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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5-08-22 11:08
창세기 047: 거부가 된 야곱(창 31:1-55)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5,890  

창세기 047: 거부가 된 야곱(창 31:1-55)

야곱은 타향살이 20년 만에 거부가 되었습니다. 에서와 이삭을 속이고 고향을 떠날 때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 빈털터리였습니다. 그런 그가 20년 만에 네 명의 부인과 13명의 자녀와 수많은 짐승의 떼를 거느린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은 본문에서만 네 번이나 이 사실을 강조하여 말하였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3절),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5절),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9절),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공수로 돌려 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시고 어젯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42절)가 야곱의 신앙고백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하듯이, 라반과 그의 아들들도 야곱이 잘 되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드리기가 어려웠습니다. 평생을 가난하게 살아가면서 종처럼 일할 팔자라고 생각했는데, 하는 일마다 잘되고, 처복과 자식 복에다 재물 복까지 받았으니 샘이 날 법도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풍성한 복을 내리신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의 누이들과 소유물까지 강탈하여 부자가 된 것이라 오해하였습니다. 그래서 1절에 보면, 라반의 아들들이 야곱을 시기하여 말하기를 그가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야곱도 이때야말로 떠나야할 때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때를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때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떠나야할 때를 알지 못해서, 회개해야할 때를 알지 못해서, 투자해야할 때를 알지 못해서, 손을 떼야할 때를 알지 못해서, 끊어야할 때를 알지 못해서, 변해야할 때를 알지 못해서, 열심히 해야 할 때를 알지 못해서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기독교 역사관에 ‘카이로스’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카이로스’는 정한 시간 곧 하나님이 짜놓으신 스케줄을 뜻합니다. 그 스케줄대로 찾아오는 것이 정한 때라는 시간입니다. 그 정한 때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노아의 홍수의 때처럼, 소돔과 고모라의 때처럼, 주님께서 불시에 재림하실 때처럼, 그 때를 맞추지 못한 사람들은 패가망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제멋대로 산 사람이 아닙니다. 야곱은 주도면밀하고 성공지향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준비하고, 착수하고, 착수한 그 일에 모든 것을 다 거는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결코 게으르거나 불성실하거나 강물에 흘러가는 낙엽처럼 제 인생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때에 매우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와 몹시 시장한 때를 노려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넘겨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삭이 에서를 축복하려고 사냥한 짐승으로 요리를 해오라고 지시했을 때에도 시기를 놓치지 아니하고 에서보다 한발 앞서 눈먼 아버지에게 요리를 해서 바침으로써 에서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라반이 품삯을 거론하자, 때를 놓치지 아니하고 연모하는 라헬을 아내로 달라며 칠년을 봉사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레아와 라헬을 위해서 14년간을 무보수로 봉사한 야곱에게 라반이 무엇을 주면 좋겠느냐고 물었을 때에도 야곱은 때를 놓치지 아니하고 대단한 모험을 시도했습니다. “외삼촌께서 제게 무엇을 주실 것이 아니라, 제가 외삼촌을 위해서 먹이는 짐승 가운데 점이 있거나 아롱진 것이 새끼로 태어나면 그것들을 제 몫으로 주시기를 바랍니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점이 있거나 아롱진 짐승은 모두 골라내서 라반이 가져가 버리고, 점 없고 아롱진 것이 전혀 없는 짐승들만을 가지고 시작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대단한 모험이었습니다. 라반은 내심 쾌재를 부르면서 승낙했습니다. 당장에 무엇인가를 줄 필요가 없어서 좋고, 따로 보수를 마련할 필요도 없어서 좋고, 점 없고 얼룩 없는 짐승만을 골라 맡기면 점이 있거나 아롱진 새끼를 낳게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테니 좋다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라반이 유전의 법칙을 조금치라도 알고 있었더라면 야곱의 제안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짐작하고 거절할 수 있었겠지만, 수천 년 전에 유전의 법칙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오랜 목축경험을 통해서 또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통해서 유전의 법칙을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단 게임이 시작되자 야곱은 정당하게 자기 몫을 챙기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불철주야 수고를 아끼지 않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런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때를 놓치지 않고 붙잡는 야곱의 손에 힘을 부여하셨습니다. 수고하는 야곱에게 함께하셨습니다. 노력하는 야곱에게 함께 하셨습니다. 성실한 야곱에게 함께 하셨습니다. 야곱이 복 받아 거부가 되었다고 해서 라반이 손해를 본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라반도 함께 복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반과 그의 아들들은 야곱을 시기하였습니다. 그들의 욕심이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38절 이하를 보면, “내가 이 이십년에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떼의 수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낮에 도적을 맞았든지 밤에 도적을 맞았든지 내가 외삼촌에게 물어내었으며,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야곱이 얼마나 진실하고 성실하고 신실하게 충성하고 봉사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복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에게 복을 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야곱의 편에서 일하셨습니다. 그것은 라반이 야곱을 열 번이나 속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41절 이하를 보면, “내가 외삼촌의 집에 거한 이 이십년에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 사년, 외삼촌의 양떼를 위하여 육년을 외삼촌을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값을 열 번이나 변역하셨으니,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공수로 돌려 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시고 어젯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누린 모든 축복이 전적으로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성도님들의 지난날들을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살아온 세월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았다면, 과연 오늘의 이 축복이 가능했겠는가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누가 뭐라 해도 야곱은 겸손한 사람이었고, 성실한 사람이었고, 신앙인이었습니다. 야곱이 속임수에 능한 사람이라고만 안다면, 왜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시고, 그에게 복을 주셨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축복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돌렸습니다. 그가 그렇게 고생하며 쌓은 부이지만, 그는 그것을 자신의 노력의 대가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라헬과 레아가 친정을 떠나 먼 길을 가자는 야곱의 제안에 선뜻 그러겠노라고 응해준 것은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그들의 야곱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성실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인정을 받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습니다. 무엇보다도 늘 함께 몸을 부비며 살아가는 가족들로부터 그 성실성을 인정받는다는 것은 매우 귀한 일입니다. 야곱은 가족들로부터도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거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가까운 가족들로부터도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는 성공적인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간 우리는 야곱의 네 명의 부인들이 야곱으로부터 사랑을 받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노력했던 점을 살펴본바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야곱은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였던 것입니다. 이제 그는 가까운 시일 안에 에서하고도 화해를 하게 됩니다. 그가 힘겹게 얻은 재물을 지혜롭게 에서에게 보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성실성과 하나님께 대한 신실한 믿음이 실타래처럼 엉킨 지난날의 복잡한 일들을 하나하나 다 풀어나가게 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라반과 야곱이 화해를 하고 언약의 돌기둥을 세운 후에 더불어 먹고 마신 것은 우리 주님께서 제정하신 성만찬의 예표인 것입니다. 음식을 함께 먹고 마시는 행위는 쌍방간에 계약이 형성되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 되어 왔습니다. 고대 근동지방에서는 공동식사를 통해서 평화 협정이나 협약 또는 계약체결을 인준하는 규정관습이 있었습니다. 이삭과 아비멜렉(창 26:30), 야곱과 라반이(창 31:54) 그러했고, 다윗과 아브넬이 그러했고(삼후 3:20),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습니다. 쌍방간에 의견이 교환되고, 그것이 수용되고, 계약이 체결되면, 그것이 백성들에게 공포되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다"고 성서는 적고 있습니다(출 24:11).

신약시대에 와서는 이것이 성만찬으로 발전 승화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마지막 만찬에서 식후에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5)고 말씀하신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려 우리의 행실을 깨끗케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시어 부르심을 입은 우리들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셨습니다(히 9:14-15).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화해한 언약백성’으로써 매주일 예배 때마다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여 이 귀한 사실을 재차 확인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밧단아람에 머무는 20년 동안 사랑의 성취가 지연되는 고난을 당하기도 하고, 품삯이 바뀌는 고초를 당하기도 하고, 귀향을 방해받는 고난을 겪기도 하지만, 낙심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인내하며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성실하고 신실한 믿음의 인격자로 발전을 하게 됩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가족과 재물의 복을 풍성하게 부어 주셨습니다. 이런 축복이 우리 성도님들에게도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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