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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9-11 22:00
기독교100년과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글쓴이 : 함동진
조회 : 2,355  
   http://hamdongjin.kll.co.kr/  [408]
   http://cafe.daum.net/hamdj  [357]

기독교100년과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2010년 7월 06일)  / 함동진            



                        (일기) 양화진 (2010년 7월 06일)    
    

                  낯선 땅 이역만리 위험 무릅쓰고 사명 하나 복음과 함께                            
                  교육 의료 과학 신세기 문명에, 對日 자주독립정신까지  
                  안일없는 희생정신으로 대한민국을 위해 몸사른 분들
                  양화진언덕 돌비로 남은 위인전으로 천년만년 전해지리
                  복음만세!  대한민국독립만세!  자유민주주의승리만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함동진 2010. 07. 06)
                                                                            


(1) 006.    (2010. 07. 06)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楊花津外國人宣敎師墓園) 표지 동판.   사진/함동진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楊花津外國人宣敎師墓園 Yanghwajin Foreign Missionary Cemetery)
                   소재지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144    


          [양화진의 역사]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麻浦區 合井洞) 지역에 있었던 나루터를 이른다.  조선시대에 한양(漢陽)에서
양천(陽川)을 지나 강화(江華)로 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또한 삼남지방에서 한강을 통하여 운송되어 오는 곡식을
저장하던 5강 가운데 하나였고, 농산물의 재분배기능을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 지역이었다.
양화진의 경우 강변에 가파른 언덕을 이루고 있어 군사적 삼진(三鎭)의 하나로 수도의 천연방어선이 되었었다.
그래서인지 북괴의 6.25남침전쟁시에도 이지역이 격전지가 되어서 만은 묘비들이 총탄에 손괴되되거나
없어져 버린 것도 있다.  이로서 선교사들은 사후의 묘비에서도 고난을 당하였다.  
조선 말에는 그리스도교신자들이 박해를 당해 처형장이 된 곳으로 절두산 순교지 등과 순교자묘지가 남아 있다.
또한 개화파의 선각자인 김옥균(金玉均)이 처형이 되기도 한 곳이다. 현재는 이 일대에 양화대교와 연결된 강변도로와
지하철 2호선이 건설되어 있어 김포공항·강화·인천 등지로 통하는 교통요지이기도 하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楊花津外國人宣敎師墓園 Yanghwajin Foreign Missionary Cemetery)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는 구한말과 일제하 우리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친 외국인 선교사와 가족 143명이
다른  이들과 함께 안장되어 있다.
선교사들은 모국에서의 전도 양양한 앞날을 뒤로 하고 당시에 세상의 변방이었던 'Corea'에 복음의 빛을
나누기 위하여 헌신하였다.
이들은 병원과 학교 설립 등 사회제도뿐 아니라 신분제 및 남존여비관습의 철폐와 같은 무형의 정신세계로도
우리 민족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더욱이 이들 중 일부는 일제의 한반도 무단 강점을 한민족과 함께
아파하였고 우리의 독립을 위하여 기꺼이 많은 위험을 감수하였다.
오늘날 한국교회와 사회전반을 살펴보면 이들을 통하여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 맺은 열매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의 법적 소유주인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회의]는 양화진에 깃든 참된 정신을
계승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100주년기년교회]를 설립하였으며 [100주년기념교회]는 묘역을 재정비하고
이곳에 묻힌 선교사들을 기리기 위하여 [양화진홀]을 개관하였다.
복음의 씨앗으로 양화진에 묻힌 선교사 한 분 한 분의 삶은 선교 200주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한국교회의
소중한 밑거름이 되고 있다.
양화진을 한국교회의 성지로 지키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 인들에게 맡겨진 귀중한 소명이 되고 있다.
(묘원답사시 참고: 묘소에는 아래의 사진설명에서와 같이 묘별로 묘번(墓番)이 부여되어 있다.

        [양화진홀]

   [양화진홀]은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목숨까지 바친 선교사들의
삶을 기리고 재조명하는 공간이다.
당시의 선교사들은 어떤 이들이었으며 왜 조선을 찾았는지 하나님께서 이들을 조선으로 이끌기 위하여
어떻게 섭리하셨는지, 이들이 조선에 와서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 그리고 양화진의 모습은 역사 속에서
어떻게 변하여 왔는지 등의 이야기들이 주제별로 전시되어 있다.
[양화진홀]은 선교사들의 삶과 신앙의 이야기들을 보고 들을 수 있는 뜻깊은 체험의 장이다.
또 그들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전승되어 새로운 이야기로 이어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양회진홀의 전시배치도(입구에서 출구로의 관람순서)]

입구 -->
--> 1. 부르심 : 내가 너를 지멸하여 불렀나니
          체험-손바닥 글 영상
--> 2. 조선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 3. 선교사의 발길이 조선으로 향하가 까지
--> 4. 선교사들의 활동
          보건과 의료/ 교육과 사회개혁
--> 5. 역사속의 선교사 활동연표
     성서번역과 복음전파
--> 6. 특별기획: 조선사람들의 몹과 영혼을 사랑한 홀가(家)의 이야기
         양화진의 역사 영상--> 7. 양화진의 역사
         -안내-
--> 8. 묘원의 연혁과 오늘의 모습
-->출구



(2) 012.     (2010. 07. 06 )  <묘번 A-2>.  E.T. 베델(1872-1909. 영국 언론인 -한국명 배열裵說)의 묘소.  사진/함동진

베델은 구한말 <대한매일신보>를 발간하여 억눌린 한국인들의 대변인 역할을 하였다.
베델은 민족지사들을 신문사의 주간으로 영입히여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한민족의 애국심을 고양하는
글들을 실었다.
1909년 5월 1일 37세 때 세상을 떠나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3) 031.   (2010. 07. 06)   <묘번 A-24>.   S.F. 무어(1860-1906.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의 묘소  사진/함동진

무어는 '백정전도의 개척자'이자 '백정 해방운동의 조력자'로 불리는 인물이다.
장티브스에 걸여 죽어가던 백정 박성춘을 에비슨 선교사와 함께 치료해준 일이 계기가 되어
무어 선교사는 박성춘과 함께 차별 당하던 많은 백정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1906년 장티브스에 걸려 46세의 나아로 제중원에서 숨울 거두었다.  



(4) 055.    (2010. 07. 06)    <묘번 A-31>.  M. 위더슨(1898-1956. 영국 구세군 사관)의 묘소.  사진/함동진

위더슨은 고아들을 위하여 평생을 헌헌한 선교사이다.
1926년 남편 크리스 위더슨과 서울에 와서 변두리의 고아원에 부금자리를 차리고 7년동안 줄곳
고아들과 같이 생활을 하였다.
1953년 한국전쟁 중에 다시 와서 한국 구세군사령부를 조직하고 고아들을 돌보는 일도 계속하였다.
위암으로 1956년 5월에 세상을 떠났다.  



(5) 028.    ( 2010. 07. 06)    <묘번 A-46>.  W.D. 레이놀즈(1867-1951.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의 묘소.  사진/함동진

남장로회 개척선교사 레이놀즈는 한글성경 번역에 크게 공헌하였다.
1895년 성경번역위원회 남장로회 대표로 선임되면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 매진하였고
한글 구약성경(1910) 출판의 주역이었다.
양화진에는 채 한 살이 되기 전 한국에서 죽은 맏아들과 미국에서 76세로 죽은 둘째 아들의 무덤이 있다.



(6) 033.    (2010. 07. 06)    <묘번 B-3>. R.A.  하디(1865-1949. 캐나다 YMCA  남감리회 선교사)의 묘소.   사진/함동진

하디는 토론토대 의대 출신의 의료서교사로 25세 때 한국에 처음왔다.
그는 평양대부흥운동의 시발점이된 1903년 원산회개운동의 주역이었다. 감리교, 협성신학교 등에서
가르치다가 한국에 온지 45년째 되던 1930년 은퇴하였다.
양화진에는 두 딸이 안장되어 있다.



(7) 014.    ( 2010. 07. 06)  <묘번 B-7>.  H.B. 헐버트(1863-1949.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의 묘소.   사진/함동진

헐버트 선교사는 '한국의 은인',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으로 칭송받는 분이다.
헐버트는 조선에 관한 글을 써서 외국에 알렸고 고종의 외교 밀사로 일본의 침략에 맞서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싸웠다.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에 왔지만 노환에 여독으로 세상을 떴다.
'웨스터민스터사원보다 한국에 뭍히고 싶다'는 뜻대로 양화진에 안장 되었다.



(8) 016.   (2010. 07. 06)  <묘번 B-8>.  J.P. 캠벨(1853-1920.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의 묘소.  사진/함동진

캠벨 선교사는 한국의 여성들을 위하여 보음을 전한 선교사이다.
이미 중국에서 10년 동안 선교활동을 하고 44세때 내한하여 배화학당을 열었다.
한국여성들을 복음 안에서 새롭게 변화시키는 일에 헌신하던 캠벨은
1920년 67세때 세상을 떠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9) 058.   (2010. 07. 06 ) <묘번 B-16>.  F.M. 브로크만(1878-1929. 미국 YMCA 선교사)의 묘소.   사진/함동진

브로크만은 YMCA를 통해 조국을 잃고 실의에 빠진 한국청년들에게 복은 안에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준 인물이다.
브로크만은 한국 YMCA운동의 개척자로서 전국규모의 '하령회(수련회)'를 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학생회 간사이던 이승만과 전국 각지를 돌면서 수많은 교회에 YMCA 학생회를 조직하였다.
과로로 병에 걸려 1927년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곧 세상을 떴다.  



(10) 025.  (2010. 07. 06) <묘번 B-44>.  M.F. 스크랜턴 대부인(1832-1909.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의 묘소.    사진/함동진

스크랜턴 대부인은 이화학당을 통하여 근대 여성교육의 선구자 역할을 한 인물이다.
52세 되던 1885년 외아들 내외와 한국에 왔으며 이화학당을 열어 많은 여학생을 가르쳤다.
스크랜턴 선교사는 전도부인을 조직하여 여성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였다.
그녀는 24년동안 조선 여성들의 구원을 위하여 헌신하다가 76세 때 세상을 떴다.



(11) 024.  <묘번 C-11>.   (2010. 07. 06)  H.G. 아펜젤러(1858-1902.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의 묘소.   사진/함동진

  아펜젤러는 한국 감리교의 초석을 놓은 선교사이다.
그가 세운 배재학당은 복음의 가치관 위에서 민족을 섬긴 인재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최초의 감리교회인 정동감리교회를 설립하였고 한글성경번역에도 참여하였다.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가던 중 배가 침몰해 순직하였다.



(12) 019.  (2010. 07. 06)  <묘번 C-19>.  R.S. 홀(1865-1951.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와 셔후드 홀 가족묘소.     사진/함동진

로제타 홀은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남편과 딸을 잃는 고통속에서도 43년 동안 한국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겼다.
그녀는 한글에 맞는 점자법을 만들고 학교를 세워 시각장애인들을 돌보았으며 수많은
여성 의사와 간호사들을 육성하였다.
폐결핵 전문의인 아들 셔우드 홀은 해주에 요양원을 세워 결핵환자들을 치료하였고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해서
결핵에 대한 계몽운동도 벌였다.  양화진에는 3대에 걸쳐 6명의 홀 가족이 합장되어 있다.  



(13) 021.    (2010. 07. 06 ) <묘번 C-20>.  소다 가이치(曾田嘉伊智 1867-1962. 일본 사회사업가)의 묘소.    사진/함동진

소다 가이치는 양화진에 안장되어 있는 유일한 일본인으로 부인과 함께 한국의 고아들을 위해 삶을 바쳤다.
YMCA의 이상재 선생에게 큰 감화를 받아 기독교인이 된 그는 1921년부터 45년까지 천 명 이상의
고아들을 돌보았다.
한경직 목사의 초청으로 94세 되던 1961년 한국으로 돌아온 소다는 영락 보린원에서 1년동안
고아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세상을 떴다.



(14) 053.  ( 2010. 07. 06) <묘번 C-21>.  J.W. 헤론(1856-1890.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와  가족묘소.     사진/함동진

헤론은 양화진에 최초로 안장된 선교사이다.
1885년 6월 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여 알렌, 언더우드와 함께 제중원에서 의사로 일을 하였다.
열악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조선인들을 돌보던 헤론은 이질에 걸려
한국에 온지 5년만에 세상을 떴다.  



(15) 051.   (2010. 07. 06 )  <묘번 D-8>.   J.S. 게일(1863-1937. 캐나다 YMCA 북장로회 선교사)의 묘소.     사진/함동진

캐나다 출신의 게일은 독립선교사로 1888년에 한국에 왔다.
그는 한국교인들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었다는 <천러역정>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연동교회 초대 목사로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신앙을 기준으로 천민 출신들을 교회의 장로로 세웠다.
또한 서양 기독교가 아닌 한국화된 기독교를 지향하였다.
게일은 한국고전을 서양에 알리는 데 힘쓴 한국학의 선구자이기도 하였다.
양화진에는 게일의 아들이 묻혀 있다.  



(16) 049.   (2010. 07. 06 )  <묘번 F-18>.   W.M. 베어드(1862-1931.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의 묘소(기념비).     사진/함동진

베어드는 평양의 숭실대학을 설립하고 발전시킨 교육선교사였다.
1891년 한국에 온 베어드 부부는 수년 동안 부산과 대구를 중심으로 교회를 개척하였다.
1897년에 평양으로 선교지를 옮긴 뒤에는 자신의 사랑방에서 학당을 열었다.
이 학당은 숭실중학으로 성장하였고 1906년에는 협성숭실대학으로 발전하였다.
베어드는 노년에 구약성서의 한글 번역에 크게 공헌하였다.
양화진에는 베어드 부부의 기념비가 있다.  



(17) 035.   (2010.07.06 )  <묘번 F-25>.   H.G. 언더우드(1859-1916.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와  가족묘소.    사진/함동진

언더우드는 한국선교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 분이다.
그는 1885년 4월 부활절인 26세때 내한하였다.
전도여행을 통한 적극적인 선교활동, 후배선교사 초청, 성서번역, 새문안교회(최초의 장로교회) 설립,
조선기독교대학(연세대학교 전신) 설립 등 선교초기 그의 흔적이 묻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그는 한국교회와사회와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8) 044.   (2010. 07. 06 )  <묘번 F-46>.  O.R. 에비슨(1860-1956. 캐나다 북장로회 선교사)와 가족묘소.    사진/함동진

에비슨은 세브란스병원과 의학교를 설립하고 성장시켜 근대의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1893년 한국에 들어온 에비슨은 처음에는 제중원의 책임을 맡아서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세브란스의 후원을 받아 세브란스병원을 설립하였고 제중원 내에 의학교를 설립하였다.
42년 동안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하다가 1935년 은퇴하였다.
양화진에는 에비슨의 아들 내와가 묻혀 있다.



(19) 060.    (2010. 07. 06 )   <묘번 1-7>.  A.B. 터너(1862-1910. 영국 성공회 선교사)의 묘소.    사진/함동진

터너는 성공회 2대주교로 성공회의 교세확장과   YMCA  발전에 기여한 선교사이다.
터너는 주로 인천과 강화도에 집중되어 있던 성공회의 선교영역을 수원과 충북 진천까지 확대하였다.
또한 1907년부터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강제합병되는 시기에  YMCA  확장을 맡으면서
이상재, 윤치호 등의 항일운동을 뒷받침 하였다.



(20) 178.   (2010. 05. 14)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인천)  사진/함동진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 건립의 말>

       1885년 4월 5일 부활절,
       미국선교사 아펜젤러 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가  
       진리의 큰 빛,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이꼿에 상륙하였습니다.

       그로부터 100년, 한국 개신교회는
       신도 1천만을 헤아리는 놀라운 성장을 이룩하였으며
       고난속의 민족에게 구원의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 100주년을 맞아
       세 선교사의 뜻을 기리며, 이곳에서 발원한
       복음의 물결이 온 나라와 바다 건너 땅끝까지
       파도치기를 기원하면서
       이 자리에 기념탑을 세웁니다.

                             -선교백주년기념탑보존회-  
****************************************



(다산연구소 茶山포럼501)


         기독교, 연세대, 그리고 ‘고려대-학’

                                    김민환 (고려대 명예교수, 다산연구소 대표)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은인이다. 그는 1859년 7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13세 되던 해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1881년 뉴욕대학을 졸업한 그는 기독교 선교에 몸을 바치기로 하고 미국의 네덜란드개혁교회 신학교(The Dutch Reformed Theologica Seminary)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가 가고 싶은 곳은 인도였다. 1883년에 장로교 목사가 된 그는 다시 의학공부를 하면서 인도로 갈 날을 기다렸다. 그러나 1884년에 장로교 선교본부는 그를 아침의 나라 한국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는 곧장 한국에 오고 싶었지만 사정은 여의치 않았다. 마침 갑신정변이 일어나 국내 상황이 매우 유동적이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일본에 머물며 그는 이수정이라는 한국사람에게 한국어의 기초를 익혔다. 1885년 4월 5일 인천에 도착한 그는 곧 서울로 와 선교활동을 펴려 했지만 우리 정부가 기독교 선교에 여전히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우선 광혜원(廣惠院)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다.


*언더우드가 한 역할, 제대로 평가하고 감사해야

   정부가 기독교 선교를 더 이상 탄압하지 않자 그는 곧 본격적인 선교활동에 돌입했다. 1887년 조선인 교우들이 참여한 가운데 정동교회(현 새문안교회)를 세웠다. 그는 이 교회에 눌러앉지 않고 북한 지역을 세 차례나 돌며 선교에 열을 쏟았다.

   그는 1889년에는 기독교 서적을 간행하기 위해 기독교서회(基督敎書會)를 창설했다. 그는 성서번역위원회를 만들어 그 위원장을 맡아 마가복음 등 성서를 한글로 번역해 출간했다. 번역을 위해서는 한글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한글 공부에 열을 올린 그는 내친 김에 <한영사전> <영한사전>을 내는가 하면 우리말의 문법서인 <말본>도 저술했다. 그는 기독교 선교를 위해 1897년에는 주간신문인 <그리스도신문>도 창간했다.

   국운이 기울어 가던 기독교청년회(YMCA)를 조직하는데 앞장 선 그는 우리나라가 식민지로 전락한 뒤인 1915년에 YMCA 안에 조선기독교대학(Chosun Christian College)을 개설했다. 이 학교가 1917년에는 사립 연희전문학교로 발전했고, 1957년에 세브란스의과대학과 통합하여 오늘의 연세대학교가 되었다.

   개화기에 나온 신문이나 잡지를 읽다보면 우리나라가 살 길은 기독교를 믿는 것이라는 주장을 자주 접하게 된다. 이른바 기독교 구국론이 개화파 사이에서 하나의 대세를 이루었다. 물론 기독교 구국론은 기독교 교리 자체에 대한 평가를 밑바탕에 깔고 있지만 그보다는 기독교에 녹아 있는 근대성(modernity)을 우리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개화할 수 없다는 절박한 인식이 주조를 이룬 것으로 볼 수 있다.

   혹자는 당시의 기독교 선교사들을 서구 제국주의의 선발대쯤으로 폄하한다. 그런 면이 없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잠재적 위험이었다. 당시 개화파들은 그런 잠재성보다는 기독교가 안고 있는 근대성이라는 현재적 기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백번 돌아봐도 잘한 일이다.

*선교사들이 세운 교육기관이라며 사시로 봐선 곤란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기독교 선교사들이 한 역할은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 선교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는 사실을 들어 선교사들이 세운 교육기관을 사시로 보는 것은 그야말로 우견이다. 기독교 정신이나 기독교가 품고 있던 근대성을 수용해 자본주의화에 성공한 우리의 주체적인 저력을 자랑으로 여기되 아울러 우리는 근대화과정에서 서구 기독교 선교사들이 편 헌신적인 봉사에 대해서도 고마워해야 한다.

   고려대가 ‘고려대-학(高麗大-學)’이라는 걸 하나의 교과목으로 개설한 모양이다. 그런 걸 고려대가 하든 말든 그건 고려대의 자유다. 그러나 그 ‘고려대-학’이라는 것이 다른 대학의 정통성을 비하함으로써 고려대의 상대적 우월성을 내세우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면 그건 한 마디로 개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고려대-학’을 개그에 비유한 것이 혹시 개그를 모욕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글쓴이 /김민환

· 다산연구소 대표
· 고려대 명예 교수
· 전남대 교수 (1981-1992)
· 한국언론학회 회장 역임
· 저서 : <개화기 민족지의 사회사상>
<일제하 문화적 민족주의(역)>

<미군정기 신문의 사회사상>
<한국언론사>
<민주주의와 언론>등

                    <출처>:
                    제     목 : 기독교, 연세대, 그리고 ‘고려대-학’/ [김민환]
                    보낸사람 : 다산연구소
                    보낸날짜 : 2010년 9월 14일 화요일, 00시 03분 58초 +0900
                    받는사람 : 함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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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동진
http://hamdongjin.kll.co.kr/    
http://cafe.daum.net/hamd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