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8장 성경공부
제1과
복음과
믿음
오늘의 말씀: 로마서 1장
1-32절
찬송: 415장(통471), 305장(통405)
간직할 말씀: ...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6-17).
주제: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말씀
앞에서
로마서는 바울이 터키 소아시아도
에베소에서 2년 3개월의 선교사역을 모두 마치고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교회들을 순방하던 중에 겨울을 나기 위해서 아가야도 고린도에서 3개월간
머물렀던 주후 57년 말부터 58년 초 사이에 작성하였다. 주후 58년 초여름 오순절 절기 때 예루살렘에 방문했다가 준비를 마치는 대로 로마로
건너가 서방지역에 선교하겠다는 계획을 알리고, 자신이 동방지역에서 전파한 그리스도의 교회의 복음과 구원에 관해서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말씀을
나누며
1. 복음의
대상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에 민족색깔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차별이 없다는 소식이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하나님이 되신다. 하나님은 누구한테나 차별이 없이 믿음만으로 판단하시고 값없이
은혜로 구원을 베푸신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는 없다. 하나님은 누구도 버리지 않으신다. 다만 기다리실 뿐이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 로다.”라는 16절의 말씀은 예수님의 탕자비유와 맥을 같이 한다.
탕자를 기다린 아버지는 순종적인 맏아들한테뿐 아니라, 방탕아 둘째 아들에게도 자비로운 분이셨다. 순종적인 맏아들은 유대인 또는 먼저 믿는 자들의
대표요, 방탕아 둘째 아들은 이방인 또는 불신자들의 대표이다. 이 모두가 다 동일한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다. 하나님과 유대인과의 관계는 지상
가나안땅과 문자적인 이스라엘 나라에 관한 옛 언약(구약)으로 맺어졌다. 따라서 새 하늘땅과 새 하늘나라에 관한 새 언약(신약)으로 맺는
그리스도인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더 좋은 새 하늘땅과 새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이 기득권을 모두 내려놓고
이방인들과 동일하게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최우선적으로 유대인에게
전파되었다. 그렇다고 무슨 별도의 혜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복음은 근본적으로 민족색깔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고, 오직 복음을 듣고
믿고 회개하고 신앙고백하고 침례를 받고 성령님을 선물로 받음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기쁨의 소식이기 때문이다.
2. 복음의
주인공
복음의 주인공은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님을 말한다. 구원은 이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음으로써 시작된다. 복음이 말하는 구원은 지상 가나안땅과 문자적인 이스라엘
나라가 아니고, 새 하늘땅과 새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이므로 맏아들 신분의 유대인도 방탕아 신분의 이방인과 동일하게 복음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가능하게 된다. 유대인들이 율법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은 율법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언약은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정의와 평화와 안식이 없는 유대인만의 지상의 땅을 얻고 나라를 세워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 옛 언약은 근본적으로 유대인만을 위한
유대인을 선민이 되게 하는 것이지, 인류를 위한 인류를 선민으로 삼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민족색깔에 상관없이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예수님을 믿고 값없이 은혜로 새 하늘땅과 새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새 언약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방인은 물론,
유대인까지도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이 복음인 것은 민족색깔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차별이 없고, 값이 없으며,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기 때문이다.
3. 복음의
주인공에 대한 믿음
18-32절은
하나님이 자연을 통해서 자기 존재를 드러내시기(계시) 때문에 이방인들일지라도 창조주의 존재를 어느 정도 인식할 수 있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거룩하게 살기보다는 우상숭배하며 음란하게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또 인간에게는 동물과 달리 창조주의 존재를
의식하고 공경할만한 이성과 종교성이 있고, 도덕법을 만들어 지킬만한 사회성도 있고, 지켜야할 법을 지키지 못했을 때 느끼는 양심의 가책도 있고,
또 하나님과 긴밀하게 관련된 율법이 있지만. 인간은 죄와 허물을 피할 수 없는 피조물이다.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자연스럽고 필연적이며
절대적이다. 그런데다가 법이란 아무리 잘 지켜도, 혹 가다 한 가지만 지키지 못해도 죄를 짓는 게 되고 만다. 만 가지 법들 중에 한 가지만
지키지 못해도 죄인이 되고 만다. 큰 죄도 죄이고, 작은 죄도 죄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처럼 613개의 율법과 수많은 울타리 법들을 철저하게
지켜서 하나님의 거룩하고 완전한 속성을 만족시키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현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만일 하나님이 ‘죄의 대가는 죽음’이란 잣대를 들이대신다면, 아무리 깨끗하고 고결하며 착하고 성실하게 살았어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복음의 주인공 이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총을 입지 않으면, 아무라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
말씀을
마치며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복음은 2000년 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것을 선포하시기전까지 유대교인들이 1000년이 훨씬 넘도록 오해하고 실천하지
못했던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깨닫고 선포한 기쁨의 소식이다. 이 소식은 민족색깔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모두가 동일한 한
가지 조건, 즉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분이 세우신 새 하늘땅과 새 하늘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다는 기쁨의 소식이다. 믿음으로 받는 구원에는 이 복음을 듣고, 믿고, 회개하고, 신앙고백하고, 침례를 받고, 성령님을 선물로 받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말씀을
새기며
1.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각자에게 어떻게 임했는지 회심체험을 말해보자.
2. 생명체가 만들어지는 수정에서 출산까지가
믿음으로 구원(생명)을 얻는 과정 즉 듣고, 믿고, 회개하고, 신앙고백하고, 침례를 받고, 성령님을 선물로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토의해 보자.
제2과
복음과
율법
오늘의 말씀: 로마서 2장
1-29절
찬송: 218장(통369), 220장(통278)
간직할 말씀: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롬
2:11).
주제: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
말씀
앞에서
인간의 딜레마는 죄와 허물을 피해 갈
수 없다는데 있다. 하나님은 자연과 인간본성에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계시고, 인간은 그분의 존재를 의식하고 공경할만한 이성과 종교성과 도덕법을
만들어 지킬만한 사회성과 지켜야할 법을 지키지 못했을 때 느끼는 양심의 가책까지 부여받고 있지만, 심지어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서 유대인들에게
당신에 관한 특별한 지식을 알게 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유대인조차도, 제힘으로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말씀을
나누며
1.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의 근거는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에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성(이성, 지성, 감성, 의지, 종교성, 사회성)이며, 도덕법과 양심법과 율법이 이것
때문에 가능하다. 이 점에서 인간은 영성을 가진 존재가 되지만, 다른 점에서는 동물적 본능을 지닌 피조물이어서 도덕법과 양심법과 율법을 따라
살기보다는 이를 범하기가 쉽다. 그러므로 정의로운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로마서 2장은 하나님이 인간의 행위보다는
믿음의 여부를 기준으로 심판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오래 참음으로 탕자를 기다리시며, 회개하고 돌아온 자들을 자녀로 삼으시고 구원(영생)을
주시지만, 끝까지 거역하고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재앙(영멸)을 내리신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기다리심은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한 것이며,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회개할 기회를 누구한테나, 순종하는 자나 대적하는 자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신다. 하나님은 구원받을 자와
저주받을 자를 미리 정해놓지 않으신다. 그러나 회개할 기회를 끝까지 거부하는 자에게는 진노하신다. 하나님의 심판은 사랑의 매와 재앙(진노)으로
나뉜다. 사랑의 매는 죄인을 회개시켜 구원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므로, 회개하는 한 결코 재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방법은 자신의 죄와 허물을 회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재앙은 끝까지 회개를 거부하는 자들과 적대자들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진노이므로 그
끝은 불과 유황불 못이 된다.
2. 율법의
문제
도덕법과 양심법과 율법의 문제는 그
기초를 신본(神本)에 뒀느냐, 인본(人本)에 뒀느냐에 있기보다는 그것들을 지켜야할 인간을 목적으로 삼았느냐, 아니면 수단으로 삼았느냐에 있다.
예수님과 유대주의자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신본주의에서 비롯되었다. 예수님과 유대주의자들은 모두가 신본주의자들이요 절대주의자들이었다. 그런데 왜
다퉜는가? 예수님은 인간을 목적으로 삼으셨는데 반해서 유대주의자들은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 율법은 인간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것이었지만, 유대주의자들에게 율법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목적이 되고, 하나님이
이익의 수단이 되지 아니하며, 인간의 행복이 목적이 되고, 이익의 수단이 되지 아니하면, 17-19절의 말씀대로,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아이의 선생이” 되지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목적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이 이익의 수단이 되며, 인간의 행복이 목적이 되지 못하고 이익의 수단이 되면, 21-24절의 말씀대로, 남에게 가르치는 것들을 자신은
지키지 않으며, 율법을 자랑하면서 율법을 어기며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
3. 율법의
목적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인간을 이롭게 하려는 것이었다. 율법이 인간을 이롭게 하려면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아야지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동시에 인간을
목적으로 삼아야지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을 목적으로 삼으시지, 영광을 받기위한 수단으로 삼지 않으신다. 인간은
하나님을 마땅히 예배와 경배를 받아야할 존귀한 분으로 섬겨야지 이익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 시험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마땅히 바쳐야하고, 인간의 것은 인간에게 마땅히 돌려줘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할 예배와 경배를 드리되,
이익의 수단이 아닌, 예배와 경배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신본주의가 되어야 한다. 동시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계명을
주시되, 인간의 행복을 위해 주셨으므로, 율법은 인간의 삶에 행복의 도구가 되어야지 억압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인본주의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인간을 수단으로 삼지 않으신다. 인간의 존재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도 하나님이 정한
강제적인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자발적인 목적일 뿐이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의 존재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수단으로 삼으셨다면, 그 수단은
실패로 끝난 것이 되고 만다. 하나님은 인간들로부터 영광은 고사하고 배신과 굴욕을 당하시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골고다의 십자가이다. 동시에
골고다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영광 받으시기 위한 수단으로 삼지 않으시고, 인간의 행복을 목적으로 삼으셨다는 증거이다.
말씀을
마치며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도덕법과 양심법과 율법이 있지만, 그 누구도 죄와 허물을 피해 갈 수 없고, 제 힘으로는 그 죗값인 죽음을 면할 수 없다는데 딜레마가 있다.
반면에 하나님은 오래 참음과 기다림과 종종 사랑의 매로써 인간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그러나 끝까지 거역하고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진노하시고
재앙을 내리신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이 있고 없음에 있다. 율법의 문제점은 인간을 이롭게 하지 않고, 억압하는 도구가
되어버린데 있었다. 이런 점에서 28-29절은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고 하였다.
말씀을
새기며
1. 인간의
구원이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믿음에 있는 이유를 말해보자.
2.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이웃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수단으로 삼고 있는 사례들을 말해보자.
제3과
복음의
특징
오늘의 말씀: 로마서 3장
1-31절
찬송: 518장(통252), 520장(통257)
간직할 말씀: ...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5-26)
주제: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롭다고 하신다!
말씀
앞에서
인간은 누구도 죄와 허물을 피해 갈
수 없고, 제 힘으로는 죗값인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20절에서,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오히려 사랑의 하나님께서 심판의 기준을 율법의 행위에 두지 않으시고 믿음에 두신다는
역설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인간을 이롭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와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을 목적(우상)시하면서 인간을 억압함으로써
곤경에 빠뜨렸다.
말씀을
나누며
1.
믿음으로
인간의 딜레마는 불완전한 피조물인데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23절은 이 딜레마 때문이다. 피조물은 죄와 허물을 피해 갈 수
없고, 그 죗값인 죽음을 면할 수 없다. 그리스신화도 이 점을 강조하였다. 인간이 구원을 받는 길은 자기가 누군가를 알고 하나님을 믿는데서
출발한다. 그리스의 파르나소스 산 중턱에 세계의 배꼽(옴팔로스)으로 여겨졌던 델포이가 있었고, 그곳에 아폴론이 인간의 운명을 맡긴 신전이
있었다. 그 신전 상인방에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가 있었다. 이 경구는 “너의 운명을 알라. 반드시 죽게 될 피조물이란 것을 알라”는
것이었다. 이것을 알고 신에게 은총을 빌라는 뜻이었다. 이것을 망각하고 신에게 도전하면 반드시 응보(네메시스)가 따른다는 뜻이었다. 유럽인들은
지상낙원 아르카디아(Arcadia)에도 죽음은 있다고 믿었다. 부와 명예와 권세가 아무리 많고, 일평생 누린 쾌락이 아무리 클지라도,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것이다”(히 9:27). 그러나 믿음만은 인간의 영원한 미래를 보장한다. 하나님은
과거를 묻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값을 쳐주시는 것은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으로 믿는 것이다(10:9).
하나님은 율법의 행위보다는 회개하는 마음을 보신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과 죽어 있는 것들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을 보신다.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보신다.
2. 차별
없이
하나님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유식무식을
차별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신분의 높고 낮음을 묻지 않으신다. 18세기말이후 복음을 받아드린 조선인들은 양반이니 상놈이니 하는 신분을 따지지
않았다. 황일광이란 백정출신의 그리스도인이 있었다. 그는 청소년 시절을 모든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보냈다. 그런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자, 교인들은 그를 친형제처럼 대우하였다. 그는 농담조로 “사람들이 너무 점잖게 대해 주기 때문에 내게는 이 세상에 하나, 또 후세에 하나,
이렇게 천당 두 개가 있다.”고 하였다. 19세기 초엽 신자가 비신자를 전도하는데 있어서 가장 컸던 고충이 다름 아닌 양반 상놈, 적자 서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 같은 계급으로 인식하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평등사상이었다. 천당은 좁고 입구도 바늘구멍 같다던데 어떻게 상놈이나 서자가
또 미천한 계집이 들어갈 틈이 있겠느냐는 것이 믿음을 외면하는 이유였다. 이 난관을 극복하는데 동원된 선교 도구가 프랑스 신부들이 신고 들어온
양말이었다. “믿음이란 지극히 공평한 것으로 그 앞에서는 양반도 상놈도 지아비도 지어미도 또 어른도 아이도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 양말이
부드럽고 탄력이 있어 어느 누구의 발에도 신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라고 말하고 양말을 신겨만 보이면 손쉽게 깨닫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게 되었다고 한다. 21-24절뿐 아니라, 로마서 전체의 주제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는 데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3.
값없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과 천국행
통행증에는 값이 없다. 천국은 믿음으로 가는 곳이지 돈이나 행위로 가는 곳이 아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고 24절은 말한다. 여기서 “의롭다 하심”은 법정용어이다.
재판장이 법정에서 “무죄”라고 선고하는 것과 같다.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신앙을 고백하고 침례를 받은 사람에게 죄를
용서하시고 무죄를 선언하신다. 무죄선언에서 그치지 않고, “의인”으로 대우하신다. 여기서 ‘무죄선언’과 ‘의인대우’는 신자(信者)의 죄나 죄지을
성질이 실질적으로 사라지는 것을 뜻하지 않고, 말 그대로 대우받고 간주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이것을 ‘간주된 의’ 혹은 ‘전가된 의’라고
말한다. 죄인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의(義)와 그 아들 예수님의 순종의 의(義)가 믿는 자에게 온라인송금처럼 인간의 의로 옮겨진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의와 예수님의 순종의 의가 값없이 신자에게 옮겨지고 신자의 의로 간주되기 때문에 이것을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된
의(義)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은혜란 죄 사함과 구원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은 종족 언어 혈통 신분에 상관없이 오직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기만
하면 은혜로 값없이 받는다는 것이 복음의 내용이다.
말씀을
마치며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구원은
믿음으로 차별 없이 값없이 온라인송금처럼 하나님께서 무죄를 선언해 주심으로써 이뤄진다. 이를 26절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다가 지금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새번역)라고 기술하였다. 구원이 ‘선택’이란 이름으로 유대인에게는 열려있고, 이방인에게는 닫혀있거나 하나님의 주권 때문에
특정인에게는 무조건적으로 열려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닫혀있지 않다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조건아래 누구한테나 공평하게 차별 없이 기회가
열려있다는 것이다.
말씀을
새기며
1. 은혜와
믿음으로 받는 구원이 예수님의 속죄제물(25절)과 관련하여 값싼 것이 아닌 이유를 말해보자.
2. 구원의 문이 특정인이 아닌 누구한테나
활짝 열려있는 이유에 대해서 말해보자.
제4과
구원과 부활의
믿음
오늘의 말씀: 로마서 4장
1-25절
찬송: 287장(통205), 289장(통208)
간직할 말씀: ...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
주제: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자!
말씀
앞에서
로마서는 율법의 행위나 할례를
폄하하지 않는다. 할례를 포함한 율법이 폄하될 경우는 그것들이 구원에 필수적인 요건들로 강요될 때뿐이다. 바울은 구원을 아직 받지 못한 단계에서
요구되는 믿음과 이미 구원을 받고난 다음 단계에서 요구되는 믿음을 구분하였는데, 할례를 포함한 율법의 행위는 이미 구원을 받고난 다음에 요구되는
순종(실천)의 믿음에 해당된다고 보았다. 4장에서 바울은 3장 21-31절에서 언급한 믿음으로 받는 구원에 대한 예증(例證)으로써 아브라함을
증거로 내세웠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은 율법과 할례를 받기 이전이었다는 것이다.
말씀을
나누며
1. 예표와
성취
아브라함은 모세보다 짧게는 430년
전, 길게는 645년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후손(이스라엘 민족)과 가나안 땅(이스라엘 영토)에 대한 약속을 받고 그 증표로 할례를 행하였다.
그런데 바울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받은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을 유한하고 흔들리며 요동치는 지상 가나안땅으로 이해하지 않고, 영원하고
견고하며 안전한 하늘 가나안땅으로 이해하였다. 또 바울은 아브라함이 약속으로 받은 후손을 모세 때에 짐승의 피로써 맺은 옛 언약(구약) 공동체인
유대인들로 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맺은 새 언약(신약) 공동체인 그리스도인들로 보았다. 옛 언약 공동체인 유대인들을 그림자와 모형과
예표로 보았고, 새 언약 공동체인 그리스도인들을 그것들의 실체와 원형과 성취로 보았다. 바울은 4장에서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거나
받을 자들의 예증(例證)으로 제시하면서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떻게 의롭다함(구원)을 받고, 후손들과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을 받았는가를
설명하였다. 후손은 문자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이고, 가나안땅은 이스라엘 영토이지만, 바울은 가나안땅을 자주 ‘기업’이란 말로 표현하면서 하늘
가나안땅으로 언급하였다. 또 후손을 자주 ‘상속자’란 말로 표현하면서 그리스도인들로 언급하였다. 바울은 이 예표와 모형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신분을 혈통에 의한 유대민족만의 조상으로 보지 않고, 믿음에 의한 모든 민족의 조상으로 보았다.
2. 믿음을
의로 여기심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3절)를 시작으로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4:3,5,6,9,11,22,23,24)는
표현이 4장에서만 8번 사용되었다. 이 표현은 사람의 믿음이 의(義)로 간주되고, 하나님의 의(義)가 신자에게 전가된다는 뜻이다.
‘여기셨다’(reckoned)의 의미는 마치 어떤 사람이 은행에 큰 빚을 지고 있다가 누군가에 의해서 온라인 구좌로 송금되어 그 빚이 다 갚아진
것과 같다. 물론 여기서 송금된 돈은 갚을 의무가 전혀 없는 선물이다. 만일 그 빚을 갚아야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은혜나 선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4-8절에서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고 하였다. 예증으로 제시된
아브라함의 믿음은 할례를 포함한 율법의 행위, 즉 순종(실천)의 믿음과 무관하다. 11절은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다.
3. 부활의
믿음으로 된 상속자
13-16절은
‘믿음을 의로 여기심’의 결과가 상속을 받게 한다는 점을 깨우쳐주며,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도 상속에 관한 것임을 알게 해준다. 그런데 이 약속이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했다. 순종(실천)의 믿음으로 된 것이 아니라, 구원하는 믿음으로 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율법에 속한 자들 즉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들조차도 이 믿음을 갖지 않으면 그 약속의 상속자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여기서 바울은 유대인들만의 약속으로 여겨졌던 아브라함의 약속을 모든 이방인들의 약속으로까지, 유대인들만이 상속자로 여겨졌던 것을
모든 이방인들을 상속자로 확대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구원하는 믿음이라는 동일한 조건아래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차별 없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모시게 되고, 또 아브라함이 받았던 약속의 동등한 상속자가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17-25절은 ‘상속자’가 되는 조건에 대해서 말해준다.
아브라함이 지녔던 믿음처럼, 부활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다.”
말씀을
마치며
바울은 예증으로 제시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구원하는 믿음’과 ‘부활의 믿음’으로 논증하였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었다. 그의 믿음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께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17절).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18-20절). 바울은 아브라함의 이 믿음이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23-25절)고 말한다. 이처럼 구원하는 믿음은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믿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24-25절). 10장 9절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말씀을
새기며
1. 구원하는
믿음, 순종의 믿음, 교리(신앙고백서)의 믿음이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자.
2. 구원과 부활이 어떻게 같은지, 부활의 믿음이 왜
구원(영생)의 근간이 되는지 말해보자.
제5과
구원과
연단
오늘의 말씀: 로마서 5장
1-21절
찬송: 336장(통383), 338장(통364)
간직할 말씀: ...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주제: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하자!
말씀
앞에서
로마서 1-4장은 구원의 근원과
수단에 대한 설명이다. 1장 16-17절은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주제선포이다. 1장 18절부터 3장 20절까지는 죄 또는 죄악성 때문에 인간이 자기 행위로는 구원(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는 설명이고, 3장
21절부터 3장 31절까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사람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값없이 차별 없이 받는다는 설명이다. 4장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예증으로써 설명한 것이고, 5장은 구원을 보장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 땅에서는 여전히 환난을 겪어야하는지, 왜 환난 중에도
즐거워해야하는지, 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기뻐해야 하는지, 왜 소망이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다.
말씀을
나누며
1. 구원의
소망을 이룰 연단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은 가나안땅과
나라였다. 할례는 이것들의 증표였다. 마찬가지로 침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늘 가나안땅과 나라의 증표가 된다.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은 모세 때에
히브리민족에게 성취되었다. 그들은 첫 유월절 날 이집트를 탈출하여 홍해를 건너는데 성공하였고, 50일째 되는 첫 오순절 날 시내산에서 체결한
언약식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나안땅을 주시는 대신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로 서약하였다. 이후 그들은 가나안땅을 차지하기까지 40년간
광야사막을 행군하였다. 이 행군은 인내를 시험하는 연단과정이었다. 출애굽사건은 예수님이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보낸 고난주간에
대한 예표요 모형이다. 또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신앙고백하고, 침례 받고, 구원을 보장받고 하늘 가나안땅에 들어가기까지 이
땅에서 펼치는 신앙생활(천로역정)의 예표요 모형이다. 히브리민족이 홍해를 건넌 후 구원의 해변에서 목 놓아 외쳐 부른 승리의 노래(출 15장)는
예루살렘입성 때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종려나무가지를 꺾어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를 연호한 것의 예표요 모형이었다. 또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보장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부르는 찬송의 예표요 모형이었다. 히브리민족이 광야사막에서 연단을 받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에 진군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의 강을 건너신 후에 부활하시어 하나님의 우편보좌에 앉으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이 땅에서의 환란을 이기고
소망을 이뤄 저 하늘 구원의 해변에서 “어린 양의 노래를”(계 15:2-4) 부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1절).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2절).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3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한다”(11절)고 말하면서 구원을 보장받고 나서 환란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즐거워할 것을 강조하였다. 5절은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이 인내와 연단만으로 이뤄지지 않고, 구름기둥이 히브리민족을 인도하였던 것처럼,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2. 구원의
소망을 이룰 뿌리
바울은 로마서에서 죄와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부활과 생명의 세계로 나아갈 새롭고 살아있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12-21절에서 죽음과 생명의 뿌리에 대해서
설명한다. 죽음의 뿌리는 죄에 있고, 생명의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인류 최초로 죄와 죽음을 세상에
끌어들인 아담과 그것들을 상쇄시키고도 남을 부활과 생명을 세상에 끌어들인 예수님을 대조시켜 설명하였다. 여기서 아담은 최초의 인간이다. 인간은
피조물이다. 피조물은 죄와 허물과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아담(인간)의 범죄는 필연이고, 운명이다. 인간이 죄인이 되는 것은 자연스런
것이지, 하나님께서 죄인이 되도록 예정하셨거나 아담이 지은 죄 때문이 아니다. 아담이 아니었더라도 인간은 죄를 범하게 되고 또 죄 때문에 죽게
된다. 죄 때문에 죽는다는 말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죽는다는 말과 동일하다. 피조물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반드시 죽게 되고, 살아있는 동안에는 죄를
짓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영원하시고, 오류가 없으시기 때문에 거룩하시다. 인류는 아담의 후손이므로, 아담처럼, 죄를
범하게 되고, 또 반드시 죽게 된다. 인간에게 있는 죄지을 성질은 아담의 죄가 유전된 때문이 아니라, 육체(본능) 때문이다. 육체(본능)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죄의 뿌리요 씨앗이다. 이 뿌리와 씨앗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기 이전부터 그에게 있었다. 로마서는 인간의 죄와 죽음의 뿌리가
본능을 초월하는 신령한 몸을 입는 부활을 통해서 제거될 수 있다고 말한다. 믿음은 예수님을 구세주와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12-21절은 죄를 세상에 끌어들인 아담으로 인해서 상실된 것은 무엇이든지간에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더욱
넘치게’ 보상되고 회복될 것이라고 말한다.
말씀을
마치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믿음으로
구원(육체부활)을 보장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여전히 환난을 겪는 이유는 구원(육체부활)이 주님의 재림 때에 이뤄질 소망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와 낙원에서 구원을 보장받고 있는 상태를 영적부활(거듭남) 혹은 영혼구원이라고 말하고, 주님이 재림하실 때 이뤄질 구원을
육체구원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구원을 성령님으로부터 확실히 보장받고, 인침 받고, 안내를 받기 때문에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고, 구원의
날의 영광을 바라고 기뻐하며, 생활 속에서 미리 앞당겨 맛보고 누려야 한다는 것이 1-11절의 말씀이다. 회개할 죄가 없는 갓난아기가 죽는 것은
아담의 죄 때문이 아니라, 피조물이기 때문이며, 이미 죄와 죗값으로 병든 세상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할 죄가 없으므로 그들의 영혼죽음까지
단정 짓기는 어렵다. 12-21절은 예수님의 순종의 결과가 아담(인간)의 불순종의 결과보다, 또 구원에 미치는 범위가 죄와 사망보다 월등히 커서
비교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보혈로써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고, 부활로써 인간의 죽음문제를 해결하셨다. 4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할례와 같은 율법행위에 전혀 상관없이, 의롭다하심을 입기에 충분한 믿음으로 언급한 것은 예수님의 보혈의 은총이 신약시대이전에 부활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받은 자들에까지 소급될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다.
말씀을
새기며
1.
그리스도인들이 육체의 부활을 믿어야할 이유에 대해서 말해보자.
2. 육체부활을 보장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말해보자.
제6과
성화의
원리
오늘의 말씀: 로마서 6장
1-23절
찬송: 455장(통507), 461장(통519)
간직할 말씀: “죄의 삯은 사망이고,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 안에 있는 영생이다”(롬 6:23.
주제: 죄에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다.
말씀
앞에서
5장에서 구원을
보장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 땅에서 여전히 환난을 겪어야하는지, 왜 환난 중에도 즐거워해야하는지, 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기뻐해야 하는지,
왜 소망이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인지를 설명한 바울은 이제 6장에서 구원을 보장받은 그리스도인이, 비록 여전히 죄지을 성질인 옛사람의 본능아래
살고 있지만, 왜 이 땅에서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몸의 지체를 죄악의 도구로 쓰지 말며,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바쳐야하는지, 죄에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하는지를 설명하였다.
말씀을
나누며
1. 구원을
설명하는 단어들
로마서에는 구원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어들이 쓰이고 있다. 첫째, 법정용어인 ‘의롭다 하심’(4:24, 5:1)이 쓰였다. ‘의롭다하심’은 법정에서의 무죄선언에 비유될 수 있다.
인간의 죄지을 성질은 그대로 둔 채,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을 의인으로 간주해 주시고 인정해주시는 것을 말한다. 보통은 ‘칭의’(稱義)라고 부른다.
둘째, 노예시장의 통용어인 ‘구속(救贖, 3:24)이 쓰였다. 근본개념은 몸값(贖錢)을 내고 속박에서 풀려나는 것을 뜻한다. 죄의 종노릇에서
해방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자유인이 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죽음을 뜻하는 몸값(贖錢)은 피조물에 불과한 사단에게 지불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공의의 진노를 풀기위해 지불되었다. 셋째, 중재용어인 ‘화목’(5:10-11)이 쓰였다. 분단의 벽을 헐고 적대감정을 풀어
화평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화목은 하나님의 적대감과 진노하심이 제거되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께서 이를 위해서 화목제물이 되셨다.
넷째, 피해보상 혹은 희생제사 용어인 ‘그 피를 인하여’(3:25, 5:9)가 쓰였다. 구약에서는 피 흘림만이 효력이 있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믿는 자들을 대신해서 속죄제물이 되셨다. 그들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고, 예수님은 그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죄인들이 하나님께 끼친 피해를 보상하셨다. 따라서 6장은 죄의 형벌, 죄의 권세, 죄의 실재로부터 해방된 그리스도인들이 자발적으로
순종의 종(16절), 의의 종(18절), 하나님의 종(22절)이 되어야한다고 강조하였다.
2. 구원을
설명하는 다른 단어들
앞에서 설명한 ‘의롭다하심’ 즉
‘칭의’가 재판장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무죄로 혹은 의인으로 간주되고, 인정되고, 선포되는 것이라면, 의사이신 성령님에 의해서 죄의 씻음으로
이뤄지는 중생(거듭남)을 ‘초기 성화’라 부른다. 이때로부터 성령님은 그리스도인과 함께 내주 동거하시면서 하늘 가나안땅에 들어갈 때까지
그리스도인이 점진적으로 거룩해지도록 인도하신다. 이것을 ‘점진 성화’라 부른다. 성화(聖化)가 주는 의미는 믿음으로 구원을 보장받는 것이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육체(본능)는 그대로 남겨진 채로 죄 사함을 받고, 영혼이 고침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성령님은 구원을 보장하고 인치시며, 천국의 복을 앞당겨와 미리 맛보고 누리게 하시며, 육체(본능)로 인한 죄를 멀리하여 점진적으로
거룩하여지게 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도우신다. 6장에서 죄의 형벌, 죄의 권세, 죄의 실재로부터 해방된 그리스도인들이 자발적으로
순종의 종(16절), 의의 종(18절), 하나님의 종(22절)이 되어야한다고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꽃이 피는 목적이 열매를 맺는
것이듯이, 구원의 보장(칭의)은 의의 열매를 맺기 위한 성화의 출발이다.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3:28) 것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기“(16절) 위한 것이다. 믿음만 있고 행위가 없으면, 값싼 은혜요. 행위만 있고 믿음이 없으면, 도덕이요. 믿음도 있고 행위도 있으면,
복음이 된다. 믿기만 하고 행함이 없으면, 옛사람의 본능이 조금도 성화되지 못한 것이다.
3. 성화의
원리
율법주의자들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교리가 율법의 행위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만일 율법의 행위가 그처럼 보좔 것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만일 은혜뿐이라면, 왜 은혜가 역사할 기회를 더 주기 위해서 흉악하게 육욕을 따라서 죄를 짓지 않겠는가?”라고 힐난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힐난을 냉혹하게 물리쳤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교리는 결코 죄를 정당화하거나 율법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는 점을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들이 계속하여 죄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 점에서 알 수 있다.
이뿐 아니라, 바울은 “누가 너희를 주관하는 자냐?”고 묻고, 마땅히 그리스도인들은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7:1-6). 또
바울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고 강변하였다(7:7-14). 은혜의 본질이 죄를 짓도록 권장하는 것이
아닐까(1절)라고 생각하는 것은 은혜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때문이다. 죄를 사함 받고 새 삶을 얻은 자가 계속해서 죄에 머문다는 것은 도덕적
모순이다. 침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연합한 것이다. 우리는 침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우리의 옛사람을 죽이고, 그의 부활하심과 연합하여 새사람으로 부활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죄에 머무는 것은 새사람의 삶에
모순된다(2-5절).
말씀을
마치며
침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하여 죄 많은 옛사람을 장사하고 새사람으로 부활한다면, 침례는 구원의 시간이 된다. 침례 가운데서 성령님에 의해서 중생의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기 때문이다(고전 6:11; 딛 3:5-7). 또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다”(6절)는 말씀은 구원의 목적을 말한다(엡 2:10). 비록 우리가 여전히 죄지을 성질인 옛사람의
본능아래 살고 있지만, 죄가 왕 노릇하지 못하도록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12절), 몸의 지체를 죄악의 도구로 쓰지 말며,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바치기를(13절) 권하였다.
말씀을
새기며
1. 구원을
보장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여전히 죄를 극복하지 못하는지 이유들을 말해보자.
2.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인지를 말해보자.
제7과
성화의
갈등
오늘의 말씀: 로마서 7장
1-25절
찬송: 450장(통376), 452장(통505)
간직할 말씀: ...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6).
주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자!
말씀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율법도 계명도 모두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 그렇지만 육신이 약하여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하는”(15절) 이유는 사람의 “속에 거하는 죄”(20절) 때문이라며 순종의 어려움을 탄식한다. 여기서 “내 속에 거하는 죄”란 지은 죄가
아니라, 육체(본능)가 지닌 죄지을 성질을 말한다. 주님의 재림 때에 이뤄질 육체구원(부활) 때까지 모든 사람, 특히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죄지을 성질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데 큰 어려움을 겪는다.
말씀을
나누며
1.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의미
만약 우리가 율법아래 있지 않다면,
왜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는가, 어떤 법도 우리를 얽매거나 묶지 못할 것이 아닌가(6:15)라는 반박에 대해서 바울은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를 오해하는 것이라고 6장 15절부터 7장 6절에서 밝혔다. 로마서에 언급된 자유는 순종의 의무에서 면제된 자유를 말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받는 심판을 받지 않을 자유를 말한 것이다. 율법이 정의실현과 질서유지에는 가치가 크지만, 구원의 수단으로써는 무가치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권세로부터 절대자유나 자율을 주장하는 자유지상주의는 죄악이며 거짓자유이다.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명령을 충실히 지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것을 말한다. 율법에서 자유하다는 의미는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자유, 율법준행의 의존으로부터의
자유, 율법주의 동기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데, 의무가 아닌 사랑과 감사와 자원함으로 해야 한다. 바울은
우리가 누구를 섬기느냐에 따라서 섬김을 받은 자의 종이 된다고 말했다. 죄를 섬기면 죄의 종이 되고, 의를 섬기면 의의 종이 되며,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른다”(6:16)고 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종에서 해방되어 순종의 종 혹은 의의
종이 되었다(6:18,22)고 했다. 전에는 사망의 왕인 사탄의 종이었으나, 이제는 생명의 왕인 하나님의 종이라고 했다. 따라서 은혜 아래서도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할 의무는 변치 않는다.
2.
그리스도인의 순종의 동기
그리스도인들의 순종의 동기는 사랑과
감사와 자원함이다. 이제는 의무로 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미 구원의 열차를 타고 있기 때문이다(6:17,7:1-3). 우리가 율법아래서도 최선을
다했거든, 하물며, 은혜아래서 최선을 다하지 않겠는가(6:19-20), 우리가 사망의 삯을 위해 죄를 섬겼거든, 하물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겠는가(6:21-23)라고 바울은 말했다. 비록 우리의 육체가 아직 구원받지 못했고, 그래서 여전히 연약하지만,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6:19)고 권했다.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선물)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다”(6:22-23)고
하였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믿음으로 값없이 차별 없이 선물로 주신 구원의 목적이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다”(4절)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행위의 삶이요, 수고와 노동의 삶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23)라고 했다. 더 이상 사망의 열매를 맺어서는 안
된다(5-6절). 사망의 열매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같은 것들이다”(갈 5:19-21)고 하였다.
3.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갈등
율법의 순종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면,
율법에 이상이 있거나 율법이 악하단 말이 아닌가라는 반박에 대해서 바울은 율법이 악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켜야할 인간의 육신이 연약하다고
말했다. 믿고 회개하고 신앙고백하고 침례 받고 의롭다함을 받고 거듭난 인간이라 할지라도 육체의 본능은 그대로 남는다. 그러므로 아담이 범했고,
그 후손들이 범했던 죄와 허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므로 율법은 인간의 죄지을 성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렇지만,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12절)고 바울은 밝혔다. 또 바울은 율법이 죽음의 원인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율법 때문이 아니라, 죄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가 순수한 동기로 율법을 잘 지키려고 해도 우리 몸의 죄지을 성질이 이를 만만히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가 죄와 허물을
피하지 못하고 죄에 팔리는 것은 우리 몸이 아직 부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활은 인간문제의 최종적인 해결책이자 구원책이다. 구원을
받았어도 죄지을 성질에서 아직 벗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울 자신도 육체의 연약함에 대해서 15-25절에서 탄식을 금치 못했다. 본문에서
묘사된 “나”란 사람은 바울 자신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대표이다. 탄식의 원인은 아직 해결 받지 못한 육체의 죄지을 성질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내 속에 거하는 죄”는 죄성(罪性) 즉 죄지을 성질 또는 육체의 본능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비록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길 수 있는 것이다.
말씀을
마치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성화를 이루기 위한
갈등과 탄식은 피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을 성화의 완성에 두지 않고, 초기 성화(거듭남, 의롭다함)에 둔다. 구원의
확신은 초기 성화에 있지, 완전성화에 있지 않다. 따라서 성화를 이루기 위한 갈등과 탄식은 구원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은
믿음이 있다는 증거이다. 그렇다고 완벽한 행함이 믿음이 있다는 증거의 조건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자세는 성화를 이루고자하는 갈등과
탄식이다(22절). 하나님은 자원하는 의지를 찾고 계시지 완전성화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지 않으신다. 죄지을 성질인 육체의 본능을 극복하는
완전성화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부활을 해야 이뤄지기 때문이다.
말씀을
새기며
1.
그리스도인들이 바르게 살아야할 동기나 목적에 대해서 말해보자.
2. 순종의 어려움, 성화의 갈등에 대해서 각자의 경험을
말해보자.
제8과
성화의
능력
오늘의 말씀: 로마서 8장
1-39절
찬송: 182장(통169), 191장(통427)
간직할 말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주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말씀
앞에서
로마서 8장은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
승리(능력)에 대해서 선포한다. 육신의 연약함, 죄지을 성질, 순종의 어려움이 구원받을 때 선물로 주신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극복되며,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미래에 누리게 될 복들을 앞당겨와 맛보고 체험하며 누릴 수 있다고 선언한다. 그 대표적인 구절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1절);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18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28절);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37절)는 말씀들이다.
말씀을
나누며
1. 로마서
8장의 대 선언
믿음으로 구원을
보장받았지만(1-5장), 거룩한 삶을 살아야하지만(6:1-7:14), 죄를 미워하고 계명을 사랑해야하지만, 육신의 연약함(본능) 때문에 거룩한
삶이 쉽지 않다(7:15-25).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남(초기 성화)과 의롭다함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은 점진적으로 거룩하여져 간다. 점진
성화는 육체의 욕망이 점점 죽어 가고, 반대로 영혼이 점점 살아나면서 이뤄진다. 죄의 영향력이 조금씩 줄어들면서 육체의 본능이 조금씩
성화되어져간다. 바울은 이 성화능력이 성령님의 내주 동거와 인도하심에서 온다고 8장에서 선언한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1절)는 것이다. “정죄함이 없는” 이유는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을 살리는 성령님의 법이 사단의 죄와 사망의 법에서 인간을
해방시켰기 때문이고(2절), 육체가 연약하여 인간이 충족시킬 수 없었던 율법의 요구들을 하나님께서 대신 이루셨기 때문이다(3절). 두 번째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18절)는 것이다. 장차 나타날 영광이란 주님의 재림 시(時)에 나타날 새
땅과 새 나라를 말한다. 세 번째는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37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라는 배를 타고 험한 세상 바다를 항해중이고, 하늘 가나안땅을 향해 광야사막을 진군하는 용사들이다. 히브리민족이 가나안땅 정복의
영웅들이었듯이, 그리스도인들의 행군의 끝은 ‘정복자들 이상의 정복자’가 될 것이다.
2. 예수님
안에 있는 자에게 정죄함이 없다.
첫 번째 선언,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1절)에서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아브라함의 사례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신자의 믿음을 보시고, 은혜로
의(義)로 여기시고, 사죄를 선언하셨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를 향하여 죄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인하여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고, 그에게 죄지을 성질의 육신을 입히셨으며, 인간의 죄와 허물을 그분에게 전가시키셨다. 그것은 마치 유대인들이 예배자의 죄를
흠(결점) 없는 희생 제물에 안수하여 전가시킨 것과 같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고 죽게 하셨다. 이 예수님의 보혈로 신자들의 죄를
씻게 하셨고, 죄의 삯인 죽음을 면하게 하셨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2절)고 선포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언약의 내용으로 주신 율법(계명)은 거룩하고 또 아무 문제도 없다. 인간의
육신이 연약하여 죄지을 성질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율법으로는 의인의 칭호를 얻을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인간 대신에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다(4절)는 선언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까지 하신 목적은 죄지을 성질인 육신의 본능의 욕구를 좇지 않고, 우리 안에 내주동거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좇아 행하여 성화를 이뤄가게 하려는 것이다.
3.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고통과 번뇌로부터
해방을 약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다만 그 약속이 이뤄질 시점이 주님의 재림 때이므로 이 땅에서 우리 인간은 고통과 번뇌를 계속해서 겪게
된다. 그러나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18절).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은 영혼구원에서 끝나지 않고,
육체구원과 자연구원에까지 미친다. 따라서 피조물도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탄식으로 고통을 견디면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19-25절).
그리스도인들이 소망 중에 기다리는 구원이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그리스도인의 육신은 “신령한 몸” 혹은 “영광의 몸의 형체”로 변화되며,
이미 죽은 자들은 부활할 것이다. 이때 인간은 육체의 약함과 본능에서 해방될 것이다. 사망이 생명이 되고, 죄지을 성질이 회복되어 완전성화에
이른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온 우주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회복된다. 이때 비로소 사막에 꽃이 피고, 독사 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기쁨의 그 나라가 올 것이다. 우주와 지구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뀔 것이다. 이 때문에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18절),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37절)고
선언하였다.
말씀을
마치며
이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첫째,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고(26-27절),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도 이와 같이 간구해 주시기 때문이다(34절). 둘째,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획대로 부름 받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유익하게 조종해 주시며(28절), 예지예정하시고, 부르셨으며, 의롭다 칭하시고,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이다(29-30절).
셋째, 하나님이 우리 편이기 때문에 대항할 자가 없고(31절), 외아들까지 죽게 하신 하나님은 아까울 것이 없으시며(32절),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을 고소할 자가 없고(33절), 의롭다고 칭하신 하나님을 정죄할 자가 없으며(34절), 그 누구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고(35-36절), 천상천하에 그 누구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39절)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37절).
말씀을
새기며
1.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관한 각자의 체험들을 말해보자.
2. 8장의 대 선언이 각자의 삶 속에서 육화(적용)되었던 체험들을
말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