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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5-07-11 08:18
그리스도의 나라(사 11:1-9)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306  
그리스도의 나라(사 11:1-9)

금년에 우리 교회는 “마음을 같이 하는 해”로 표어를 정하고, 40명을 목표로 세웠습니다. 그래서 첫 주에 “마음을 같이 하는 해”란 주제로 말씀을 드렸고, 둘째 주에 목표달성에 필요한 “리더십과 팀워크”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김남규 목사님이 오셔서 오전에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에 대해서, 오후에는 존재목적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가 “리더십과 팀워크”란 주제의 설교에서 목표는 바꿀 수 있어도 가치는 바꿀 수 없다는 말씀을 드렸는데요, 이 바꿀 수 없는 가치가 바로 김남규 목사님이 말씀하신 존재목적과 동일한 것입니다. 빛과 생명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은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2장 50절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다”는 말씀이 나오는데요, 우리 교회의 존재목적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고 또 그 일에 매진하는 공동체라면 우리는 분명 형제요 자매요 부친이요 모친들입니다. 이 형제와 자매, 부친과 모친이 어떻게 마음을 같이하는 ‘스위트홈’이 될 수 있는가를 암시하는 말씀이 이사야 11장 1-9절입니다.
1절,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란 말씀은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인 다윗의 후손 중에서 그리스도가 태어날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이 ‘여덟’이란 숫자는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의미도 있고, ‘필요조건을 다 채우고도 남는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넉넉하고 풍성하고 모자람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고대 시비린신탁에서는 그리스도를 숫자 8로 표기하였고, 그리스도란 말을 헬라어음가로 환산하면 888이 됩니다. 그리고 그 숫자 8을 옆으로 뉘어놓으면 물고기 형상이 됩니다. 로마제국의 박해를 피해 지하무덤 카타콤(catacomb)에 숨어 지내던 성도들이 카타콤 벽에 물고기를 상징으로 그려 넣었는데요, 물고기를 헬라어로 ‘이크투스’(Ichthus)라 합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Iesous Christous Theou Huios Soter)’란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가 주인이신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는 넉넉한 분위기와 풍성한 첫인상을 풍기는 곳이 되었으면 합니다. 물질의 넉넉함도 좋지만, 성도들의 마음이 푸근하고 넉넉한 그런 풍성함이 느껴지는 스위트홈 말입니다. 그런 곳이 바로 그리스도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2절,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란 말씀은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신 곧 지혜의 신, 총명의 신, 모략의 신, 재능의 신, 지식의 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이 충만한 분이십니다. 이 그리스도가 주인이신 곳이 바로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지혜의 신이 충만하고, 이해력의 신이 충만하고, 의논의 신이 충만하고, 재능의 신이 충만하고, 지식이 신이 충만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이 충만한 곳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신(神)은 성령(聖靈)을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한 곳이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성령님이 주도하는 지혜와 총명, 의논과 재능, 지식과 진리가 물씬 풍겨나는 공동체가 스위트홈입니다.
3절 상반절에서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란 말씀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며 교제와 기도에 전혀 힘쓰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일들을 즐거움으로 삼는 공동체가 바로 그리스도의 나라요, 기쁨이 넘치는 스위트홈입니다.
3절 하반절에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란 말씀은 정의와 성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의롭지 못한 사람들의 편에 서지 않고, 오히려 가난하고 힘없어 억울한 일을 당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편에 서며,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외모만으로 판단치 않고 그 중심을 보고 정의롭게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요 7:24, 2:11). 따라서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않는 곳이 바로 그리스도의 나라요, 비교가 없고 비판이 없고 칭찬과 격려가 넘치는 곳이 스위트홈입니다.
톨스토이가 쓴 󰡔대자󰡕에 보면, 사내아이가 금빛지붕을 이은 높직한 궁궐에 사는 대부를 만나 이곳저곳을 구경하게 됩니다. 정원의 아름다움이나 그곳에 깃든 평화로움은 꿈에서도 보지 못했던 황홀경이었습니다. 대부는 대자를 궁궐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더욱 훌륭하였습니다. 대부는 이 방 저 방을 빠짐없이 보여 주었습니다. 보면 볼수록 훌륭하기만 하여 아이는 더욱더 즐거웠습니다. 이윽고 문이 닫힌 한 방문 앞에 이르렀습니다. “너 이 문이 보이지?” 대부가 물었습니다. “여긴 자물쇠가 없단다. 그냥 닫혔을 뿐이야. 그러니까 열수는 있지만 열지 않는 편이 좋을 꺼다. 어디서든 네 마음대로 뛰어다니며 놀아라. 어떤 놀이를 해도 상관없지만, 한 가지, 이 방만큼은 들어가지 말거라. 알겠느냐? 만약에 안으로 들어가는 날엔 너는 큰 곤경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대부는 가 버렸습니다. 사내아이는 홀로 궁전에 남아 살았습니다. 거기서는 즐겁고 행복한 일뿐이었습니다. 얼마나 좋았던지 겨우 두 시간 지난 것 같았는데, 실제는 30년이 지나간 것이었습니다. 30년이 지났을 무렵에 사내아이는 굳게 닫힌 문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 때 호기심이 발동했습니다. “대부님은 왜 이 방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하셨을까? 어디 한번 들어가서 뭐가 있는지 보아야지.” 문을 한번 잡아당겨보았더니 굳게 닫혔던 문이 의에로 너무 쉽게 열렸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방은 궁궐에 있는 그 어떤 방보다 크고 훌륭하였으며 중앙에는 황금으로 장식한 보좌가 놓여 있었습니다. 사내아이는 방안을 이리저리 살핀 후에 보좌에 다가가 층계를 밟고 올라가 않았습니다. 자리에 앉아서 내려다보니 옥좌 옆에 홀이 놓여 있었습니다. 사내아이가 홀을 손에 잡자마자 갑자기 벽이 사방으로 쫙 열리며 온 세계가 한눈에 보이고 세상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들이 다 보였습니다. 정면을 보니 바다가 있고 배가 왕래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오른 쪽을 보니까, 기독교인이 아닌 이방민족이 살고 있고, 왼쪽을 보니까, 기독교인인 것 같은데 러시아 사람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뒤를 보니까, 러시아인들이 사는 동네가 보였습니다. “어디 한번 우리 집에서 뭣들을 하고 있나 봐야겠다. 밭에 보리는 잘 영글었는지.” 자기 집 밭을 보니 보릿단이 잔뜩 쌓여 있었습니다. 얼마나 되나 하고 다발을 세기 시작했는데 얼핏 보니까 그 밭쪽을 향해 짐수레가 오고 있었습니다. 그 위에는 농군이 앉아 있었습니다. 사내아이는 이건 틀림없이 아버지가 밤중에 보릿단을 가지러 온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그것은 바실리이 끄로랴쇼프라는 도둑이었습니다. 도둑은 보릿단을 수레에 싣기 시작했습니다. 사내아이는 속이 상해서 “아버지, 보리를 훔쳐가요!”라고 외쳤습니다. 아버지는 잘 자다가 깨서는 “보릿단을 훔쳐가는 꿈을 꾸었군. 어디 나가 봐야겠는걸.”하고 말을 타고 밭으로 달려갔습니다. 밭에 와 보니까, 바실리이가 보릿단을 훔쳐가고 있었으므로 커다란 소리로 이웃 농군들을 불렀습니다. 바실리이는 붙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다음에 사내아이는 대모가 살고 있는 거리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대모는 어떤 상인의 아내가 되어있었고, 그때 마침 잠자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살그머니 일어나 정부에게로 가려하고 있었습니다. 사내아이는 대모에게 “일어나세요. 주인아저씨가 나쁜 짓을 하려고 해요.”라고 큰소리를 내어 일러 주었습니다. 대모는 벌떡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남편의 정부가 사는 집으로 달려가 한껏 망신을 준 뒤에 정부를 마구 때리고 남편을 몰아냈습니다. 그리고서 사내아이는 자기 친어머니를 찾아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집안에 도둑이 들어와 옷궤의 자물쇠를 부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잠이 깨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도둑은 그것을 보더니 도끼를 꺼내들고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사내아이는 참을 수 없어서 쥐고 있던 홀을 도둑을 향해 던졌습니다. 그 홀은 도둑의 관자놀이에 정통으로 맞았고, 도둑은 그 자리에 쓰러져 숨을 거뒀습니다.
도둑이 죽자마자 훤히 트였던 사방의 벽이 싹 닫히면서 방은 그 전대로 되었습니다. 그 때 문이 열리면서 대부가 들어왔습니다. 대부는 대자에게 다가와서 그 손을 잡아 보좌에서 내려놓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내가 일러 준 말을 듣지 않았구나. 네가 행한 첫째 잘못은 금단의 문을 연 일이란다. 두 번째 잘못은 보좌에 앉아 내 홀을 손에 잡은 일이고. 세 번째 잘못은 세상에 죄악을 더하게 한 일이지. 만약 네가 한 시간만 더 보좌에 앉아 있었더라면, 인간의 절반을 못 쓰게 만들고 말았을 거다.” 대부는 다시 한번 대자의 손을 잡고 보좌에 올라가 홀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러자 다시 벽이 열리면서 무엇이나 다 훤하게 보였습니다. 그 때 대부는 말했습니다. “자 이번에는 네가 너희 아버지에게 한 짓을 보아라. 바실리이는 1년 동안이나 감옥에 갇혀 있었으므로 온갖 나쁜 짓을 배워서 손댈 수 없는 악당이 되어버렸다. 봐라. 방금 저 사나이는 너희 아버지의 말을 두 필이나 훔쳐 갔는데 이제 조금 있으면 집까지 불살라 버릴 테니.... 네가 너희 아버지에게 행한 일이 이런 것이다.” 아버지의 집이 타는 것이 대자의 눈에 비치자 대부는 그 장면을 닫고 또 다른 장면을 보여줬습니다. “자, 봐라. 네 대모의 남편은 벌써 1년 전부터 아내를 버리고 딴 여자와 놀아나고 있어서 대모는 술로 밤낮을 지새우고 있단다. 정부는 아주 타락한 여자가 되어버렸지. 네가 대모에게 행한 짓이 이런 것이다.” 대부는 그 광경도 닫아 버리고 이번에는 대자의 집을 보여줬습니다.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는데 어머니는 지은 죄를 뉘우치며 울고 있었습니다. “차라리 그때 내가 그 도둑에게 죽임을 당했더라면 좋았을걸. 그러면 이렇게 많은 죄를 짓지는 않아도 되었을 텐데.”라고 하면서 가슴을 치고 있었습니다. “네가 어머니에게 행한 짓이 이렇단다.” 대부는 그 광경도 닫아 버리고 아래쪽을 가리켰습니다. 대자의 눈에 도둑의 모습이 비쳤습니다. 두 사람의 간수가 감옥 앞에서 그 도둑을 잡아 누르고 있었습니다. 대부는 말했습니다. “이 사나이는 아홉 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자기 자신이 그 죄를 갚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지. 그런데 네가 이 사나이를 죽여 버렸기 때문에 이 사나이의 죄를 네가 모두 떠맡아야할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고,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는가를 톨스토이는 보여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비판과 책망이 난무하는 곳이 아니라 칭찬과 격려의 소리가 충만한 곳입니다.
4-5절,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고한 말씀은 정의가 물 같이, 공의가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는 것을 말합니다(암 5:24). 이런 곳이 바로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에는 형식과 논리로 옥죄는 율법이 지배하는 곳이 아니라 정의와 사랑과 신의가 충만한 곳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눅 18:12), 613개의 율법을 지키고, 그것도 부족해서 39개의 엄격한 안식일 법을 만들어 지킨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더 이상 경건할 수 없었고, 더 이상 거룩한 종교인이 없을 듯싶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요 7:19)고 하셨고, “외식하는 자들”(마 23:23), “회칠한 무덤”(마 23:27)이라고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도 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마 3:7)이라고 하였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기에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그토록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고 힘써 율법을 지켰던 자들에게 이런 엄청난 독설을 퍼부었던 것일까요?
첫째, 그들에게 정의와 자비와 신실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마 23:23). 예수님께서는 정의와 자비와 신실함은 율법이나 제사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법에 매인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마 12:7)고 하셨습니다. 사람을 겸손과 사랑으로 대하지 않고 바리새인들처럼 뭔가 꼬투리를 잡으려고 한다면 결국 무죄한 자를 정죄하는 죄를 짓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둘째, 진리를 왜곡하고 말쌀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소경을 보게 하며, 앉은뱅이를 걷게 하며, 문둥이를 깨끗케 하며, 귀머거리를 듣게 하며, 죽은 자를 살리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예수님을 향해서 귀신들린 자 또는 귀신의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세무원이나 창녀와 같은 죄인들의 친구(눅 7:34)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런 예수님을 오히려 죽이려고 모의하였습니다. 돈과 명예와 권세를 위해서라면 정의도 사랑도 신의도 땅에 버리는 몰인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집착했던 안식일 법은 노동이나 품팔이로 입에 풀칠하는 민중이 지키기에는 너무나 힘에 부치는 것들이었습니다. 결국 안식일 법은 가난한 민중을 억압하는 수단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에는 안식일 논쟁에 관한 기록이 아주 많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계명이 아닌 그들 기득권자들이 만들어낸 안식일 법을 가지고 예수님의 의롭고 자비로운 행위들을 비판하였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법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싶지 아니한 기득권자들이 토끼몰이 하듯이 예수님을 죽음의 언덕 골고다로 몰아가는 도구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인 교회에 이런 바리새인들이 설치게 되면 그 공동체는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인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일에서 멀어지게 되고, 빛을 어둠 되게 하고, 질서를 혼돈되게 하고, 생명을 죽음 되게 하는 토끼몰이 사냥이 난무하는 정치마당이 되고 맙니다. 교회는 모름지기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기러기의 집단이 되고, 자기 일을 스스로 하는 비버들의 조직이 되며, 소중한 가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책임을 다하는 열성적인 다람쥐의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계획이나 목표만을 앞세우면서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고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는 집단은 바리새인들의 정치집단입니다. 이런 집단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없게 되고,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 왜곡되는 현상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비교하지 않고, 눈이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않고,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않는다면, 6-9절의 말씀처럼,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이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으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한 말씀 그대로 상징적이지만 교회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뤄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성도들 간에 아무런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 곳이며,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섬김이 그 조직에 충만한 곳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