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배 믿음, 보배 약속02: 보배로운 믿음(2)(벧후 1:1-1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
베드로는 1장 1절에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라고 소개하였다. 여기서 “종”이란 말은 노예란 뜻이다. 노예란
자기 결정권과 인권이 없는 주인이 소유한 물건이었다. 노예에게는 법적 권리란 것이 없었다. 따라서 노예들은 공정과 공평을 기대할 수 없었다.
노예와 가축과 농기구사이에 유일하게 다른 점은 노예가 우연찮게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이 같은 점을 고려해본다면, 베드로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한 것은 자기를 지극히 낮춘 것일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100퍼센트 순종하대 모든 권한을 완전히
포기했다는 것을 뜻한 것이다.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란 표현은 로마시대에서는 매우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황제가 백성의 신이었고 주인이었으며 구주였기
때문이다. 특히 로마법에 의해서 십자가형을 받고 처형된 예수를 구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황제의 권위를 찬탈하는 것이고 도전하는 것이었다. 로마의
황제들은 신성 또는 신의 아들 또는 신과 주였다. 일부 황제들은 ‘신(神)과 주(主)’(Deo et Domino) 혹은 ‘주와
하나님’(Dominus et Deus)이란 표현을 자신들의 두상이 새겨진 주화에 새겨 넣기도 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로마제국에서뿐 아니라, 고대
근동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황제의 신성이나 숭배가 가능했던 것은 당대에는 다신을 믿었기 때문이다. 신들의 숫자가 워낙 많다보니까 황제신이 하나
더 추가됐다고 해서 문제가 될게 없었다. 같은 맥락에서 야훼 하나님이나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이나 성령 하나님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고 해서
그리스로마사회에서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문제는 다른 신들을 우상으로 여겨 인정하지 않는다는데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황제를 신으로 믿고
섬겨야하는 준엄한 시기에 “신은 한분뿐이요, 주도 한분뿐이다.”를 주장했고, 각종 신상들과 신전들 및 제단들을 부정할 뿐 아니라, 황제숭배를
거부하였다. 그로 인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무신론자’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이런 저런 오해로 인해서 네로 황제 때 발생한 로마시의 대화재를
일으킨 방화범이란 누명을 뒤집어쓰고 베드로와 바울을 비롯해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베드로후서 1장 1절부터 4절 전반절까지의 내용은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성도의 신분을 설명한 글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 곧 “보배로운 믿음”을 소유한 자들이고(1:1),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자들이며(1:2),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 곧 신령한 축복을 받아 누리는 자들이고(1:3),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받은 자들이라(1:4)고 하였다.
또 2절에서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라고 했는데, 베드로는 이 앎(지식)과 모름(무지)을 대조시키고 있다. ‘앎’이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1:2, 8),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1:3), 및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님”(1:20)을 아는
것을 뜻한다. ‘모름’은 신성한 것들 곧 보배로운 믿음(1:1), 보배로운 약속들(1;4), 주의 재림, 새 하늘과 새 땅, 불의 심판에 관한
것들(3:8-13)을 알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1장 4절 후반절부터 7절까지의 내용은 위와 같은 구원의 축복을 주신 목적을 설명한 글이다. 그 목적은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다”는 것이며(1:4b),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더하기”(1:5-7) 위함이라 하였다.
1장 8절부터 11절까지의 내용은 우리 성도들이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고,”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더하는” 일에 힘써야할 이유를 설명한 글이다. 그 이유는 우리 성도들이 부지런하여
열매를 맺고(1:8), 믿음의 걸음에서 실패치 않고(1:10), 영원한 천국에 넉넉히 들어갈 은혜를 입도록 하려는 것(1:11)이라고
하였다.
베드로후서는 “보배로운 믿음”과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소유한 성도들이 어떻게 하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쓴 글이라고 볼 수 있다. 베드로는 이 글에서 신앙성장의 8단계를 언급하였다. 비록 믿음이 보배롭기는 하지만 가장 초보적인 단계로
언급되었다. 믿음에서 한 계단 발전한 단계가 덕이다. 덕 위에 지식, 지식 위에 절제, 절제 위에 인내, 인내 위에 경건, 경건 위에 형제
우애, 형제 우애 위에 사랑이라고 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서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는데,
베드로는 바울이 말한 믿음과 사랑 사이에 있는 소망을 성취하는 덕목으로 곧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11절) 받기 위한
덕목으로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 우애를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8이란 숫자는 주님의 이름 ‘예수’의 헬라어음가 ‘888’에서
나왔다. 그런 연고로 마태복음에서 8은 그리스도교 복음과 넉넉한 구원을 상징하고 있다. 숫자 8은 7+1의 의미로써 ‘넉넉하다.’ ‘채우고
남는다.’ ‘차고 넘친다.’ ‘더하기가 된다.’는 뜻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받기 위한 신앙성숙의 8단계를
언급하면서 이 8가지를 “신의 성품”이라고 칭하였다.
첫째, 믿음(π?στει, pistei)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신뢰의 믿음뿐만 아니라, 복음의 내용과 신앙고백에 담긴
지식에 동의하는 믿음 및 말씀의 순종과 확신 속에서 모든 시련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음의 끈을 놓지 않는 견인의 믿음을 모두
의미한다.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둘째, 덕(?ρετ?ν, aret?n)은 도덕적 미덕, 도덕적 힘 또는 도덕적 우수성을
의미한다. 고대 에베소의 켈수스 도서관에는 세 명의 여신상이 있었는데, 이들은 ‘아레테’(Arete, 도덕적 미적),
‘에피테메’(Episteme, 학문, 과학적 지식), 소피아(Sophia, 지혜)였다. 사람이 갖춰야할 3대 덕목을 강조한 것이었다.
셋째, 지식(γν?σιν, gn?sin)은 세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벧후 3:18),
세상의 지식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길 만큼 고상한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빌 3:8), 그리스도 안에 감춰진 지혜와 지식의
보화(골 2:3),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딛 1:1) 혹은 “진리를 아는 지식”(히 10:26)을
의미한다.
넷째, 절제(?γκρ?τειαν, enkrateian)는 자기 통제 곧 절제를 의미하며, 베드로후서 2장에서 언급된 본능, 불의, 불법,
속임수, 탐욕, 음행 등 육체의 정욕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힘을 의미한다.
다섯째, 인내(?πομον?ν, hypomon?n)는 견인 곧 불굴의 인내 혹은 지속적 인내를 의미한다. 박해, 시련, 환난, 고난,
시험을 당할 때 믿음의 끈을 놓지 않고, 믿음을 배반하지 않고, 주께 한 약속을 신실히 지키기 위한 인내를 의미한다.
여섯째, 경건(ε?σ?βειαν, eusebeian)은 불의 혹은 “망령되고 헛된 말”(딤후 2:16)에 반대 개념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는”(딤전 6:3)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경건이 범사에 유익하고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딤전
4:8)고 하였다.
일곱째, 형제 우애(φιλαδελφ?αν, philadelphian)는 형제 사랑, 형제 친절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민족색깔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차별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형제자매가 된 사실을 알고, 형제와 자매로 여겨서 친절을 베풀고
우애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덟째, 사랑(?γ?πην, agap?n)은 인간들의 에로스(광기)적인 사랑이나 성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
희생적인 사랑, 정의로운 사랑, 헌신적인 사랑, 하나님과 타인을 이익의 수단과 도구로 삼지 않고, 목적으로 삼는 사랑. 겸손과 희생과 용서와
헌신이 깃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친히 보여주신 자기 포기와 동일시의 사랑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