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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5-09-26 20:01
창세기 052: 벧엘로 올라가자(창 35: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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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동호
 조회 : 5,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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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052: 벧엘로 올라가자(창 35:1-29)
이사나 멀리 여행을 떠날 사람은 사전에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꼭 필요한 것은 챙기고 불필요한 것은 놓고 가야합니다. 마음의 준비도 필요 합니다. 세심한 계획도 필요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길을 떠나거나 이사를 한다면 고생을 사서 하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여정이나 신앙의 여정도 마찬가집니다. 철저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본문 창세기 35장을 보면, 야곱이 벧엘을 목적으로 길 떠날 채비를 하는 것을 봅니다. 전 가족이 이사할 채비를 합니다. 철저하게 준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이 하란에서 20년 만에 돌아와 세겜에서 땅을 사고 그곳에 장막을 치고 정착하였는데, 그만 그곳에서 불미스런 일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외동 딸 디나가 세겜 추장으로부터 강간을 당했고, 야곱의 아들들은 대학살로써 그들에게 보복하였던 것입니다. 이 불행한 일로 인해서 야곱은 역 보복을 두려워했을 것이고, 피를 흘린 세겜 땅에서 더 이상 발붙이고 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그곳을 떠나 새로운 땅에 가서 정착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 문제를 기도하면서 심사숙고하였을 것이고, 그 때 떠오른 영감이 벧엘이었습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입니다. 이즈음에 야곱은 거처문제뿐 아니라, 가문에 심각한 위기가 닥친 원인에 대해서도 깊이 뉘우치며 반성하였을 것입니다.
야곱이 얻은 결론은 두 가지였다고 봅니다. 첫째는 세겜이란 환경입니다.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또 아들들이 세겜의 남성들을 대량 학살한 불행의 원인이 세속적이고 불신앙적인 환경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미칠 나쁜 영향을 피해서 세 번씩이나 이사를 했듯이, 야곱도 가문에 이미 나쁜 영향을 미친 세겜 땅을 떠나야했습니다. 둘째는 집안사람들의 신앙입니다. 부인들과 아들들 그리고 일군들의 신앙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만을 신실하게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있었고, 세속적인 향락에 빠진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벧엘로 이사할 것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게 된 것입니다.
다 아시다시피 벧엘은 야곱이 에서를 피해서 도망하던 때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셨던 곳입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돌을 베개 삼아 누워 잘 때에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다음과 같이 언약의 말씀을 주셨던 곳입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 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2-15).
심각한 위기를 맞이한 야곱은 기도하던 중에 세속을 떠나 하나님이 만나주셨던 영적인 터전을 생각해 냈던 것입니다. 가장 어려운 시절에 자기를 만나 주신 하나님께 서원을 드렸던 곳인 벧엘, 또 한 번의 위기를 만난 야곱은 하나님의 집인 벧엘을 생각해 내고, 이전에 만나 주셨던 그 동일한 하나님께서 또 한 번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주실 것을 믿으면서 그곳을 향해서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마치 집을 떠나 고생하며 유리하던 탕자가 극한 시련에 직면하여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고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듯이, 야곱도 하나님의 집에로 돌아가고자 하였습니다.
야곱은 세겜을 떠나 벧엘에 당도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청산할 일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신앙의 문제입니다. 야곱의 가족들 가운데는 이방 신들을 섬기는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세속적인 물질의 문제입니다. 야곱의 가족들은 신앙의 열정보다는 물질욕심에 더 깊이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의 집을 향해서 떠나기에 앞서 전 가족들을 모아놓고 중요한 지시를 내립니다.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가족들은 모든 이방 신상과 귀고리까지 빼어 야곱에게 주었고, 야곱은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장사지내는 것입니다. 우상이란 매우 상징적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우위에 놓는 것은 다 우상입니다. 그것이 종교이든, 물질이든, 교만이든 하나님보다 앞선 것은 다 우상입니다. 그것을 땅 속에 내려놓고 묻어버려야 합니다. 귀고리는 물질욕심이나 향락을 상징한다고 봅니다. 그들이 귀고리를 빼서 땅 속에 놓고 묻어버린 것은 소중하게 생각하던 것을 장사지내버린 것입니다. 내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만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겠다는 마음의 표시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헌금을 준비하고 드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소중한 돈을 떼어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물질이나 돈보다 하나님을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돈 없이 살 수 없는 것이 세상살이이고 보면 헌금을 바치는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가난해질 수밖에 없고, 하나님은 그 가난해진 마음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또 야곱은 “의복을 바꾸라”고 했는데, 이것은 철저한 회개를 상징합니다. 찌든 때로 더러워진 의복을 바꾼다는 것은 세속에 찌든 때를 깨끗하게 씻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방 신상과 사치의 상징인 귀고리를 땅 속에 묻어버리고 의복을 바꾼다는 자세로 하나님께 나설 때 하나님은 우리를 받으시고 도우십니다. 야곱이 철저하게 회개하고, 모든 것을 청산한 후에 하나님의 집인 벧엘을 향해 떠날 때에 하나님은 그와 그의 가족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세겜을 떠날 때에 그들을 추격하는 적대세력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겜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심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야곱과 그의 가족에게만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도 어려움과 문제는 생깁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그 어려움을 함께 헤쳐 나갈 동반자로 누구를 꼽느냐는 데 있습니다. 자녀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아버지나 어머니를 생각하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을 생각하느냐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동반자이십니다. 부모가 자녀의 손을 붙잡고 걷듯이,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손을 붙잡고 걷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어려움이 발생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일수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을 멀리 했을 때입니다. 부모에게서 멀어진 어린 자녀는 사고를 당하기 싶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잊고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야곱이 그런 동일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벧엘로 올라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그의 가족의 벧엘로 가는 여정에 동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적들이 오히려 야곱일행을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또 세상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면, 우리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늘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고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목초지가 부족해서였는지는 모르지만, 본문에서 야곱이 하나님의 집인 벧엘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향합니다. 이로 인해서 야곱에게 두 가지 큰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첫째는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산고 끝에 죽은 일이고, 둘째는 르우벤이 서모인 빌하와 통간한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멀리하게 될 때, 문제가 발생될 수 있다는 교훈을 본문에서 얻어야합니다. 또 다른 교훈은 이런 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의외로 의연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라헬이 산고 끝에 죽으면서 둘째 아들의 이름을 ‘고통 중에 낳은 아들’이란 뜻으로 ‘베노니’로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라헬이 마지막 길을 떠나면서 자식에게 남긴 ‘베노니’란 이름을 라헬을 잃은 슬픔에도 불구하고, ‘오른손의 아들’ ‘운 좋은 아들’이란 의미를 지닌 ‘베냐민’으로 고쳐 부릅니다. 아들에게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이름을 지어 줄 필요를 느꼈던 것입니다. 아들이 출생 시의 어려운 상황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의 희망 즉 확실한 정체감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르우벤이 서모인 빌하와 통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야곱이 흥분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외동 딸 디나가 강간을 당했을 때도 야곱은 흥분하여 날뛰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곱이 의외로 차분하고 냉정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야곱이 이런 문제들을 눈감고 덮어버린 유야무야한 사람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이 운명하기 직전에 자식들을 불러놓고 행한 유언을 보면, 아비의 침상을 더럽힌 맏아들 르우벤과 디나의 일로 세겜 사람들을 도륙한 시므온과 레위에게 저주를 내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34장과 35장을 통해서 야곱이 밧단 아람 곧 하란을 떠나서 가나안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집’이란 뜻인 벧엘을 벗어나 세겜과 베들레헴에 거주할 때마다 음행의 문제를 겪게 되고, 죽음의 문제를 겪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이 벧엘을 찾을 때마다 찾아와 만나주셨습니다. 언약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안주하지 못하고, 목초지를 찾아서 길을 떠나야했고, 또 그가 정착한 곳에서 불행한 일들을 겪게 되었듯이, 우리도 마찬가지로 세속을 떠나서 살 수 없고, 크고 작은 문제들을 피할 수 없는지 모릅니다. 그렇더라도 야곱이 마음과 육체를 깨끗이 하고 하나님의 집인 벧엘에 올라가듯이, 우리 성도들도 세상을 떠나 살 수는 없다할지라도, 예배출석을 게을리 하지 말고 주님 앞에 나오기를 힘써야할 줄 압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만나 주시고, 응답주시고, 힘주시고, 복 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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