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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8-31 01:43
기독교 신앙은 무엇인가?(막 4:35-41; 롬 10:9)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4,931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돌풍에 폭풍이 휘몰아치는 갈릴리 호수와 같고, 우리 자신은 이 호수를 건너가는 작은 배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폭풍을 만나 파선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폭풍을 만나도 요동치 않고 극복합니다. 성경은 폭풍을 만나 이를 극복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리고 주어진 삶을 승리로 이끈 이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보통 사람들이 갖지 아니한 큰 힘이 있었습니다. 인간에게 행복을 갖다 주는 힘, 폭풍같은 시련을 겪데 그 시련을 이기게 하는 힘, 절벽같은 장벽을 만나도 피해 갈 수 있는 힘, 수렁에 빠져도 살아 날 수 있는 힘, 이 힘을 가지고 능력있고 성공적인 삶을 살아간 사람들의 삶의 진솔한 고백이 성경에 가득차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관심사는 이들이 시련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었던 그 힘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는지를 찾는 일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에 의하면, "저녁 때가 되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다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제자들이 무리를 그대로 남겨 둔 채 예수를 모시고 배를 저어 갔다"고 적고 있습니다.

때가 저녁이였습니다.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드는 시간이였습니다. 이 때를 우리가 주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나가야 할 세상은 어둠이 짙은 긴 터널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야 할 곳은 바로 호수 건너 저편 행복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또 본문 말씀에 의하면, "그런데 얼마 못 가서 거센 폭풍이 일면서 큰 물결이 배 안으로 덮쳐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배 고물에 머리를 기대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소리쳤다. '선생님, 저희가 빠져 죽게 되었는데도 돌보지 않으시렵니까'" 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돌풍에 폭풍이 휘몰아치는 갈릴리 호수와 같고, 우리 자신은 이 호수를 건너가는 작은 배와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할 것없이 살면서 여러 종류의 폭풍을 겪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큰 시련 중에서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폭풍과 큰 물결이 쳐 배가 뒤집어지고 물에 빠져 죽게 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주무시고 계셨다는 말씀은 아마도 우리의 현실을 잘 표현해 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시시 각각 부닥쳐 오는 시련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게 됩니까?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현실 속에서 허둥되며 이리 뛰고 저리 뛸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폭풍을 만난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었습니다. "왜 그렇게도 겁이 많으냐?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느냐?"고 말입니다.

폭풍을 만난 제자들이 폭풍을 이기지 못한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침묵도 아니었고, 하나님의 부재도 아니였습니다. 제자들이 폭풍을 이기지 못하고 당황하게 된 원인은 신앙의 부재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중요성을 알게 됩니다. 신앙이 있고 없음에 따라 사람의 행불행이 좌우되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에게 신앙이 있었다면, 폭풍이 그렇게 위협적이거나 무섭게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앙의 눈이 열리고, 믿음의 귀가 열리면, 어떠한 장벽도 넘지 못할 정도로 크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조정하는 보이지 아니하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불교에도 '일체유심조'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만사가 신앙여하에 달렸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우리 인간의 행불행의 출발점이며, 삶의 존재방식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생각과 행동은 신앙에 의해서 조정되기 때문에 인간의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있다 할지라도 그 신앙의 질이 문제입니다. 잘못된 신앙은 인간을 불행의 수렁으로 인도하게 되고, 바른 신앙은 인간의 삶을 넉넉하고 성숙한 삶에로 인도합니다. 신앙의 힘이 큰 만큼 잘못된 신앙의 부작용이 크고, 신앙의 힘이 큰만큼 바른 신앙의 축복도 큽니다. 어떤 신앙을 가질 것이냐의 문제는 개개인에게 달린 선택의 문제지만, 바른 신앙의 선택은 하나님의 은총이요 선물입니다. 성서는 바른 신앙을 선택했던 신앙인들의 성공담이요, 권면의 글이요, 믿음의 글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극한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바른 신앙으로 이를 극복하고 승리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들 승리자들의 신앙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 보고 그들의 성공적인 삶에 동참하려고 합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신앙의 핵심은 네 가지 입니다. 그리고 이 네 가지는 우리 인간의 삶에 매우 중요한 것들입니다.

첫째, 기독교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습니다. 이것이 창조주 신앙입니다. 이 신앙의 바탕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분은 말씀 한마디로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셨고, 흑암에서 빛을 있게 하셨고, 혼돈을 질서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죽음의 상태에서 생명의 상태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이 신앙의 바탕 위에 성서가 기록되었습니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이 창조주 신앙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들과 같이 혼돈과 흑암의 세상을 살면서도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바다를 육지로 건너게 하시며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시며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신 창조와 회복의 하나님을 믿는 창조주 신앙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이 이집트 노예생활과 바벨론 포로생활의 극한 고난 속에서도 잘린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피는 환상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이 야웨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역사 배후의 큰 손, 하나님이 계심을 믿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섭리하심에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기독교의 창조주 신앙은 세계가 보다 큰 하나님의 뜻속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믿고 극한 시련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은 신앙입니다.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결코 실패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는 연단과 훈련의 과정은 있을지언정 실패와 패배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 배후에 계신 하나님은 만물을 통치하십니다. 그가 만물을 만드셨고, 그가 만물을 다스리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우주는 시작이 있었고, 끝이 있습니다. 이 우주는 만드신 이의 목적과 계획과 섭리아래 만드신의 이의 뜻을 따라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역사는 목적없이 흘러갈 수도 없고, 윤회의 역사일 수도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지배아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모든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아래 놓이게 될 것입니다. 성서는 흑암에서 생명으로 즉 무에서 유에로 말씀 한마디로 이 우주가 창조되었음을 설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이 우주도 재 창조될 것이며, 죄로 인하여 흑암의 권세에 살던 인간들이 새 생명으로 구원함을 받으며, 죽어도 부활하게 된다는 매우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생명신학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제 2차 대전 중에 나치의 학살을 피하여 성당 지하실에 숨여 살던 무명의 어느 유대인이 "나는 밤이 아무리 캄캄해도 아침 동녘이 밝을 것을 믿노라. 나는 하나님이 아무리 잠잠해도 그가 살아 계심을 믿노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창조주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둘째, 기독교는 예수를 부활의 주로 믿습니다. 기독교를 부활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가 예수의 부활에 근거해서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의 기초는 부활입니다. 그런데 부활신앙은 창조신앙 안에서 가능합니다. 창조신앙이 죽음에서 생명을 말하기 때문에 창조신앙 안에서 부활신앙은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습니다. 죽음의 흑암에서 생명을 있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죽은 예수를 살리셨습니다.

기독교의 구원하는 믿음이 예수를 구세주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을 믿고 동의하는 부활의 신앙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기초는 부활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과 우리도 또한 부활할 것을 믿는 것이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는 믿음이요, 이 믿음의 기초위에 기독교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0장 9절은 "네가 말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계시록에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재창조 즉 새 하늘과 새 땅과 신앙인의 영생에로의 부활은 성서가 말하는 구원 그 자체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범죄한 이후에 받은 형벌이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창 3:17-19)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라"(롬 6:32)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문제는 죽음이고, 구원은 다시 사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음의 고통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형벌이며, 이 큰 고통의 원인이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그리고 죄는 결국 육체를 가진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 동료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죄악들이라고 말합니다. 인간들은 육체를 가진 사람들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여러 가지 죄악들로 인해서 고통을 받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문제는 육체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육체가 타락 이전의 상태로 완전하게 회복되지 않은 한 인간은 영원토록 완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하나님을 믿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궁국적 희망인 것입니다.

세째, 기독교는 성령을 임마누엘 즉 내주의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마 28:20)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겠다"(요 14:16)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구약의 예언자들에 의해서 예언되었던 성부 하나님의 약속이였고, 이 약속은 오순절 성령의 오심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이 성령의 오심의 특징은 성령의로서의 세례 즉 믿는 모든 이들의 마음의 성전에 내주하셔서 구원을 이루시고, 마음의 화평을 심어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을 앞당겨 심령의 천국과 가정의 천국을 이루게 하시며, 인간 공동체에 변혁과 개혁의 능력을 심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세번 째 신앙을 선취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성령께서는 죄인에게 찾아 오셔서 중생의 씻음과 새롭게(딛 3:5) 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을 보증하시며 인치심으로(고후 1:22; 엡 1:13-14) 그 축복을 앞당겨 체험하게 하십니다.

멸망과 구원의 문제에서 죽음과 부활이 대표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긴 하지만, 이런 문제는 궁극적으로 미래의 문제입니다. 현재의 죽음과 부활이란 영적인 문제 혹은 현실적인 문제가 여전히 남게 됩니다. 사실 인간은 죄악된 세상에서 타락한 육체를 가지고 살면서 매일매일 죽음을 맛보며 살게 됩니다. 실질적인 지옥은 아니라 할지라도 지옥과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러한 삶에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선물로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이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해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들은 죄악된 세상에서 타락한 육체를 가지고 살면서도 매일매일 영생을 맛보며 삽니다. 실질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삶을 맛보며, 누리며, 체험하며 살아 갑니다. 이것이 구원의 기쁨이요, 축복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인 축복과 저주는 미래의 죽음과 부활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선취적인 혹은 영적인 형태의 것들입니다. 완전한 것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도상의 삶 혹은 순례자의 삶입니다. 다시 말해서, 현재의 구원이나 저주가 완벽한 것이 아니면서도 여전히 우리의 삶 속에서 중요한 요소로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네째, 기독교는 인간이 죄인임을 믿습니다. 기독교의 인간론은 역시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고백하는 신앙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은 만드신 분이시고, 인간은 만들어진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피조물임을 알게 될 때, 인간은 자기를 만드신 분에게 예배의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우리가 소유한 물질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신앙인에게는 소유자의 개념 보다는 관리자의 개념이 더 앞서게 됩니다.

우리가 피조물이란 말은 인간은 부족한 존재라는 점을 스스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완전하게 지음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인일 수 밖에 없습니다. 죄인이란 결국 요구된 점수에 미치지 못한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사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위치와 존재를 아는 사람은 남의 허물을 쉽게 용서합니다. 부인이나 남편의 허물을 용서합니다. 자녀의 부족함을 용납하고 위로하며 권면하고 용기를 북돋우어 줍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나는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 자신의 허물을 용서하게 되고, 새 출발의 길을 언제나 새로 걷게 됩니다. 내게는 창조와 부활의 신앙이 있기에 언제나 새 출발이 가능합니다. 내게는 연약한 나 자신을 도우실 성령이 계시기에 언제나 용기를 잃지 않습니다. 나는 늘 넘어지고 쓰러지지만 언제나 다시 일어 납니다. 내 곁에는 언제나 임마누엘의 주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거친 풍랑이 이는 바다와 같고, 우리 자신은 망망 대해에 떠가는 작은 배와도 같습니다. 때로는 잔잔한 물결이 일 때가 있겠고, 때로는 강풍이 불어 파선의 위기에 직면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만난 무서운 폭풍 중에서 종종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시시 각각 부닥쳐 오는 어려움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게 됩니까?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착각과 생각 속에서 혼자서 허둥되며 이리 뛰고 저리 뛸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때 일수록 우리는 신앙의 눈을 뜨고 마음의 귀를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임마누엘의 성령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빛이 있으라"는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에 흑암의 세상에 빛은 있었고, "고요하고 잔잔하라"는 예수의 말씀 한마디에 성난 바다는 바람이 그치고 물결이 잔잔해졌습니다.

성서는 시련을 만난 사람들이 창조주요, 부활의 주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함으로서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시련은 짧고 승리의 영광은 길고 영원하다는 것이 성서를 기록한 저자들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에게 시련을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시련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시련을 발전을 위한 연단의 과정으로 믿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한 창조주 하나님의 신앙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를 맛 보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승리자의 표상입니다. 그 분 안에서 우리는 결국 이기게 될 것입니다. 창조주, 부활의 주, 임마누엘의 주 하나님을 믿는 강한 신앙으로 늘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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