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빈민 선교의 성자 노무라 목사,日서 은둔 첫 인터뷰… “청계천 빈민굴은 내 신학교였다” <2009.12.23 21:52, 국민일보>
1970년대 서울 청계천 선교는 세계 기독교계에서 빈민선교의 대표적 사례로 꼽는 역사적 사역이다. 이 사역은 전 재산을 팔아 헌신했던 한 일본인 목사의 피와 땀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무라 모토유키(78) 목사. 그는 젊음을 청계천 사역에 바쳤고 이 사역이 뿌리를 내리자 1985년 일본으로 돌아가 은둔하면서 한국 교회에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기자가 오랜 수소문 끝에 지난 14일 도쿄에서 4시간 거리인 야마나시현 야쓰가다케산 남쪽 산기슭 산골 교회로 그를 방문했을 때 노무라 목사는 “기어코 찾아오셨군요!”라며 마른 손을 내밀었다. 여위었지만 강한 손이었다.
노무라 목사는 “지금까지 해지도록 속옷을 입는 가난한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며 “산골 마을에서 20여년간 목회를 하며 유기견을 키우고 있다”고 근황을 알려주었다. 그는 “한국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나라”라며 감격해했다.
노무라 목사는 68∼85년 청계천 일대에서 제정구 전 국회의원(99년 작고·빈민운동가), 황화자 전 작은자복지선교회장(97년 작고), 김진홍 목사(구리 두레교회) 등과 함께 복음 전파와 구제에 힘썼다. 그는 청계천 빈민의 참상과 그곳 어린이들의 헐벗고 굶주린 모습에 충격을 받아 73년에는 도쿄 자택을 팔아 빈민 구제와 탁아소 건립 비용으로 사용했다.
노무라 목사는 박정희 정부가 청계천 일대 빈민촌을 철거하자 김 목사 등과 협력해 경기도 남양만 공동체 건설 이주비 수억 원을 마련하는 등 빈민선교에 젖줄을 댔다. 서독(독일)과 호주 교계를 찾아 지원을 호소, 탁아소 건립비용과 2000명의 절대 빈곤층 아이들이 20년간 매일 식사를 제공 받을 수 있는 급식비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아울러 남양만 이주 철거민들의 자립을 위해 뉴질랜드를 수차례 방문, 종자 소 600여 두와 최신 낙농기기를 들여왔다. 당시 그는 한국 중앙정보부로부터 조사를 받는 등 많은 탄압을 받았다.
그가 한국에 다시 알려진 것은 2007년 청계천 옛 사진과 관련 자료 2만여 점을 청계천문화관에 기증하면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한국에서 행한 선교 활동을 드러내지 않고 ‘노무라 할아버지’임을 강조했다.
노무라 목사는 “70년대 초 제암리교회를 찾았을 때 그곳 권사님들이 우리 가족을 위해 귀한 설탕물을 타주시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청계천 빈민굴은 내게 신학교였다. 예수의 얼굴을 본 곳도 그곳 움막이었다”며 한국 빈민선교의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성탄 특집 빈민의 성자 노무라 목사] “움막 여인에게 손 내민건 나 아닌 예수님” <2009.12.23 18:42, 국민일보>

(상) 1973년 성탄전야 청계천 뚝방촌
1973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의 청계천 하류 뚝방촌(현재 군자차량기지 일원). 청계천을 따라 뚝방 밑으로 형성된 빈민가에도 성탄 전야가 찾아왔다. 그러나 경사진 둑을 파고 지은 움막, 얼기설기 지은 판잣집 등 1600가구 어느 곳도 웃음소리가 새어나오지 않았다. 한기와 배고픔에 우는 아이들 소리, 어른들의 싸우는 소리만이 청계천 악취와 뒤섞여 삶의 고단함을 그대로 보여줬다.
이날 한국 정부로부터 어렵게 7일간의 체류비자를 얻어 입국한 일본인 노무라 모토유키(당시 41세) 목사는 슬럼가 주민들에게 말씀과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기 위해 이집 저집 허름한 문을 열며 기척을 살폈다. 73년 한 해만도 10여회에 걸친 청계천 방문이었다. 일본인 목사가 빈민촌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 한국 정부는 ‘안보’를 이유로 탐탁지 않게 여겨 중앙정보부 등이 사찰에 나서는 시대였다. 체류 기간이 7∼15일 정도로 제한된 이유이기도 했다.
지난 14일 일본 야마나시현 야쓰가다산 산골 베다니교회에서 만난 노무라 목사는 두툼한 앨범 10여권과 각종 자료를 보여주며 당시를 간증했다.
“동료 일본인 목사 등과 청계천 움막의 비닐 문짝을 살짝 열며 한국말로 인사를 했어요. 그랬더니 한 아주머니가 놀라며 ‘조금 기다려 달라’고 했어요. 두어 평 남짓한 움막을 대충 치우는 듯하더니 우리를 맞았어요. 애 셋을 둔 과부였습니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오들오들 떨며 이방인의 방문을 신기한 듯 바라보더군요.”
한국 통역이 하나님 말씀을 전하러 온 일본 목사님이라고 하자 여인은 밖으로 나가 한참 후 비닐봉지에 쌀을 구해 왔다. 그리고 “그 오염된 청계천 물(청계천변 지하수를 마시고 된통 설사를 한 적이 있었다)로 쌀을 씻어 연탄불에 밥을 하더라”고 말했다. 여인은 목자를 위해 상자 위에 청어를 올려놓고 들지 않는 칼로 토막 쳐 국을 끓였다.
“밥은 설익었고, 생선 냄새는 역했어요. 한데 여인이 신문지 위에 밥상을 차리면서 ‘목사님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세요’ 하는 겁니다. 안 먹고 싶었어요(웃음). 한데 애들이 덜덜 떨며 우리를 지켜보는 겁니다. 먼저 먹어야 아이들도 먹을 것 아닙니까.”
일행은 예수가 탄생한 말구유같이 허름한 그곳에서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노무라 목사가 수저를 들었을 때 아이들과 함께 한 사람이 더 있는 걸 보았다.
“제가 일본과 미국에서 대학을 세 곳이나 다닌 사람입니다. 저는 그날 거기서 예수 형상을 보았어요. 움막 거적을 배경으로 가난한 자와 함께하신 예수님을요.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을 또렷이 보여주셨어요. 청계천은 제게 신학교였습니다.”
노무라 목사는 그 후 여인과 아이들을 위해 판잣집을 얻어 주었다. 그리고 성도가 된 여인은 청계천이 철거되자 그와 김진홍 목사 등이 이끄는 새로운 주거지 남양만 간척지로 떠났다.
노무라 목사는 자신이 찍은 여인의 움막 사진을 가리키며 눈시울을 붉혔다.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듯 밥상을 대접한 그 여인이 훗날의 ‘남양만 활빈교회 조금자 권사’(98년 무렵 작고)이다.
또 다른 사진. “그 해 찍은 이 여인은 폐결핵으로 남편을 잃었어요.”
그가 보여준 여인의 사진 밑에는 파란 글씨로 ‘切なる祈り(간절한 기도)’라고 써 있었다. “청계천 뚝방촌에는 육신과 심령, 물질이 가난한 사람들이 수만 명이었다”며 “구원을 기다리는 그들에게 교회가 유일하게 손을 내밀었을 뿐 아무도 돌보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사진 속 여인은 포대기로 아기를 업은 채 기도하고 있다. 그런 엄마를 지켜보는 큰아이의 눈망울이 안쓰럽다. 노무라 목사는 “남편을 잃고 도시 빈민으로 전락한 여인에게 손을 내민 예수의 사랑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무라 목사는 누구
1931년 일본 교토 출생. 모태 신앙으로 태어났으나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 노무라 가스코(99)는 도시샤(동지사) 대학 신학과를 졸업한 후 소비자운동에 나서 2005년 노벨상 후보에까지 오른 인물.
노무라 목사는 도쿄수의축산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해 켄터키성서대학, 남동부기독교대학, LA바이올라종합대학, 페퍼다인대학원 등에서 수학했다. 61년 귀국 후 목회 활동을 하다 70년대 초 청계천 빈민의 참상을 보고 충격을 받아 한국 빈민선교에 나섰다. 교회 주일학교 교사 시절인 50년 무렵 유학생 김오남(전 전남대 교수)씨를 만난 것 등을 인연으로 68년 한국을 첫 방문했었다. 부인 노무라 요리코와의 사이에 딸 메구미와 아들 마코토가 있다.
야마나시=글·사진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
[성탄 특집 빈민의 성자 노무라 목사] 뼛가루 가슴에 품고 침묵으로 찬양 청계천 빈민촌을 세탁시킨 눈물 <2009.12.24 21:34,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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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잊을 수 없는 한국의 성도들
1968년 서울 화곡동 그리스도신학대학 관계자들이 노무라 모토유키(78·일본 야마나시현 베다니교회) 목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노무라 목사와 같은 교단에 속한 이 학교 관계자들은 한국의 가난한 심령들을 위해 일본 기독교계가 나서줄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한국은 급격한 경·중공업정책으로 도시가 팽창하고 그에 따라 이농민이 늘어났다. 그러나 뿌리 뽑힌 이농민들은 청계천, 화곡동 등 서울 변두리의 도시 빈민으로 전락했다. 날품팔이와 행상으로 연명했고 아이들은 굶주렸다.
노무라 목사는 이 소식을 접하고 일본 목회자들과 함께 ‘한국교회를 생각하는 모임’을 조직했다. 그리고 4∼5년간 한국을 드나들며 소명을 실천할 대상지를 찾았다.
“도시 빈민선교하시는 분들과 어머니의 대학 동창인 서남동(작고·전 연세대 신학과) 교수 등을 찾아 뵀어요. 73년 어느 날 소개받은 성도에 이끌려 청계천 빈민굴을 방문하게 됐습니다.”
이런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악취와 소음, 공해 등으로 눈뜨고 볼 수 없는 현실이었다. 오물이 아무데나 버려진 지저분한 골목은 걸어 다닐 수 없을 정도였고 주민에게선 살아 보려는 의지를 찾아 볼 수 없었다. 그곳 빈민만도 6만여명이라고 했다.
그는 선교 방향을 정하고 그 곳에서 만난 당시 김진홍(현 구리 두레교회 목사) 전도사 등과 복음 전파와 구제에 나선다.
“그 해 7월이었을 겁니다. 빈민굴 가운데서도 가장 열악한 개미마을을 찾아 가가호호 문 두드리며 전도지를 돌렸어요. 한데 대낮에 16세가량의 한 소녀가 한 평 남짓한 움막에 누워 있는 거예요. 얼굴이 창백했어요. 고름이 흘러 방바닥을 적시고 그 상처를 파고든 파리가 상처 부위에 알을 낳아 구더기가 된 거예요. 오, 하나님.”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병마야)물러가라”고 기도하며 침을 발라 구더기를 잡아냈다. 물론 병원에 갈 형편이 안 되는 집안이었다. 소녀의 어머니는 더구나 점쟁이 말을 믿었다. 일행은 청계천 건너편 대형 병원으로 데려가기 위해 소녀를 김종길(현 화성 활빈교회 장로) 집사의 등에 업혔다. 병원이 눈앞에 보이는데도 다리(橋)가 없어 뱅 돌아 도착해야 했다.
“소녀는 영양실조로 인한 복합 질병이었어요. 환자를 내려놓으니 ‘돈 있어?’ 물어요. 없다고 했더니 데려 가래요. 나는 그 때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물었어요.”
노무라 목사의 물심양면 도움과 김 전도사와 그 어머니, 김 집사 등의 기도와 간호에 힘입어 소녀는 나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11월 끝내 소녀는 숨을 거뒀다.
지난주 베다니교회에서 만난 노(老) 목사는 소녀를 회상하며 눈물을 참지 못했다. 소녀를 잃은 것이 자신의 탓인 양 자책했다.
자살 청년 시신을 수습한 일도 잊을 수 없다. 74년 어느 날 지금의 장안교(당시 나무다리) 밑 오물구덩이에 시신 한 구가 떴으나 누구도 수습하지 않았다.
“김 집사가 막대기로 끄집어냈어요. 무연고자라 사망진단서조차 끊을 수 없었어요. 진단서 끊는 것도 돈이 있어야 했거든요. 돈 있는 사람은 저뿐이어서 경찰 등에게 여권을 보여주며 사정했더니 안 된다는 겁니다. 뇌물 주고 허가 받아 리어카에 실어 소각장으로 향했어요. 그곳에서도 뒷돈이 필요하더군요.”
정말 슬펐던 일은 화장한 뼛가루를 다시 청계천으로 가져와 장안교 다리에서 뿌린 것이라고 했다.
“뼛가루를 뿌리며 찬송을 불렀어요.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심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어요.”
청계천 빈민굴은 그렇게 그를 연단시켰다. 그는 빈민들을 위해 도쿄의 집을 팔아 뚝방촌 탁아소 건립에 나섰다. 그러나 정부는 아랑곳 않고 빈민굴 철거를 밀어붙였다. 빈민운동가 제정구(작고·전 국회의원)씨 등이 청와대에 탄원서를 내는 등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철거는 활빈교회 첨탑의 뼈대만 남긴 채 마무리됐다. 빈민 성도 일부는 이스라엘 키부츠와 같은 공동체를 꿈꾸며 그들의 지휘 아래 엑소더스 하는 심정으로 남양만 간척지로 향했다.
“저는 가난이 후대에 이어지지 않게 하려면 아이들을 먹이고 그 부모를 교육시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탁아소 건립을 확충해야겠다는 마음을 더욱 굳혔죠. 집을 팔아 수억원을 마련하고 귀한 가구와 스테레오 등도 처분했어요. 또 일본인 목사 등이 보태준 돈 등을 합쳐 계속 지원했습니다. 그 때 아내와 나는 속옷이 그물 될 정도로 입었어요.”
이로써 우리 현대사의 교계 빈민운동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청계천 활빈교회’는 ‘남양만 활빈교회’ 시대를 맞는다. 노무라 목사는 수백만원을 들여 서독(독일) 교계로 쫓아가 청계천 빈민들에 대한 지원을 호소해 당시 돈 수억원을 지원받아 탁아소 등을 지었다. 그 무렵 독일 청년들이 남양만으로 선교 봉사를 온 것도 그러한 배경이 있어서다.
또 남양만에 뉴질랜드산 종자 소를 수입해 분양하는 사업도 그의 헌신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70년대 내가 본 한국 사람들 얼굴엔 기쁨이 없었어요. 날씨와 자녀 얘기 외엔 모두 은밀하게 말하고, 서로를 의심해야 하던 암울한 시대였죠. 오늘날 사랑과 희락이 있는 한국이 자랑스럽습니다. 예수의 믿음으로 살아왔기 때문이죠.”
야마나시=글·사진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 |
[성탄 특집 빈민의 성자 노무라 목사] 그가 사랑하는 한국 “청계천 가난은 日帝 탓… 한국도 이제 타락 걱정해야” <2009.12.24 18:52, 국민일보>
멀리 후지산이 마주보이는 야츠가다케산 숲 속에 위치한 베다니교회. 노무라 목사는 지난 13일 ‘베다니주보’에 마태복음 10장 42절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를 인용해 말씀을 전했다.
그리고 이날 주보에 ‘70년대 청계천 슬럼가에 살고 있는 6만여명의 참상을 처음 목격했을 때 바로 그곳에 예수가 살고 있음을 직감했다’며 ‘내가 다섯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고독하고 괴로웠던 경험을 하나님께서 왜 주셨는지를 청계천 빈민굴을 보고 알았다’고 적었다.
아버지를 잃고 친척집 등에 얹혀살아야 했던 소년 노무라는 늘 외로웠다.
그는 “초등학교 때 일본 군대가 인도네시아 등을 약탈하고 그곳에서 만든 고무공을 전교생에게 나눠줬다. 그런데 우리학교 ‘조센진’ 2명에게는 안 줬다. 또 교토 거리의 조선인 직공들의 슬픈 표정도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 때 본국에서 생활비가 끊긴 유학생 김오남(전 전남대 교수)을 자기 집에 살게 하면서 한국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하게 된다. 일본서 망명 생활을 했던 지명관 전 한림대 교수 등 한국 지식인들과의 교류도 한몫했다. 여기에 54∼61년 미국 유학 시절 자신이 미국 사람들에게 받았던 인종 차별 경험 등을 통해 동급생에게 시달렸던 ‘조센진’ 친구들의 마음을 헤아리게 됐다.
“청계천 사람들의 가난은 우리 일본의 잘못으로 비롯된 겁니다. 6·25가 왜 일어났겠어요. 일본 때문이었습니다. 현재 복음에 취약한 일본은 희망이 없어요. 동물적인 젊은이들이 많아요. (서울 신촌, 홍대 거리를 지칭하며) 한국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데 한국은 예수님을 지나치게 일하게 해요(웃음). 서로가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일이 하나님을 위한 길이란 걸 믿고 따르면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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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특집 빈민의 성자 노무라 목사] 김종길 남양만 활빈교회 장로 “자기를 녹여 세상을 비춘 분” <2009.12.23 18:42, 국민일보>
내가 본 노무라 목사
“노무라 목사님은 촛불과 같은 삶을 사신 분입니다. 자기를 녹여 세상을 비추셨어요.”
청계천 활빈교회에서 빈민선교를 도왔던 당시 집사 김종길 장로(사진·남양만 활빈교회)는 노무라 목사 이야기를 하자 “어이구 우리 목사님요. 우린 큰형님이라고 부르기도 했어요. 뵙기와 달리 농담을 아주 잘하세요”라고 회상했다.
그러나 “청계천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도쿄의 집을 팔고 전세로 살다 나중에는 산골에 들어가 목회를 하고 있다는 얘길 듣고 너무 마음이 아팠다”며 ‘촛불의 삶’이라고 말했다. 실제 기자가 만난 노무라 목사는 팔순을 앞두고서도 남들이 입던 옷을 기증 받아 입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런 옷도 호사”라며 밝게 웃었다.
김 장로는 “당시 목회자로서 우리를 도우셨는데 일본인이 한국을 돕는 걸 이상하게 여긴 당국이 미 CIA요원 아니냐며 비자를 일주일밖에 내주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도 얼굴 한 번 붉히지 않고 ‘나갔다가 또 들어오면 되지’ 하시는 겁니다. 특히 청계천 아이들에게는 산타할아버지나 다름없었습니다. 들어오실 때마다 아이들 선물을 많이 가져오셨거든요.”
노무라 목사는 지금까지 200여 마리의 유기견을 보살필 정도로 개를 사랑한다. 그런데 청계천 사람들이 어느 날 노무라 목사에게 보신탕을 대접했다. “기도 후 갑자기 펑펑 우시더라고요. 입국 전 셰퍼드가 죽어 묻었다고 했어요. 아직도 우시던 모습 안 잊혀지네요.”
김 장로는 “어떤 어려움도 극복해 가며 한국 성도를 사랑하는 노무라 목사님과 같은 분은 적어도 해방 직후로는 없을 겁니다”라며 그의 소식을 반겼다.
전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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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특집 빈민의 성자 노무라 목사] 현지 한국인 목사 부부 “목사님께 빚 갚고 싶어” <2009.12.24 18:51,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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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후기
# 13년 전 야마나시현 고후시에 들어와 고후교회를 세우고 구령에 힘쓰고 있는 홍창희 목사 부부(오른쪽 사진)가 지난주 노무라 목사의 헌신을 뒤늦게 알고 베다니교회를 찾아가 감사예배를 드렸다. 홍 목사 부부는 해진 내의를 입는 노무라 목사 부부에게 내의와 김치 등을 선물했다. 홍 목사는 “가까운 곳에 그렇게 훌륭한 목사님이 계신 걸 몰라 부끄럽다”며 “나 한 사람이라도 노무라 목사님에게 진 빚을 갚고 싶다”고 말했다.
# 노무라 목사는 70년대 초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두 번이나 방문, 대성전 2층에서 예배를 보았다고 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초창기 가정집회 등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은 것을 잘 알고 있다”며 “내게 그 같은 공동체성 회복은 지금도 기도제목”이라고 덧붙였다.
# 일본 취재 후 노무라 목사에게 메일이 왔다. 2005년 소비자운동 공로로 노벨상 후보에 오른 그은 어머니 노무라 가스코(99)가 곧 소천하실 것 같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한편 24일자 본보 3면에 노무라 가스코 여사가 아오야마학원대학 신학과를 졸업했다고 했는데 ‘도시샤대학 신학과’로 바로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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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나시=글·사진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