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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7-26 00:56
새 시대를 위한 변화[요 2:1-11]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112  
요한복음 2장 1-11절의 말씀은 갈릴리 가나에서 예수께서 결혼잔치에 참석하여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기적이야기입니다. 이 기적은 요한복음에만 있는 것으로써 예수께서 행한 '첫 번째 표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복음서 전체에서 '기적'이란 말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표적'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표적'이란 말과 '기적'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기적이란 말은, 첫째, '큰 능력 행함'과, 둘째, 큰 능력 행함을 보고 나타나는 '놀람'과, 셋째, 큰 능력 행함을 통해서 기적을 행한 자가 하나님의 종이란 사실과 그가 전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사실을 믿게 하는 표적을 다 함께 포함하는 말입니다. '표적'은 큰 능력 행함과 같은 기적의 근원이나 능력이 일어난 것을 보고 놀라며 기이하게 생각하는 기적의 결과를 말하는데 쓰이지 아니하고 항상 기적을 행한 자가 하나님이 보낸 종이란 사실과 그가 전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사실을 믿게 하는 기적의 목적에 쓰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사건을 기적이라 하지 아니하고, 표적이라 한 것은 이 사건을 보는 요한의 신학적인 관심사 때문이었습니다. 요한에게 있어서 이 사건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유대교와 기독교 또는 옛 시대와 새 시대를 비교하는 상징이며, 기독교가 유대교보다 또는 오고 있는 새로운 시대가 지나간 시대나 현재보다 훨씬 더 좋은 것임을 밝히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물이 포도주가 된 사건은 낡은 것을 대치하기 위하여 오는 새로운 질서를 예고하는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있어난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것은 먼 옛날 모세가 물을 피로 변화시킨 것(출 7:14-24)과 비교되는 표적입니다. 바로 왕과 이집트인들에게 야훼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모세는 이집트의 억압으로부터 히브리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낸 히브리 민족의 선지자란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 보인 첫 표적이 바로 물을 피로 바꾸는 기적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류에게 야훼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예수는 죄의 억압과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낸 구원자란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 보인 첫 표적이 바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파괴적이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냈고, 예수는 건설적이고 남에게 유익을 끼치는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냈습니다. 여기에 모세와 예수의 삶의 방식의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에 과거와 현재의 고통과 다가오는 미래의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7절에 보면,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기적을 소개하기 전에 이 말씀을 먼저 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히브리 민족에게 시내산에서 율법을 선포하였습니다. 옛 시대의 상징인 율법은 지키기가 매우 어렵고 억압적이며 형식적이고 비판적이며 파괴적이고 불완전합니다. 또 율법은 부정적이고 수동적이며 폐쇄적입니다. 율법은 사람들에게 불안과 스트레스를 주고 무거운 멍에를 지웁니다. 그것은 마치 모세가 이집트에서 행한 첫 번째 표적인 물을 피로 바꾸어 재앙을 내린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산에서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3-10). 이런 귀한 말씀을 하시면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 5:17)라고 하셨습니다.
새 시대의 상징인 복음은 지키기가 매우 쉽고 자유로우며 실질적이고 포용적이며 건설적이고 완전합니다. 또 복음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개방적입니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평안과 기쁨을 주고 멍에를 가볍게 해줍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행한 첫 번째 표적인 물을 포도주로 바꾸어 큰 기쁨을 선사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9-30)고 하셨습니다. 과연 예수의 천국복음은 사람들에게 참 자유와 큰 기쁨과 평안을 줍니다.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성도들 가운데는 모세와 같이 물을 피로 바꾸듯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수와 같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듯이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세와 같이 물을 피로 바꾸는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예수와 같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개의 삶의 방식에는 천국과 지옥의 차이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기왕이면 예수와 같은 삶의 방식으로 살면서 남에게 도움을 주고 기쁨을 주고 평안을 주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바꾼 표적은 요한복음 19장 34절에서 예수께서 옆구리에 창 찔림을 받고 물과 피를 흘리시고 죽어 무덤에 갇히신 후에 부활하신 것과 비교됩니다. 즉 물은 죽음을 상징하고 포도주는 부활을 상징합니다. 2장 11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 표적을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행하신 첫 번째 표적의 목적이 능력을 행함에 있지 아니하고, 예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임을 암시합니다. 요한복음은 전체가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한 때'와 '때가 이미 이른 후'로 나누어 맞춰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반부 1장부터 12장까지는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한 때'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고, 후반부 13장부터 21장까지에는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가 이미 이른 후'에 맞춰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2장 1절에 보면, "사흘 되던 날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의 영광이 완성되는 부활의 때를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만드신 포도주는 자신이 십자가 위에서 흘리실 피(19:34)를 상징하는 것이자 또한 부활의 상징이었습니다. 2장 4절에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는 자기의 때에 아주 민감하셨습니다. 고난을 받아야 할 때와 영광을 받아야 때에 민감하셨습니다. 떠나 보내야 할 시대와 새로 맞이해야 할 시대에 민감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에서 물을 옛 시대나 율법시대 또는 겉은 회를 칠해서 깨끗해 보이지만 속은 시체가 썩어 냄새나는 무덤과 죽음을 상징했고, 포도주는 복음시대나 은혜시대 또는 죽었지만 다시 사는,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서는 새 생명과 부활을 상징하였습니다.
모세가 히브리 민족에게 구약시대라는 옛 시대와 율법적인 삶을 주었다면, 예수는 인류에게 신약시대라는 새 시대와 복음적인 삶을 주셨습니다. 이제 내 후년이면 서기 2000년이 되면서 새로운 삼천 년 시대가 시작됩니다. 새 시대에는 새로운 정신과 사상이 필요합니다. 옛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새 시대를 맞이해서는 안됩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고 게으르고 무책임하며 수동적이고 폐쇄적인 정신을 가지고는 새 시대에서 역할을 수행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포도주도 보전되고 부대도 보전된다(마 9:17)고 하셨습니다. 옛것은 새 시대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옛것은 미련 없이 용기를 내서 버리고, 새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정신과 믿음을 가지고 복음적인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모세로 상징되는 옛것은 인간에게 만족이나 기쁨이나 평안을 줄 수 없는 부족하고 무기력한 것이었지만, 예수로 상징되는 새것은 인간에게 만족과 기쁨과 평안을 줄 수 있는 넉넉하고 넘치는 능력이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나타난 옛것의 상징은 '부족함'입니다. 요한복음 2장 3절의 "포도주가 모란다"는 말씀에서와 같이 혼인잔치가 끝나기도 전에 포도주가 다 떨어져버렸습니다. 또 유대인들이 식사전후에 손발을 씻는 종교의식에 필요한 물을 담았던 돌 항아리도 '부족함'을 상징하는 숫자 6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자연의 법칙에 지배되는 옛것과 세상 것에는 인간을 복되게 하거나 참 평안과 기쁨을 줄 수 없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모세와 율법으로 상징되는 옛것은 인간을 구원하기에는 참으로 부족합니다. 역부족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물을 가지고 포도주로 만든 사건에서 보여주는 상징은 기쁨과 넉넉함과 최상의 품질입니다. 예수의 이 표적은 엘리야가 열왕기상 17장 8-16절에서 사르밧 과부에게 베푼 기적과 동일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집에 남은 한 움큼의 가루와 약간의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하고 없어지지 않도록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이 기적은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베푼 첫 번째 기적이었으며, 열왕기상 17장 18절에서 여인이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한 말과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한 말씀이 거의 동일하다는 점에서 볼 때,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기적은 엘리야가 가루와 기름을 떨어지게 하지 아니하고 없어지지 않도록 한 기적과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또 가나의 혼인잔치는 마지막 때에 우리 성도들에게 있을 천국잔치를 상징적으로 보고 주고 있습니다. 우리 구세주이신 예수는 포도주가 떨어져 축제의 분위기가 꺼져 가는 상황에서 더 맛있는 포도주를 만들어 줌으로써 더욱 기쁜 축제의 분위기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 이야기는 마지막 때에 있을 천국잔치의 "때"가 예수께서 시작하신 새로운 질서 가운데서 이미 우리 가운데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예수는 우리에게 기쁨과 넉넉함을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는 우리 안에서 잔치분위기의 천국생활을 시작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는 모자람이 없는 분입니다. 예수만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실 수 있고, 넉넉함을 주실 수 있고, 천국생활을 경험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예수를 철저히 의지하시고, 오고 있는 시대를 자기의 때로 만드는, 미래를 자기의 때로 만드는 성공적인 삶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넷째, 옛것으로 상징되는 물은 무색 무미 무취하고 변화가 없지만, 새것으로 상징되는 포도주는 짙은 색깔과 향이 있고 맛도 좋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는 우리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하실 뿐 아니라, 삶의 질까지도 변화시키십니다. 물처럼 흔한 인생, 가치 없는 인생도 일단 주님의 손에 붙잡히면 포도주처럼 색깔 있고, 향기 있고, 맛이 좋고 가치가 있는 인생으로 변합니다. 귀한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변화의 종교라고 합니다.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서 일어난 잔칫집의 변화는 매우 다양했습니다. 궁색하던 결혼식장이 아주 풍요로운 결혼식장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혼가가 풍요로워졌습니다. 우울하던 결혼식장이 기쁨으로 충만한 결혼식장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근심하던 혼가에 기쁨이 충만해졌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져 궁색하고 우울하며 망신스럽던 잔칫집이 모든 하객들 앞에서 체면이 서게 되었습니다. 수치스럽던 혼가에 체면이 서게되었습니다. 단절되었던 하객들의 대화와 친교가 다시 활기를 띄게되어 아주 화기애애한 결혼식장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인간중심의 결혼식장이 예수 중심으로 변화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께서 오신 것은 이 땅에 사는 우리 인류에게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둠을 몰아내고 참 빛을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율법의 멍에를 벗겨내고 은혜와 진리를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죄악을 몰아내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듯이 새 시대에 필요한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직후에 성전에 들어가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을 내어쫓으시고 정화하신 이유가 바로 새 시대에 필요한 변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변화하지 않는 기독교인은 잘못된 것입니다. 달라지지 않는 기독교인은 잘못된 것입니다. 변화의 주체이신 예수를 믿으면서 아무런 변화도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은 창피한 일입니다. 삶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잘못 믿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옛 습관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진리 속에서 사상이 달라져야 합니다. 믿음의 질이 달라져야 합니다. 삶의 질이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 안에서 변화를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