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CCS 홈페이지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
main_5.GIF main_6.GIF main_7.GIF main_8.GIF

 

 

 

 

 

 

 

 

 

 
작성일 : 10-02-15 12:29
창현 함태영 목사 전기 -1
 글쓴이 : 함동진
조회 : 7,334  
   http://kccs.pe.kr/main30.htm [2229]
   http://kccs.pe.kr/main30.htm [2129]

창현 함태영 목사 전기 -1

함동진 아동문학가


(그리스도의교회 환원운동 75주년) 창현 함태영 목사 전기

                            목      차

                서문

                     창현 함태영목사 략전(전기) 서문

                 본문내용 (구분 - 年間別)  

                         유림가문(儒林家門)에서 (1914~1931) 
                         청운의 꿈을 품고 (1932~1936) 
                         기독교로의 개종과 항일(抗日) (1937~1948)
                         그리스도의교회로 환원과 6․25북괴군남침전쟁 (1950~1952) 
                         환원운동(還元運動) (1953~)
                          -슬픔은 시험이 되나 / 선친 함봉표 지사와 사목 정용옥 여사 소천 
                         생즉복음 사즉맥립-生則福音 死則麥粒 ……한 알의 밀알로 썩다(1962~1983)

                부록

                        그리스도의교회 환원운동의 지원자 송암 함봉표 지사  
                        함태중(咸泰仲 -그리스도의교회 환원운동 숨은 후원자)
                        [환원운동] 창현 함태영목사 략전(전기-2) / 함동진
                        (함태영-2)


                  창현 함태영목사 략전(전기)
                  唱泫 咸泰英牧師 略傳(傳記)


 서문

                     [환원운동] 창현 함태영목사 략전(전기-1) / 함동진
                     (함태영-1)

                  창현 함태영목사 략전(전기) 서문
                  唱泫 咸泰英牧師 略傳(傳記) 序文

 

창현 함태영 목사

   창현 함태영 목사는 生則福音 死則麥粒(생즉복음 사즉맥립 : 살아서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죽어서는 주님의 분부대로 한 알의 밀알로 썩는다. 마28:19~20. 행1:8. 요12:24.)의 삶으로, 번화한 도시 보다는 주로 후미진 곳 농촌, 난민촌, 빈민촌을 찾아 복음을 전하고 교육사업을 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는 헌금을 받아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하고, 교육사업을 한 것이 아니라 늘 자기의 가진 것을 모두 털어 헌신하였다.

그때에 농촌과 빈민촌에서 뿌린 복음의 밀알이 지금은 백 배, 천 배 결실을 하여 도시로도시로 향하여 모여들고 있다.

도시의 교회들은 차고 넘치어 서로 경쟁을 하며 맘모스 교회당을 지으려 하고 부흥사를 동원하여 기성교인을 서로 차지하려고 안간힘 하고들 있다.

   그러므로 어렵게어렵게 복음을 전하여 불신자를 새 신자로 만드는데는 힘을 덜 쓰려한다.

   오늘날 모든 도시의 교회들은 농촌을 돌아볼 때다 . 농촌의 교회들은 얼마나 험난한 가시밭길을 걷고 는가.

   도시의 교회는 호화롭다 못해 은혜스럽지 못하고 재물을 가진 자가 헌금으로 천국을 사 놓은 듯 빗나가게 가르쳐지고 있다.

   그리고 가장 도덕적이어야 하고, 윤리적이어야 하며 질서가 정연하여야 할 신앙인들이 행동은 멋대로 하고도 교회에 나아가 헌금이나 많이 하고 기도만 하면 천국이 자기의 것이 되는 것처럼 가르쳐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뜻(희생. 봉사)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창현 함태영 목사의 약전(略傳-傳記)을 통하여 보면 복음을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전하는 것으로 일관해 왔다.

   창현 함태영 목사의 전기가 신학을 입문하는 신학도나 목회를 지망하는 전도자들에게 지침과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신학과 목회를 지상에서 누리는 화(榮華)나 명예욕으로 시작한다면 썩어지는 밀알이 될 수 없고 참된 열매를 결실치 못할 것이다.

   복음 전도자는 자기를 낮추고 농촌의 후미진 곳, 빈민촌, 난민촌과 같은 곳에서 고난을 겪는 자들에게 더욱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로 인해 핍박을 받는 자(마5:1~12)의 편이시다.

   그리고 사랑은 어떤 것이고 어떻게 실천하는 것인지 고린도전서 13장은 말씀하시고 계신다.

   복음은 가난한 자, 고통받는 자, 병든 자에게 찾아가야 할 것이고, 거기에 더욱 필요한 것이다.

   부(富)는 그러한 곳에 가져가 나누어주어야 할 목적 이외에는 신앙과 교회의 목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끝으로 기억하여 둘 것은 창현 함태영 목사는 어려움 속에서도 초대교회(初代敎會)로의 성서적 그리스도의교회로 돌아가자는 환원운동(還元運動)에 일관하여 목회를 하여왔고, 이를 회고하여 보면 한국환원운동사(韓國還元運動史>의 한 편을 보는 듯 하다.


(칼럼)

   날이 가면 갈수록 사람들은 공(公)보다는 사(私-나我)를 위해 목숨을 걸거나 전력투구한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남을 먼저 배려하고 공적인 일에 더 열심이하라는 교육과 교훈을 많이 받고 자랐다. 그 공적인 일에는 국가에 충성하는 일, 사회에 헌신하는 일, 남을 위하여 봉사하는 일 등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태복음 16장 24절)

   그리스도의교회 환원운동으로서의 교회개척은 크게 번창한 것에만 기준을 두지 않는다. 가정교회 또는 작은 모임이 시작되면 교회의 개척이며 교회를 이루는 것이다.

   복음전파(전도) 그 자체가 교회를 이루며 역사이다. 할 수만 있다면 기록하고 간수하는 것은 더 좋은 것이지만 교회의 시작장소와 교회당과 간판이 없어졌다 하여 복음 전파도 함께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목회자(복음전도자)의 삶의 방식과 그의 처지(處地)한 환경에 따라 그 자취나 기록이 있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

   그리스도의교회는 복음을 받아드린 한사람한사람이 교회이며 개교회주의가 "성서로 돌아가자"는 환원운동의 주축이며 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신약성서시대)의 사도들이 세상을 떠난 후 로마 폭정의 갖은 핍박과 억압 속에서도, 성서에 기록된 일곱 교회 이외에도 복음은 전하여졌고 그 복음을 전한 전도자들과 교회(교회당=예배당건물)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미기록의 교회들과 전도자들이 전한 복음은 무효한 것인가? 아니다. 2세기 속사도시대에서 새 제도권(교권.교파)으로 도달하기까지의 복음전도자들과 교회들이 활동한 기록들은 없다. 온갖 핍박 속에서 순교를 불사하며 정처없이 이동되고 쫓겨다니던 교회들이나 전도자들의 기록이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복음의 전파는 전세계를 누비며 오늘에 이르도록 한 원천이요 밑거름 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만약 기독교 탄압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현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체포, 구금, 폭행, 고문, 순교당하거나 추방당하였다면 그 곳에 전한 복음(교회)은 영원히 없어지는 것인가? 아니다.

   지금 중국이나 북한 그리고 아프칸(탈레반지역 등) 등지에서 교회당이나 그에 속한 목회자(복음전도자)가 없어도 지하에서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교회당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님)가 유지되고 있다. 이들로부터 훗날 역사를 따지며 기록이나 물증을 대라하면 가능한가? 복음전도와 교회를 그런 것의 물증으로 현장을 일일이 증명하라하면 이를 증명할 수 있겠는가?

   복음전파와 교회는 그런 것의 물증으로만 역사를 삼을 수 없는 것이다.  50-100여 년 전의 후미진 오지(교통 통신 인쇄물 언론매체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의 복음전도와 교회(에클레시아)의 역사를 내어놓으라 하면 이는 어불성설이다. 문화의 기반이 전무하다시피한 열악하고 피폐한 곳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면 얼마만큼의 역사적 기록물과 물증을 내어놓을 수 있겠는가? 기어이 내어놓으라고 요구한다면 이는 무리(無理)이다.

   문명과 물질과 문화가 미개하거나 외부와의 소통도 원활치 않는 열악한 지역에서 순교적 사명으로 복음전파와 전도에 온 정성을 다 쏟아 부었어도 그에 관한 기록이나 유물이 없으면 그가 전한 복음 전도와 환원운동이 인정되지 않는 업적이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당시의 교회당이 남아 있고, 당시에 기록된 활동기록이 있어야만 하고, 그 밖에 당시의 자료와 유물이 현존하여야만 하고, 당시에 목격한 인물들이 증언하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를 들어 오늘날의 어떤 교회는 자체교회에서 전도한 신자는 없다시피하고, 타교회 타전도자의 전도에 의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분, 또는 그 후손들이 이주하여 와 그 교회의 신도가 된 경우가 있다. 이렇게 이주하여 온 성도들 중에 섬기던 前교회는 없어지고 그때의 복음전도자(목회자)도 세상을 뜨고 없다. 그렇다면 이주하여오기 전의 교회(교회당)와 그 교회 복음전도자(목회자)가 전파한 복음은 무효한 것인가? 무효하다면 이주하여온 이 신도들 또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여야 하지 않겠는가? 필자는 참으로 부끄러운 우문(愚問)을 남기게 되었다.

   복음 전도에는 명예나, 자랑이나, 자기의 이익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복음그리고 십자가만이 우선할 뿐이다.

   복음전도의 진정한 역사는 주님의 나라인 천국의 생명록에 다 기록되어 있다. 
*[함동진의  칼럼 <공(公)만 있고 나(我-私)는 없다 -복음전도 자체가 역사다 > 全文]    
 

    <한국그리스도의교회 환원운동 : "성서적 초대교회로 돌아가자!(基督敎 初代敎會로의 還元運動)">

                      19991년 6월 11일 (음력 4월 30일)
                       -창현 함태영 목사 탄생 77주년-
                                  함동진 삼가 쓰다

                                    --------------------

*[창현 함태영 목사 카페<카페자료실>란] http://cafe.naver.com/hamdongjin.cafe 
  함동진 홈 http://hamdongjin.kll.co.kr/ 
  함동진 카페 http://blog.daum.net/hamdongjin/

                 ***************************************************************

                    제 1 부

             창현 함태영목사의 선조들

   창현 함태영목사의 휘(諱)는 영주(英柱)이며, 초휘(初諱)는 태영(泰英)이고, 호는 창현(唱泫)이다.

   *(江陵咸氏 33世孫임 : 강능 .양근咸씨 대동보(갑자보) 제3권 671쪽. 1987. 2월 강능.양근 함씨 대동보편찬회 간행에 수록)

    창현 함태영 목사의 선조(先祖)는 아래와 같다.

시조 :

   휘는 규(規), 시호는 양후공(襄厚公), 고려의 개국공신이다.

6세조 :

   휘는 유일(有一), 자(字)는 형천(亨天), 시호(諡號)는 양경공(良敬公), 공부상서와 순충좌명정난공신(純忠佐命靖難功臣)으로 "淸苦守節 以立門戶(청고수절 이립문호 : 청련하여 곤궁울 견디고 절개를 지키며 문호<가문>를 이르킴)"한 청백리일 뿐만 아니라, 사당을 불사르고 무당들을 교외로 내쫓으며 철저하게 미신을 타파하신 분이다.

7세조 :

   휘는 순(淳), 자는 자진(子眞), 호는 시은(市隱), 시호는 문익공(文翼公), 증직(贈職) 예부상서를 지냈다.

당대의 명시인 이인로(李仁老), 오세재(吳世才), 임춘(林椿), 조통(趙通), 황보항(黃甫抗), 이담지(李湛之) 등 7인이 어울려 강좌칠현(江左七賢 또는 竹林七賢)을 조직하여 시주(詩酒)에 열심하며 뛰어난 재주로 시와 문장을 즐기셨던 분이다.

13세조 :

   휘는 승경(承慶), 자는 선여(善餘), 청백리로서 의정부 영의정 집현전 대제학(議政府 領議政 集賢殿 大提學)을 지내신 분이다.

14세조 :

   휘는 부림(傅霖), 자는 윤물(潤物), 호는 난계(蘭溪), 시호는 정평공(定平公), 이조판서(이조판서), 8도도백(八道道伯),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을 추증 받으신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포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포은의 행장기를 지었고, 만경두곡삼선생서원(萬頃杜谷三先生書院 : 杜谷書院)에 배향됬다.

15세조 :

   휘는 우치(遇治), 자는 문명(文命), 호는 송담(松潭), 시호는 평양(平襄), 또는 문희공(文僖公), 7도도백(七道道伯),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내고 동편군(東平君)이 되신 분이다.

16세조 :

   휘는 영훈(永勳), 자는 성도(聖道), 함경도감사, 공조판서, 호조판서, 의정부좌찬성정헌대부를 지냈다.

17세조 :

   휘는 이정(以正), 자는 원식(元植), 음충훈도사를 지내신 분이다.

22세조 :

  휘는 덕립(德立), 호는 수정(水亭), 무과주부(武科主簿), 증 병조참판(贈兵曹參判), 임진란순절의사선무종훈(壬辰亂殉節義士宣 武從勳)으로 곧, 의병을 모집 이끌고 도원수 권율(權慄) 장군을 따라 행주전투에서 싸우다 전사하여 행주대첩의 공훈을 세운 임진란순절의사이시다.

  # 수정공의 임람시 의병참전을 위한 <通文>,<擧義文>과 詩文이 전해져 오고 있다. 함동진편저<부림 정평공后 강능함씨장산리파 선조기록>과     함동진 홈 http://hamdongjin.kll.co.kr/   함동진 카페 http://blog.daum.net/hamdongjin/   창현 함태영 목사 카페  http://cafe.naver.com/hamdongjin.cafe/  상에서도 볼 수 있다.

30세조 :

   휘는 병후(炳후), 자는 선욱(善郁), 또는 자윤(字潤), 호는 죽포(竹圃), 창현 함태영 목사의 증조부이시다. 참봉(參奉), 생원(生員), 남부도사(南部都事)였으며 당대에 깊은 학문으로 문장에 특출하였으며 문집(文集)이 있고, 효성 도한 지극한 분이시다.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의 문인으로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과 교분을 갖고,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선생이 배향된 필암 서원(筆岩書院)의 춘추대제(春秋大祭)를 집례한 유림이다.

 # 죽포공의 詩文이 전해져 오고 있다. 함동진편저<부림 정평공后 강능함씨장산리파 선조기록>과    함동진 홈 http://hamdongjin.kll.co.kr/   함동진 카페 http://blog.daum.net/hamdongjin/   창현 함태영 목사 카페  http://cafe.naver.com/hamdongjin.cafe/  상에서도 볼 수 있다.

31세조 :

   휘는 장기(莊基), 자는 기호(基昊), 호는 명사(明沙), 창현 함태영 목사의 조부이시다.

의관(議官)을 지냈고, 문장에도 뛰어나 문집이 있다. 효성 또한 지극하여, 손가락을 두 차례나 물어뜯어 그 피를 위독한 부친의 목에 넘겨 환생시킨 일이 있어 효행상을 받기도 했다.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 선생과 교분을 갖고 하서 김인후 선생이 배향된 장성의 필암서원 춘추대제를 집례한 유림이다.

# 명사공의 詩文이 전해져 오고 있다. 함동진편저<부림 정평공后 강능함씨장산리파 선조기록>과   함동진 홈 http://hamdongjin.kll.co.kr/   함동진 카페 http://blog.daum.net/hamdongjin/   창현 함태영 목사 카페  http://cafe.naver.com/hamdongjin.cafe/  상에서도 볼 수 있다.

32세조 :

   휘는 종종(鍾宗) 또는 종현(鍾鉉), 자는 봉표(鳳表), 호는 송암(松庵), 창현 함태영 목사의 선친이시다.

유교를 근본으로 삼았으며 구한말(舊韓末)의 의병으로서 좌우명을 "生則義士 死則義鬼(생즉의사 사즉의귀: 살아서는 의롭게 싸우는 투사(의병)요. 죽어서도 의로운 귀신이 되어 싸운다)"로 삼고 왜병(倭兵)들과 목숨을 걸고 싸웠고 포로가 되어 고문을 당하고 목포형무소에 3개월 수형(受刑) 했다.

   교육, 농민계몽운동, 개척운동 등으로 자력갱생을 부르짖으며 일생을 보냈고, 조상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였던 분이다.

송암공은 조부 죽포공과 부친 명사공에 이어 노사 기정진 선생의 학문을 따랐고, 송사 기우만 선생의 문인이 되었다. 그리고 하서 김인후 선생이 배향된 장성 필암서원의 춘추대제를 맡아 집레한 정통 유림이었다.

   그러나 송암 함봉표공은 유림이면서도 장자인 창현 함태영 목사의 목회활동과 기독교복음전파 환원운동에 끊임없는 재원조달로 크게 이바지하였다. 

   # 송암 함봉표의 詩文이 전해져 오고 있다 . 함동진편저<부림 정평공后 강능함씨장산리파 선조기록>   함동진 홈 http://hamdongjin.kll.co.kr/   함동진 카페 http://blog.daum.net/hamdongjin/   창현 함태영 목사 카페  http://cafe.naver.com/hamdongjin.cafe/  상에서도 볼 수 있다.

                                   ************************

                    제 2 부

                    창현 함태영목사 략전(전기) 
                 唱泫 咸泰英牧師 略傳(傳記)


(수필)

   한국그리스도의교회 환원운동사박물관이 개관되면 이것만은 꼭 그곳에 전시되기를 염원하며 이 글을 쓴다.

   한국그리스도의교회의 환원운동 초기의 목회자들은 예배처소, 먹는 것, 입는 것, 잠자리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고난 받는 생활이었다. 세(勢)가 있는 교파도 아니요 조직이 있어 후원이라도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직 믿음 하나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환원운동의 기치(旗幟)를 반겨 들고 스스로 뛰어든 가시밭길 고난의 길이었다. 오늘날의 환원운동의 그리스도의교회와 교인들이 이를 들여다보고 과거를 돌이켜 보고 신앙의 거름으로 삼는 계기가 되기를 염원하여 본다.

   위에서 지적한 '이것만'은 극히 일부로 수집된 자료이지만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당시의 목회자의 상황이다.

   이는 1960년대 - 1970년 초에 기록된 창현 함태영(唱泫 咸泰英 1914.5.24<음력4.30일>-1983.11.28) 목사의 <요약설교원고>들이다. 그 이전의 자료들은 없어졌기에 더욱 궁금하다.

   매장마다 모두 종이 지질과 두께가 다르며 규격도 다르다. 거의가 휴지로 버려야 마땅할 종이조각들을 사용하여 작성한 것이다. 경리장부이면, 요금고지서이면, 영수증이면, 선전물이면, 카렌다이면, 받은 전보지이면, 누가 낙서해 놓은 종이이면, 결혼청첩장(아들 함동진 결혼)이면 등 일일이 지질과 형태와 모양을 이 글에 표현하여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가지런하게 재단한 종이나 수첩, 노트 등을 사용치 못하여 비참할 정도의 휴지조각 같은 여러 종류의 모양새들이다. 이런 종이 종이조각들 위에 <요약설교원고>를 만들었음을 보면 그 목회자의 생활이 궁핍하면서도 얼마나 알뜰하였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이런 형편과 상황으로서는 가족의 의식주문제와 자녀들의 교육은 어떠하였겠는가? 독자들께서 미루어 상상하기를 바랄뿐이다.

   창현 함태영 목사는 젊은 시절 한때이기는 하지만 토목건축기술자로서 화폐가치의 단위가 높은(일제시대) 때에 금전을 부대에 담아가지고 다닐 정도로 수입이 좋은 넉넉한 생활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인인 아내 정용옥 여사와 결혼한 후 기독교로 개종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후로는 세상의 부나 명예를 분토(糞土)만도 못하게 여겼고, 초기의 장로교파의 목회와 신학공부를 접고, 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로(서울성서신학교-<현서울기독대학교>제1회) 옮겨 졸업을 하였고 오직 그리스도의교회 환원동에만 생의 전부를 걸었다.

   이제는 함태영 목사의 <요약설교원고>들이 만지면 부스러져 버리는 것들도 있고, 색이 바래고 잉크가 번져 탈색되는 것들도 있다. 이들은 충분히 박물관에 소장될 가치가 있고, 후세들이 거기에서 교훈을 받고, 교육의 장이 될 수가 있다고 생각을 한다.

   그 뿐인가. 함태영 목사가 사용하던 성경책을 살펴보면 성경책 갈피마다 깨알 같은 글씨로 요약설교 내용이나 참고사항들이 빼곡히 기록되어 있어 진기하게까지 느껴진다. 이 또한 박물관에 전시되어야할 감이다.

   잦은 이사와 가난으로 유품하나 남김이 없는 형편이다. 함태영 목사의 유일한 유품인 <요약설교원고>와 <성경책> 그리고 <찬송가책>은 나에게는 보물이요, 어느 것에 비길 바 없는 유산이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물려받은 것이 없다. 가난과 맨주먹뿐이었다.

   가난하였던 것이 무슨 자랑거리가 될 리가 없지만 이 가난은 한국그리스도의교회의 환원운동("성서로 돌아가자!" / "초대교회로 돌아가자!")으로 인함이었기에 나에게는 소중한 것이며 값진 것이 된다. 창현 함태영 목사 그분은 세상적으로 볼 때에는 이름도 빛도 없이 가셨지만 <요약설교원고>와 <성경책> 그리고 <찬송가책>은 꼭 환운동사박물관에 수장 전시되기를 우리구주 예수그리스도께 간구하는 바이다.

   그리고 빛도 이름도 없이 환원운동을 하다가 먼저가신 선구자 목회자들이 오늘날 그리스도의교회의 주춧돌이 되어 떠 밭치고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함동진의 수필<함태영 목사의 요약 육필설교문을 보면서(2) 전문> 

1914년 :

   5월 24일(음4월30일)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와룡리(全羅南道 長城郡 黃龍面 臥龍里) 3번지에서 부친 송암 함봉표(松庵 咸鳳表)와 모친 김월림(金月林) 사이에서 장자로 출생하다.

1915년 :

   (1세때) 전남 장성군 동화면 남산리(東化面 南山里)로 이주하여 성장하다.

이후 5세가 되기까지 참봉이며 면장인 외조부(김평숙金平淑) 댁에서 교육받으며 유아기를 보냈으며, 영특하여 한글을 하루만에 깨우쳤다.

1919년 :

   (5세때) 나라안에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선친 송암 함봉표께서 설립한 사립학교(장성역전에 위치하였음)에서 선친과 교사 김종운(金鍾云)으로 부터 초등 학문을 닦았다.

1923년 :

   (9세때) 전라남도 구레군 봉서리로 이주 선친께서 농토를 개간, 농업을 경영하였으나 7년 간의 천재(天災)의 가뭄으로 극심한 궁핍을 겪고 일제의 감시를 받았다.

1929년 :

   (15세때) 구례지방의 극심한 가문과 흉년으로 인한 생활고와 더불어 끈질긴 일제의 감시를 받음으로 인하여 선친 송암 함봉표는 전라남도 숭천군(현재의 순천시) 외서면 장산리 12번지에 기반을 조성키 위해 이주하고, 전답을 개간, 자력갱생의지로 개척하며 청소년 아동을 위한 사설 학습장을 운영하였다. 일제천하에서도 민족정기를 불어넣기 위함이었다.

1931년 :

   (17세때) 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32년 :

   (18세때) 중학과정을 닦기 위하여 단신으로 부산 타지에 나아가 고학으로 면학의 길에 들어섰다. 이때에 만난을 극복하면서 굳은 의지로 부산공고를 수학하였으며 추운 겨울에는 동상으로 손톱이 빠지는 역경과 고초를 겪으며, 토목건축의 공사장에서 일을 하고 기술을 배우며 면학을 하였다.

   이로서 습득한 미장술, 조적술, 조각술 등 기타 건축기술 분야에 능통하게 되었다.

   이때에 일본에서 공전(工專)을 수료한 서(徐 00)씨와 친교를 맺고 부산, 벌교, 외서, 광주, 서울, 평양, 선천, 신의주, 만주 등지에서 학교와 은행 등의 건축물 토목공사를 비롯 당시 최첨단의 조각건축물들을 축조하였다.

1935년 :

   (21세때) 만주의 봉천, 태래, 지하자루 및 소련(지금의 러시아)국경지대인 마주리에서 2년을 기거하였다.

일제천하에서 일본천황을 위한 강제징집과 지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1936년 :

   (22세때) 전라남도 광주를 잠시 경유, 토목건축 공사장의 작업책임조장으로 활동을 할 때에 전남 담양에서 담양선 철도부설당시 토목공사 현장에는 한국인조와 일본인조가 같이 공사에 투입되었는데 항상 일본인들이 우월한 것처럼 한국인들을 멸시하고 있어 이에 격분 일본조의 조장과 격투를 하게 되었는데 일본인 조장이 칼을 빼어들자(당시 일본인은 칼을 소지할 수 있었고 한국인은 소지불가 하도록 일제가 법으로 정하였다) 다 도망가고 한국인 조장 창현 함태영이 단독으로 대항하다가 일본조의 조장이 휘두른 칼을 맞자 굉이를 들어 방어하는 중 그 일본조장을 살해케 되었다.

   이와 같이 한국인을 학대하는 일본인을 좌시할 수 없어(선친께서 의병참전시 좌우명으로 삼으신"生則義士 死則義鬼 : 살아서는 의로운 투사요 죽어서도 의로운 귀신이 되어 싸운다"는 말씀이 생각나 젊은 피를 끓게 하였다.) 담양사건을 일으킴으로서 일본 경찰에 의해 고소되어 재판결과 정당방위로 판결을 받았으나 일인들이 복수를 노림으로 평안북도 신의주로 피신을 하였다.

이때 일본인 조장과의 격투 중에 그가 휘두른 칼에 부상을 입은 턱의 상처 흉터가 평생 가시지 않고 남아있게 되었다. 담양의 사건은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신의주 압록강 철교의 철로를 끊기 위하여 徐씨 친구와 함께 잠입하였다가 일본군경비병에게 발각되어(장비는 수하 즉시 강물 속에 던져버림) 총격과 추격을 받아 검문 당하여 고문을 받고, 압록강에 놀러 나왔다고 계속 주장하여 무사히 풀려 나와 철로절단 계획은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그 후에도 신의주와 만주사이의 압록강을 넘나들며 친구와 함께 독립운동을 꾀하였다.

   일화로서 담양사건이 있었던 시기에는 보성군 벌교읍 등지에서 토목건축 기술이 뛰어나 많은 활동을 하였고, 전라남도 승주군(지금의 순천시) 외서면 금성리에 비각 조각품을 남겨 향리의 지역인들이 이를 보고 경탄하였다.

   또한 재정적 수입이 많아 돈을 부대에 담아 가지고 다녔다.(이 시기의 화폐단위는 가치가 희소해서 한 부대의 돈이라면 대단한 거액임을 짐작케 한다.)

   그 분만 아니라 신체가 건장하고 미남형이어서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주고, 호방하고 방탕하기도하여 술을 말술로 마시고, 많은 여인들이 따랐다.

토목건축기사시절 압록강변 나들이 앞줄 左부터 차남 성원,정용옥 사모. 뒷줄 左부터 -장남 동진, 창현 함태영 목사 

1937년 :

   (23세때)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주거지를 선천으로 옮겨 기독교인 하동정씨 관림(河東 鄭觀林)과 이봉녀(李鳳女) 사이의 장녀인 정용옥(鄭龍玉) 여사와 혼인하여 기독교에 입교하므로 인하여 후일 목사가 되었다.  기독교 입교에는 이봉녀 권사의 전도에 크게 힘입었다. 정용옥 여사의 본가는 평안북도 선천군 선천읍 천남동(川南洞) 191번지이었다.

右-정용옥 사모.  左-이봉녀 권사

창현 함태영 목사의 약혼사진

1938년 :

   (24세때) 평안북도 선천 북교회에서 독립운동가 백영력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939년 :

   (25세때) 평안북 선천북교회 집사로 직분을 받았다.

이때에 깊은 신앙심으로 인해 신도 중에서 종양을 앓고 있는 환자의 환부의 고름과 종양근(腫瘍根)을 입으로 빨아 뽑아내어 쾌유케 하였다. 이때의 직업은 건축업과 건재상경영)

만삭이 된 부인 정용옥 여사를 고향인 전라남도 순천시 외서면 장산리 본가로 보내어 장남인 동진(東振-시인․아동문학가)을 출생케 하였다.(음력 5월 4일)

1943년 초. 앞줄 -左부터 성원, 동진. 뒷줄-좌부터 정용옥 사모, 창현 함태용 목사  

1941년 :

   (27세때) 일본의 강압적인 신사참배 강요에 대부분의 목사들과 장로들이 일제에 굴복, 신사참배에 응할 때에 단독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한 문제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나 고문 받기 직전 기지를 발휘하여 화장실에 간다고 핑계하고 순사의 눈을 피하여 탈출하였다.

   늠름하고 건장한 인물의 생김새에 정문경비 순사들은 다행히 검문치 않았다. 이리하여 펴안북도 압록강 주변인 자성군으로 피신한 후 만포진과 만주 삼강진 등으로 옮겨 은거생활로 2년을 기거하였다.

일제의 압박으로 고난을 당할 때마다 선친 송암께서 남기신 말씀 "生則義士 死則義鬼 : 생즉의사 사즉의귀"를 되새기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고난을 생각하며 견디어 내었다.

1944년 :

   (30세때) 다시 전라남도 순천시로 단신 이주하여 기독교인으로 은거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추적에 적발되어 투옥되었으나 옥중에서 8.15광복을 맞아 자유를 찾았다.

<수필>

   벌교(伐橋)읍을 벗어나 북쪽으로 널따란 들판이 있다. 들판을 따라 도로가 곧게 뻗어 있고, 그 중간 지점에 낙안(樂安)으로 갈라져 들어가는 갈림길도 있다. 들녘 곳곳에 파릇파릇한 풋보리가 자라고 곧 패어나려는 듯 보리이삭이 통통하게 배어 있었다. 푸른 들판에서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파아란 하늘 속으로 종달새가 솟구쳐 올라 재잘거렸다. 아마도 아들 딸 낳고 환희에 넘치는 기쁨을 알리는 코러스인 듯 싶었다.

   들녘을 꿰뚫고 곧게 뻗어나 있는 도로(현지 인들은 신작로라 일컬었음)는 미루나무 가로수 사이로 원근을 그리고 있어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도로가 지나는 마을마다 주민들이 부역(負役)에 동원되어 할당된 몫의 자갈을 제각기 깔고 닦아 놓곤 하였는데, 자갈을 밟고 걸을 때마다 발목이 이리 휘고 저리 꺾이어 발바닥이 아프고 시큰거렸다. 곧은 도로는 백이산(白耳山) 줄기 아래에서 갑자기 멈춰선 듯 급경사의 고갯길이 되어 오르막으로 전개된다. 널따란 들녘에서 갑자기 솟아난 가파른 줄기인지라, 도로는 마치 큰 구렁이처럼 이리 구불 저리 구불 산허리를 휘어 감아 돌고 돌아 올라갔다. 이 재를 석거래재라 부르고 있다. 도로를 따라 석거래재를 넘는 다면 발과 다리는 편하겠지만 쉬엄쉬엄 오르다보면 한 시간 반 이상은 족히 걸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삼 사십 분이면 쉽사리 넘을 수 있는 지름길인 골짜기를 택하여 고갯길을 오르내리곤 하였다.

   아름드리 적송(赤松)이 빼곡한 밀림인 솔숲 속으로 수아- 솨아- 봄바람이 스쳤고, 바람이 스칠 때마다 송홧가루가 흩날리며 그윽한 솔 향내가 풍겼다. 솔 향이 노곤한 행려객(行旅客)의 발길을 가볍게 하였으며, 산새들이 지저귀고 야생화가 미소를 지으며 길손들을 반겼다.

   나는 이 때에 여섯 살, 단오 때가 되면 일곱 살이 되는 1945년, 일제로부터 광복이 되던 해 어느 늦은 봄날이었다. 보퉁이를 머리에 인 어머님의 손을 꽉 잡은 나는 콧등에 땀이 송송 이슬 맺히듯 올라 있었고, 어머님 역시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땀이 흘러내린 뺨에 가닥가닥 붙어 있었다.

   “어머니, 할아버님 댁이 아직 멀었어요?”
   “음, 이제 거의 다 왔어. 이 고개만 넘으면 할아버님 댁이야.”
   “엄마, 할아버님 댁에 가면 아버지도 뵐 수 있겠지요?”
   “그래……, 어서 가자.”

   아버님은 풍운아(風雲兒) 같은 분이셨다. 담양에서 일본인이 한국인을 괄시(恝視)함에 분개하여 그 일본인을 살해한 후 평안북도 신의주로 피신 하셨다가 선천(宣川)으로 옮겨 하동 정씨(河東 鄭氏)인 어머님을 만나 결혼하신 후 열열한 기독교인이 되셨다. 아버님은 신사참배(神社參拜) 거부문제로 투옥되셨다가 탈옥하여 압록강을 넘나들며 은거생활도 하시었다. 그러던 중 고향인 순천 지역에 잠입했다가 다시 체포되어 재 투옥되셨다.

   어머님께서는 내심으로 조부님댁에 아버님이 안 계신 것을 알고 계시면서 도 어린 나에게는 숨기셨던 것이다. 나는 자주 집을 떠나 계신 아버님의 얼굴 모습조차 기억하지 못하였다. 그러면서도 석거래재를 넘는 순간 아버님을 곧 만나 뵐 수 있다는 기분에 들떠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지치지도 않았다. 석거래재를 오를 때에는 가파르고 높았지만 고개 너머 내림 길은 나지막한 산등성이처럼 길이 구불구불하지도 않았다. 완만한 비탈길이 곧 끝나버리는 지점에 다다르면, 대나무 숲에 쌓여있어 초가지붕만 보이는 곳이, 할아버님 댁이 있는 장산리(長山里) 마을이다. 동구 밖에서, 어머님께서는 “저기 대나무 숲 울타리에 가려져 지붕만 보이는 저 초가집이 할아버님 댁이란다.”고 하시었다. 나는 큰 소리로 “할아버지! 아버지!” 하고 부르며 앞서 달려갔었다. 사립문 앞에 다다랐을 때에 아버님은 보이지 않고 긴 수염을 늘어뜨린 할아버님과 인자스런 할머님만이 “아이고, 내 새끼!” 하시면서 번쩍 들어 안아주시고 볼을 비벼주셨다.

   나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외서(外西)초등학교로 입학하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일본식의 학교 교육에 익숙치 못하고 학교 다니기에 늘 두려움이 따랐다. 몇 개월이 지나가도 아버님은 보이지 않았다. 어른들의 말씀은 늘 ‘멀리 돈벌려 가셨단다.’라는 말씀뿐이었다. 평안도 도시 태생인 어머님은 심한 평북사투리를 쓰셨다. 어머님은 아버님이 계시지 않는 농촌에 오셔서 농사일을 거들 줄 몰라 동기간 사이에 눈치 보느라 서러움과 함께 마음 고생이 크셨다. 아마도 어머님은 어린 자식인 나를 바라보며 사시는 것이 외로움을 달래는 길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무더운 여름날, 늘 그리워하던 아버님께서 초췌한 모습으로 갑자기 돌아오셨다. 한없이 기뻤다. 그때 아버님께서 출옥으로 인하여 돌아오시게 된 것과 8․15 광복으로 해방이 되었다는 것도 철이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지금은 석거래재의 도로가 넓혀지고 아스팔트로 잘 포장되어 대중교통수단인 버스 등이 빈번히 오르락내리락한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하던가, 그 골짜기의 지름길은 억새풀과 밀림 속에 흔적도 없이 감추어져 버렸다.

   지난 봄 사촌의 결혼식에 참석, 석거래재의 마루에 올라앉았다.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봄바람은 나의 귀에 진하디진한 사모곡(思母曲)으로 스치어 왔다. 어머니의 환영이 시야를 가리우는가 싶더니 눈시울이 뜨거워져 오는 가운데 나도 모르게 “어머니……!”하고 불러보았다. 그러자 백이산에서 “오냐……!”하고 분명한 어머님의 음성이 메아리져 왔다.
*(함동진의 수필<석거래재에 스치우는 사모곡> 전문) 

1945년 :

   (31세때) 일제의 압박으로부터 8.15해방을 감격으로 맞이한 후 순천고등성경교에 입학함과 아울러 승주군(지금의 순천시) 해룡면 교회의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이때에 정용옥 여사는 어려운 가정살림의 보탬이 되기 위하여 깊은 산속에서 여름이면 송충이와 독충에게 물려가며, 엄동의 겨울에는 어름구덩이에 빠지고 미끄러지면서 땔감 나무와 나물을 뜯어 머리에 이어 날랐다.

   그리고 들과 산에서 뜯어 온 나물로 죽을 쑤거나 나물 반찬을 만들었다.

   이때 38선 이북 평안북도 선천에서 거주하던 장인 어른과 처남 정윤익, 정윤신, 처제 정용삼이 소련군의 총부리를 피해 사선(死線)의 38선을 넘어 월남하여 옴으로 순천시 저전동(당시는 昇州 楮田里,/ 지금의 順天市 楮田洞)의 자택에서 함께 기거하였다.

   후일 처남 정윤익은 외서초등학교 등의 교사와 순천, 광주, 서울 등지에서 한국상업은행의 행원을 거쳐 공인회계사와 세무사에 이르고, 둘 째 처남 윤신은 전남대를 졸업하여 고등학교 교사에 이르고 처제 정용삼은 순천의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다 출가한 후 전라남도 고흥군 남양면의 보건소장으로 근무하다가 정년이 되었다.

   창현 함태영 은 같은 해에 전라남도 승주군 상사면과 별양면에 , 순천시(順天市 楮田洞)에 있던 사재인 자택을 처분하여 첫 번째 개척교회(장로교회)를 설립하였다.

   별량면 교회에 시무할 당시 신앙심 깊은 집사 한 분이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야습을 받아 살해되고 그의 가옥이 불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살해를 당한 그 집사는 살해를 당하기 전 무렵, 공산주의자들의 난동이 있을 것이니 생명에 위협이 있을 것임으로 멀리 피신하는 것이 좋겠다고 창현 함태영 목사에게 비밀스레 귀띰하여 주었다.(교회 안에도 공산주의자들이 있었는데 사형 직전에 공산주의자들을 책임지고 교화시키겠다고 교회 안으로 데려다가 같이 생활하며 복음으로 교화시키기도 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그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여수-순천반란사건(麗順反亂事件)의 예언이었음을 누가 알았으랴?

1947년 :

   (33세때) 순천고등성경학교를 졸업함과 아울러 서울 마포구 도화동산(용산구 도원동과 접경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서울로 이주하자 심계원장인 함태영(咸台永/1873-1964-종교가․법조인․정치가 : 별주 참조)씨를 찾았는데 함 심계원장은 창현에게 지방국장(地方局長)자리를 권유했으나 이를 사양하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기를 고집하였다.

   그 후 예수교 장로회 신학교인 한국신학대학(당시의 학장은 훗날 대한민국 부통령이 된 松岩 咸台永)에 입학하고 장신대(長神大) 등을 2년 수료 후 그리스도의교회의 환원운동이 성서적인 신학이며 참 신앙적인 기독교교리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의교회의 신학교인 서울성서신학교(현재의 서울기독대학교). 당시의 학장은 미국인 선교사 죤․제이․힐 목사)로 전학하였다.

이 무렵 강순명 목사와 만나 같이 인연을 맺게되며, 함께 천막학교도 운영, 북한으로부터 월남한 불우한 난민의 학동들을 교육하고, 겸하여 천막교회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창현 함태영과 그의 가족들은 자택의 집을 마련하기 위한 잠시동안은 북한에서 38선을 넘어 월남한 난민들과 함께 서울 마포구 도화동산(麻浦區 桃花洞山))에 있는 일본군이 사용하다 버리고 간 대공포대 벙커 지하굴에서, 또는 임시 천막촌에서 기거하였다.

   이 때에 북한에서 월남한 정희건, 김00씨와 사귀었는데 이 두 분은 신앙심이 매우 돈독한 재건교회파 신자로서. 함께 그리스도의교회로 환원하여 서울성서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고 그리스도의교회에서 사역하였다.

정목사와 김목사는 신학공부를 위하여 주경야독을 하였는데 주간에는 나무 젓가락(일어로 와리바시)을 만드는 공장을 차려 사업을 하였다.

   이곳에서 창현 함태영의 아우인 태무(泰武)도 동업을 시작으로 토목 건축 등의 사업을 하며 형인 창현과 함께 기거하였다.

창현 함태영은 같은 해에 손수 지은 자택의 건축이 완료되어 안주하게 되었고, 신축한 자택에는 방 2칸, 서재 1칸, 부엌 1, 점포 1개가 있어 상점을 경영하며 신학공부를 할 수 있었다.

   서재는 방과 겸용으로 사용했는데 이 서재에 마련하였던 장서들이 6.25전쟁 때에 모두 분실되거나 훼손되어 무엇보다도 애통해 하였다.

상점이 마련되기 전 까지는 용산역 등 시장거리와 도로변 등지에서 손수레에 풀빵틀을 싣고 다니면서 행상을 하였다. 이렇게 빵을 구워 판 수입으로 학비를 마련하고 가족의 생계를 어렵게 꾸려 나아갔다.

   빵틀을 손수레에 끌고 행상을 할 때에는 자주 경찰관의 단속에 걸려 끌려가 경찰봉으로 구타당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창현의 내외가 새벽에 상품구입차 도매시장에 장보러 가며 숯불 풍로에 밥짓는 것을 장자인 동진에게 맡겨두고 나갔는데, 동진은 추위에 숯불 풍로를 끌어안고 쪼이다가 숯불에서 나오는 일신화 가스를 마시고 사경을 헤매다 12시간 후에야 간신히 깨어난 일도 있었다.

   또한 차남인 성원은 뇌염질환으로 식물인간이 되어 1년 이상을 누워 앓다가 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슬픔의 시험이 컸고 충격 또한 컸다. 새벽부터 낮 동안은 상품을 구입하고 장사를 하며, 밤에는 공부를 하는 주경야독의 세월이었다.

   또한 이 시절에는 아현동에 있는 한국신학대학장 송암 함태영(松岩 咸台永) 목사댁에 가끔식 방문하여 사제지간으로서 또는 강능함씨의 일가로서 문안인사도 드리고 신학에 관한 의견이나 진로에 관한 조언을 듣기도 했는데 때로는 장자인 동진을 데리고 가 함씨 일가의 어른께 문안드리는 것을 이르기도 하였다.

   그 후 송암 함태영(松岩 咸台永) 목사는 6.25전쟁 등으로 생활거처가 멀어지고, 부통령으로서 분주하였으므로, 창현 하태영 목사도 역시 자신의 목회일로 분주하기도하여 방문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

1948년 :

   (34세때) 전라남도 승주군 별량면 개척교회에 시무 할 때에 공산주의자의 방화와 살해로 순교한 집사 한 분의 예언대로, 한국민족의 비극인 동족상잔의 여수․순천반란사건(여순반란사건1948.10.19)이 일어났다.

   온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하여 난을 피하고 신학공부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이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이었다고 믿게 된다.

이 무렵 일제시대에 압록강철교의 철로를 절단키 위하여 동행했던 친구 서00씨는 공산주의 사상을 가졌다고 하여 서북청년단에 끌려가 수 차례 구타 등 린치를 당했는데, 후일 6.25 인민군남침전쟁발발 직전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었다.

   서씨에게는 서울에 부인과 일남일녀가 있었다. 그 당시 서울 마포구 도화동산(도원동과 경계부근)에는 서북청년단이 있었는데 거의 매일과 같이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자들을 불러 들여 구타할 때에 들리는 고통의 비명소리가 들렸었다. 참으로 이 나라 이 민족의 크나큰 비극이었다.

   후일 6,25남침전쟁이 발발하면서 서씨의 가족들은 창현 함태영 목사의 가족들과 함께 피난길 에 올랐다. 한강의 여의도 강변 모래 벌에 도달했을 때에 한강철교를 끊는 유엔군 폭격기가 폭탄을 투하하자 각각 가족끼리 끌어안고 강변 모래 벌(지금의 여의도 - 대방역건너)에 엎드렸다가 폭격이 멈추어 모래 먼지와 폭탄의 검은 연기가 살아졌는데도 서씨의 가족은 보이지 않았다. 이 후 영영 만날 수 없었다.


이름 패스워드 비밀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