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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6-23 06:59
(그리스도의교회-환원운동)김은석 목사에 대하여 -함동진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6,668  
(그리스도의교회-환원운동)김은석 목사에 대하여 -함동진

김은석 목사에 대하여(답변)-함동진


[질문] : 석사학위 논문으로 김은석 목사님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연구로 정했습니다. 열심히 자료를 찾던중 목사님의 말년에 관한 자료가 거의 없어서 혹시 선생님께서 가지고 계신 자료가 없을까 생각되어 이렇게 문의합니다. - 정인조

[답변]: (그리스도의교회-환원운동)김은석 목사에 대하여 -함동진

김은석 목사께서는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서울(아현동?)에 거주하시었습니다.
저는(부친 창현 함태영목사) 서울 마포구 도화동산(桃花洞山)에서 거주하였는데 거기에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고 김일성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박해를 받는 북한주민들이 38선을 넘어 북한으로부터 월남한 분들을 위한 재활 천막촌이 있었습니다. 여러 동의 천막(미군용야전대형천막)으로 천막촌을 이루었는데 이 천막촌은 강순명목사의 위주로 공민학교와 교회가 운영되었습니다. 이 학교에 김은석 목사님 아드님 김성철(현재 미국거주 목사)과 저는 한반에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6.25 전쟁이 끝나고 김은석 목사님은 충청도(거주)지역과 전라도지역에서 그리스도의교회 원로목사로서 아우르며 활동을 하였습니다.
창현 함태영 목사는 수복하자마자 부산으로가 국방방부 정훈국 소속으로 종군하였다가 그만두고 1951년 봄 피난지 순천에서 가족과 함께 광주로 이전하여 일제적산가옥(당시 사직동 소재2층구조물)을 매입 그리스도의교회 개척과 신학교운영에 들어갔습니다. 그리스도의교회 신학교 였지요. 여기에 충청지역과 호남지역의 신학생들을 모아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김은석 목사님이 주축이 되어 신학강좌가 운영되었습니다. 교수로 김은석 목사. 이신 목사. 김재순 목사. 장주열 목사. 창현 함태역 목사 등이었습니다. 당시는 식량이 귀하여 굶주림이 많았고, 자금 또한 달렸습니다. 오가며 찾아드는 목회자들과 신학교 교수들의 식사문제, 신학교 운영비는 거의가 함태영 목사가 사비로 지출 운영되었습니다.(이는 함태영 목사의 아우인 함태중이 의술이 있어 이로 얻어지는 수입금액을 전액 이곳에 투입하였던 것입니다. 식량 일부는 함태영 목사의 본가에서 일부 조달도 하였습니다.)
1951년에 광주의 그리스도의교회 신학교는 충남 부여군 귀암면 합송리 그리스도의교회(담임 이신 목사) 내로 이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신 목사께서 합송리그리스도의교회를 담임하게 된 원인이었습니다. 주된 강좌 신학은 물론 헬라어 히브리어 등 담임 강좌가 많았기에(그 당시는 교통편이 여의치 않고 매일 통강할 수 없었기에) 편의상 그리 된 것 같습니다. 따라서 창현 함태영 목사는 충남 논산군 부적면 충곡리로 이전하여 충곡리 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하고, 동시에 인근에 있는 논산군 부적면 신교리 그리스도의교회(현재의 금성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함과 동시에 복음중학교를 설립케되었고, 부여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에는 매주간에 반주(半週) 정도는 그곳으로 출강을 하였습니다.
이때 김은석 목사님은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의 여러 교회에 순방하며 격려하였고, 부흥회도 개최하였습니다. 그리고 오순절과 같은 성령운동을 방불케 강조하여 예배에 까지 도입하려하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마치 초대그리스도의교회 오순절 성령강림처럼 말입니다. 매우 열성적이었습니다.(이 성령 운동은 이신 목사 사상에 대한 이은선교수의 논문과 주변 관련목회자 자료(<김홍철 목사의 논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성장사"-1986>) 에서 성령에 관한 부분이 일부 부합되는 부분이 있지는 안나하고 유추해봅니다.)
그 이후 1953년 서울이 수복(9월28일)되면서 서울 서대문구 송월동에 서울성서신학교가 다시 문을 열게 되어 이전에 6.25 피난시절 광주에서 부여로 옮겨가며 운영하던 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는 문을 닫게 되고 이곳 학생들은 서울성서신학교(지금의 서울기독대학교)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 신학교에서 사용하던 신학교 직인을 제가 간수하고 있습니다. (창현 함태영 목사는 그 신학교의 교무와 재무를 담당한 격이었으니까요.)
그 이후의 김은석 목사님에 대한 행적은 저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개진한 행적들에 대한 자상한 기록들이 없음으로 한심스럽습니다.
김은석 목사님의 아드님이신 김성철 목사님과 연결이 되어 김은석 목사님의 말년의 상황을 개진하였으면 합니다. 저는 김성철 목사님의 소재를 알 수 없고, 혹 대전의 그리스도의교회총회 소속 목사님들께 소재를 파악하시면 합니다. 김성철 목사님이 최종적으로 대전지역에 거주하시다가 미국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혹 그 곳에 친분이 두터워 연락이 되고 있으신 분이 계시지 않나하여 말씀을 드리며 죄송하게 생각을 합니다.

*******창현 함태영 목사 약력(함동진 찬) 중에서 부분*****

◎1951년 (37세 때) ☞김은석 목사로부터 창현 함태영, 이신, 최요한, 김재순, 장주열이 그리스도의교회 목사 안수를 받음.
☞사재를 처분, 광주 사직동 공원입구(KBS방송국 앞, 2000년 1월 현재 치과병원이 들어 있음)에 일본의 적산가옥 2층집 을 매입하여 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하고 시무함.
☞같은 교회건물에 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를 개설 김은석 목사, 이신 목사(감리교신학대학 출신인 이신 목사를 환원운동에 동참케 한 데에는 함태영 목사와의 교유에 의한 것임.), 김태수 목사 등이 협력하여 환원운동신학강좌를 실시함. 함태영 목사의 3제 함태중의 전적인 재정적 후원은 광주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와 광주그리스도의교회 운영에 크게 기여함.
☞가을, 충남 논산군 부적면으로 이주하여 충곡리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 시무함.
☞같은 시기에 논산군 부적면 신교리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 시무함(현재의 우320-863 논산시 부적면 탑정리 269-13 소재 금성그리스도의교회 담임목사 오광은 ).
☞11월 15일, 신교리의 마을회관을 빌어 복음중학교(후일 후배 이춘식 목사가 인수하여 대명중학교로 개칭)를 설립, 피폐한 농촌 2세들을 교육함. 3제 함태중과 계제 함태욱이 교회와 학교 일에 적극 협력함.
☞복음중학교교사들의 식사문제 등으로 인해서 가족의 거소를 충곡리교회에서 신교리교회로 옮김.
☞이신 목사는 부여 합송리로 이주하여 합송리그리스도의교회에 시무하며 광주에서 운영하던 신학교를 이곳에 옮겨와 김은석 목사, 함태영 목사 등과 함께 신학강좌를 하며 기독교환원운동을 전개함. 김확실 전도사, 정찬성 목사등 많은 환원신학도를 배출하였음. 여기에서도 함태영 목사의 3제 함태중의 전적인 재정적 후원으로 부여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와 부여 합송리그리스도의교회 운영에 크게 이바지함.
☞부여 합송리 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에서는 <로고스(λογοζ)>라는 환원운동신학잡지를 간행 전국 환원교회에 배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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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추가되는 글은 {그리스도의 교회 회보}(1984년 여름호)와 김홍철 목사의 논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성장사,"(1986)을 참고한 것입니다.

이신은 6.25사변 때 고향 돌산에 피신해 있다가 그 이듬해에 광주에서 개최된 그리스도의 교회의 연합집회에 참석하였다가 김은석 목사를 만나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서적이며 근본적인 교회임을 깨닫고 환원하여 목사 안수를 받고 부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여 환원의 기수가 되었다.
부여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여러 동역자들간에 가장 크게 부딪쳤던 문제가 성령론이었다. 이신은 성령의 역사가 단일회적인 사건이라는 전통 교역자들의 주장에 반대하여 오늘날에도 오순절 성령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 문제로 부여교회를 사임하고 상월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목회하다가 다시 상경하여 힐 선교사를 만나 신학교를 도와 일하면서 동역하였다. 충북 괴산에 있는 수리교회로 옮겨 예배당을 건축하였고, 다시 서울 돈암동 교회에 부임하여 목회하다가 도미하여 밴더빌트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
이신은 설교 때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증거하였으며, 종이에 낙서를 해도 항상 "근본"이라는 단어를 써놓고 심취에 있었다고 사모는 회고하였다. 항상 성령의 세례를 주장하면서 창조적인 일을 계속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하며 바른 신앙을 위해 육신의 고통을 문제시 않고 최선을 다하다가 소천하였다. 이신은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회 정관을 초안작성하기도 하였다.
(출처: 그리스도의교회연구소 (소장 조동호 목사) http://kccs.pe.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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