으며, 에레트는 “오류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란 지위를 부여하였다. 이 노선에 선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은 “우리만이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인들일 뿐이다”(We are not only Christians, but Christians only!)는 표어를 갖게 되었다. 한편 모세스 라드를 필두로 그리스도의 교회들에서는 침수세례를 받지 않은 자들을 그리스도인들로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을 포용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과는 교제를 단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 양 지류들에서 보수주의자들은 열린 회원제를 철저히 배제시켰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 가운데 윌렛과 애임즈를 포함한 진보주의자들은 열린 회원제를 적극 수용함으로써 보수주의자들과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켰다. 1870년대 이전까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배타적이고 고립적이며 승리주의적인 선교정책들을 써왔다. 그러나 1874년 ‘그리스도인 여성 선교회’(CWBM)와 1875년 ‘해외 그리스도인 선교회’(FCMS)가 설립된 이후로는 에큐메니컬운동에로까지 활동영역을 넓혀나갔다. 이들 선교단체들의 열린 회원제 수용은 1909년에 개최된 100주년대회 때 진보와 보수가 분열된 양상을 표출하였다. 1920년에는 중국 체류 선교사들이 연합 그리스도인 선교사 협회 집행 위원회(Executive Committee of UCMS)에 열린 회원제를 시행할 수 있도록 허용해 줄 것을 요청하자 위원회가 비틀거렸다. 이 문제가 「그리스도인 표준」(Christian Standard)에 공개되자 심각한 갈등이 뒤따랐다. 보수주의자들이 이 문제와 연관된 선교사들의 소환을 1925년 오클라호마시티 대회와 1926년 테네시 주 멤피스 대회에서 연이어 요구했지만, 선교회의 임원들이 이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중앙집권적인 조직들은 그것들을 지탱시키는 구성원들의 조절기능을 넘어서버렸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확신이 널리 확산되었고, 그것은 좌절감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결국 많은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공식 선교기관이자 1919년에 통합된 연합 그리스도인 선교사 협회(UCMS)에 대한 후원을 중단하였다. 이 과정에서 UCMS로부터 독립교회들이 소송을 당하였지만, 대부분 승소하여 개교회의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독립교회들은 UCMS을 대체할 선교방법을 찾다가, 이미 UCMS와는 별개로 독립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몇몇 선교사들을 발견하고 이들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UCMS에서 후원을 받던 일부 선교사들도 탈퇴하고 독립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수십 년간 이런 교회들의 네트워크를 특징짓는 “독립”(Independent)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다섯째, 열린 회원제의 수용이 보수주의자들의 반발을 촉발시킨 또 다른 사례는 1939년에 일본에 파송된 선교사, 제시 트라웃(Jessie Trout)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녀는 기사를 써서 UCMS에 보냈다. UCMS는 그 기사에 깊이 감명을 받아 인쇄하여 전국의 모든 그리스도인 여성 선교회에 보내어 그들의 월 집회 때 소개하도록 하였다. 그녀가 쓴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학식 있는 비평가들이 해외선교에 대해서 평가한 주된 비평의 한 가지가 선교사들이 자기들이 섬기는 민족의 종교들과 신앙들을 뭉개버린 것이다. 다행하게도 다수의 오늘날의 선교사들은 동양종교들의 가치를 인정해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더 이상 그들의 문제들을 현재의 관점보다 우위에서 접근하지 않고, 열린 마음과 심정으로 한다. ‘여러분이 놓은 우수한 토대에서 수행하여 완벽하고 완전한 하나의 종교를 건설하자’고 그들은 말한다.” 그녀는 또 유교와 불교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분명코 이들 종교들에서 발견되는 것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거들이었다. 오늘의 기독교는, 마찬가지로 분명코, 동양인 선지자들의 평범한 진리들과 가르침들을 발견할 수 있다. ‘만일 변화산체험이 동양에서 일어난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산에서 부처와 공자와 함께 말씀을 나누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고 나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현대선교들은 기독교가 비기독교 종교들과 손을 맞잡을 수 있고 또 맞잡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불편한 상황은 제시 트라웃이 1949년 10월에 UCMS의 부회장에 선출되는 데까지 발전되었다. 이 사실을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 신문은 이렇게 보도하였다. “인디애나폴리스의 미스 제시 메이 트라웃(Miss Jessie Mae Trout)은 그리스도의 제자들 국제대회(International Convention of the Disciples of Christ) 총회에서 어제 UCMS의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미스 트라웃이 뽑힌 직위는 제자들 단체에서 가장 높은 것들 중의 한 자리이다.”

여섯째, 보수주의자들은 UCMS와 같은 중앙집권적인 조직들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그 대안으로 교회나 개인이 원하는 선교사에게 직접 기부금을 전달하는 방식의 ‘직접 후원 선교’(Direct Support Missions)를 채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W. K. 아즈빌(Azbill, 1892)과 W. C. 커닝햄(Cunningham, 1901)은 이 직접 후원 선교 방식으로 일본에서 독립선교사들로 활동하였다. 한편 신시내티의 사업가 시드니 클라크(Sidney Clarke)가 남긴 재산이 1919년부터 이들 독립파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의 교회개척과 발전에 쓰이기 시작하였고, 1921년까지 30개의 교회들이 개척되었으며, 200여개의 기존 교회들이 강화되었다. 클라크의 유증은 교회와 개인으로부터 기부금을 받기 위해서 1922년에 법인 ‘클라크 기금’이 되었다가 1925년에 그리스도인 환원 협회(Christian Restoration Association, CRA)로 발전되었다. 이때 이미 16개의 독립 선교회들이 가입되었다. 독립 선교사들이었던 필리핀의 레슬리 울프(Leslie Wolfe), 중국, 티베트, 미얀마 접경지의 러셀 모스(J. Russell Morse), 멕시코의 엔리케 웨스트럽(Enrique Westrup), 남아프리카의 C. B. 티투스(Titus), 일본 도쿄의 M. B. 매든(Madden)을 협력 지원하면서 해외 선교에 집중하였다. 신시내티기독대학교와 신학대학원도 1924년에 이 기관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그리스도인 환원 협회는 보수주의 교회들의 성장의 모판이 된 ‘그리스도인 봉사 캠프 운동’(Christian Service Camp Movement, 1927)을 지원하여 출범한지 2년 만에 14개 주에 14개의 캠프장이 들어서게 하여 매년 5백여 명의 젊은이들이 목회사역자로 결신하도록 동기를 부여하였다. 이처럼 ‘직접 후원 선교’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서 탈퇴하여 독립교회가 된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과 그리스도의 교회들을 결집하는데 기여하였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은 이 직접 후원 선교를 통해서 70개 이상의 나라에 1,200명이 넘는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있고, 미국 전역에 수많은 가정선교, 선교단체들, 교육기관들을 후원하고 있다.

일곱째, 보수주의자들은 1927년에 인디애나 주 인디애나폴리스에서 ‘북미 그리스도인 대회’(North American Christian Convention, NACC)를 개최하였고, 1945년에 ‘선교 봉사’(Mission Services), 1948년에 ‘전국 선교사 대회’(National Missionary Convention)를 개최하였다. 이들 조직들에는 독립교회들을 통제할만한 그 어떤 권한이나 결정권이 없으며, 대회형식으로 치러지는 총회모임에서는 그 어떤 결의안도 상정되거나 채택하지 않는다. 보수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 국제대회’의 경향들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1950년대까지 간헐적으로 대회를 치르던 NACC를 자신들의 집결지로 삼았다. 독립파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서 나와 36개의 성서대학을 세웠고, 5천5백여 개의 교회에 출석교인 1백2십만 명을 상회하는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로 성장하였다.

여덟째, 보수주의자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세계 교회 협의회’(전 ‘연방 교회 협의회’)의 창립회원교일 뿐 아니라, 선도적인 교단이 되었다. 1959-66년 ‘내부 일치 협의’(Consultations on Internal Unity), 1960년 ‘교단 재구성 위원회’(Commission on Brotherhood Restructure), 1962년 ‘교회 일치 협의’(Consultation on Church Unity/COCU)에 가입, 1963년 ‘학자들의 패널’ 보고서 발간(Publication of the Panel of Scholars Reports) 등을 통해서 꾸준히 교단화를 추진하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1968년에 “그리스도인의 교회(그리스도의 제자들)를 위한 가(假)계획”(Provisional Design)을 채택함으로써 결국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과는 별도로 개 교회들의 대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교단이 되었다. 따라서 UCMS의 책임들은 1973년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해외 사역 분과’(DOM)와 ‘국내 사역 분과’(DHM)로 재편되었고, 1981년에 “일반 정책과 원리들”(GPP)이 DOM의 재단에 의해 승인되었다. 1982년에 WCC산하 ‘신앙과 직제 위원회’가 만든 교회일치문서인 「세례, 성찬, 사역」(BEM)을 그대로 수용하여 유아세례자나 약식세례자들에게 재침례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1996년 이후부터는 DOM과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United Church of Christ)의 ‘세계 사역 연합교회 이사회’(UCBWM)를 결합한 공동 글로벌 사역국(Common Global Ministries Board, CGMB)을 통하여 유아세례 전통을 고수하는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와 많은 일을 공동으로 수행하고 있으며 통합까지 추진하고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제자들 가운데 주류 회중들은 여전히 침수세례를 시행하고 있으나, 미침수 그리스도인들도 자신들의 교회의 완전한 회원으로 받아드리고 있다.

3.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에서 파생된 그룹

첫째, 그리스도의 교회들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교회(그리스도의 제자들)와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에서도 성령의 은사들에 관한 운동이 일어났다. 필자는 1980년대 전반기에 성령운동을 하는 펠로쉽 그리스도인의 교회(Fellowship Christian Churches)에 몇 차례 출석한 적이 있었다. 다른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과 달리 손을 높이 들고 통성기도를 하였고, 예배당 여러 곳에 상이 놓여있었으며, 그곳에 떡과 포도주가 담긴 잔이 한 개씩 놓여 있었다. 전체 교인이 한 컵을 쓴 것은 아니지만, 7-8명 정도가 한 컵으로 포도주를 돌려 마시는 주의 만찬을 시행하였던 것이다. 성도들은 상 주변에 둘러 앉아 각자 기도한 후에 참여하였다. 이들 교회들이 1988년에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에서 조직된 ‘그리스도의 교회 친교회’(Christ's Church Fellowship, CCF)의 창립교회들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CCF의 창립 멤버 대부분이 스톤-캠벨운동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링컨기독대학, 밀리건대학, 산호세기독대학 (San Jose Christian)의 일부 학생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본부는 신시내티에 있으며, 링컨기독대학원(LCS)을 졸업한 톰 스미스(Tom Smith)가 이끌었다. CCF는 치유와 다른 은사들을 강조하며, 「보혜사」(Paraclete)라는 정기간행물을 발행하였다.

둘째, CCF는 결신자들에게 구원의 필수적인 요건으로 간주하지는 않았지만, 침례를 시행하고 매주일 주의 만찬을 행하는 등 스톤-캠벨운동의 관행들과 신념들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론적인 은사와 권위를 강조하면서, 자신들을 소위 성령의 제3의 물결에 속한 집단으로 구분하였다. CCF는 또 에베소서 4장 11절에 기록된 사도, 예언자, 전도자, 장로(목사), 교사의 다섯 가지 직분이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원래대로 수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단의 행정은 모든 지 교회 대표들이 반년마다 모이는 장로 대회(General Presbytery)에서 선출된 지도부(leadership presbytery)에 의해 주도된다. 이 지도부는 사도들, 장로(목사)들, 예언자들, 장로들로 구성된다. 이 교단의 조직 체계에서는 사도가 특정 지역에서 회중들을 감독하는 영적인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다. 행정적으로, 지도부는 회장을 선출하게끔 되어 있고, 선출된 회장은 교단 전체의 행정과 연락 사무를 총괄한다. 미국과 해외에 CCF 교회가 약 100여개 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나오는 말

스톤-캠벨운동은 꾸준한 분열에도 불구하고 미국사회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종교집단이 되었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스톤-캠벨운동은 20세기가 되는 1900년에 미국의 인구증가율의 두 배나 더 빠르게 성장하여 한 해 동안 무려 1천 개 교회를 늘린 경험을 갖고 있다. 분열이 없었다면, 50년 후인 20세기 중반까지 이 운동은 기하급수적으로 퍼져 미국에서의 교인수가 4천에서 6천만 명에 도달했을 것이라고 한다. 이런 점에서 20세기 초반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분열, 20세기 초중반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에서 독립파인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의 분열은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조직은 뭉쳤다가 흩어지고, 흩어졌다가 뭉치면서 발전한다. 흥망성쇠에서 흥성(興盛)은 뭉칠 때이고, 망쇠(亡衰)는 흩어질 때이다. 그렇다고 조직의 분열이 반드시 망쇠의 길인 것은 아니다. 필요한 분열은 분가(分家)와 같아서 흥성으로 이어지는 성장통에 해당된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것이 분열이지만, 좋은 분열은 자식이 분가하는 것과 같아서 생산적이고 발전적이다. 따라서 스톤-캠벨운동의 세 주류들은 분가와 같은 좋은 분열이 되기 위해서 꾸준히 연합에 힘써왔다. 1930년에 출범한 ‘그리스도의 교회들 세계대회’(The World Convention of Churches of Christ)와 1999년에 시작된 ‘스톤-캠벨 대화’(Stone-Campbell dialogue)가 대표적이다.

이 연합 모임들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세 지류가 일치를 이루는 데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연합하여 스톤-캠벨의 유산을 공유하고 상호협력하며 격려하는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상호 비방을 멈추고 이해와 협력으로 일관해야 한다. 1999년에 출범한 스톤-캠벨 대화(Stone-Campbell Dialogue)에서 모임의 성격을 “진솔한 대화를 통해서 스톤-캠벨 운동의 세 지류 간에 신뢰와 관계를 발전시키려는 노력”이라고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세 지류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공통점과 차이점을 토론하며,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형제애를 키우려는 것이다. 한국교회들도 이런 공식적인 모임을 갖는다면 상호 신뢰와 관계 발전에 도움이 클 것이다.

참고서적

The Encyclopedia of the Stone-Campbell Movement. Edited by Douglas A. Foster, Paul M. Blowers, Anthony L. Dunnavant, & D. Newell Williams. Grand Rapids, Michigan/ Cambridge, U.K.: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04.

Bream, Harvey C. “The Church in the Bible and in History, Restoring New Testament Church.” 이 자료는 신시내티 크리스천 대학교 및 신학대학원의 총장을 역임했던 하비 C. 브림 2세(Harvey C. Bream, Jr.)가 1989년 9월 10일부터 13일까지 총 4회에 걸쳐서 플로리다 주 올랜도에 위치한 사우스이스트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행한 환원운동사 강연 내용. 음성파일과 녹취록은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http://kcc.info)에서 듣고 읽을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