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CCS 홈페이지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
main_5.GIF main_6.GIF main_7.GIF main_8.GIF

 

 

 

 

 

 

 

 
작성일 : 08-03-05 22:28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 예수(히 9:11-28)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371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이신 예수(히 9:11-28)

1세기경 유대인 기독교인들(‘메시아닉 주’/Messianic Jews)은 동족인 유대교공동체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심한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기독교를 버리고 유대교로 복귀할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박해를 이기지 못한 이들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인으로 있었을 때가 기독교인으로 남아있는 것보다 훨씬 신분보장이 잘되고, 생활안정도 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속해있던 유대교에로 복귀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히브리서 9장은 ‘옛 언약’인 구약을 ‘육체의 예법’(10절), ‘모형’(23절) 혹은 ‘그림자’(24절)로 표현하면서 신앙의 위기에 빠진 유대인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님을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소개한 것입니다.
옛 언약의 예법에 따른 제사와 제물과 대제사장은 장차 올 더 좋은 예배와 제물과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에 비해서 불완전하고 불충분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본문은 첫 언약의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막이 갖는 제한성에 대해서 몇 가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곧 법궤 위 속죄소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휘장으로 막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 분명하지도 않았고, 좀처럼 쉽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대제사장이 일 년에 단 한 차례 대속죄일 때만 백성의 속죄를 위해서 짐승의 피를 가지고 법궤 위 속죄소로 나아간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 대제사장이 백성의 속죄를 위한 피를 가지고 속죄소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의 속죄를 위한 피를 가지고 속죄소에 들어가야 했던 불완전하고 유한한 인간이었다는 점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한 성막과 예법이 장차 나타날 더 좋은 것의 예표와 모형과 그림자였다는 점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지시한 옛 것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성취와 실체는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한 더 좋은 것으로써 완전하고 항구적인 것입니다.
셋째, ‘옛 언약’에 따른 성막 제단에 드려진 희생제물과 봉헌물은 인간의 양심까지 온전케 할 수 없는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얻어지는 구원은 법적인 속죄는 물론이고 양심까지 깨끗하고 온전하게 영구적으로 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넷째, ‘옛 언약’에 따른 예법은 심령보다는 육적인 것에 강조점을 두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레위기 11장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서 발생한 부정을 씻는 일에 중점을 두었고, 민수기 19장은 죽은 자와 접촉하는 데서 발생한 부정을 씻는 일에 중점을 두었으며, 레위기 12-15장은 일상생활 중에 질병으로 발생한 부정을 씻는 일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옛 언약’의 제도는 육체에 관해서는 철저했지만, 영혼에 관해서는 약점을 지닌 것이어서 반드시 ‘새 언약’에 따른 예법으로 개혁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9장 10절에서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준 것이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구약성서시대를 살았던 히브리인들은 영적세계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습니다. 그들의 사고는 일원론적이고 통합적이어서 사람을 육체와 영혼으로 나눈다든지, 영적세계를 천국과 지옥으로 나눈다든지 하는 이원론적인 인식이 약했습니다. 영적세계에 대한 관심과 강조는 헬레니즘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님시대나 신약성서시대에는 이 헬레니즘의 이원론이 매우 두드러진 때였습니다. 육적인 것이 영적인 것의 모형이나 그림자 혹은 예표로 강조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구약성서가 육적이고, 신약성서가 영적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육적인 ‘옛 언약’에 따른 예법은 영적인 ‘새 언약’에 따른 예법으로 개혁되는 것이 당연하고 합당한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구약성서의 가르침이 신약성서의 가르침에 의해서 개혁되는 것이 당연하고 합당한 것입니다.
개혁의 대상으로써 옛 언약의 예법이 신약성서에서 문제점으로 제기된 것들에는 ‘식사전 손씻기법’과 ‘카샤룻 음식법’ 그리고 ‘그릇씻기법’이 있습니다. 복음서에서는 이러한 예법들을 ‘장로들의 유전’라고 불렀습니다. 이들 ‘장로들의 유전들’이 갖는 가장 큰 문제점들은 지나치게 의식적이고 형식적이며 육적이라는데 있습니다.
‘식사전 손씻기법’을 보면, 말이 손씻기법이지, 실제로는 손 전체를 한 번의 쏟아 붓는 물로 손목부터 손등과 손바닥과 모든 손가락과 손톱에까지 구석구석 손 전체를 적신 후에 두 손을 높이 쳐들고 물기가 마르기 전에 축복기도문을 낭송하는 것이고, 물을 적신 손이 다른 손이나 옷에 닿지 않게 자연상태에서 말리는 것입니다. 이런 손씻기를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시행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사장들이 성막이나 번제단에 나아가기 전에 물두멍에서 씻었던 성별행위를 본받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전혀 씻는 것과는 동떨어진 형식에 불과한 허례허식에 불과한 행동입니다. 영적인 성결은 고사하고 전혀 위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손씻기법입니다.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본질문제에 접근하셨던 예수님은 음식이 입을 통해서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육적인 문제이지, 영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하셨으며, 사람을 영적으로 더럽게 하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말과 행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다른 장로들의 유전들 가운데 ‘카샤룻 음식법’이란 것이 있습니다. 유대교인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부정(不淨)한 것, 정(淨)한 것, 거룩한 것으로 나눠놓고 정한 것만 먹고 정한 것만 사용하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기제품을 우유제품과 함께 먹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고기제품에 접촉된 그릇들은 우유제품에 쓸 수 없고, 반대로 우유제품에 접촉된 그릇들은 고기에 쓰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유대교인들은 그들의 카샤룻법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들과는 식탁교제를 극도로 피해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그것이 아무리 종교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깨끗하다고 해도, 사람을 깨끗하게 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마음의 악을 제거하는 것이지, 특정 음식을 먹고 안 먹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릇씻기법’도 마찬가집니다. 유대교인들은 출애굽기 23장 19절의 계명, “너는 염소새끼를 어미젖으로 삶지 말라”는 계명을 고기제품과 우유제품을 함께 먹지 말라는 계명으로 해석하면서 우유제품과 고기제품을 함께 먹지 못하게 할뿐 아니라, 전용 그릇들을 사용하여 어떤 경우에도 그릇이나 음식이 섞이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합니다. 따라서 그릇을 씻을 때에도 용기들이 서로 섞이지 않도록 별도의 싱크에서 씻고, 그릇을 말릴 때에도 전용의 수건을 따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 25절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고 하셨습니다. 겉도 중요하지만, 속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겉이 깨끗한 것도 중요하지만, 속이 깨끗한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속이 깨끗하다는 것은 그 속에 공의와 사랑과 신실함으로 차있어야 깨끗한 것이고, 하나님의 계명이 지켜지는 것이지, 속이 무덤 속처럼 썩어서 고약한 냄새가 나는데, 겉만 하얀색 페인트칠을 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명이 지켜지거나 깨끗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이런 간단한 차이점들이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다른 점들입니다. 옛 언약이 육적이고 율법적이며 의식적인 것에 집착하고 중점을 두었다면, 새 언약은 본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 공의와 사랑과 신실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의 우월성을 여러 가지로 설명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1장에서 ‘천사보다 뛰어난 예수님,’ 2장에서 ‘형님과 오빠이신 예수님,’ 3장에서 ‘모세보다 뛰어난 예수님,’ 4장에서 ‘참 안식을 주시는 예수님,’ 5장에서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6장에서 ‘우리를 위해 앞서가신 예수님,’ 7장에서 ‘하늘보다 높이 되신 예수님’ 그리고 8장에서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예수님’에 대해서 살펴본바 있습니다. 이밖에도 히브리서 저자는 2장에서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 4장에서 ‘우리의 큰 대제사장’과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대제사장,’ 5-6장에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은 대제사장,’ 7장에서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쫓아 된 대제사장,’ ‘영원히 갈리지 아니하는 대제사장’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간구하시는 대제사장,’ 8장에서 ‘하늘 지성소에서 일하시는 대제사장,’ 그리고 9장에서는 ‘구약시대의 모든 제사제도를 완성시킨 대제사장’과 ‘만왕의 왕으로 오실 대제사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히브리서 9장 11-28절을 살펴보면 우리 예수님의 우월성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첫째, 예수님은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신 분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성막을 섬기는 대제사장이십니다.
셋째, 예수님은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보혈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대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은 새 언약의 효력이 발생되도록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셨습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넷째, 예수님은 레위 계열의 대제사장처럼 매년 한 차례씩 지성소에 들어가지 않고, 단 한번 지성소에 들어가심으로 인류의 속죄와 구원을 완성하신 대제사장이십니다. 참 성전인 하늘 성막에서는 모형으로 할 필요가 없고, 더 좋은 제물인 예수님 자신의 몸으로 한 것이며, 대제사장이 해마다 짐승의 피로써 지성소에 들어간 것처럼 매년 자기를 하나님 앞에 나타내실 필요가 없이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마지막 때에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다섯째,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그의 피로 그를 믿는 자들의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케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할 능력의 대제사장이십니다.
여섯째, 예수님은 새 언약의 중보자이며, 부르심을 입은 성도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할 능력의 대제사장이십니다.
일곱째, 예수님은 그를 믿고 구원을 받은 성도들을 구원하여 영원토록 복락을 누리게 하시려고 다시 오실 대제사장이십니다. 그가 오시면 반드시 세상을 향한 대심판이 있게 됩니다.
여덟째, 예수님은 인간의 죄와 고독과 죽음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해 주실 대제사장이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인간의 ‘죄를 속하려고 죽으셨기’(15절)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실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장차 좋은 일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막힌 담 없이 담대하게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고, 오직 믿음으로 값없이 은혜로 법적인 속죄는 물론, 양심까지 깨끗케 사함 받는 길을 열어주셨으며, 육적인 복은 물론, 더 좋은 영적인 복까지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 우리의 형제가 되시며, 참 안식을 주시며, 우리를 위해 앞서가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며,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만왕의 왕으로 이 세상에 다시 나타나실 분이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장래에 좋은 일들을 엮어 주시는 우리를 위한, 우리의 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성도님들에게 장래 좋은 일들이 풍성하게 펼쳐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