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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6-25 01:48
최제우와 동학창도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5,303  
{천도교백년약사}(天道敎百年略史) 제 1편 창도시대(創道時代)에 따르면, 천도교는 1860년 최제우(崔濟愚)에 의해서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뜻), 후천개벽(後天開闢: 인간중심의 문화개벽을 말함), 보국안민(輔國安民: 외세를 막자는 민족주의를 말함), 동귀일체(同歸一體: 사람과 한울이 하나임을 깨닫고 참된 하나의 진리로 돌아가 모든 사람이 하나로 귀일 하자는 뜻) 사상을 바탕으로 한국에서 창도(創道)되었다. 이 시대의 조선은 말기현상을 예고하던 시기였다. 이태조 등극이후 숭유척불정책에 의하여 불교는 산중으로 쫓겨갔고, 유교는 초창기인 약 150년간 건국에 공헌한 바도 없지 않았으나 선조 때로부터 약 350년간은 공론과 허례에 치우치게 되어 실제로 민족문화에 큰 공헌이 없었으며 더구나 시대의 추이에 맞는 민심의 향도와 새로운 지도원리를 갖출만한 능력을 갖지 못하였다.


조선왕조 제 14대인 선조(1552-1608) 당시에는 서울시내 동쪽에 사는 김효원과 서쪽에 사는 심의겸의 갈등으로 동인 서인이란 파당이 생기게 되었고, 이것이 그후 남인 북인 노론 소론의 당파로 갈리우면서 수백년 동안 이른바 사색당쟁을 일삼게 되었다. 이는 세습으로 인해서 증가된 양반들이 한정된 관직과 토지를 놓고 양반사이에 벌린 투쟁의 역사였다. 이들은 자기가 소속해 있던 당파의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서로 왕실에 등을 대고 골육상잔의 비극을 서슴지 않았는데 이를 소위 사화라고 한다. 이들은 또한 중인 평민 천민들로부터 온갖 착취를 자행하였다. 정국이 이러하니 민생은 반상체제에 대해 심한 불신을 갖게 되었고, 집권층에 반항하여 각처에서 봉기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을(1811년) 비롯하여 경상도 진주의 민란(1862년)과 예천민란, 그리고 전라도의 익산, 함평, 공양 그밖에 제주도 민란에 이어 경기도의 수원, 인천, 개성, 강원도의 고성, 철원, 평안도의 성천 강계, 중화, 덕천, 함경도의 함흥, 회령 등 전국 각 지방에서 거의 쉴새없이 민요 민란이 일어났다.


한편 민간에 유행하는 토정비결 등 참위설(讖緯說/陰陽 五行說에 의하여 인간 사회의 길흉 화복을 예언하던 학설)을 비롯하여 이른바 식자층에 속한 인사들의 정감록 숭상으로 말미암아 삼재팔난(三災八難/난리, 병, 기근을 작은 삼재, 화재, 수재, 풍재를 큰 삼재라 한다. 그리고 배고픔, 추위, 더위, 불, 물, 兵亂, 목마름, 칼의 여덟 가지 어려움을 팔 난이라 한다)을 면해 보려는 무리가 늘고 이에 좇아 남천북거(南遷北去)의 십승지지(十勝之地/術家가 말하는 기근, 兵火를 당할 근심이 없다는 열 군데 땅)를 찾는 자들도 또한 끊이지 않았으며 진인(眞人)이 출어해도중(出於海島中)이라는 비결을 믿고 섬 속에서 이인(異人)이 나오기를 기대하는가 하면 혹은 궁을촌(弓乙村)을 찾아다니는 예도 없지 않았다 한다. 이에 무당 판수가 판을 칠 뿐아니라, 각종 재난과 악역으로 민심은 말이 아니 였다고 한다. 이러한 때에 신천신지와 인간해방과 평등사상을 가르치는 서학 또는 천주학이 인조 9년(1631년) 사신 정두원이 북경에서 구약성서를 가지고 온 이래로 조선 유학자들에게 소개되었고, 정조 7년(1783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광암 이 벽 선생이 포교를 시작하여 중인 평민 천민으로 이어지던 신앙운동이 사학(邪學)으로 규정되어 심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한편 순조 32년(1832년) 6월에는 영국 상선이 황해도 몽금포 앞바다에 나타나 교역을 희망해온 이래로 조선의 쇄국정책에도 불구하고 병인양요(丙寅洋擾/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으로 고종 3년인 1866년에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한 사건)와 신미양요(辛未洋擾/고종 8년인 1871년에 미국 군함 5척이 통상을 강요하고자 강화도를 침입한 사건)를 치른 후에는 타의에 의해서 병자수호조약(1876년)이 체결되었고,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이 때 중국에서는 아편전쟁을 일으킨 영국에 침공을 받아 패배하였고(1840년), 남경조약(1842년)의 체결로 5개항을 잃게 되었다. 이후 1851년에는 만주족정권인 청제국에 반항하는 태평천국난까지 일어나 중국은 내요외란으로 혼란을 거듭하였다. 태평천국난은 원시 기독교의 평등사상을 채용한 홍수전이 농민군을 조직하여 관군을 격파하여 중요도시를 점령하였고, 1853년에는 백만에 달하는 농민군을 이끌고 남경을 점령하였으며, 토지의 공동소유와 공동경작을 취지로 한 천조전무제도(天朝田畝制度)를 선포하였다. 이 때 이홍장 증국번(曾國藩) 등이 지휘하는 지주들의 군대와 외국 의용군의 공격을 받게 됨으로서 1864년에 패망하게 되었다. 1860년에는 영불연합군이 천진과 북경을 함락하게 되었고 9개 항을 개방하는 북경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로서 중국은 서구열강의 상품시장이 되었으며, 1900년대에 발생한 외국인 배척운동으로 의화단 사건이 있었으나 이미 때늦은 반발이 되고 말았다. 러시아도 태평천국난을 틈타 청국을 협박하여 흑룡강 이북을 탈취하는 한편 여러 면에서 이득을 챙겼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외세를 막는 방편으로 서교를 배척하며 쇄국정책을 펴 나갔으나 보다 적극적인 대비책을 세우지 못하였고 자각적인 자위능력을 갖추지 못하였다.


천도교를 창도한 시조는 수운대신사(포덕 49년 4월 부구총회에서 大神師로 존칭키로 결의함) 최제우이다. 그는 1824년 10월 28일 경주 가정리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근암공 최 옥은 정씨 부인과 서씨 부인을 맞았으나 모두 사별하였고, 아우 규(珪)의 아들 제원(濟寃)으로 양자를 삼았다. 근암공이 63세 되던 해 1월 15일에 대추나무 아래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던 한 씨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낳은 자식이 제선(濟宣)이였고, 후에 제우(濟愚)로 개명하였다. 한 씨 부인은 과부로서 20살에 홀로 되어 10년간 친정에서 수절을 하던 중, 이 날 새벽에 홀연히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해와 달이 품안에 안기고 이상한 기운이 몸에 둘러싸이면서 부지중에 가정리 대추나무 아래에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최제우는 13세에 결혼하여 부인을 맞게 되고 14세에 여행길에 올라 여러 명산을 탐방하게 되었다. 그는 또 유가서(儒家書)와 불서(佛書)를 연구하였고, 도가(道家)의 신선술(神仙術)과 천주교의 서학을 연구하여 보았지만 득도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20세에 화재로 가산과 부친의 유물을 잃고 제세안민의 구도생활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10여년의 유리 방황하던 고행 길에서 돌아와 나이 31세가 되어서 정착에 뜻을 두게 되었다. 정착후 다음 해인 32세 때인 1855년 3월 3일 홀로 앉아 이치를 생각하고 있을 때에 이상한 도인이 나타나 소위 을묘천서(乙卯天書)라는 책을 받게 되어 읽게 되고 49일간의 기도에 들어갔다. 이 때부터 그에게 신기한 환상이나 신유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 도를 깨우치지 못한 점을 안타까워하면서 처자를 데리고 고향인 경주로 돌아와 구미산아래 용담정에 은거하면서 1859년 10월에 '불출산외'(不出山外)의 네 글자를 문 위에 적어놓고 이름도 제선에서 제우로 고치고 자도 도언에서 성묵으로 고친 후 본격적으로 구도에 힘썼다 한다. 그 다음 해인 1860년 4월 5일 나이 37세 되던 해에 입신의 경지에 들어가게 되었고, 근 1여년간에 걸친 소위 천사문답(天師問答)을 갖게 되었다. 그 중에 세 가지 시험이라는 것이 있는 데 다음과 같다. 한울님이 가라사대, "네가 지금 그릇된 세상을 건지고 도탄에 빠진 창생을 살리고자 하니 그 마음은 아름다우나 그 뜻을 이루고자하면 반드시 가져야 할 것이 있으니, 그러므로 내 너에게 백의상제(白衣宰相)를 주어 금력과 권력으로 천하를 다스리게 하리라." 최제우는 대답하기를, "부귀는 본래 제 소원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돈과 권세로서 망하게 되었거늘 다시 부귀로서 세상을 건지라 하시니 이것은 사나운 것을 바꾸는 격이 될 것이라, 저의 뜻은 이것을 원치 않습니다." 한울님이 가라사대, "부귀가 네 소원이 아니라면 권모술수로서 세상을 건지라." 최제우는 대답하기를, "이 세상은 권모와 간교로서 망하였는데 어찌 다시 적은 꾀로서 백성을 속여 일시의 평안을 도모하겠습니까? 이것도 원치 않습니다." 한울님은 다시 "그렇다면 나에게 조화의 술법이 있으니 이것으로서 세상을 건지라" 라고 하자 최제우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한다. "이것은 이치에 어기는 일이라. 만물이 다 무위이화(無爲而化)의 이치로 자라고 사는데 어찌 이치에 어기는 술법으로서 세상을 건지겠습니까? 이것도 소원이 아닙니다." 이 일 후로 대신사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한울님이 또한 그릇된 도로서 가르치시니 내 이제부터는 다시 한울님의 명교를 듣지 않으리라"고 결심하고 11일간의 단식에 들어가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의 경지에 들어가 대도 하였다 한다.


대신사가 만든 주문에는 선생주문과 제자주문이 있는 데 선생주문에는 강령주문(降靈呪文)과 본주문이 있다. 강령주문=至氣今至四月來; 본주문=侍天主令我長生 無窮無窮 萬事知. 또 제자주문에는 초학주문과 강령주문과 본주문으로 나뉜다. 초학주문=爲天主 顧我情 永世不忘 萬事知; 강령주문=至氣今至 願爲大降; 본주문=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대신사 최제우는 신유포덕(辛酉布德) 즉 1861년 6월 2일부터 본격적으로 전도에 힘을 쏟았다. 그가 제일 먼저한 일은 인가귀도(引家歸道/가정포덕)하는 일이었고, 도(道)를 가화(家和)로서 근본을 삼고 도의 통불통(通不通)이 부인수도에 있다고 강조하면서 부인에게 도를 권하였다. 그는 또 그가 데리고 있던 여비 두 사람을 해방하여 한 사람은 며느리로 또 한 사람은 양딸로 삼았다 한다. 그는 책 읽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고, 무악(無惡), 무탐(無貪), 무음(無淫)으로 심잠을 삼았다 한다.


이 도에 입도 한 사람으로서 무식한 사람이 왕휘지와 같은 글씨를 쓰는 이적도 있었고, 시를 읊으면 귀신도 울게 할 명작도 있었고, 노둔하던 사람이 갑자기 총명하여지는 수도 있었고, 용모에 화기가 돌아 탈웅하는 사람도 있었고, 오랜 된 병이 스스로 낫는 사람도 있었다 한다. 이 뿐만 아니라, 대신사 최제우는 중병에 걸린 사람을 두어 번 손으로 어루만짐으로서 고치는가 하면, 온갖 희귀한 이적을 일으킨 것으로 적고 있다. 또한 그의 제자 최시형도 상당한 이적과 기적을 일으킨 것으로 적고 있다. 이와 같이 신통력과 영적(靈蹟)이 도처에서 일어나자 그를 추종하는 자들은 그를 "신선이 구름을 타고 해상에 소요하는 듯" 우러러보았다 한다.


그는 스스로의 죽음을 예견하였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전날 밤에 한 꿈을 얻으니, 태양살기가 내 왼쪽 다리에 부딪쳐 사람 人자를 이루더니 꿈을 깬 후 이후에도 오히려 붉은 흔적이 있어 사흘 동안을 없어지지 않았으니 내 이로서 화 장차 이를 것을 아노라." 제자들이 이 말을 듣고 도피할 것을 권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태연히 말하기를, "도 나로부터 나왔으니 내 스스로 당할 것이니라. 어찌 몸을 피하여 누를 제군에게 미치게 하겠느냐?"고하였다 한다. 그는 또 사혼(死魂)을 버리고 생혼(生魂)을 일으켜야 한다고 하였고, 성령(性靈)과 도덕(道德)을 믿었다.


최제우는 검가(劒歌)를 짓고 검무(劒舞)를 추곤 하였는 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죽음을 자초하게 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를 심문한 서헌정(徐憲渟)은 "네 도로서 세상을 가르친다 하면서 목검을 만들어 스스로 사용하고 또 제자에게 가르쳤으니 그것은 무슨 의미로 한 것이냐?"고하였고, 대신사는 대답하기를, "도를 닦는 것은 천심을 지키고 정기를 養하는 것이라. 그러므로 내 사람의 정기를 養하기 위하여 목검을 만들어 검무를 추게 한 것이요 다른 뜻이 없노라"고하였다 한다. 또한 서헌정은 크게 꾸짖으며, "검은 무인의 행사요 또 흉기이거늘 이 태평성세에 일개 백성으로 검가와 검술을 사람에게 가르쳤으니 네 말로 천도를 세상에 편다는 것은 세상을 속임이요 그 실인즉 도당을 모아 반역을 도모하는 뜻이 명백한 것을 조정에서 이미 알았으니 속히 자백하여 양심을 속이지 말라"고 다그쳤다. 심문의 핵심은 검무와 검가에 있었고 조정에서 서헌정에게 심문하라는 요점도 역시 '劒' 一字에 있었다 한다[대신사의 체포와 심문에 관한 관변기록은 日省錄(발해 12월 21일자; 갑자 2월 29일자), 승정원일기(갑자 2월 29일자), 備邊司膽錄(발해 12월 21일자), 右捕廳膽錄(발해 12월 21일자), 慶尙監營啓錄(갑자 1월 7일자), 龍湖間錄, 선전관 鄭雲龜書啓, 東山日記(갑자 2월 29일, 3월 2일자), 哲宗記事拾遺記 백권 64追集(갑자 2월)].


이렇게 해서 그는 도를 깨닫고 포덕한지 5년만에 최시형에게 道統하였고, 1864년 고종 원년 갑자해 2월 29일에 조정으로부터 좌도난정률(左道亂正律)(東學魁首 崔濟愚 以邪術 濟人疾病 以呪文 國家民族欺瞞 以劒歌 國政謀叛 以邪道亂正律 宣當處刑)로 다스리라는 명령에 의하여 3월 10일 대구 장대에서 참형을 받게 되었다.


이로서 보건대 여러 면에서 최제우에 대한 전기적 설명이 기독교 복음서의 예수에 대한 내용과 유사하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으며, 고대 헬라-로마의 전기 형태인 선전적 형태(aretalogy)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그의 죽음이 단순히 종교적 이유에서라기보다는 검가와 검무로 인한 국가모반에 대한 죄명으로 처형된 것임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