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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11-14 23:04
초기 유대교의 학자들과 탈무드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10,712  
1. 요하난 벤 자카이(Johanan ben Zakkai)

랍비 요하난은 68-70년에 발생한 유대전쟁 당시에 극적으로 예루살렘을 탈출한 후 욥바 근교에 있는 야브네(Jabne 혹은 Jamnia)에 학교를 세우고 유대주의를 발전시킨 위대한 학자이다. 요하난은 온건파로써 유대전쟁 당시에 유대민족이 영원히 살아남을 방법을 골똘히 생각하던 끝에 로마군의 사령관을 만나기로 결심하고, 꾀병을 앓아 위독설과 사망설을 퍼뜨렸다. 유대인들은 시체를 보거나 만지지 않았음으로 요하난은 이 점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요하난을 수상하게 여기고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았던 강경파 열심당원들은 그의 시신을 향해서 칼을 찌르겠다고 했지만, 제자들이 랍비의 시신을 모독해서는 안된다고 그들을 제지시켰다. 또 로마군의 포위망을 벗어날 때에는 제자들이, "만약 로마의 황제가 죽었다고 한다면, 당신은 황제의 관에 칼을 찌르겠는가? 우리는 전혀 무장도 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하여 마침내 사선을 뚫고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요하난은 베스파시안 장군을 만나 그가 차기 로마의 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자신이 세우게 될 조그만 학교만은 파괴하지 말고 보존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후 예루살렘과 성전은 훼파되고 말았지만, 유대교의 전통만은 요하난과 그와 함께 한 10여명의 랍비들의 교육 때문에 보존될 수 있었다.

2. 랍비 아키바(Aqiba)

아키바는 나이 40세가 될 때까지 문맹이었으나 나중에 유대주의 조직가로써 최초의 탈무드 편집자가 되었다. 일점 일획 숭배자로서 132-135년에 발생한 유대전쟁 당시에 순교하였다. 이 전쟁은 로마 황제 하드리안이 예루살렘에 신 로마도시(Aelia Capitolina)를 설립하고자 하였을 때, 바르 코크바(Bar Kochba)1)를 중심으로 열심당원들이 반발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의 패배로 말미암아 팔레스틴에서의 종교적 민족주의는 사라지게 되었고, 예루살렘은 신로마시가 되고 말았다. 이후 하드리안은 할례를 금하고, 예루살렘을 재건하여 일리아(Aelia)로 개명하였으며, 성전 터에 주피터 신전을 건축하고 유대인 출입을 사형으로 금하였다. 4세기경부터는 느부갇네살에 의해서 파괴된 솔로몬성전 멸망 기념일(주전 586년 압월 9일)2)에 서쪽에 남아 있는 성전 터(통곡의 벽)에서 곡할 수 있도록 일년에 한 차례 출입이 허락되었다.3) 이 날은 공교롭게도 헤롯성전(주후 70년)이 파괴된 날과 일치된다. 오늘날도 그날이 돌아오면 유대인들은 하루종일 금식하고, 구약성경 '예레미야의 애가서'를 읽으면서 그 날의 역사적 의미를 반추한다.

3. 랍비 유다(Juda the Holy)

유다는 그의 아버지 티베리아스를 계승하여(166년) 구전을 수집하여 책에 기록하였는데, 이를 미쉬나(Mishna)라 부른다. 미쉬나는 여섯 가지 주제들 즉 농사법(Zeraim), 안식일 및 절기법(Moed), 결혼 및 이혼법(Nashim), 일반 형법(Nezikin), 희생제물법(Kodashim), 레위인의 성결법(Tohovoth)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미쉬나를 주석한 책을 가마라(Gamara)라 부른다. 결국 탈무드는 미쉬나와 가마라(혹은 게마라)가 합하여 된 것이다. 유다 랍비는 '성자', '왕자', '우리의 선생'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큼 존경을 받았다. 그는 200년에 죽었다.

4. 탈무드(Talmud)

미쉬나를 둘러싼 방대한 논의나 토론을 기록한 것이 바로 탈무드이다. 이 토론은 반드시 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하라카라고 불리는 논의이고, 다른 하나는 아가다라고 불리는 논의이다. 하라카는 유대인의 생활 양식을 말한 것으로써 인간의 모든 행동을 거룩한 것으로 승화시키려 한 것이다. 제사, 건강, 예술, 식사, 회화, 말, 대인관계 등이 이 하라카에 속한다. 아가다는 탈무드의 3분의 1일을 차지한다. 이것은 철학, 신학, 역사, 도덕, 시, 속담, 성서 해설, 과학, 의학, 수학, 천문학, 심리학, 형이상학 등 인간이 가진 모든 지혜를 포함한 것이다.

탈무드란 우리말로 '위대한 연구'라는 뜻으로 5천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유대민족을 버텨 오게 한 생활 규범이다. 이 책은 구약성서가 씌어진 뒤 유대교의 법률, 전통적 습관, 축제, 민간전승, 해설 등을 모은 것으로 성서 다음으로 유대인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왔다. 이 책은 유대인의 종교적 생활만이 아니라 법 규정이나 판례법까지 포함하고 있으며, 당시 유대민족의 사상이나 생활양식은 물론이고 기독교와의 관계를 아는데도 귀중한 자료가 되는 통권 20권, 12,000쪽, 250만 단어, 무게 75킬로그램이나 되는 방대한 양이다. 이 책은 기원전 500년에서 기원후 500년까지 구전(口傳)되어 온 내용을 10년이란 세월에 걸쳐서 2천여 명의 학자가 편찬한 것이다. 이것은 5천년 역사를 가진 유대민족의 지혜이며 지식의 창고라 할 수 있다. 탈무드가 글로 씌어지기 전에는 구전으로 교사들에 의해서 학생들에게 전해졌다. 그 때문에 내용의 전개는 대부분 질문과 대답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탈무드에는 메소포타미아에서 나온 바벨론 탈무드와 팔레스틴에서 나온 예루살렘 탈무드가 있다. 이 중에 바벨론 탈무드가 더 중요시되어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그래서 탈무드하면 일반적으로 바벨론 탈무드를 가리킨다. 탈무드는 독자가 자신의 경험을 기록할 수 있는 여백을 주기 위해서 어느 권(卷)을 펴보아도 반드시 2쪽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4)

바벨론 탈무드는 랍비 애시(Ashi)에 의해서 472년에 바벨론에서 완성되었다. 주후 200년부터 500년까지 유대인들의 중심지는 바벨론이었다. 이 곳에서 중요한 유대교 문헌들이 만들어졌다. 이들 가운데서 가장 방대한 것이 바벨론 탈무드이다.5) 이는 사절지 크기로 2,947쪽이나 되는 방대한 양이다. 예루살렘 탈무드는 랍비 아비나(Abina)에 의해서 490년에 예루살렘에서 완성되었다.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 된 탈무드는 1334년에 만들어진 필사본이다. 탈무드가 처음 인쇄 출판된 것은 1520년 기독교인 인쇄업자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오늘날 남아 있는 탈무드는 완전한 것이 못된다. 그 이유는 기독교에 의해서 많은 양의 탈무드가 압수되어 소각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가장 심했던 때가 1500년대였다.6)

각주

1)바르 코크바는 랍비 아키바의 도움을 받아 유대전쟁을 주도한 군사 지도자였으며, 아키바를 포함한 유대인들이 그를 그처럼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아라고 생각했었다. {유대인을 알고 싶다} 198쪽.

2)압월(ab)은 우리가 쓰는 양력 7~8월에 해당된다.

3)R. H. Pfeiffer, {신약시대 역사와 외경개론}(한국기독교문화원), 36-37쪽.

4)마빈 토케이어, {탈무드} 지경자 역(홍신문화사, 1996), 10-22쪽.

5)데이빗 C. 그로스, {유대인을 알고 싶다} 장병길 옮김(도서출판 살렘, 1997), 200쪽.

6)마빈 토케이어, {탈무드} 148-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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