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CCS 홈페이지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
main_5.GIF main_6.GIF main_7.GIF main_8.GIF

 

 

 

 

 

 

 

 
작성일 : 05-07-21 07:22
자만과 네메시스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179  
사도신경
찬송가 393장
성경 :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제목 : 자만과 네메시스
일자: 2004년 12월 08일

󰡔역사의 연구󰡕를 쓴 아놀드 토인비(A. J. Toynbee. 1889∼1975)는 민족이나 국가를 연구의 단위로 삼은 종래의 역사연구방법을 버리고 `문명`을 역사연구의 단위로 삼았습니다. 토인비는 유럽의 여러 국가는 그가 기독교문명이라고 일컬은 하나의 문명 안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 왔기 때문에 개별 국가를 따로 떼어 연구해서는 전체적인 역사의 운동을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지금까지 존재한 인류의 문명을 기독교문명, 인도문명, 중국문명 등 21개로 나누어 고찰하고 문명의 발생과 성장, 쇠퇴와 해체의 과정을 지배하는 보편적인 법칙을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이 방대한 작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토인비는 역사학자들이 믿을 만한 자료로 취급하지 않는 신화와 성서, 문학 작품 등을 폭넓게 인용하였습니다.
토인비에 따르면, 인간의 문명은 자연환경의 도전에 직면한 인간이 성공적으로 응전을 한 지역에서 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문명이 계속해서 성장하고 지속적으로 발전을 하려면 새롭게 부닥치는 도전들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성공적으로 응전을 해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면 한 문명이 계속되는 새로운 도전들에 성공적으로 응전하면서 성장할 수 있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토인비는 그 해답이 `창조적 소수자`의 창조성에 있다고 했습니다. ‘창조적 소수자’의 창조성이 문명이 계속해서 발전해가는 힘의 원천이라는 것입니다.
토인비는 사회를 창조성을 지닌 소수자와 그렇지 못한 다수자의 집합으로 나눴는데, 창조적 소수자는 사회의 극히 일부이지만 새로운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하는 길을 제시함으로써 창조성이 없는 다수의 사람들, 곧 대중의 지지를 얻어 그들을 이끈다고 했습니다.
문명을 성장시키는 힘이 창조적 소수자에게 있다면, 그 쇠퇴의 원인도 창조적 소수자에게 있다는 것이 토인비의 생각입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자의 창조성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업보가 따른다고 보았는데, 창조성의 업보를 그는 ‘네메시스’라고 했습니다. ‘네메시스’는 도전에 대한 응전에 성공한 소수자가 자기의 인격과 제도와 기술을 우상화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한 가지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한 창조적 소수자는 다음번의 도전이 앞의 것과 전혀 다른 것인데도 불구하고, 예전에 했던 방식으로 응전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 곧 창조적 소수자들이 과거에 이룬 성공에 도취되어 자만에 빠지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과거에 이룬 성공에 도취되는 것은 일종의 교만과 우상숭배여서 반드시 재앙과 파멸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교만과 오만에 빠진 소수자는 창조성을 잃게 되고, 창조자의 역할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의 권력을 손아귀에 쥐고 새로운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할 수 있는 새로운 창조적 소수자들의 진출을 가로막고 그들을 억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문명은 해체의 내리막길로 내달리게 된다고 했습니다. 유일신 사상에 도달한 유대인들이 그랬고, 높은 철학사상에 도달한 그리스인들이 그랬고, 르네상스 문명을 이룬 이탈리아인들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천부적 재능으로 얻은 것보다 한층 더 큰 보물인 기독교 복음을 수용하지 못한 경우를 토인비는 그들의 네메시스 곧 창조성의 업보라고 하였고, 그 업보가 1,878년간이란 세월을 남의 나라에서 집시처럼 떠돌게 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합리적이고 귀납적이면 끊임없이 새로운 답을 추구해 나갈 수 있지만, 상대성에 지나치게 기우려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결과 상대적인 절대성에 이르게 되어 또 다른 네메시스, 곧 자기 우상화로 인한 업보를 받게 됩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신을 향한 경건한 믿음과 감사로 돌이 변하여 사람이 되게 한 이야기도 있지만, 신을 향한 오만과 자만이 오히려 사람을 돌이 되게 한 이야기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테바이의 왕비였던 니오베는 오만했습니다. 오만했기 때문에 신들을 가볍게 여기면 무서운 벌을 받는다는 교훈을 본받으려 하지 않았고, 감사예물을 바치지도 않았습니다.
니오베에게는 자랑할만한 것들이 많았던 왕비였습니다. 남편 암피온이 어찌나 수금을 잘 탔던지 수금 소리만으로 돌을 들어 성벽을 쌓았던 왕이었고, 다스리고 있던 왕국도 자랑거리였고, 무엇보다도 아들 일곱, 딸 일곱, 도합 14명이나 되는 자녀들이 자랑거리였습니다.
그 즈음에 예언자 만토가 예언의 권능을 받아 테바이 여자들에게 레토 신과 아폴론 신과 아르테미스 신에게 향을 사르고 경배하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이에 테바이 여자들은 모두 신전으로 나와서 향을 피우고 기도를 올렸지만, 니오베만큼은 온갖 거드름을 피우며 나타나 예배하는 여자들을 신전에서 내쫓으며 하는 말이, “어찌 내가 레토 신만 못하단 말인가?” 라고 하였습니다. 때가 되면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인간은 절대로 신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니오베는 오만이 지나쳐 자신을 여신으로 착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니오베는 ‘신이 혐오하는 인간’이 되고 만 것입니다. 피그말리온은 신들을 믿고 감사예배를 바침으로써 ‘신이 사랑하는 인간’이 되었지만, 니오베는 신들을 모욕함으로써 스스로 화를 자초하였습니다. 레토의 아들이자, 활의 신인 아폴론이 쏜 화살들에 14명의 자녀들이 모두 비참하게 세상을 하직하였고, 남편은 자살하였으며, 참기 어려운 슬픔은 니오베의 몸을 돌로 바꿔놓고 말았습니다. 슬픔과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화살을 쏘는 아폴론을 향한 채, 제발 마지막 남은 딸만은 살려달라며 간청을 하면서, 몸뚱이로는 하나 남은 딸을 치마폭에 숨기고 있는 모습으로 돌이 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 신화가 진실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리스인들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오만과 자만이야말로 스스로 불행을 불러들이는 어리석은 일이란 것을 말입니다. 공자님은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데가 없다”는 말씀을 남겼다고 합니다.
추호라도 내게는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자만과 오만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들입니다. 가만히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 감사해야할 조건들이 아주 많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 00에 피그말리온과 같은 경건한 믿음으로 얻어지는 결과들에 대한 감사가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이런 경험적인 감사가 과연 값어치 있는 감사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내년에는 금년보다 더 크고 넘치는 축복을 내려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