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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6-11-27 21:46
출애굽기2501: 성막(출 25:1-9)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11,349  

2501. 성막(출 25:1-9)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의 특별한 관계를 유지시켜준 것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율법이고, 다른 하나는 성막이었다. 율법(토라)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과 체결한 시내산 언약의 내용이다. 이 언약의 내용, 곧 하나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킴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선민의 특권을 유지해갈 수 있었다.

성막(미쉬칸)은 이스라엘 회중이 주둔한 중앙지역에 설치한 성소로써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과의 만남과 하나님의 치유를 상징하는 곳이었다. 본문 출애굽기 25장은 이 성막제조에 필요한 재료들과 지성소에 안치될 언약궤와 속죄소, 또 성소에 안치될 떡(진설병) 상과 등대(메노라) 제조에 관해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신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신 성막은 하늘보좌방의 상징이었다.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계명이 담긴 증거궤라 불리는 언약궤가 있었고, 이 궤는 야훼가 언약의 하나님이심을 상징하였다. 언약궤 상단의 뚜껑은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는 속죄소(시은소)였다. 이 속죄소 양 끝에는 각각의 그룹(Cherubim)이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20절)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22절)고 하셨다.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속죄소는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였다. 이 속죄소에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차례 초막절 축일 5일전인 대속죄일(Yom Kippur)에 들어가 백성의 속죄를 상징하는 염소의 피를 뿌렸다. 성막의 내실은 성소와 지성소가 휘장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대제사장이 일 년에 단 한 차례 백성의 속죄를 위해서 성소의 휘장을 통해서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래서 히브리서 10장 19-20절을 보면,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휘장을 꿰뚫어서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은 곧 그의 육체입니다.”라고 했던 것이다.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말씀은 히브리서 4장 16절의 말씀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게 되었다는 뜻이다. 지성소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에로 나가는 길이 휘장으로 막혔었는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성소휘장을 찢고 하나님의 보좌 곧 은혜의 보좌에로 나아가는 새로운 생명의 길(new and living way)을 열어놓으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소휘장은 십자가가에 못 박혀 찢기신 예수님의 몸의 모형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혈혈단신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막힌 담을 헐기 위해서 당신의 온몸이 찢기고 모든 피와 물이 다 쏟아질 때까지 싸우셨고, 결국에는 인류가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있는 통로를 여셨다.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였다. 성막은 광야시대에 조립과 분리와 운반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만든 이동식 미쉬칸 곧 하나님의 집이었다. 가나안 주거시대에는 솔로몬이 최초로 성전을 건축하여 하나님께 봉헌하였고, 바벨론에 망한 후에는 스룹바벨이 재건하였으며, 예수님 당시에는 헤롯 대왕이 성전증축에 힘쓰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주후 70년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성전도 영구히 사라지게 되었고, 성전을 대신하게 된 것이 회당이다. 회당은 바벨론 유배이후 줄곧 지금까지 기도회를 위해서 사용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성전이 예루살렘에 단 하나만 허용된 반면에 회당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거리”(행 1:12)마다에 성인 가장 열 명이 모일 수 있는 곳이면 어디에든지 세워졌다는 것이다. 이 회당제도에서 나온 것이 기독교 예배당이다. 그러나 기독교 예배당이 유대교의 회당과 다른 점도 있다. 유대교 회당이 여전히 성막과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를 상징적으로 유지하고 있고, 가톨릭과 같은 전통교회들이 여전히 성막과 성전의 개념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리스도교 예배당은 신성한 성막이나 성전의 개념보다는 평범한 집회소의 개념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계신 곳을 건물에 두지 아니하고, 구원 받은 성도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 개개인의 마음속에 혹은 성도들의 모임 속에 임하여 계시기 때문에 구원받은 성도가 있는 곳이면 그곳이 어느 곳이든지 하나님이 임하여 계신 신성한 곳이 되는 것이다. 이런 개념에서 단 한 곳에만 허용되었던 성전이 회당개념에서는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거리”(행 1:12)마다에 성인 가장 열 명이 모일 수 있는 곳이면 어디에든지 회당을 세우도록 허용했던 것이다.

성막시대 곧 광야시대에는 하나님이 성막에 계신다는 표인 ‘쉐키나’(구름기둥과 불기둥)가 성막 위에 있었다. 쉐키나가 떠오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일상의 일을 중지하고 자기의 짐을 꾸린 후 쉐키나를 따라 나섰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곳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려고 길을 떠나시기 때문이다.?

쉐키나가 길을 떠나면 언약궤가 쉐키나의 뒤를 따랐고, 그 뒤를 백성이 따랐다. 쉐키나는 항상 사흘 길을 앞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였다. 그러다가 쉐키나가 어느 한곳에 자리를 잡으면 그곳에 성막을 세우고, 성막 주위 사방에 각 지파 별로 진을 쳤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 있는 군대와 같이 성막을 호위하며 그곳에서 쉐키나가 떠오를 때가지 진을 치고 거주하였다.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은 친히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다.

성막을 ‘회막’(meeting tent)라고 불렸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만나시는 장소란 뜻이다. 따라서 성막은 하나님과 교제가 이뤄지는 곳이요, 만남의 광장이었으며, 제사를 바치는 장소였다. 성막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었고, 상단 뚜껑에는 하나님의 쉐키나의 영광이 임하여계신 시은소가 있었다. 따라서 성막 지성소는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이었다. 예물을 들고 성막에로 나가는 것은 곧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기 위함이었다.

성막은 속죄와 치유가 이뤄지는 백성을 위한 장소였다. 죄의 삯은 죽음이다. 죗값을 대신할 제물을 바치게 함으로써 백성의 죽음을 대신하게 했던 장소이다. 따라서 성막은 백성을 위한 신성한 장소요, 백성의 속죄와 치유를 위한 거룩한 장소였다. 죄와 제물을 함께 가져와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제물에 죄를 전가시켜 죽게 함으로써 죄 사함을 받고 삶을 치유 받게 하는 곳이었다.

오늘날 성막을 대신하는 곳이 예배당이다. 그리스도교 정신은 장소보다는 성도들의 모임에 더 큰 무게를 둔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성도들의 모임이 없다면 예배당이라 할지라도 보통의 장소에 불과하다. 그러나 언약백성이 있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라면, 그곳이 아무리 비좁고 누추한 마구간과 같은 곳일지라도 그곳은 하나님이 계신 신성한 장소요, 하나님과의 만남과 속죄와 치유가 이뤄지는 은혜와 사랑이 넘치는 신성한 성소가 된다.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 되고 못되는 것, 하나님의 쉐키나의 인도하심이 있고 없고는 예배당의 크고 작음이나 장엄하고 누추한 것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모이는 그리스도인들의 태도와 예배의 내용과 신실함에 달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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