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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6-22 22:04
힐 요한 선교사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 약사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5,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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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존 J. 힐, 再譯: 조동호(1999.3), 初譯: {쎄메론} 제7호 편집부(한성신학교, 1972)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사를 기록해야 할 필요성을 지난 수년간 느끼고 있었고, 또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로부터 파송된 그 어느 선교사보다 한국에 오래 거주했기 때문에, 비록 있어서 좋을 자료를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간 아무도 손대지 않았던 이 일을 지금부터 나는 내 기억에 의존해서 짧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사를 기록하고자 합니다. 아마 나중에 좀더 정확한 교회사를 기록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은 필자가 한국인 전도자의 관점에서 보다는 미국 선교사의 한 관점에서 기록한다는 점을 또한 기억해 주셔야 합니다. 그러나 필자는 이 교회사에 적어갈 사실들을 언급함에 있어서 할 수 있는 만큼 솔직하게 할 것입니다.

미국에서 살고 있었을 당시, 아마 1939년이었을 것입니다. 필자는 일본 동경에서 활동했던 W. D. 커닝햄 선교사 부부의 일생기(一生記)를 적은 책, {타오르는 횃불}을 모두 읽었습니다. 그 책은 커닝햄 선교사의 한국 선교에 관한 부분도 다루고 있었습니다. 커닝햄의 부인과 오웬 W. 스틸의 부인이 그 책을 쓴 것 같습니다. {타오르는 횃불}은 일본 거주 "독립"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사들 가운데, 가장 초기, 적어도 아주 초기 선교사들 가운데 한 사람인 커닝햄 선교사가 어떻게 해서 1907년에 일종의 선교사 대회와 같은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 중국을 여행하게 되었는가와 일본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국에 들러서 아마 몇몇 그룹에서 설교하게 되었는가를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되지 않아 일본 그리스도의 교회로부터로 온 한 한국인 젊은이가 한국 서울에 있는 YMCA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들 가운데 첫 전담 전도자는 동경주재 커닝햄 선교부(또한 요츠야 크리스찬 밋션이라고 부름)와 손을 잡고 일해왔던 어떤 한국인이었습니다. 그는 1924년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왔고, 곧이어 한국에 일곱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필자가 1939년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그들 일곱 교회 가운데서 인천에 있는 두 개 교회와 서울에 있는 한 개 교회에 대해서는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이인범은 한국인 전도자였으며, 커닝햄이 한국 선교를 위해서 파송한 분 같았습니다. 그분이 앞에서 언급된 일곱 교회를 세운 초기 전도자였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1939년 한국에 왔을 때 그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한국에 거주하면서 사역한 최초의 미국인 선교사는 마이클 쉘리 형제였던 것 같습니다. 쉘리는 1934년경에 그의 아내와 딸과 함께 한국에 와서 9개월간 머문 것으로 압니다. 쉘리 가족이 그렇게 빨리 한국을 떠나야 했던 이유는 딸의 건강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쉘리 형제는 오리건 주 메드포드에서 목회활동을 해왔으며, 아마 지금도 거기에 살고 있을 것입니다.

1939년 이전에 한국에 선교사로 온 또 다른 가족은 오스트랄리아 멜버른 출신의 토마스 G. 힛치였습니다. 그들은 한국에 세워진 커닝햄 교회들을 돕기 위해서 한국에 파송되었습니다. 1939년 6월 경, 필자의 가족이 한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힛치와 그의 부인 그리고 딸 앨리스를 만났지만, 그 당시 그들은 한국을 떠날 준비가 거의 다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1939년 여름이나 가을에 한국을 떠난 것으로 압니다. 그들이 떠난 이유는 이인범이 매우 정직하지 못했으나 그 사실을 일본 동경의 선교부는 믿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 중이거나 후에 이인범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버리고 장로교단으로 넘어가 버렸습니다.

한국에 크게 공을 세운 선교사는 1936부터 1940년까지 약 4년 동안 사역했던 요한 T. 채이스였습니다. 채이스는 일본 동경에 있는 커닝햄 선교부에서 약 7년간 일해 왔었는데, 커닝햄과 의견 충돌이 있었고, 해고를 당한 후 그의 선교부를 떠났습니다. 1939년 필자를 한국 선교사로 발탁한 분이 바로 채이스였습니다. 채이스 부부는 1936년에 세 자녀와 함께 한국으로 건너와서 1940년 5월까지 머물렀습니다. 그들은 한국에서 아이 한 명을 더 낳았습니다. 채이스는 서울 게이조 쇼게추조 32-6번지에 위치한 큰 고가와 대지를 영국해외성서공회로부터 사들여 그곳에서 "기독교회 선교부"(The Korean Christian Mission)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선교부 지하실에서 성경학교를 열었고, 1939년에 약 10여명의 남학생이 등록하였습니다.

채이스와 함께 일했고, 그를 도와 서울 지역에 교회들을 세웠던 초기 한국인 지도자들은 최상현, 김요한, 성낙소, 박판조, 김문화였습니다. 1939년 필자 부부가 한국에 왔을 때, 기독교회 선교부에 서울 전역에 걸쳐 교회가 다섯 개밖에 없었습니다. 일 년 안에 또 하나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들 초기 교회들은 돈암동, 신당정, 내수정, 청량리, 산돈암동에 있었으며, 나중에 백낙중 목사가 시무했던 왕십리에 하나가 더 세워졌습니다. 1940년 여름, 필자와 김요한에 의해서 새롭게 침례받고 교인이 된 33인과 함께 또 하나의 새로운 교회가 북한 동해안 초도리에 세워졌습니다. 후에 최상현이 협력하였습니다.

1939년과 1940년 필자는 처음으로 세 명의 한국인 소년을 알게 되었는데, 후에 한국교회와 고아원 사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수경, 최윤권, 노봉욱이었습니다.

1940년 가을, 채이스가 미국으로 돌아간 후, 필자가 한국인 목회자 양성을 위해서 성경학교를 다시 열었으나 어느 날 오후 갑자기 일본인 경찰이 선교부 마당에 들어서서 허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성경학교를 폐쇄하라고 시달하였습니다. 폐쇄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11월까지, 일본은 미국인 선교사들을 점점 더 탄압하였고, 그들의 특권을 박탈하였으며, 감시도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1940년 11월 서울주재 미국 대사관은 모든 미국인들에게 짐을 꾸러 미국으로 돌아가도록 충고하였습니다. 필자 가족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11월 8일경에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일 년이 조금 지난 후인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했을 때까지는 전쟁이 발발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채이스는 1941년 봄에 한국에 건너와 몇 주간 머무는 동안 선교부 소유지를 전항섭에게 임대하였고, 전씨는 그곳에 난로공장을 세웠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은 전씨에게 그 부지를 매입토록 강요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한국에서 모두 쫓겨 나갔습니다. 따라서 전씨는 그 부지를 선교부에 반환하기를 꺼려하였습니다. 채이스는 몇 차례에 걸쳐서 잠깐씩 한국을 방문하였지만, 그 부지를 되돌려 받지는 못했습니다. 전후 선교부 산하 초기 교회들은 단지 두 곳만이 남게 되었는데, 돈암교회와 후에 필운동 교회가 된 내수교회뿐이었습니다.

필자 가족은 1949년 2월 18일에 한국으로 되돌아왔고, 서울 연지동에 살았으며, 세 자녀 즉 브루스, 버지니아, 수잔도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서울 성서 신학교는 1949년 3월 15일 필자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필자를 도와 신학교 교수로 봉직했던 분들이 최상현, 성낙소, 백낙중이었습니다. 수업은 연지동 집에서 이루어졌지만, 곧 이어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사직동 앞에 있는 필운동 교회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학생 수가 70명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새로 세워지기도 했고, 인간이 세운 교파 교단들로부터 신약성서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해 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들이 남으로 동으로 서로 번져 나갔고, 우이동, 김포, 미아리, 신탄진, 부강, 심지어는 광주, 목포, 부산에까지 세워졌습니다. 김은석 목사는 나중에 세워진 이들 교회들 가운데 상당수를 세우는데 공헌하였고, 미 공군 군목, 할 마르틴 목사를 통해서도 교육과 계몽이 상당히 이루어졌습니다. 이 당시 대부분의 교회들의 출석 인원은 60-70명 정도였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의 갑작스런 남한 침공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기까지만 해도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크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전쟁발발로 인해서 필자 가족을 포함해서 외국인 선교사들은 서울과 남쪽에 있는 그들 재산의 거의 모든 것을 갑작스럽게 버려야 했고, 일본이나 미국으로 피신을 해야 했습니다. 필자 가족은 처음에 일본 후쿠오카로 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곧 바로 동경으로 옮겼고, 그후에는 카루이자와와 센다이를 거쳐 동경 세타가야에 다시 돌아와 추루마키초에 있는 오래된 일본집을 하나 매입했습니다. 일본에 있는 동안 필자 가족은 한국에서 건너온 다른 많은 선교사들이 머무는 카루이카와에서 약 일 년 가량 한국어를 공부했습니다.

필자는 1950년 11월 한국에 돌아와 5주 동안 머물렀고, 서울 장충동에 있는 임대 건물에서 성경학교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더욱 악화됨에 따라 12월에 일본으로 되돌아와야 했습니다. 중공군이 북한 공산군을 지원하기 위해서 전투에 참가하였고, 전투가 치열해졌으며, 수천 또는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1951년 7월 3일까지 남자 선교사들이 한국에 돌아오기 시작하였고, 필자도 바로 그 날 서울에 돌아왔습니다. 필자는 부산에서 고아원을 시작해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 영부인을 만나 뵈려고 갔었을 때, 그분은 필자더러 서울에서 시작하도록 권유를 하셨습니다. 서울에 올라와서 필자의 오랜 친구, 당시 젊은 청년이었던 성수경을 찾았으며, 서대문 근처 송월동 32번지에 있었던 구 선교부 재산을 되찾기 위해서 동행하였습니다. 전항섭은 탄환이 장전된 연발권총을 들고 우리를 쫓아왔으나 우리가 합법적인 재산 소유자임을 알고 물러갔습니다. 우리가 건물의 절반을 차지했고, 전항섭도 나머지 절반을 차지했습니다. 약 일 년 후에 미국 대사관과 영국 해외성서공회의 도움으로 우리는 마침내 전씨를 몰아냈습니다. 그 대신 전씨는 정부가 일본인 자산에서 지불한 정착금을 받았다고 믿습니다. 필자는 끝내 재산을 되찾게 된 것을 무척 기뻐했으며, 전쟁중 폭격으로 부분적으로 파손된 구 건물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많은 돈을 들여 수리를 마쳤습니다.

1951년 8월 4일 "크리스찬 밋션 고아원"으로 불린 첫 고아원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집없는 소년 소녀들 19명을 서울시 송월동 32번지에 위치한 부서진 선교부 건물에 수용하였습니다. 곧 이어 수용인원이 점점 더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필자는 성낙소 목사의 아들이었던 성수경과 최윤권의 누이를 불러 돕도록 했고, 나중에 대전 판암동 고아원의 총무가 된 박중현, 낸시홍, 안나, 안 여사, 김동수, 한길자, 요리사 신 여사 등 다른 사람들도 와서 도왔습니다.

우리의 서울 고아원이 시작된지 얼마 못되어 이종만 형제가 인천에 고아원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필자는 일정한 액수를 돕겠다고 약속할 수는 없었지만, 가능한 한 힘껏 돕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500명이 넘는 고아들을 데리고 있었는데, 낡은 2층 학교건물에 수용하고 있어서 아주 붐비고 있었습니다. 그 고아원은 세워진지 21년이 지난 지금도 90명 가량의 고아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그후 오래지 않아 우리 선교부는 송씨의 감독아래 있는 대전 판암동에 하나, 대구에 하나, 이렇게 두 개의 고아원을 더 세우는데 도움을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여러 해 동안 그들 고아원들을 도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전쟁중에 4개의 고아원들이 유지될 수 있도록 실제로 돕고 있었습니다. 우리와 그들은 몇 곳의 미군부대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한번은 필자가 아내와 자녀들을 만나보기 위해서 일본에 가 있는 동안, 도날드 캠포스라는 한 공군병사가 서울 고아원을 방문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자기 고향에서 발행되는 신문, [미네아폴리스 스타]지에 편지를 보냈는데, 그 신문에 그의 글이 실렸습니다. 그 편지가 신문에 실리고 난 다음부터 고아들을 위한 헌옷 새 옷 보따리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왔고, 그 많은 것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미국 전역의 여러 교회들과 기관들 그리고 시민들로부터 1천 보따리 이상을 받았습니다. 그중의 일부는 전혀 새 옷들이었습니다. 우리는 헌옷 가지 하나라도 버려지는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선교부 건물 3층 넓은 다락에 쌓아두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분류해서 그것들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에 있든 많은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성인의류는 그것들을 필요로 하는 많은 목회자들과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한국을 떠난 1955년까지도 옷 보따리의 일부가 남아있었습니다. 우리는 1955년 한국을 떠나 1959년에 돌아왔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 중에 필자는 미시간, 웨스트 버지니아, 인디애나 등지에서 목회를 했고, 미 육군 군목(중위, 후엔 대위)으로 미국, 필리핀, 일본에서 복무했습니다. 필자는 또한 버틀러 대학교 신과대학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한국전쟁 중 또는 전쟁직후에 많은 수의 단기 선교사들이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한국을 찾았습니다. 로버트 웨스트, 알렉스 빌즈, 제인 키넷트가 일본에서 왔고, 폴 인그램(나중에 전 가족이 합류함)이 일본에서 왔고, 젊은 미혼 여성 두 명이 미국에서 왔습니다. 리라 톰슨과 메리 루이즈 반힐 부인이 그들입니다. 리라 톰슨은 대부분 우리의 서울 고아원에서 일했습니다. 후에 부평으로 옮겨 그곳 고아원에서 먹고 자며 일했습니다. 나중에 그녀는 히람 힐러라는 상처한 미군과 결혼하여 두 딸을 낳았습니다. 나중에 그녀는 아들을 한 명 낳았지만 미국에서 백혈병으로 죽었습니다. 진실로 훌륭한 그리스도인 여성이었습니다. 메리 루이즈 반힐은 대전으로 갔고, 그곳 판암동 고아원에서 먹고 자며 일했습니다. 판암동 고아원은 송씨가 총무로 있었고, 나중에는 박중현이 총무로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전염성 간염에 걸렸고, 요양하기 위해서 서울 선교부로 불리어 왔습니다. 리리 톰슨이 그녀를 돌보기 위해서 왔는데, 그녀 또한 병에 걸렸습니다. 그 병 때문에 반힐 부인은 1955년 가을에 한국을 떠났습니다. 제인 키넷트도 반힐 부인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폴 인그램 가족은 1953년에 한국에 건너와서 1954년말까지 있다가 한국을 완전히 떠났습니다. 필자의 가족은 1953년에 안식년으로 미국에 들어갔다가 1954년 여름에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새로운 신학교 건물이 보기 좋은 3층 건물로 송월동 선교부 건물 옆에 세워졌습니다. 미군 부대가 자재와 건축의 큰 부분을 맡아 주었습니다.

필자는 1955년 봄에 첫 부인을 비통하게 잃고 세 자녀들과 함께 1955년 7월에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필자는 1956년 캘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 출신의 제인 키넷트와 재혼을 했습니다. 제인은 중국, 범마, 일본에서 활동했던 노련한 선교사였습니다.

제인은 몰리 챤이라는 중국 고아 소녀를 비공식으로 입양하여 데리고 있었는데, 미국으로 건너와 필자 가족과 함께 살았습니다. 현재는 결혼해서 인디아나 주에서 동독출신의 남편과 아들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해롤드 테일러 부부와 두 아들이 중국을 떠나 일본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1955년말 경에 한국으로 건너와서 서울에서의 필자 가족의 선교사역을 인수받았습니다. 테일러는 새로 지은 신학교 건물을 포함해서 송월동의 선교부 재산을 팔았습니다. 그 때문에 북서울 역천동에 새로운 부지와 건물을 구입할 때까지 몇 년 동안 신학교가 거의 폐쇄상태에 있었습니다.

필자 가족이 한국을 떠난 후, 1957년에 리차드 래쉬 가족이 한국에 와서 서울의 태일러 부부와 함께 일했습니다. 수개월 후 그들은 서울을 떠나 강릉으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수년간 머물면서 전도사역을 하고 있었고, 한국의 형제들이 그 지역에 몇 개의 새로운 교회들을 세울 수 있도록 돕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1963년경에 부산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들은 부산에서 장성만 목사가 젊은 남녀 학생들에게 기술과 성경교육을 위해서 전문대학을 설립하는 일을 도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국에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결정을 내린 후에, 자신들의 모든 일을 장성만 목사에게 넘기고 1971년에 한국을 떠났습니다.

알렉스 빌즈 가족은 1956년에 한국에 와서 부산에 자리잡았습니다. 그들은 음악과 설교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라디오 방송국을 설립하려고 시도했고, 몇 채의 건물도 세웠습니다.그들은 그들의 라디오 사역을 돕도록 미국에서 몇몇 가족들을 데려 왔습니다. 1959년에 버어트 엘리스 가족과 조 세겔케 가족이 왔고, 플로라 매 구른지 양이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크리스찬 라디오 밋션"의 심한 내분과 버어트 엘리스와 조 세켈게의 반대로 인해서 빌즈 가족은 한국정부로부터 결코 허가를 받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크게 실망한 그들은 1961년에 미국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구른지 양과 세겔케 가족도 벌써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오직 버어트 엘리스 가족만이, 래시 가족과 장목사의 사역지로부터 꽤 떨어진 곳에 있긴 해도, 부산에 남아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1959년 여름에, 현재의 힐 제인과 거의 두 살이 된 아기 대니로 구성된 필자의 새로운 가족이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두 달 동안 부산의 빌즈 가족과 함께 지내다가 대전으로 옮겨왔습니다. 그리고 대전에서 정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959년 12월 1일, 대전 성서 신학교가 힐 요한과 힐 제인에 의해서 태어났고,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일 년 가량 후에 한국 성서 신학교로 이름이 바꿨습니다. 그 이름이 십중팔구 지속적으로 미래를 내다볼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그때에는 한국 성서 신학교가 한국에서 운영되는 유일한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였습니다. 서울 성서 신학교는 이전을 위해서 문을 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에 필자의 가족은 한국에 5년간 머물렀는데, 생애 가장 긴 기간이었습니다.

한국 성서 신학교 교수들로는 최요열, 이은수, 버지니아 힐, 딕 래시, 이신(후에 이만수로 부름), 김이영(후에 김찬영으로 부름), 소교민, 김태수, 심영진, 김은석, 김치연, 김희영, 임춘봉, 박태규, 최용호, 김성철, 천명화, 프레드 호프만, 힐 제인 그리고 힐 요한(1959-1971년까지 교장 역임)이었습니다.

1959년 개교이래 한국 성서 신학교는 90명 이상의 젊은이들을 졸업시켰습니다. 그들 중 많은 수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목회자로 섬기고 있습니다.

1969년 봄에, 대전에 새로운 신학교 건물의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오는 (대부분의) 자금과 한국의 친구들로부터 오는 약간의 자금의 지연으로 말미암아 1972년 늦은 봄이나 초 여름까지는 완공되지 못할 운명이었습니다. 한국 선교 30주년 기념일에 필자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조 가맨으로부터 상당한 도움도 받았지만, 결국 김찬영과 그의 넉넉한 미국인 후원자들의 힘있는 도움으로 1972년에 완공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크게 성공적으로 사역한 또 한 분의 선교사는 조 가맨이었습니다. 조 가맨은 1967년 가을에 처음 한국에 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1968년 초까지 김희영 통역과 함께 한국에서 많은 부흥집회를 열였습니다. 수 천명이 회심하고 조 가맨 형제로부터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필리핀, 인도, 일본 등지에서 좀더 많은 집회들을 갖기 위해서 한국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나서 1969년에 그의 새 부인 린다와 친구 폴 코모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고, 1969년부터 1970년까지 안식년으로 고국에 돌아간 필자의 가족을 대신해서 사역했습니다. 또 다시 수천명의 사람들이 조 가맨의 능력있는 설교를 듣고 그리스도께로 인도되었으며,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의 전도팀은 조 가맨, 김희영, 심영진, 폴 코모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는 미국으로부터 27,000불을 모금하였고, 심하게 화상을 입은 소녀를 미국으로 보내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얼굴과 많은 피부이식들을 통해서 보기 좋은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조 가맨은 또한 새로운 신학교 건물을 위해서 5,000불을 모금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드디어 부인 린다와 어린 딸과 함께 선교사로써 이스라엘에 가려 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가족과 고아원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야 할 것 같습니다. 1960년, 필자의 나이든 두 딸, 버지니아와 수잔이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서 미국으로부터 한국에 왔습니다. 오정리에 있는 한국 크리스찬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버지니아와 수잔은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버지니아와 그녀의 형제 브루스는 미주리주 조플린에 있는 오자크 성서 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버지니아는 1966년 한국으로 돌아와 새로운 고아원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 고아원은 "버지니아의 고아원"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 대전 고아원에서 22명의 아이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리고 고아들과 네 명의 교사 또는 보모들과 얼마간 고아원에서 생활했던 버지니아를 위해서 일층짜리 건물이 보기 좋게 지어졌습니다. 필자 가족이 1969년에 안식년으로 고향에 돌아가게 되었는데, 버지니아도 이때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고, 미국에 남아 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녀는 1971년 10월 7일 하비 벤져와 결혼하였고, 미주리 주 아스베리 루트 1번지에 보금자리를 꾸몄습니다. 그녀는 지금도 한국의 고아들을 위해서 후원금을 관리하는 현지 에이전트로 지속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1969년 11월 29일, 필자 부부는 엄마가 죽은 세 쌍둥이 한국아이들을 데려왔습니다. 한 아이는 후에 죽었고, 나머지 링컨과 더그는 필자 부부가 양자로 입적하였습니다.

1963년 2월 20일에 딸인 티나 메이가 대전 선교부에서 태어났습니다. 같은 해에 필자는 미국에 있는 한 신학대학원으로부터 신학박사학위를 수여받았습니다.

필자 부부는 1964년 여름 안식년을 맞아 유럽으로 경유하여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때가 처음이자, 아마 마지막 유럽 여행이 될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파리에서 심카라는 작은 자동차를 구입해서 그걸 타고 북유럽의 여러 곳을 관광하였고, 8월에 배로 미국에 부쳤습니다. 미국에서 일 년 동안 안식년을 보내는 동안 그 차를 이용하였습니다. 필자가 미국 전역을 돌아 다니며, 한국에 관해서 미국 교회들에 알리는 동안, 필자의 처와 네 자녀들은 미주리 주 조플린에 살고 있었습니다. 필자 부부가 안식년으로 미국에 거주하는 동안 부산에서 딕 래시가 대전에 올라와 한국 성서 신학교에서 가르쳤으며, 교수들과 직원들의 봉급을 지급하였으며, 전반적으로 업무를 살폈습니다. 그는 대전뿐 아니라, 부산과 강릉의 일을 모두 잘 해냈습니다.

필자 가족의 고아원 사역은 대전에 있는 "버지니아 고아원"의 설립과 유지뿐 아니라, 1959년 이후 세 곳의 다른 고아원들, 즉 88명의 어린이를 수용한 부산 홍 여사의 성광원, 현재는 영아원이지만, 90명에서 145명까지 수용했던 연무대의 에덴 보육원, 1951년 이후 인천에 세워진 인천 그리스도의 교회 고아원에 주는 지속적인 후원을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필자 부부는 1951년부터 1955년까지 서울과 인천과 대전과 대구를 이어지는 네 개의 도시에서 고아원을 세우도록 도왔거나 운영하였고, 1959년부터 1972년까지 인천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다른 네 곳의 고아원을 세우도록 도왔거나 운영하였습니다. 많은 미국의 후원자들이 많은 고아들을 위해서 확보되었고, 그들이 후원금을 보내주었습니다.대전과 연무대의 에덴 보육원에서 많은 아이들이 미국에 보내어져 새로운 미국인 양부모와 함께 살게 되었고, 매우 잘 지내는 것같습니다.

1962년 고든 패턴 가족이 서울의 해롤드 테일러 가족과 함께 일하기 위해서 한국에 왔습니다. 그들은 서울 성서 신학교의 경영을 돕고 있습니다. 지난 수년간 고든 패턴은 새로운 믿음사역에 뛰어들었는데, 성서주석과 같은 많은 종교서적들과 많은 전도용 전단들을 영어에서 한국어로 번역하고, 출판하고, 공급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마 이 사업이 그의 한국에서의 가장 큰 업적일 것입니다.

프레드와 엘리 호프만 부부는 필자 가족과 김찬영 가족 그리고 한국 크리스찬 밋션 산하 한국 교회들과 동역하기 위해서 1971년에 한국에 왔습니다. 엘리는 오정동 미국 유치원에서 가르칩니다. 프레드는 한국 성서 신학교에서 영어 성경을 가르치면서 아르바이트하는 학생들의 작업을 감독하는 일과 고아원의 많은 일과 건물 유지를 돕고 있습니다. 그와 엘리는 한국어를 매우 열심히 배우고 있으며, 크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미국으로 건너가 신학대학과 종합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와 그들 자신의 민족을 섬기는 미국 선교사들로써 뿐 아니라, 본토 교회의 지도자들로써 섬기는 많은 한국인 젊은이들에 관해서 지면을 할애하고 마땅한 점수를 줘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서울의 최윤권, 최순국, 안재관이 포함되는데, 지금 한국에서 가장 큰 우리 교단 신학교인 대한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를 서울에 세운 이들입니다. 미국인 부인 패트와 두 아들 피터와 필립을 데리고 1970년에 한국에 돌아온 대전의 김찬영은 1972년 1월 21일 이후 지금 한국 성서 신학교의 새로운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1971년에 한국에 돌아온 이만수 혹은 이신은 대한 신학교, 이화 여자대학교, 연세 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현재 공부하고 있는 한국학생들은 신영기, 유근희 김희영 같은 이들이며, 부산의 장성만 목사도 신시내티 성서 대학원에서 공부하였고, 부산에서 재학생 340명 규모의 전문대학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논산, 풍산, 장호원, 충주에 세워졌던 기독교 학교들에 대해서도 언급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비록 이들 가운데 두 곳이 자금부족으로 문을 닫아야 했지만, 수백명의 가난한 소년 소녀들이 이곳 학교들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필자의 가족은 1939년부터 시작된 한국에서의 역사(歷史)를 마치고, 1972년 6월에 한국의 선교사역에서 은퇴하고, 모든 것을 본토 한국인들과 한국에 보내어질 젊은 선교사들, 만약에 그와 같은 젊은이들이 발견되고 모집되어 질 수 있다면, 그들에게 인계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 . 평안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번역 후기: 인쇄된 영문 자체에 상당한 오자가 발견되었고, 초역을 참고하여 교정하였으나 그래도 오자나 오역이 있을 수 있음을 밝혀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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