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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2-15 21:37
창현 함태영 목사 전기 -4
 글쓴이 : 함동진
조회 : 6,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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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현 함태영 목사 전기 4>

부록

(그리스도의교회 환원운동)  송암 함봉표 지사(환원운동의 지원자)

        송암 함봉표 지사(환원운동의 지원자)
                      송암 함봉표 지사에 관한 글(詩文 등)은  http://hamdongjin.kll.co.kr/ 

                    또는   http://cafe.daum.net/hamdj?t__nil_cafemy=item  에서 검색하여 볼 수 있다.


   
     송암  함봉표 지사

  송암 함봉표 지사는 창현 함태영 목사의 선친이시다. 그는 독실한 유림이면서도 기독교로 개종한 함태영 목사의 구령사업에 적극 지원하는 아량을 베풀었다. 창현 함태영 목사가 해방정국과 6.25전쟁의 후유증으로 피폐된 사회환경에서 기독교를 전파하고 교육사업을 하며 기독교환원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송암 함봉표 지사의 후원의 덕이었다고 하여도 과장이 아니다. 그러므로 함봉표 지사는 그리스도의교회의 환원운동지원자이며 間接功勞者임에는 틀림이 없음을 이에 밝혀둔다.

          송암 함봉표 지사의 약전                  

(함봉표-年譜)

(약력)
송암 함봉표의 년보(松庵 咸鳳表의 年譜) 

                                                                                    함동진

1889년 8월 14일 : ☞ 송암 함봉표는 정언관, 의관(正言官, 議官)인 父 명사 함장기(明沙 咸莊基 - 基昊, 兆海)와 母 파주 염씨(波州 廉氏)와의 사이에 七子女 중 次男으로 전남 장성군 황룡면 삼룡리(全南長城郡黃龍面三龍里 - 지금의 와룡리-臥龍里)에서 출생하다.

1894년 : ☞ 동학혁명(東學革命)을 겪다.

1895년 : ☞ 연옹 박선생 문하(然翁 朴先生 門下)에서 2年間 수학(受學)하다.

1897년 : ☞ 죽은거사 김대규 문하생(竹隱居士 金大奎 門下生)으로 2年間 受學하다.

1899년 : ☞ 朴然翁 先生 門下에서 2年間 수학(受學)한 後 16세가 될 때까지 가내(家內)에서 독학(獨學)을 하다.

1903년 : ☞ 광산 김영호(光山 金永鎬) 선생 門下에서 受學하다. 이 때에 社會가 극(極)히 혼란(混亂)하여 의지(意志)를 굳게하다.

1907년 1월 : ☞ 장성 황룡면에서"<생즉의사 사즉의귀-生則義士 死則義鬼>-살아서는 의(義)를 위(爲)하여 싸우는 투사(鬪)士요, 죽어서도 義로운 귀신(鬼神)이되어 싸운다."라는 좌우명(座右銘)으로 의지(意志)와 정신(精神)을 삼아 분연(憤然)히 일어나 자위대(自衛隊)를 조직 인솔(組織 引率)하여 호남의용장(湖南義勇將)인 참봉 김태원 막하(參奉 金泰元 幕下)에 가담하다.
      ☞ 창평 무등촌에서
          의병장 김태원 휘하(義兵將 金泰元 揮下)에서 창평 무등촌 전투(昌平 無等村 戰鬪)에 참전, 외적 길전부대(參戰, 倭敵 吉田部隊)와 혈전분투(血戰憤鬪)하여 적장 길전(敵將 吉田-요시다)와 그 부대(部隊)를 총몰살(總沒殺)하고 무기(武器)를 노획하는 전과(戰果)에 가담(加擔)하다.
     2월 : ☞ 장성 황룡면에서장성군 황룡면 월암리(月岩里-鼓岩) 전투(戰鬪)에 참전(參戰)하여 일주야간 일본군부대(一晝夜間 日本軍部隊)와 대혈전(大血戰)을 벌여 日本軍을 총몰살(總沒殺)하는 전과
(戰果)에 가담(加擔)하다.
     3월 : ☞ 羅州·靈岩·江津·海南에서 군자금조달운반책(軍資金調達運搬責)의 命令을 받들고 義兵 3人을 거느리고 羅州·靈岩·江津·海南 等地를 巡廻, 義兵支援을 꾀하는 元老들의 家宅을 秘密裏에 訪問, 軍資金受領調達의 任務를 完遂하다.
     6월 : ☞ 光州(光山) 魚登山에서光州(光山) 魚登山 戰鬪에 參戰하여 日兵과 血戰, 追擊하던 中 不幸하게도 義兵將 金泰元 將軍께서 戰死하므로 哀慕하고 痛哭하다.
같은 때 海山 全垂鏞 將軍과 痴齊 金 將軍이 義兵을 이르켜 軍士를 모으므로 이에 加擔하다.
     10월 : ☞ 光州(光山) 大峙里에서光州 大峙里 戰鬪에 參戰하여 日兵과 大血戰을 벌이며 追擊하여 日兵을 總 沒殺하고 武器를 노획하는 戰果에 加擔하다.
福興面 內東里에서같은 때, 淳昌의 義士 申昌學 將軍이 軍士를 모아 福興面 內東里에서 義兵을 指揮하므로 이 戰鬪에 參戰하여 日兵과 大血戰을 벌이며 追擊하는 戰果에 加擔하다.
     11월 : ☞ 長城 自隱谷에서長成의 自隱谷戰鬪에 參戰, 日兵과 大血戰을 벌이며 追擊하는 戰果에 加擔하다.
     12월 : ☞ 羅州 古幕浦에서 羅州의 古幕浦 戰鬪에 參戰, 日軍駐屯所를 包圍하여 攻擊하다. 이 戰鬪에서 先鋒將 鄭 參尉의 指揮로 連戰連勝의 攻擊이 繼續되었으나 不幸하게도 先鋒將 鄭 參尉의 戰死로 哀慕하다.

1908년 : ☞ 日將 西村(니시무라)의 捕虜가 되어 拷問을 당하면서도 "生則義士 死則義鬼-살아서는 義로운 鬪士요, 죽어서도 義로운 鬼神이 되어 싸운다."라는 義兵 加擔時의 決意를 되세기며 意志와 節介를 屈하지 아니하다.(木浦刑務所 3個月 受刑) 이로써 가정이 敗家(破産)되어 훗날을 期約하고 杜門不出 隱居生活을 하던 中 參奉 金平淑의 次女인 金月林과 結婚을 하다.

1910년 : ☞ 大韓帝國의 國運이 不幸하여 韓日合邦이 되었다는 消息을 듣고 땅을치며 哀痛학 痛哭하다.

1911년 : ☞ 珍原面 栗谷里로 移住하여 農業에 熱中하는 한편 松沙 奇宇萬(蘆沙 奇正鎭의孫으로 義兵을 이르키고 日本을 排斥한 人物) 先生을 따르며 隱居生活을 계속하다.(義兵決意를 못버림).
(註 : 松沙 奇宇萬은 蘆沙 奇正鎭의 손자이고, 노사 기정진은 송암 함봉표의 조부 죽포 함병후(선욱)의 스승이되고, 송사 기우만은 송암 함봉표의 부친 명사 함장기(기호)와 교유함).
     ☞ 같은 때, 大聖敎春秋大祭를 맡음과 아울러 河西 金麟厚 先生의 長成 筆岩書院 春秋大祭를 맡아 執禮하므로 民族正統文化를 지키는데도 앞장서다.
     ※ ☞ 刑務所 出所後에도 日本 憲兵과 巡査의 繼續監視로 行動과 나들이가 自由롭지 못하다. 이로서 生活苦가 따르고 잦은 移住가 있게 되다.

1913년 10월 15일 : ☞ 부친 함장기(父親 咸莊基, 기호-基昊, 조해-兆海)께서 患憂가 있어 誠心을 다하여 약수발을 하였으나 別世하므로 草土에서 3年間 謹愼으로 보내다.

1914년 5월 24일 : ☞ 장자 태영<영주,창현>(長子 泰英<英柱,唱泫>)을 낳다. <註>: 창현 함태영 목사(唱泫 咸泰英 牧師 1914. 5. 24∼1983. 11. 28 조선일보 인터넷 인물 DB에 수록 - 자세한 인적사항은  http://hamdongjin.kll.co.kr/  <문학서재>詩人 함동진의 홈페이지 및 http://cafe.daum.net/hamdj 함동진의 카페 참조.  창현 함태영 목사는 함동진의 父이다.

1915년 : ☞ 동북면 남산리(東化面 南山里)로 이주하여 수년간 농업(數年間 農業)을 경영(經營)하다. 이 때에도 춘추성제(春秋聖祭)를 계속 집례(執禮)하다.

1918년 : ☞ 자산(自産)과 자비(自費)로 本家에 사립학교(私立學校)를 설립(設立)하고, 교사김종운(敎師 金鐘雲)을 임명(任命)하여 자신-봉표(自身-鳳表)가 校長이 되었고, 생도(生徒)의 수(數)는 백여명(百餘名)으로 수년간 교육(數年間 敎育)을 하다.

1919년 3월 1일 : ☞ 기미(己未) 3·1 독립운동(獨立運動)이 일어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를 천지(天地)가 진동(振動)하도록 높이 부르고, 민족(民族)을 교육(敎育)으로 깨우쳐 항일정신(抗日精神)을 기르는데 힘쓰다.
     7월 26일 : ☞ 모친(母親)이 별세(別世)하여 동귀산 고조묘소(東貴山 高祖墓所) 아래 부친묘(父親墓)와 쌍묘(雙墓)로 합장(合葬)하고 호천망극(昊天罔極-하늘같이 가없는은혜)하며 초토(草土)에서 근신(謹愼)하다.

1922년 : ☞ 군(郡)의 사회유지회의 요망(社會有志會議 要望)에 의(依)하여 소작상조회 감사(小作相助會 監司)에 피선(被選)된 後, 회장 김경환(會長 金璟煥)씨의 협력하(協力下)에 전답지세(田畓地稅)를 소작인(小作人)이 선세(先稅)로 부담(負擔) 하느냐, 부호(富戶)가 자진납부(自進納付) 하느냐는 일로 각처(各處)의 지주(地主)들 간(間)에 언쟁(言爭)과 다툼이 있으므로 각면(各面)에 설명회(說明會)를 개최(開催)하여 지세(地稅)는 완전(完全)히 지주(地主)의 부담(負擔)으로 하여 소작인(小作人)을 보호(保護)하고 小作人의 離農을 防止하다.
또한 小作料를 6割 增收하느냐 3割 增收하느냐는 일로 富戶들과 討論을 벌여 極力 理解시켜 3割 增收로 完全決定을 봄으로 小作農民을 保護하다.
     ( 註 : 평생동안 어려운 문제발생시마다 언제나 약자편에서서 선의적으로 정의롭게 해결하므로 후일 "변호사"라는 별명이 따름).

1923년 2월 : ☞ 2月에 求禮地域方面을 돌아보다.
     5월 : ☞ 5月에는 구례 봉서리(求禮 鳳西里)로 移住, 土地를 개간 농업(開墾 農業)을 經營하던 中 7年間이나 天災로서 한발(旱魃)이 들다.

1929년 : ☞ 繼續된 凶年으로 因한 生活苦로 不得已 順天郡(昇州) 外西面 長山里 12 番地에 새로히 기반(基盤)을 造成하여 移住하다. 이곳 長山里에서 田畓을 開墾하며 "自力更生"의 意志를 圖謀하여 農業을 經營하다.

1932년 : ☞ 地域區 農民會 會員들의 要望에 依하여 自力更生委員長에 피선(被選)된 後에 뜻하는 바 民風을 改善하고, 農業方法을 改良하며, 靑少年 兒童을 敎育키 爲하여 私設學習場을 運營 民族意識을 고취(高趣)하다.
이로써 向後 13年間 뽕나무 심기와 누에치기를 장려(奬勵)하고, 나무심기를 장려하며, 퇴비증산(堆肥增産)을 奬勵하고, 畜産奬勵運動을 積極 展開하며, 지도하다.

1933년 : ☞ 武科하여 주부-증 병조참판(主簿-贈 兵曹參判)을 지내고 임진왜란(壬辰倭亂)때 義兵을 이끌고 도원수 권율(都元帥 權栗)을 따라 행주전투(幸州戰鬪)에서 戰死하고 선무원종 종훈(宣武原從 從勳)에 참여한 수정공 함덕립(水亭公 咸德立 -승주·구례·보성 地域의 江陵咸氏一家가 모시는 派先祖)의 墓所 神道碑 設立을 위한 모임을 發起한 바 종제 우현(從弟 宇鉉)과 종순(鐘淳)이 協力하여 卽時 設立하고 碑를 刻하고 이름을 넣다.
이러써 日帝末期에도 倭에 抵抗하는 뜻으로 壬辰倭亂 義兵參戰 戰死者 先朝의 碑를 세워 뜻을 기리다.
한편 江陵咸氏 大同譜編纂 南道有司로 委任되어 任務를 遂行하다.

1934년 : ☞ 地域區民의 모임인 애림계(愛林契)의 長에 被選되다.
한편 죽천리 都門山에 各祭位의 土地가 不足하여 從弟 宇鉉의 協力과 誠意로 沓 40落을 買入하여 보제(補祭)하므로 祖上에 對한 孝를 發揮하다.

1935년 : ☞ 農民들의 모임인 공려회(共勵會)의 長과 식산계(殖産契)의 主事로 被選되어 營農事業을 改善하여 이에 必要한 資金을 조달하다.

1936년 : ☞ 竹山里 6代祖墓祭位의 沓 2筆地와 증조산위(曾祖山位) 土地 沓 1筆地, 전 1筆地, 垈地 1筆地를 買入하여 호제(護祭)하다.

1937년 : ☞ 農民指導上 必要에 依하여 長城郡의 뽕나무農園의 누에치기를 視察하고, 光州의 모범농장(模範農場)과 방직공장(紡織工場), 제사공장(製絲工場) 等을 視察하다.

1938년 : ☞ 外西國民學校 學務委員에 被選되어 3回 連任하였으며 向後 6年間 校務에 힘쓰다.
     3월 : ☞ 水原의 模範農場을 視察하다.
              ☞ 京城(서울)의 박물관(博物館), 百貨店, 여러 工場 等을 視察하다.
              ☞ 開城과 평양(平壤)에서 채종재배법(菜種栽培法)을 視察하고 各種物産地의 一般工場을 視察하면서 各 名勝地를 觀光하다.
              ☞ 新義州에서는 제지공장(製紙工場), 木材工場, 其他 模範生産地를 視察하다.
              ☞ 滿洲 安東에서는 지나박물관(支那博物館)과 重要物資生産工場을 시찰하다. (<註>: 1930年代 우리 나라는 오늘날과 같이 交通이 發達하지 못한 때에 長距離 坊坊曲曲을 여행한다는 것은 經濟的 負擔도 클 뿐만 아니라 보통사람으로서는 해내기 어려웠던 일이다. 松庵 선생은 八道江山은 勿論 滿洲까지 누비며 視察旅行을 해낸 것은, 많은 見聞으로 新知識을 쌓아 農民啓蒙을 하겠다는 强한 意志의 人間性을 잘 나타내어 주고 있다. )

1939년 : ☞ 學術指導, 講習指導 功勞로 表彰을 받다.
     6월 21일(陰 5월 4일) :長孫 東振(唱泫 咸泰英의 長子) 태어나다. <註>: 함동진 시인-「문학서재」홈페이지 http://cafe.daum.net/hamdj

함태중(咸泰仲 -그리스도의교회 환원운동 숨은 후원자)

  창현 함태영 목사의 셋째 아우인 함태중(咸泰仲)은 교회의 직분이나 외모로 보아 열렬한 신앙인으로 비춰 보이지 않으면서도 창현 함태영 목사의 구령(救靈)사업에 적극적인 후원자였고, 한국 전통적인 형제우애를 발로한 분이다.
  6.25를 전후한 시기에 폐허와 한발과 기근으로  한국인들의 생활사정은 전반적으로 열악하고 피폐하였다.
  함태중은 창현 함태영 목사를 뒤따르며 아래와 같이 교회개척이나 운영에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1951년 전남 광주시에서의 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 운영과 병설된 교회를 운영할 때에 적극적으로 헌신.
    *1952년 부여 귀암면 합송리 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 운영과 병설된 교회를 운영할 때에 적극적으로 헌신.
    *1952년 논산 부적면 충곡리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하고 운영할 때에 적극적으로 헌신.
    *1952년 논산 부적면 신교리그리스도의교회(명칭변천 : 탑정-> 현재의 금성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하고 운영할 때에 적극적으로 헌신.
    *논산 부적면 신교리에 개설한 복음중학교에 재정적으로 적극적 후원.
  함태중이 헌신적으로 후원하였다함은 금전적인 지원은 물론이지만 특히 6.25전란 중에는 식량조달이 큰 문제였다. 신학교와 중학교의 교수와 교사들에게 제공하는 식량의 문제, 교회의 부흥회와 행사에 오가는 목사들의 접대에는 재정적 부담이 컸다.
  함태중 그는 자기를 위한 재물은 전혀 축적하지 않고 오직 창현 함태영 목사의 구령사업에만 전력하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사진에서 뒤 右측의 분이 함태중(咸泰仲 -검은회색양복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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