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소망 산 돌12: 교회(7)(벧전 3:19)
구약시대의 음부
베드로전서 3장 19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는 난해(難解)한
말씀이다.
“옥에 있는 영들에게”에서 과연 옥은 어디인가? 죽은 자들에게 과연 복음전파가 가능한가?
유대교에는 교리가 따로 없다. 그 이유는 613개의 계명과 수많은 규례(구전)의 실천에 치중하기 때문이다. 유대교는 민족의 생사가 유일신
야훼와 맺은 언약의 내용인 율법을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믿는 실천 종교이다. 유대인들에게 ‘다가올 세상’(Olam Ha-Ba)은 오실
자 ‘모쉬아크’가 장차 세울 문자적 이스라엘국가를 말한다.
구약성경에는 천국과 지옥이란 개념이 없다. 구약성경에 자주 쓰인 ‘스올’(sheol)은 죽음의 세계 곧 무덤을 의미한다. 따라서 전도가
불가능한 곳이다. ‘스올’에서는 기억하거나 찬송하거나 감사할 수 없고(사 38:18-19, 시 6:5, 30:9, 88:10-12,
115:17),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기” 때문이다(전 9:10). ‘스올’이 영혼들의 옥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은 구약성경에는 육체와 영으로
나뉘는 이원론이 없기 때문이다. 또 구약성경은 유대인들의 나라 곧 이스라엘과 가나안땅에 관한 문자적인 말씀이다. 따라서 영의 세계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 예수님 시대에 사두개파들이 천국도 지옥도 영혼도 부활도 천사도 믿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면에 바리새파들은 천국과 지옥,
영혼과 부활 천사를 믿었는데, 이것은 신구약중간기였던 헬라시대의 영향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언급하신 지옥은 예루살렘 남서쪽에 위치한 힌놈의 골짜기를 말한 것인데, 히브어로는 ‘게헨놈,’ ‘게힌놈,’ ‘게벤힌놈’으로
불렸고, 헬라어로는 ‘게헨나’(Gehenna)로 불렸다(마 5:22, 막 9:47). 이곳에 가룟 유다가 목맨 ‘피밭’이 있었다. 힌놈의
골짜기는 한때 바알에게 분향하던 곳이었고, 몰렉에게 어린자녀들을 산 채로 불살라 제물로 바치던 곳이었다(대하 28:1-4, 렘 7:31-33).
그러다가 요시야의 개혁 때부터(왕하 23:10) 이곳은 쓰레기와 동물과 죄인의 시체를 태우는 소각장으로 쓰였다. 24시간 불과 연기가 피어오르는
잿더미 골짜기였다. 그래서 힌놈의 골짜기는 불이 꺼지지 않는 지옥의 상징이 되었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천국은 에덴동산(Gan Eden)에 연결되고, 지옥은 ‘게힌놈’(Gehinnom)에 연결되는데, 연옥과 같아서
‘다가올 세상’이 도래하기 전까지만 존재하며, ‘게힌놈’에서 머무는 기간도 최장 12개월로 한정된다. 그러나 악한 자들은 ‘다가올 세상’에
들어가지 못한다.
헬라시대와 신약시대의 음부
“옥에 있는 영들에게”에서 옥은 헬라인들에게 벌을 받는 지옥이 아니라, 죽은 자가
누구나 가는 음부 곧 ‘하데스’(Hades)를 말한다. 헬라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땅 속 깊은 곳에 있는 음부의 세계로 옮겨가기 위해
뱃사공 카론에게 뱃삯을 주고 밑바닥이 없는 소가죽 배를 타고 통곡소리가 참혹하게 들려오는 비통의 강, 깊은 시름의 강, 분노의 불길이 치솟는
불의 강, 이생의 기억들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망각의 강을 차례대로 건너면 (이 네 강은 유족이 건너는 강이기도 하다. 비통함, 시름, 화장,
유골처리 후 망각) 너른 벌판에 이르게 되고, 벌판 오른쪽에 낙원(엘뤼시온, Elusion), 왼쪽에 지옥(타르타로스, Tartaros)이
있다고 믿었다. 당연히 이곳에서의 영혼들은 살아 있어서 기쁨도 행복도 고통도 아픔도 느낀다. 베드로가 말한 영혼들의 옥이 이곳일 가능성이
크다.
타르타로스에는 많은 죄인들이 벌을 받고 있는데, 그 중 탄탈로스는 물속에 몸을 잠그고 있는데도 영원히 갈증에 시달린다. 탄탈로스가 마시려고
입을 대면 물이 달아나 버리기 때문이다. 익시온은 끝없이 도는 불 바퀴에 매달려 비명을 지른다. 티튀오스는 독수리 부리에 살을 파 먹히면서
소리를 지르고, 다나오스의 딸들은 밑 빠진 독에다 끝없이 물을 길어다 붓는다. 시쉬포스는 산꼭대기로 바위를 굴려 올리는데, 바위가 산꼭대기에만
이르면 다시 굴러 떨어지기 때문에 시쉬포스는 영원토록 그 바위와 씨름을 한다. 영혼의 안식이 없는 곳, 바로 그곳이 타르타로스이다.
신약성경이 기록될 당시는 헬레니즘 사상이 유럽은 물론이고 근동과 북아프리카에 스며든 지 이미 400년이 다되어가고 있었다. 그런 만큼
베드로전서의 일차적인 독자들인 현 터키 곧 옛 아나톨리아지역의 사람들은 그들이 헬라인이었던 유대인이었던 음부의 세계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다만 마태복음 5장 22절에서 ‘게헨나’가 쓰인 것은 마태복음의 일차적인 독자들이 팔레스타인지역의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지역의 보통의 유대인들은 여전히 헬레니즘보다는 구약성경에 강하게 영향을 받고 있어서였다. 신약성경에는 헤브레이즘과 헬레니즘이 모두 담겨
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비롯해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도 낙원과 음부(타르타로스)가 있지만, 낙원은 땅속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 지옥의 개념으로 무저갱과 불 못이 있는데 활화산과 연관
지을 수 있다. 계시록 15장 2절에 실린 ‘붉은 유리 바다’는 홍해와 연관 지을 수 있다.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예수님이 40여 시간 죽음을 맛보셨기 때문에 음부의 세계로 내려가셨다고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낙원으로 가셨어야 맞다(벧전 3;22). 예수님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죄수에게도 그렇게 말씀하셨다(눅 23:43)
그러므로 예수님이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것은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아니라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셨다 또는 단순히 죽으셨다는 의미일 수 있고,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는 뜻은 예수님 이전에 죽은 영혼들에게까지도 그리스도께서 구원사역을 완성하셨다는 소식이 선포되고
전해졌다는 의미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음부에 갇힌 불순종의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면 그들에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졌다는 뜻일 텐데 이것은
히브리서 9장 27절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고 그 뒤에는 심판이 있다.”는 말씀과도 배치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능성
있는 해석을 아래와 같이 유추해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셔서 죽은 영혼들에게 발하신 선포는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죗값과 흘리신 보혈을
구약시대에 하나님을 믿다가 죽은 의로운 영혼들에게 소급시켜 낙원으로 옮기기 위한 것일 수 있다(롬 5:15-21 참조). 그러나 이 해석이
가능해지려면, ‘스올’과 ‘하데스’를 동일하게 봐야만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데스’에서처럼 ‘스올’에 갇힌 영혼들이 그리스도의 선포를
들을만한 의식이 있었느냐에 상관없이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부여할만한 능력이 죽음을 친히 맛보셨고, 또 부활하실 그리스도에게 있었다는 점에서 이
해석이 가능하다.
이밖에도 노아시대에 불순종한 영혼들에게 천상의 성자 하나님께서 음부로 내려가 선포하셨다는 주장도 있고(글리슨 아처), 타르타로스에 갇힌
“범죄한 천사들”(벧후 2:4)에게 무서운 심판을 선포하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승리는 우주적이고, 이 우주에 하나님의
은총이 미치지 아니한 구석이 단 한 곳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다(윌리엄 바클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