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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7-26 00:20
믿음을 고백하고[롬 10장 9절-10절]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7,377  
로마서 10장 9-10절 말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는 말씀 말고도, 성서는 여기저기서 예수를 시인하는 자가 구원을 얻게 될 것을 증언하고 있다.
마태복음 10장 32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가복음 12장 8절: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요한일서 4장 3절: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요한일서 4장 15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마가가 쓴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행하신 18개의 기적을 소개하고 있다. 이 기적 이야기는 마가복음 전체내용 가운데 약 25%에 해당되는 상당한 분량이다. 마가는 우리에게 예수를 능력이 많으신 분으로 소개하고 싶었던 것이다.
마가복음의 기적들을 살펴보면, 마가는 두 개의 바다기적 즉 배 안에 계시면서 광풍을 잔잔케 하신 기적(4:35-41)과 배를 향하여 물위로 걸어 오셔서 광풍을 잔잔케 하신 기적(6:45-51), 두 개의 급식기적 즉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 천명을 먹이신 기적(6:35-44)과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사 천명을 먹이신 기적(8:1-10), 두 개의 신체장애자 치유 기적 즉 귀먹은 벙어리를 고치신 기적(7:31-37)과 벳새다 장님을 고치신 기적(8:22-26)을 거의 평행과 대칭을 이루도록 배열하고 있다.
이 가운데 두 개의 신체 장애자 치유기적은 마가복음에만 있고,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아주 독특한 기적들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20개씩의 기적이 소개되고 있지만 이 두 개의 신체 장애자 치유 기적은 생략되어 있다.
장애자 중에 한 사람은 귀먹고 어눌한 사람이었다. 예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예수는 이 사람을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보시며 탄식하셨다. 그리고 그에게 향하여 '에바다' 즉 열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풀려 말도 하고 예수께서 하시는 복음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또 한 사람은 예수를 볼 수 없는 소경이었다. 이 사람은 벳새다에 사는 사람이었다. 예수는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사람들이 보지 않는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다. 그리고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다. 그러자 그는 사람들이 걸어가는 것이 보이지만 나무가 걸어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자 예수는 다시 그의 눈에 안수하셨다. 그리고 소경은 완전히 눈을 뜨게 되었고, 보고 싶었던 예수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두 개의 기적이 소개되는 과정 속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꾸짖는 말씀이 나온다. "너희가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치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 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 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막 8:17-21).
제자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있었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보고 듣는 것은 피상적이고 표피적인 것들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의 그 많은 기적과 권위 있는 말씀을 듣고도 확실한 믿음의 반석 위에 서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귀먹고 어눌한 자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렸을 때에, 또 소경의 눈이 뜨였을 때에 제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을 듣고, 예수를 보고, 예수를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고백이 이들 두 개의 기적이 행하여진 바로 다음에 배치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제자들의 무지와 몰이해가 강조된 직후에 귀먹은 벙어리가 고침을 받고, 제자들의 불신이 강조된 직후에 장님이 고침을 받는다. 이렇게 귀가 뚫리고 눈이 열린 후에야 비로소 제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가 예수를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는 전반부에서 예수의 기적들을 18개나 소개하면서 예수를 자연의 위협에서 구원해 주시는 능력의 주님, 굶주린 자를 먹이시는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 정신적 신체적 장애자들을 돌보시고 고치시는 메시아로서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를 이런 능력 있는 분으로 듣고 볼 때에 비로소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앙고백은 이와 같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가가 그의 복음서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소경의 눈이 열리고, 벙어리의 귀가 뚫릴 때, 제자들이 예수를 능력의 주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마음의 눈을 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우리의 영적인 귀를 열어 그분의 말씀을 경청할 때에 비로소 예수를 우리의 구세주로 신앙고백하고 마음에 영접할 수 있는 것이다.
플라톤은 그의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 속에 결박된 채로 살아가는 죄수의 이야기를 통해서 두 개의 세계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죄수들은 태어날 때부터 손이 몸 뒤로 결박되어 있고, 목도 뒤로 돌리 수 없게 되어 있어서 동굴의 벽 쪽만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죄수가 바라보는 벽에는 여러 가지 그림자가 나타나고 있었는데 죄수는 이 그림자가 실제로 있는 현실이라고 믿고 살았다. 그러던 중 한 죄수가 그 결박에서 풀려 나와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 순간 그는 새로운 실재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동굴의 벽 쪽에 비쳐진 것은 실재가 아니라 그림자였던 것이다. 그림자를 실재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탄의 결박에 매인 채 죄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실재를 볼 수 없다. 실재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앞에 보이는 허상을 실재로 잘못 알고 살아간다.
실재를 보기 위해서는 사탄의 결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탄의 결박에서 벗어나면 자신이 경험했던 이 세계가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사탄의 결박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얻고 실재를 볼 수 있는 방법은 복음을 듣고, 믿고, 회개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일이다. 그 때에 우리는 진정한 영안이 열리고 진정한 영의 귀가 열려서 실재이신 예수를 볼 수 있고, 참으로 의롭고 평화로운 세계인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 세상은 공이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이 없는 것에 집착하고 욕심을 내다보면, 실재를 놓치게 되기 마련이다. 허공을 쫓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 세상을 그림자로 볼 수 있는 사람, 공으로 또는 무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우리의 삶의 행복과 축복의 실재이신 예수를 찾게 되고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또한 우리의 구세주로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나라 이조 말엽 개화당의 거두 김옥균 선생이 개화운동에 실패하고 역적으로 몰렸을 때, 그의 친누나 한 분이 관헌에 붙잡히지 아니 하려고 10년 세월을 땅굴 속에서 지낸 일이 있었다. 시대가 뒤바뀌어져서 그녀가 그 흑암의 동굴 속에서 나와도 좋게 되었을 때 그녀는 앞이 먼 장님이 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빛 아래 있지 못한 인간의 시력은 자연적으로 쇠퇴해 버리기 때문이었다. 우리 눈이 보배라 하지만, 빛과 접촉되어 있는 눈이 아니면 눈은 그 보는 능력을 상실하고 마는 법이다. 태양광선이나 기타 어떤 광선이 도무지 없는 곳에서는 인간이 보는 기능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생각하면 빛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게 된다.
성서에 '흑암에 앉은 백성'이란 말이 나온다. 이 말은 구체적으로 동굴 속이나 깊은 감방 속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하겠지만, 이것을 정신적인 의미로 해석한다면,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상태, 마땅히 가야 할 곳을 가지 못하는 상태, 마땅히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는 상태, 눈도 캄캄하고 귀도 캄캄하고 앞길도 캄캄한 상태에 빠진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사람은 결단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예수를 평범한 인간 이상의 사람으로 볼 수 없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다.
결혼을 앞에 둔 젊은 남녀는 사랑한다는 고백 없이 부부가 될 수 없다. 부부가 하나가 되는 결혼식도 중요하지만, 그 결혼이 가능케 하는 것은 사랑의 고백이다. 또 이 사랑의 고백은 결혼 전에만 하는 것이 아니다. 결혼 후에도 수시로 해야 한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와 예수와의 관계는 부부관계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은 수시로 "예수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베드로에게 물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 때 베드로가 대답했다. "주여, 그렇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두 번째 또 물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또 대답했다. "주여, 그렇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세 번째 또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때에 베드로는 예수께서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기 때문에 근심하면서 대답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사실 이 대화에서 예수는 베드로에게 첫 번과 두 번째 질문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했을 때에 헬라어로 '아가파스 메' 즉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어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죽게 하셨듯이, 조건 없이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미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예수께서 물으시는 질문대로 "내가 당신을 조건 없이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필로 세' 즉 "내가 당신을 친구로서 사랑한다."라고 대답했다. 결국 예수는 세 번째 질문에서 '아가파스 메' 라고 묻지 아니 하시고, '필레이스 메' 하느냐고 물으셨고, 베드로도 '필로 세' 라고 대답했다. 예수는 이 세 번째 질문에서 "네가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하느냐?"고 묻지 아니 하시고, "네가 나를 친구로써 사랑하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어쩌면 베드로의 대답이 훨씬 인간적이었는지 모른다. 연약한 인간으로서 조건 없이 예수를 사랑한다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 우리의 사랑을 고백해야 한다. 그것이 비록 조건적인 사랑일망정 또 베드로의 고백처럼 자신감 잃은 고백일망정 사랑을 고백해야 한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이제부터는 당신만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겠습니다. 당신을 나의 구세주로 인정하겠습니다. 당신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겠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때에 예수는 우리의 사랑을 받으시고 또 축복해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