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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3-07 19:41
더 좋은 것12: 안식(가나안땅)에 들어가는 길(3)(히 4:1-13)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22  

더 좋은 것12: 안식(가나안땅)에 들어가는 길(3)(4:1-13)

고대근동에서의 안식

안식이란 단어 카타파우시스’(katapausis)가 히브리서 3-4장에 집중적으로 나온다. 우리에게 안식을 뜻하지만, 고대근동에서는 그 의미가 사뭇 달랐다.

고대근동에서의 안식은 신들과 신성을 주장하는 왕들에게 국한되었다. 1849년 오스틴 헨리 레야드 경(Sir Austen Henry Layard)이 발견한 주전 18세기경의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 토판은 창조신 마르두크(Marduk)가 사람을 만든 목적을 신들의 노역을 감당시키고, 신들로 하여금 안식을 취하게하려는데 있음을 밝히고 있다. 또 고고학자 호르무즈 라쌈(Hormuzd Rassam)1882년 바그다드 남서쪽 30킬로미터 지점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발견한 주전 6세기 신바빌로니아시대의 토판은 사람이 창조된 목적이 신들이 기쁜 마음으로 기거할 수 있게 하는데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이 토판들이 말하는 신들은 누구인가? 신의 환생, 신의 현현, 신의 아들이라며 신성을 주장한 왕들이었을 것이다. 인간의 존재 목적을 이들 신들과 왕들을 위한 존재로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고대근동에서의 안식은 신들과 왕들의 것이었고, 백성들은 그들의 노예였을 것이다.

고대근동 신화들에 따르면, 태초에 혼돈 속에 있던 담수를 다스리는 아프수’(Apsu=Qingu)와 바다의 짠물을 다스리는 티아마트’(Tiamat) 사이에서 라흐무’(Lahmu), ‘라하무’(Lahamu), ‘안샤르’(Anshar) 등의 신들이 탄생하고, 이 신들이 다시 자신들을 닮은 자식들을 낳는 과정에서 훗날 신들의 왕이 된 마르두크’(Marduk)가 태어난다. 마르두크는 태양신이자 폭풍신이며 바벨론의 수호신이다. 이후 자신의 뱃속을 폭풍으로 어지럽게 하는 마르두크를 멸망시키려고 바다용 곧 혼돈(흑암)과 바닷물의 여신 티아마트가 폭풍신인 마르두크와 한판 크게 붙는다. 이 싸움에서 이긴 마르두크는 티아마트의 시체를 둘로 쪼개어 하늘과 땅을 만들고, 티아마트의 자식이자 배우자였던 킨구(Qingu=Apsu)의 피를 흙에 섞어 인간들을 빚어서 신들이 담당했던 노역을 인간들이 대신하게 함으로써 신들에게 안식을 주었다고 한다. 또 마르두크는 인간들로 하여금 신들의 거처로 바빌론을 건설하게 하였다. 바빌론 왕은 태양신인 마르두크의 현신(계시)으로서 마르두크 신앙의 수호자였다. 이로써 인간은 왕의 노동자로서 안식을 취할 수 없고, 악신의 피로 선신이 만든, 선과 악을 함께 물려받은 존재라는 것이 바빌론 신화에 담긴 세계관이자 인간관이다.

성서에서의 안식

유대교의 중심 주제는 안식이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의 장소는 가나안땅이다. 유대인들은 수천 년에 걸쳐 떠돌이와 노예로 살았던 민족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땅은 기나긴 떠돌이와 노예의 삶을 끝내고 취할 안식의 땅이었다. 유대인들이 매우 엄격히 지키는 제칠 안식일도 안식의 땅을 다시 빼앗기지 않거나 복구시키려는 그들의 강력한 의지와 관련되어 있고, 하루 세 번하는 기도회들도 그 같은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안식개념은 지나치게 민족적이고, 배타적이며, 땅 중심적이다. 또 그것은 지나치게 현세적이고 물질적이다. 유대인들의 민족적이고, 배타적이며, 영토중심적인 이 안식개념을 우주적이고 탈민족적인 포용개념으로 승화시킨 것이 그리스도교이다. 유대인들의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안식개념을 내세적이고 영적인 개념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안식은 지상 가나안땅에서의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것이 아니라 하늘 가나안땅에서 누리는 영원하고 완전한 쉼을 의미한다.그리스도교는 육체노동을 마치고 잠시 쉬는 일시적인 유대교적 안식개념을 버리고, 무덤(흑암, 혼돈, 죽음)의 상황을 박차고 일어나는 부활정신, 부활신앙, 부활의 삶을 안식의 개념으로 취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에서는 노동으로부터의 쉼을 강조하는 제칠 안식일인 토요일을 지키지 않고, 예수님께서 무덤을 박차고 나오신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에 지키고 있다. 제칠 안식일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존재하지만, 일요일 안식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그런 진정한 쉼을 주는 참 안식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안식은 일하지 않는다.’는 육체의 쉼보다는 참 평안을 누린다.’ ‘해방을 만끽한다.’ ‘자유를 누린다.’와 같은 마음과 정신과 영혼의 쉼을 의미한다.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히브리서 4장은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한다는 교훈이다. 1-2,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는 이집트를 탈출하여 홍해까지 건넜으나 광야 행군 때에 야훼께 대한 믿음을 배반하고 불순종을 일삼다가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은 이집트 세대 히브리인들을 염두에 둔 말씀이다. 이집트는 세상을, 홍해도하는 침례를, 광야생활은 교회생활을, 안식은 하늘 가나안땅의 그림자와 모형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회개하고 신앙을 고백하여 침례를 받고 하늘 가나안땅의 시민권을 약속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일지라도 이집트 세대 히브리인들처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배반하거나 불순종을 일삼는다면, 하늘 가나안땅에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염려가 되니, 하늘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신실한 믿음과 인내로써 행군하라는 충고이다.

3절 앞부분에서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는 끝까지 신실한 믿음과 인내로써 행군한 그리스도인들은 약속받은 대로 저 안식곧 하늘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것이 확실시되지만, 야훼께 대한 믿음을 배반하고 불순종을 일삼다가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은 이집트 세대 히브리인들에서 보듯이,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배반하거나 불순종을 일삼는 자들은, 약속하신 이를 믿고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하늘 가나안땅을 이미 창조 때 예비하셨으나 그곳에 들어갈 자격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는 신실한 믿음과 인내로써 행군을 마치느냐, 중도에 포기하고 주저앉느냐에 달려있다는 말씀이다.

4-11절은 하늘 가나안땅의 문이 남녀노소 빈부귀천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있다는 뜻이다. 그곳은 세상수고를 마치고 안식하기에 최상이지만, 신실한 믿음과 인내로써 믿음의 여정을 끝낸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고,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들도 있으니 우리도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한다.”(10-11)고 말씀한다.

그리고 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난다.”는 인과응보와 관련된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그 값을 치른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예리하게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실뿐 아니라, 그 누구한테도 농락당하지 않으시며, 그분 앞에서는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말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