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CCS 홈페이지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
main_5.GIF main_6.GIF main_7.GIF main_8.GIF

 

 

 

 

 

 

 

 

 

 
작성일 : 10-01-10 19:06
한국의 사도 바울 김은석 목사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10,818  

한국의 사도 바울 김은석 목사

글: 素光 조동호 목사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들어가는 말

김은석 목사는 성경으로 완전무장한 하나님의 용사였다. 성경만을 읽고, 성경만을 말하며, 성경의 내용만을 설교하고, 성경의 내용만을 가르친, 성경에 목숨 건 성경의 사람이었다. 이것이 김은석 목사가 보여준 실천적 목회자의 삶이다.

김은석 목사의 성경지식은 그의 설교나 강해를 듣는 이들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마치 성경 전체가 머릿속에 펼쳐져 있는 것처럼 신구약성경의 짝을 설명할 때에 사람들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깊은 감명과 은혜를 받았다. 오직 성경만을 말하고 그 성경 위에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웠던 신약성경교회의 개척자였고,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사도 바울이었다.

1950년대 목회자의 삶은 갈등과 가난함과 곤고함과 괴로움 그 자체였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교회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6.25동란직후라서 한국경제는 이루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웠다. 필자는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서 1950년대의 목회자들의 이런 수고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고, 애린가슴과 감동의 눈물로 김은석 목사의 성경통독 메모를 읽을 수밖에 없었다. 메모내용을 옮겨 적는 일은 시간도 많이 걸리고 고달프고 힘든 작업이었다. 확대경을 손에 들고 낡고 오래된 그의 성경에 쓰인 메모들, 특히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흘러 많이 흐려진 글씨들, 지금과는 많이 다른 어법과 용어들, 그리고 한자까지, 판독하고 옮겨 적느라 등에 담이 심하게 들었고, 병원엘 다니며 치료받느라 한동안 고생이 많았다.

필자는 김은석 목사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하려하지 않았다. 이 글은 단지 그와 같은 거룩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는 것에 불과하다. 필자는 이런 저런 자료들을 수집하여 종합하려하지 않았다. 이 글은 단지 김은석 목사가 남긴 성경통독메모를 정리하고 소개한 자료집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글은 1953년부터 1958년까지의 6년간의 행적에만 국한되어질 것이다. 그 이전과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와 정인조 목사의 <김은석 목사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의 인터넷 자료, ‘김은석 목사 자료모음 코너’를 참고해 주기 바란다.

1958년 이후의 활동자료가 전무한 상황이지만, 다행히 몇 장의 사진들이 남아 있어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58년 4월 13일 산상연합집회 중에 심영진 목사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고, 1960년 김은석 목사와 김완례 사모가 박점상 목사의 침례신학교 졸업식 날 셋이서 찍은 사진이 있다 (제공 장성우 목사). 또 다른 사진은 한국성서신학교의 교수 및 학생들과 함께 대전시 도마동 (충남 대덕구 유천면 도마리, 성화교회, 심영진 목사 시무) 대전 그리스도의 교회 앞에서 찍은 것으로써 가장 최근의 활동모습을 담고 있다. 한국성서신학교는 1959년 12월에 문을 열었지만, 늦어도 61년까지는 앞서 언급한 충남 대덕구 유천면 도마리 성화교회에서 강의를 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또 김은석 목사는 1963년 1월 하순에 소천 하였다. 따라서 이 사진은 아무리 빨라도 1959-60년 겨울철이고, 아무리 늦어도 1960-61년 겨울철이다. 또 이 사진은 김은석 목사가 정확히 몇 년간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강원도에서의 침거를 끝내고 소천하시기 전 이미 몇 년간 활동을 재개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이 사진에 나오는 알만한 인물들은 앞줄 왼쪽부터 힐 요한 선교사 부부, 김은석 목사, 심영진 목사, 김태수 목사, 뒷줄 왼쪽부터 오재건 장로(사진 제공자), 고재윤 목사, 뒷줄 오른쪽부터 고광석 목사, 김찬영 목사 등이다. 뒷편 서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도마리 성화교회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했던 분들이다.

김은석 목사의 성경메모는 성경통독일지라고 볼 수 있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은 그보다 훨씬 더 상세하다. 그 이유는 아마 이들 메모가 자신의 기억을 위해서가 아니라, 훗날 그의 메모를 읽게 될 사람들을 위해서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메모를 읽다보면, 훗날 누군가가 자신의 메모를 읽게 될 것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드는데, 그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마치 보고하듯이 적고 있는 경우가 꽤 많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그토록 소중히 간직하였던 성경책을 손에서 놓고 하나님 품으로 떠난 지 무려 46년만인 2009년에서야 다른 누군가가 다름 아닌 바로 우리가 되어 그의 메모를 읽게 된 것이다. 이것이 어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며, 그분의 경륜과 섭리에 따라 이뤄진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김은석 목사의 메모를 읽고 연구하는 자들에게 그의 깊은 영성과 복음에의 뜨거운 열정이 그대로 전수되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마지않는다.

  2010년 1월 10일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소광(素光) 조동호 목사.

<김은석 목사 가족 (1958년 4월 15일)>
(사진제공 박점상 목사)

 

 1. 김은석 목사와 세상사

김은석 목사는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를 보면, 1963년 1월 21일 충남 논산시 충곡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소천하신 것으로 되어 있고, 양아들 김성철 목사의 자서전, <삶이란 감사하면 그것으로 O.K다>에는 “63년 1월 하순”으로만 나와 있다. 김은석 목사는 양아들 김성철 목사가 군에 입대한지 얼마 안 된 훈련병 때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군에서는 이 소식을 훈련 중이라는 이유로 전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돌아가신지 꽤 날짜가 지난 후에서야 알았다. 가족 중에는 아무도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고 한다.

김은석 목사의 생신 날짜는 정확하게 음력 5월 14일이다. 성경통독메모에 생신에 관한 언급이 1955년 7월 3일과 1956년 6월 22일에 두 번 나온다. 모두가 음력 5월 14일이다. 다만 출생연도가 정확하지 않다.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를 보면, 1902년으로 되어 있는데, 1955년 7월 3일 메모를 보면, “금일 주일 아(我) 생일인데 갈산교회당 골방에서 시편 83:1-89:12까지 봉독함. 완례씨도 내(來)함. 4288년 5월 14일 황우재, 이정자, 암(임?)정례, 집사님들도 내(來)함. 아(我) 출생(出生) 52년 주이다.”고 적고 있다. 1955년이 52주년이라면, 1903년생이기 되기 때문이다. 본인이 적은 글일지라도 착각이란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1902년생인지, 1903년생인지는 정확하게 확신할 수 없다.

김은석 목사는 매년 한 차례 이상씩, 때로는 자택에서, 때로는 타지에서, 병이 들어 앓아눕는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1958년 10월 13일에는 부산침례회 병원에 입원까지 하였다. 김완례 사모도 건강이 좋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김은석 목사는 사모의 병약함이 심령병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심한 말까지 적고 있다. 사모의 불평과 불만생활에 화가 나서 쓴 말이다. 그러나 사모의 불만불평에 원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 년이면 대부분의 날들을 전도 집회며 성경연구집회로 타지에서 보내는 남편, 그것도 먹고살기가 지극히 곤란했던 1950년대, 끼니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역자들을 떼거리로 몰고 들어오는 남편, 그런 남편에게 어찌 불만이 없을 수 있겠는가? 김은석 목사는 하나님의 일과 자기 입장만 생각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의 1957년 8월 26일(월)자 메모를 보면 당시의 곤란한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957년 8월 26일(월) 아침은 대전 자택에서 고린도전서 1:1-2:9까지 봉독함. 어젯밤 고린도전서 7장 3절대로 지내었고, 편지를 받은 최춘선, 김영원, 김영숙, 이종만, 설하운, 태일러, 박은병씨가 온 것이었다. 집이 민망함은 완례씨가 항상 불만생활을 함입니다. 심영(령)병이 있음으로 육신병이 임함. 오전 9시 48분경에 고린도전서 3:9-4장말까지 봉독하는 중 내가 크게 각성을 가지게 된 것은 4장 9절과 4장 11절 이하 바울이 경천애인 생활한 것을 보고 위안 받음. 지금 날마다 집에 당함은 생활난입니다. 저녁에 대전 자택에서 고린도전서 5-6장까지 봉독함. 김은영, 최근수, 이신, 김윤구, 김영애, 고광석, 임온년, 7남매가 다녀가심. 최근수, 김은영은 혼인사로, 이신은 목포 강사로.

여기서 “고린도전서 7장 3절대로 지내었고”는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는 성경말씀대로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다했다는 뜻이다. 일 년의 대부분을 타지에서 보내는 만큼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집이 민망함은 완례씨가 항상 불만생활을 함입니다.”는 몰려오는 동역자들을 어찌 대접할 것인가라는 현실문제로 김완례 사모가 화를 냈을 가능성을 추측해볼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김은석 목사 자신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으리라 생각되어진다. 그것은 고린도전서 4장 9절의 말씀,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와 4장 11절의 말씀,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를 통해서 자신들의 처지를 사도 바울의 것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지금 날마다 집에 당함은 생활난입니다.”라는 고백은 자신과 가족의 처지뿐 아니라, 동역자들의 처지가 어떠했는가를 총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되어진다.

김은석 목사의 8월 26일(월)자 김완례 사모에 대한 비난은 이보다 4일전에 꾼 꿈과도 전혀 무관치 않는 듯싶다. 1957년 8월 22일(목) 메모에 따르면, 김은석 목사는 상당히 기분이 나쁜 꿈을 꾸었다. 그 꿈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지난 밤 몽사에는 안해(아내)가 다른 사람(에)게 시집에 갔다고 하며 가정물건도 가지고 갔다며 성철이 섭섭함을 보다 나도 기분이 상함을 지내었음.” 이는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채 험한 가시밭길을 걷고 있는 전도자 김은석 목사의 심리적 불안을 드러낸 것이 아니었는가 싶다. 이 꿈을 꾸기 하루 전인 1957년 8월 21일(수)만 해도 아침에 충북 청원군 남일면 황청교회에서 사도행전 26-28장까지를 봉독하면서 “계시로 말미암아 음성을 듣고” 로마서 4장을 봉독하고 있다. “계시로 말미암아 음성을 듣고”와는 상관없이 가정문제, 경제문제, 교회문제, 핍박과 비난은 떠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기세를 높여 김은석 목사를 영적으로 공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갈등과 고민을 우리는 1954년 7월 24일자 메모를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성경을 봉독 중 들이난(들리는) 말리(말이) 나을(나를) 거짓 선지자라는 말과 나를 불신용자(不信用者)은(나를 신용하지 못하는 자는) 말만타(말이 많다?) 그런 고로 어이할까.” 또 1957년 8월 23일(금)자 메모에서는 “저녁집회는 기독교장로회 전도자 지(池)씨가 합석하였는데, 은혜를 나누는 것이 아니고 책잡으려는 주의를 표하고 떠났습니다. 지금 각 교회 분위 형편은 대체가 그러하다.” 1957년 8월 23일(금)자 메모는 사모에 대한 불안한 꿈을 꾼 다음 날의 일이었다. 그가 유명세를 탈수록 그를 비방하고 해하려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교회 외부의 비난과 핍박과 내부의 이단과 분열과 갈등과 가난함과 곤고함과 괴로움이 늘 있어왔다. 그 길을 예수님이 걸었고, 바울 사도가 걸었으며, 한국의 사도 바울 김은석 목사도 걸었던 것이다. 김은석 목사에게도 갈등과 시련은 언제나 있었고, 그 때마다 성경봉독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새 힘을 얻곤 하였다.

김은석 목사의 성경통독메모에는 1950년대의 물가지수를 엿볼 수 있는 몇 가지 기록들이 있다. 그가 지불한 몇 가지 비용들을 보면, 이발료 120환, 안경 3,200환, 모자 80환, 냉면1기 2백환, 배표 300환, 부강에서 서정리(평택)까지 열차표 890환이었다. 참고로 김은석 목사가 자주 탔던 열차들에는 경부선 5, 6, 14열 급행열차, 호남선 33, 34열차, 전라선 태극호 601열차, 통근차가 있었고, 버스로는 금성버스와 계룡버스 등이 있었다.

2. 신약성경교회들의 개척자

김은석 목사의 충실한 동역자들은 목사 이신(13회), 김재순(24회), 전도사 김명석(26회), 김은영(22회), 고광석(12회), 임남규(10회), 전도희(23회), 자매 강신규(26회), 이혜순(9회), 김숙명(12회), 박종예 등이었다. 이들은 김은석 목사의 동역자들일 뿐 아니라, 순회여행을 함께한 동행자들이기도 하였다. 이름 옆의 가로 속 횟수는 김은석 목사의 성경통독메모에서 이름이 적힌 빈도수이다. 1953년부터 1958년까지 김은석 목사의 성경통독메모에 적힌 목회자, 전도사, 장로, 집사, 성도들의 이름만 하여도 220여명이나 된다. 메모에 적힌 사람들은 아래에 나열한 명단보다 실제로는 더 많다. 편집자가 빠뜨리고 옮겨 적지 못한 이름들도 꽤 있기 때문이다. 아래의 명단은 주소록 명단과 통신 명단과는 별개의 것이다.

  • 강만수 강순임 강신규 강월선 고광석 고동주 곽형도 권영숙
  • 권종철 귀제원 김경수 김경열 김광우 김교인 김규상 김기주 김남산
  • 김눅기 김대석 김도철 김동국 김동열 김만석 김명석 김명순 김봉구
  • 김봉섭 김삼용 김상열 김상옥 김선원 김성철 김숙명 김순식 김영애
  • 김영환 김오봉 김 완 김완례 김윤구 김은영 김일례 김일순 김일제
  • 김재수 김재순 김정만 김주한 김준수 김준철 김창수 김천금 김청길
  • 김칠봉 김칠성 김태규 김태달 김태수 김태열 김향자 김호민 김홍석
  • 김확실 나연찬 노광수 노의수 노이석 도주일 도화당 마은정 목고환
  • 문광예 문대연 문옥자 문원섭 박근영 박기서 박병우 박상호 박순애
  • 박승호 박신상 박신애 박옥순 박용기 박유선 박은병 박인순 박자매
  • 박전도 박점상 박정엄 박종승 박종식 박종예 박진식 박치환 배문순
  • 배윤순 백전순 백정순 서석용 석중한 설하운 성소녀 송석희 송안성
  • 신상득 신숙길 신영두 신정철 안명수 안영천 안혜옥 오연홍 우정예
  • 원교선 원용숙 유재춘 윤근오 윤묘중 윤양춘 윤옥동 윤일상 윤철호
  • 이경님 이공님 이기철 이명근 이문구 이복동 이성하 이숙준 이순애
  • 이 신 이원노 이원화 이은우 이은희 이재균 이재천 이정자 이종만
  • 이종원 이종철 이학재 이한상 이혜순 이흥식 임남규 임미라 임온년
  • 임현건 임혜숙 전대현 전도희 전봉상 전상규 전현동 전현재 정곡간
  • 정귀남 정매실 정옥순 정유순 정찬성 정히건 조국형 조규석 조대식
  • 조봉순 조장환 조종화 조태국 주관보 주기현 주명삼 주안성 지철휘
  • 진성구 진이삭 진종운 진중열 천세영 천정희 최근수 최길수 최병록
  • 최병수 최성대 최성례 최성윤 최순국 최영식 최영임 최요열 최요한
  • 최일복 최장석 최재호 최재화 최정순 최정택 최춘선 최한주 태일러
  • 한명희 한미자 한정석 한홍석 홍기형 홍사윤 황순흥 황하주 황현욱

김은석 목사가 개입한 교회들은 80여개 교회들에 이른다. 대부분이 그리스도의 교회들이지만, 타 교단의 교회들도 섞여 있다. 타 교단들의 교회 방문은 대개가 부흥회 인도 때문이었다. 김은석 목사의 주 활동무대는 충청남북도와 전라남도였다. 이곳에 그의 영향으로 세워진 교회들이 많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백일집중성경연구회’를 주도한 지역들도 이들 지역이었다. 이 기간 김은석 목사는 제자양육을 위해서 집을 떠나 이들 지역들에 장기간 머물렀고, 특별한 일이 아니면 집엘 다녀오지 않았다. 김은석 목사는 이들 기간에 지역교회들을 순방하며 부흥회를 인도하였고, 인근에 가정교회들을 세웠으며, 목회자를 임명하여 세웠다. 교회를 세우고, 목회자를 키워 임명하는 것은 사도 바울 선교의 특징적인 활동이었다. 김은석 목사는 바울과 동일한 수고를 남녀 동역자들과 함께 수행하였던 것이다. 그가 관여하였거나 방문한 교회들은 다음과 같다. 교단의 명칭이 따로 없을 경우 대부분이 그리스도의 교회들이다.

  • 경기도 서정리(평택) 교회
  • 경기도 수원시 세류동 1구 1통 30반 천막교회
  • 경남 진주 칠암동 318 교회(김은석 목사 동생 김경원 목사 시무)
  • 경남 통영군 도산면 도선리 1구 그리스도의 교회
  • 경남 함양군 안의면 안의 교회
  • 경북 금능군(김천시) 개령면 대광동 2구 대보 그리스도의 교회 (편집자 주: 장성우 목사의 부인 김순옥 사모의 모친 김묘암씨가 설립)
  • 경북 대구 신천동 그리스도의 교회
  • 경북 대구시 동인동 교회
  • 경북 청도군 금천면 명포교회
  • 서울 마포구 아현동 교회
  • 서울 이태원 교회(순복음, 최요열목사)
  • 서울시 도원동 교회
  • 서울시 서대문구 창천동 54번지 70호 성결교회
  • 서울시 서대문구 평동 16의 23호 그리스도의 교회 (교역자회)
  • 서울시 성동구 청량리 그리스도의 교회 (교역자회)
  • 서울시 중구 도동 2가 5번 그리스도의회 대한 감리회 감남교회
  • 양동교회(?광주시 서구 양동) 
  • 전남 강진군 군동면 삼신리 연화동 교회
  • 전남 강진군 작천면 작천 교회
  • 전남 강진읍 기룡리 용동 교회
  • 전남 광주 남구 사동 22번지 그리스도의 교회
  • 전남 광주시 광산동 80번지 그리스도의 교회
  • 전남 광주시 금동 46번지 그리스도의 교회
  • 전남 목포 유달 교회 (편집자 주: 최요한 목사가 개척한 순복음교회였지만, 그리스도의 교회 성경연구처가 이 교회에 있었음)
  • 전남 목포시 죽교동 사구 동 399번지 교회
  • 전남 무안군 지도면 대조리 성결교회 (김완례 사모의 질녀 내외 시무)
  • 전남 무안군 현경면 평산 교회
  • 전남 순천 오순절교회
  • 전남 영광읍 교회
  • 전남 영광읍 도동리 교회
  •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 교회
  • 전남 함평군 손불면 궁산리 신흥부락 교회
  • 전남 함평군 함평면 석성리 신생촌교회
  • 전남 함평군 함평면 석성리 청학동 그리스도인 집회소
  • 전남 해남 송지면 매화리 교회
  • 전남 해남군 백호리 교회
  • 전남 해남군 옥천면 교회
  • 전남 해남군 옥천면 도림리 김응임 노부인 댁 교회
  • 전남 해남군 옥천면 동리 윤철호씨 댁 동리교회
  • 전남 해남군 옥천면 신죽리 교회
  • 전남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 교회
  • 전남 해남군 옥천면 팔산리 화랑교회
  • 전남 해남군 옥천면 팔산리 황당교회
  • 전남 해남군 옥천면 화당교회
  • 전남 해남군 현산면 고현리 최정택 형제 예배처소
  • 전남 해남군 화산면 방축리 교회
  • 충남 논산군 부적면 충곡리 교회
  • 충남 대전 선화동 2구 315번지 그리스도의 교회
  • 충남 대전시 반암동 교회
  • 충남 대전시 신탄진 교회 석봉리 집회소
  • 충남 대전시 판암동 교회,
  • 충남 부여군 규암면 노하리 교회
  • 충남 부여군 규암면 합송리 교회(현 교역자회)
  • 충남 연기군 동면 갈산교회
  • 충남 연기군 동면 갈산리 칠미부락 교회
  • 충남 연기군 동면 월산동 활골교회
  • 충북 괴산군 불정면 외령리 ?말 교회
  • 충북 괴산군 소수면 소수면 수리 교회
  • 충북 중원군(충주시) 신이면 화석리 방축골 교회
  • 충북 청원군 강서면 문암 교회
  • 충북 청원군 남일면 방서리 교회
  • 충북 청원군 남일면 황청리 교회,
  • 충북 청원군 남일면 황청리 정유순 자매 집 교회
  • 충북 청원군 부용면 부강 교회
  • 충북 청원군 북이면 송정교회
  • 충북 청원군 북이면 송정리 새테말 교회
  • 충북 청원군 오창면 가좌리 교회
  • 충북 청주시 영운동 교회
  • 충북 충주시 동양면 조동 교회
  • 충북 충주군 소태면 복탄리 교회
  • 형성교회
  • 화동교회

김은석 목사의 성경통독메모를 보면, 일 년의 대부분을 교회순회와 성경연구집회를 위해서 타지에서 보내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여행목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밝히는 경우가 매우 드물어서 정확하게 부흥회의 일로 나갔는지, 성경연구집회의 일로 나갔는지가 명확하지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래의 몇 가지 사례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김은석 목사와 그의 동역자들이 해마다 지역을 바꿔가면서 성경연구집회를 개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래는 김은석 목사가 메모에서 분명하게 집회의 성격을 밝힌 경우들이다. 이들 집회들의 경우 평일 10-20명, 주말 수십여 명씩 모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 1954년 5월 14일 부강교회에서 일일 성경학을 마치고 충북 충주군 동양면 조동교회 방문차로 가는 중 강신규, 임혜숙 두 자매와 같이 동행하였다.
  • 1954년 6월 14일부터 전남 목포시 죽교동 39번지 2통 4반 해병대 앞 유달 교회당 (최요한 목사 시무, 순복음교회)에 ‘그리스도의 교회 성경연구처’라는 간판붙이고 백일성경연구집회 인도하다.
  • 1955년 2월 25일부터 6월 5일까지 충북 괴산군 소수면 수리 교회에서 백일성경연구집회 인도하다.
  • 1957년 1월 1일부터 3월말까지 충북 청원군 부용면 부강 교회에서 백일성경연구집회 인도하다.

이밖에도 부흥회 인도를 언급한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최용호 목사의 박정자 사모의 증언에 따르면, 김은석 목사가 지방에 도착하면 그날로부터 일주일에서 열흘씩 밤낮없이 집회가 지속되었고, 매번의 집회마다 시간제한 없이 수 시간씩 사경회가 지속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 1953년 8월초 전남 강진군 금동면 연화동 그리스도의 교회 집회소에서 연합성경사경회를 9월 15일까지 개최하다.
  • 1953년 9월 중하순에 전남 순천시 영동 5번지 오순절교회 부흥회 인도하다.
  • 1954년 2월 중순에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 교회에서 부흥회 인도하다.
  • 1954년 3월 초에 전남 해남군 옥천면 팔산리 황당교회 부흥회 인도하다.
  • 1954년 6월 초에 대구 동인동 교회 부흥회 인도하다.
  • 1955년 6월 말에 서울 성경신학원 부흥회 인도하다.
  • 1956년 4월 하순에 대전시 판암동 애생원 교회 부흥회 인도하다.
  • 1956년 11월 중순 경북 대구 신천동 그리스도의 교회 부흥회 인도하다.
  • 1957년 8월 27일부터 9월 4일까지 목포성경연구소에서 전남 전도자 수양회가 선교사들에 의해서 개최되다.

3. 김은석 목사의 박애정신

김은석 목사의 박애(博愛) 정신을 볼 수 있는 사례들은 많다. 그의 성경통독메모들을 통해서 김은석 목사가 어려움에 처한 이들, 특히 교회와 전도자들을 돕기 위해서 자신의 경비를 써가며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첫째, 김은석 목사는 1957년 3월 23일부터 24일까지 부모 잃은 고아들을 보육원에 위탁하기 위해서 이종만 목사가 운영하던 인천시 학익동 그리스도의 교회 보육원을 오양균, 김규제, 김규성 세 아이들을 데리고 방문하고 있다. 3월 23일 토요일 아침에 수원 동생네 집에 들러 아이들에게 아침을 먹인 후 오후에 인천에 도착하였다. 이런 일이 아닐지라도 김은석 목사는 수시로 충남 부여군 합송리 구애보육원, 판암동 애생원, 인천 학익동 그리스도의 교회 보육원, 인천시 부평 그리스도의 교회 보육원, 청주시 영운동 박인회 양로원 등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성경을 봉독하고 말씀을 전하고 있다.

둘째, 김은석 목사는 1955년 7월 29일 금요일 아침에 충북 청주 예배당 구입 문제로 이한상 형제의 부탁을 받고 서울 선교부에 올라가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이 일도 하루에 처리하지 못하고 오던 길 밤에 천안에 있는 황해여인숙에서 하루 밤을 보내게 된다.

셋째, 김은석 목사는 1956년 7월 10일 화요일 새벽 2시경에 대전 은행동 자택에서 성경 요한복음을 봉독한 후에 새벽 4시 31분발 서울행 제6열 급행열차를 타고 선교부에 가고 있다. 선교부 방문의 목적은 김명석 전도사 부인에게 급하게 도와야할 일이 생겨서 도와줄 방도를 찾기 위해서였다. 이뿐만 아니라, 가좌교회의 일과 또 다른 일들도 함께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1955년 12월 27일자 메모에서 김은석 목사는 가좌교회를 “핍박이 심한 개척이다.”라고 적고 있어서 매우 어려운 처지의 개척교회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김은석 목사는 가좌교회에서 힘겹게 분투하는 전도희 전도사를 자주 위로 방문하였고, 여러 형제자매들을 불러 모아 그곳에서 성경연구집회를 갖곤 하였다. 또 김은석 목사는 1957년 9월 6일 금요일에 몇몇 전도자들을 각기 다른 지역교회로 집회가게한 후에 본인은 하이도행 외령호를 타고 석양(夕陽)에 무안군 하의면 하태에서 개척하는 임혜숙 전도사를 위로 방문하여 주일까지 그곳에 머물면서 함께 심방하고 전도하였다. 월요일 그곳을 떠날 때, 느낀 점을 이렇게 적고 있다. “오늘 하의에서 떠날 때 임혜숙 자매에 외로와함 보면서 동정심이 심하였다.” 주의 일을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주의 일군들, 특히 여성 사역자들의 노고에 대해서 김은석 목사는 깊은 동정심을 가졌던 것 같다. 공부할 때나 전도할 때나 항상 그의 곁에는 남성 동역자들과 제자들에 못지않게 헌신적인 많은 여성 동역자들과 제자들이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넷째, 김은석 목사는 병석에 누운 동역자들을 찾아 위문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1955년 8월 16일자에는 병원에 입원한 고광석 전도사와 판암동 애생원을 김옥여, 이원노, 강신규, 김완례 사모 등과 함께 위로방문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김은석 목사는 자주 병이 나는 김완례 사모의 병간호에도 힘쓰고 있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볼 수 있다. 아무리 바쁘고 할 일이 많아도 김은석 목사는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돌보는 일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정형기목사 11-01-17 06:05
답변 삭제  
김은석목사님은 넘 고지식할정도로 신앙생활을 하셨군요
저는 위에글에서보다는 아버지를통해 김은석목사의 이름을 많이들은것같습니다
저의 부친과 사역은 했는지모르겠지만 그당시 저의 부친께서도 여러교회를 개첫하셨습니다
외령 그리스도의교회 동량그리스도의교회 오순절충주교회(지금순복음교회)합송 그리스도의교회 부강 신탄진 등 활동을 많이하셨다고 하시더군요
더자세한 내용을 알고싶네요 
                                    정형기목사 예광순복음교회  010-3449-4000  으로 연락주세요
이름 패스워드 비밀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