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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8-09 00:35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마 16:21-28; 행 21:10-14)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062  
17세기 말엽 영국 국교에 맞서 설교를 하다 체포되어 12년간 토굴 속에 갇혔던  침례교 목사 죤 번연은 부인이 결혼할 때 가져온 성경책과 죠지 폭스가 쓴 {순교자}라는 책을 읽고 유명한 {천로역정}이란 신앙서적을 썼습니다. {천로역정}(天路歷程)이란 말은 '순례자의 여정'이란 뜻을 가진 Pilgrim's Progress를 한자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천로역정}은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책이라고 합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이 책을 읽어 보셨거나 들어서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 책이 한국에 소개된 것은 고종 32년인 1895년 영국 선교사 게일 부부가 순 한글로 번역하면서부터 입니다.

이 책은 꿈 이야기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신앙 체험을 우화로서 그린 신앙서적입니다. 한 순례자가 장망성을 떠나서 천성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의 등에는 큰짐이 지워 있었는데 죗짐 이였습니다. 그는 이 짐을 길가에 세워진 십자가 밑에 풀어놓고 기쁨으로 천성 길을 향해 걸어갑니다. 어느 날 그리스도인은 정도를 벗어나 쉽고 편해 보이는 다른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이 길은 그리스도인을 의심의 성을 가진 거인 절망의 영역으로 인도하게 됩니다. 결국 그는 거인 절망에게 사로잡혀 토굴에 갇히게 됩니다. 거인은 그리스도인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충고합니다. 여행을 계속해봤자 부질없는 짓이라고 말합니다. 한동안은 절망이 이 그리스도인을 정말로 정복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 그리스도인의 동반자인 희망이 그에게 이전에 거두었던 승리들을 생각나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토요일 자정 경에 시작해서 밤새도록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품속에 간직했던 약속이라 부르는 열쇠가 있다는 사실을 그때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이 약속은 의심의 성에 있는 모든 문을 열고 나올 수 있는 마스터키였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예수와 주의 종들의 여행을 주제로 삼아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누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고향인 갈릴리 지방을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시는 선교여정과 그 곳에서의 재판과 수난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9장 51절은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후 예수는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순례자의 길을 걷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가까워 질 수록 예수의 마음은 매우 무겁고 괴롭습니다. 그곳에서 발생될 여러 가지 불길한 일들을 예측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잡히시기 전 날 밤, 예수는 삶의 유혹을 뿌리치시고 죽음으로서 예루살렘성을 정복하시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정대로 체포되셨고, 다섯 번의 재판을 받으시고, 살점을 찢는 채찍을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셨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상징적인 도시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모든 신앙인의 모범자이십니다. 누가복음 9장 18절에서 27절까지를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누가가 누가복음 9장 18절 이하에서 독자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를 밝혀 내야 합니다.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가라사대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 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경계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여기서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정체에 대해서 바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요한으로 알고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 혹은 선지자 중에 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만은 예수를 바로 알았고 바로 고백했습니다. 오늘 봉독해드린 마태복음 16장 16절에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고백되고 있습니다. 요즘에도 보면, 예수를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반란죄로 십자가에 처형된 사회적 정치적 혁명가로 보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개혁가 혹은 주변부 민중 곧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을 지향한 민중 해방자로 보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예수를 임박한 세상종말을 주장하는 말세론자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생명의 주요 구세주이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부활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도 동일하게 예수를 우리의 생명의 구세주로 신앙고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복음 9장이나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관한 보도는 예수의 정체를 바로 밝히자는 데 그 뜻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의 정체를 밝히는 기독론을 적기보다는 오히려 제자직 훈련을 위한 말씀으로 적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에 예수의 수난예고와 자기부정의 십자가의 길을 언급하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또 그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죽기까지 충성으로 주를 따라 가는 자는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주를 위하여 목숨을 잃은 자들은 죽어도 다시 살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모든 신앙인의 마지막 종착지를 상징하는 영적 도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를 기록한 저자들은 한결같이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상당히 영적인 측면에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평화의 상징인 나귀를 타시고 민중의 환호와 영접을 받으시며 평강의 왕으로 입성하십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나라의 수도를 상징하기 때문에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왕으로서 입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바로 그곳에서 화려한 대관식이 아닌 심문과 조롱과 매맞음과 십자가의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순교를 당하십니다. 이로서 예수는 오실 메시야로서 왕직을 수행하게 되신 것입니다. 예수의 왕직은 세상의 권력이 아니라 죄와 사망을 정복하는 영적인 능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서 우리는 예수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순례자의 길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겪게될 수난을 예고하셨을 때에, 제자들은 실망하여 그런 일이 결단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고 말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러한 제자들의 행위를 사탄의 작태라고 꾸짖었습니다. 우리가 따르는 믿음의 길이 혹시 예수의 제자들이 제자의 길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보좌 좌우편의 자리다툼을 벌렸던 것처럼 영광과 명예의 길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할 줄 압니다. 물론 이러한 영광이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나귀를 타시고 수난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예수는 죽음으로서 악의 세력에 대항하여 공격을 개시하셨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악의 세력을 향한 공격개시였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소탕전과 승리의 개선뿐입니다. 계시록 19장에서 요한이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환상은 바로 그리스도와 성도가 백마를 타고 새 예루살렘성에 개선가 높이 부르며 입성하는 장면입니다. 이 희망찬 하나님의 약속은 머지않아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삶은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자의 삶이요, 고난의 삶이란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현세에서의 환난과 시련이 크면 클수록 그 만큼 하나님의 은혜도 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의 정도 남보다 깊다는 점을 의심치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신앙과 물질축복, 신앙과 세속적인 축복을 혼돈해서 가르치고 있는 점은 순례자의 삶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처사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예루살렘 여정을 기록한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의 선교여행에 대해서 적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사도 바울의 예루살렘 여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인의 모범자이신 것처럼, 바울은 성도의 모범자가됩니다.

누가는 바울이 지금의 터키 지역에서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유럽의 교회들을 순방한 후에 오순절에 맞추어서 서둘러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바울의 여정을 적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바울의 심정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서 가졌던 심정과 똑 같은 것이 였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행한 마지막 설교를 통해서 그의 아픔과 고난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 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노라(행 20:22-24).

바울 일행이 가이사랴에 도착하였을 때에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을 붙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도록 말렸습니다. 마치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붙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도록 말렸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을 말려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권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 21:13)고 단호하게 평안과 안일의 유혹을 뿌리쳐 버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결국 잡혀서 예수처럼 다섯 번의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상징인 예루살렘이 고난과 환난의 장소로 묘사되고 있는 것은 성경이 기록될 당시 교회상황이 박해상황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죤 번연이 {천로역정}에서 묘사한 그리스도인의 삶처럼,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에는 많은 환난과 시험과 수고가 필연적으로 따른다는 점을 일깨워 주기 위함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도 예수처럼 혹은 바울처럼 혹은 앞서간 믿음의 선배들처럼 순례자의 길을 걸어가되 우리 앞에 닥치는 환난과 역경을 끝까지 믿음과 희망으로 극복하시고 승리하시기를 바라서 간단하게 말씀 드렸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결단코 순탄치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며 생명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