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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7-26 00:12
구원의 시간[베드로전서3장 21절]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5,153  
앞에서 두 번에 걸쳐 '구원의 근원'과 '구원의 수단'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구원의 근원이시다.' '믿음은 구원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이다.' 라는 주제로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구원이 이루어지는 시간 즉 구원받는 시간에 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에베소서 2장 8절의 말씀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다. 이 말씀은 구원의 근원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원의 수단으로서 믿음을, 구원이 주어지는 성격으로서 선물을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을 받는 시간은 언제쯤일까? 믿음을 갖는 순간일까? 믿음이 어느 정도 발전된 다음일까? 침례를 받을 때일까? 성령을 받을 때일까? 이러한 물음을 염두에 두고서 먼저 성경말씀을 몇 곳 찾아보겠다.
마가복음 16장 16절: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요한복음 3장 5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사도행전 2장 38절: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사도행전 22장 16절: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로마서 6장 3-4절: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3장 27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골로새서 2장 12절: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베드로전서 3장 21절: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오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이상의 말씀들은 침례가 구원과 관련이 있을 뿐 아니라, 구원이 이루어지는 시간과도 관련이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다. '믿고 침례를 받으면 죄사함을 얻는다. 믿고 침례를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 믿고 침례를 받으면 구원을 선물로 받는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말씀들을 토대로 '침례를 받는 시간과 구원이 이루어지는 시간이 일치된다. 침례를 받는 시간과 죄사함이 선포되는 시간이 일치된다. 침례를 받는 시간과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중생의 씻음과 새롭게 하시는 시간이 일치된다. 침례를 받는 시간과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마음의 성전에 내주 하시는 시간과도 일치된다'는 주장을 펼칠 수가 있다. 이쯤에서 분명하게 기억할 것은 침례가 구원을 받는 원천이거나 수단이 아니라 시간이란 점이다. 우리는 이미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구원의 근원이시다.' '믿음은 구원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이다.'라고 선언한 바 있다. 따라서 침례는 구원을 받는 근원도 수단도 아니다. 침례가 믿음의 행위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구원의 수단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다 확실한 것은 침례가 구원의 시간과 관계된다는 점이다.
침례가 구원의 시간과 관련된다는 이런 교리가 충분히 납득이 될 만큼 설명이 가능할까?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가 잘못 이해되어져서 '믿는 순간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이 굳어져 있는 오늘날의 신앙인들에게 과연 설득력 있는 설명이 가능할까? 그 가능성을 시도해 보려고 한다.
교회는 하나의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의 정식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침례를 받아야 한다. 교회가 행하는 예식 가운데 가장 성스럽고 중요한 예식이 성만찬이다. 이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은 침례를 받아야 주어진다.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직책이 있다. 집사도 있고, 권사도 있고, 장로도 있고, 목사도 있다. 이러한 직책은 침례를 받은 사람만이 받을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직책을 뽑는데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도 침례를 받은 사람이어야 한다. 침례를 받지 아니한 사람은 교회 공동체의 회원이 되기 위해서 학습을 받고 있는 예비회원이기 때문에 투표권도 없고 피선거권도 없다. 학습이 끝나는 대로 침례를 받고 정식회원이 된다. 그 때에 비로소 투표권이 주어지고 피선거권이 주어진다.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는 나라와 보이지 않는 나라가 있고, 또 미래에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보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를 말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는 낙원을 말한다. 미래에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나타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한다. 교회와 낙원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게 될 약속과 인침과 보증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며, 단지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을 맛보고 경험하는 정도이기 때문에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다. 낙원은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을 온전하게 경험하는 곳이지만, 낙원에 있는 성도들이 아직 부활하지 못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부활의 몸으로 새롭게 태어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한 소망으로 기다리고 있다.
아무튼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침례를 받은 사람에게서 시작이 되고 맛보아 진다.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교인의 자격이 주어지는 침례와 관련해서 살펴본 것이다.
침례식은 그리스도와 신자가 혼인을 서약하는 시간이다. 결혼하는 커플이 혼인서약을 하듯이 침례를 받는 사람도 그리스도 앞에서 서약을 한다. 말하자면,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매우 중요한 시간인 것이다. 물론 결혼을 준비하는 남녀가 혼인을 결정하기까지에는 많은 만남과 사귐의 시간들이 있었을 것이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시간들 즉 남녀가 서로 사랑했던 시간들 때문에 아무도 그들을 부부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들을 연인들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혼례식을 마친 후에는 당당한 부부사이가 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침례식도 신자가 그리스도와의 사귐의 시간들을 통해서 사랑을 확인하고, 그에게 평생을 맡기기로 결단한 다음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거룩한 예식인 것이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임산부의 뱃속에 있는 태아를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자가 없을 것이다. 한 명이든 두 명이든 혹은 세 명이든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아이는 분명히 생명체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은 이름도 없고, 생년월일도 없고, 주민등록증도 없고, 인구 조사 때에 대한민국 국민으로 카운트도 되지 않는다. 임산부의 몸에서 양수를 터뜨리고 나와야 비로소 시민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침례식은 학습교인이 정식교인이 되는 시간이며, 교적부에 이름이 올라가는 시간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교적부에 이름이 올라가는 것도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운동시합에 출전해서 일 등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시상식은 내일 다른 시합이 모두 끝난 다음에 거행된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일 등을 했으면 됐지, 그까짓 상장과 부상은 받아서 무엇에 쓰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뒷날 시상식에 나가지 않았고 영원히 상을 받지 못했다고 가정해보자. 물론 이미 상을 받은 거나 다름없다. 일 등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장 없는 일 등을 언제까지나 자랑할 수 있을까?
초신자가 침례를 받기 전에 받는 학습교육이나 사랑하는 남녀가 혼인식을 하기 전에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과정이나 출산 전 태아의 성장과정이 실질적으로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씨뿌림이 없이 열매를 거둘 수가 없는 것처럼 결실이 있기까지의 성장과정은 매우 중요하며, 성장과정이 있음으로 결국 결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성장과정보다는 결실을 보고 기뻐하고 만족해한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믿음을 갖게 된 동기나 과정을 기억하기보다는 침례식 날짜를 쉽게 기억하게 되는데 잊어버리더라도 침례증서가 남아 있어서 확인이 가능하다. 결혼한 부부는 처음 만나 사귈 때의 일을 기념하기보다는 결혼한 날짜를 기념일로 지킨다. 사람마다 출생일을 기억했다가 생일잔치를 하기도 하고 선물을 주고받기도 한다.
생일을 기억하는가? 결혼 기념일을 기억하는가? 질문이 어리석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구원받은 날짜를 기념하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침례 받은 날짜를 기억하든지 못하든지, 그 날을 구원받은 날짜로 믿든지 믿지 않든지 간에 침례는 우리의 구원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고 중요한 기독교 예식이다.
침례가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구원이 침례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예수의 보혈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성령의 치료의 능력으로 이루어진다.
죄인의 상태를 편두통환자로 생각해보자. 이 환자는 자기의 병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펜잘을 먹으면 곧 바로 편두통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또 그 사실을 믿고 있다. 그래서 약국에 나가 펜잘을 산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제 곧 낫겠지? 펜잘을 샀으니 말이야." 이 환자의 편두통이 이 환자의 믿음 때문에 사라지는가? 아니다. 적어도 물과 함께 손에 있는 펜잘을 먹기까지는 말이다. 이 약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다. 죄인이 구원에 이르는 것은 믿음이나 침례 때문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 때문이다. 그러나 침례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작용하는 바로 그 시간인 것이다.
침례는 죄사함을 받고, 새로 거듭나며, 성령으로 새로워지고, 그리스도로 옷 입는 시간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는 그리스도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시간이다. 침례는 성령이 이끄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이며, 성화의 삶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마지막으로 침례는 신자와 불신자를 구별하는 예식이며 죄와 싸우는 십자군에 입단하는 시간이다. 침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지만 이 나라의 완성을 위해서는 죄와 부단히 싸워야 한다. 마르틴 루터는 침례를 순간적인 구원의 문제로 보지 않고 영구적인 개혁과 변혁의 문제로 보았다. 왜냐하면, 신자가 살아 있는 한 부단히 침례가 의미하는 바를 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죄된 모든 것을 부단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죽게 하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나라를 향하여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합하여 부단히 사는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