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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1-05 19:27
하나뿐인 복음09: 배운 것과 전한 것(2)(갈 1:15-2:10)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57  

하나뿐인 복음09: 배운 것과 전한 것(2)(갈 1:15-2:10)

1장 15-24절

바울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바리새인의 아들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로마시민권자로 출생하여 13세 무렵에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유대인 남자아이들은 여섯 살부터 의무적으로 초등교육을 받았다. 주전 75년 유대지방 대도시들에 학교들을 세우도록 지시한 인물은 시메온 벤 쉐타흐(Simeon ben Shetah, 120-40BC)였다. 그 이전까지는 가장들이 자녀교육을 책임지고 있었다. 주후 64년에는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죠수아 벤 가므라(Joshua ben Gamla)가 마을마다 학교들을 세우게 하고 다섯 살 이상의 아이들이 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유다 벤 테마(Judah ben Tema)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다섯 살부터 미크라(Mikra, 성문 토라)를, 열 살부터 미슈나(Mishnah, 구전 토라)를 배웠고, 열세 살부터 계명들(mitzvoth)을 지켰으며, 열다섯 살부터 탈무드(Talmud, 연구방법)를 배웠다. 훗날 탈무드는 미크라와 미슈나를 주석한 랍비들의 글을 모은 책을 일컫게 되었다. 초등교육은 주로 회당에 붙은 ‘헤데르’(heder, 방)라 불린 별관에서 이뤄졌다. ‘멜라메드’(melamed) 혹은 ‘멜람메드’(melammed)라 불린 개인교사가 ‘티노코트’(tinokot)라 불린 아이들에게 토라와 탈무드를 가르쳤다. 그러나 동유럽에서는 주로 개인교사의 집에 있는 ‘헤데르’에서 이뤄졌다.

바울이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아 예수님이 활동했던 시기에는 예루살렘을 떠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온 시기는 주후 30년 오순절사건이 있은 지 3-4년이 지난 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스데반 순교가 있었던 때는 주후 34년경이고, 이 무렵 바울은 30세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스데반 순교이후 사울(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해서 대제사장의 영장을 지참하고 다메섹을 향해 가다가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 개종하게 되었다. 다메섹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92km 정도 떨어진 고대 시리아의 수도였다. 유대인이 4만 명, 회당이 30-40개 정도 있었다고 한다. 주후 66년 네로황제 때에는 1만여 명의 유대인들과 그들의 가족 만 팔천여 명이 도륙을 당하기도 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 32-33절에서 자신이 다메섹을 탈출할 당시에 다메섹이 아레타스4세(Aretas, 9BC-AD40)의 통치권 아래 있었던 것처럼 진술하였다. 다메섹은 주전 64년에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었지만, 칼리굴라(AD 37-41)가 황제로 즉위한 주후 37년경부터 나바테아(요르단)의 왕 아레타스4세가 다메섹을 일정기간 통치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바울의 증언들로 볼 때, 바울은 주후 34년경 개종직후 다메섹 인근 아라비아사막에 내려가 일정기간 기도와 명상의 시간을 가진 후(갈 1:17-18), 다메섹에 돌아와 3년 정도 머물고 있던 37년경에 유대인들에게 매수당한 아레타스 왕의 고관이 바울을 체포하려고하자,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을 받아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예루살렘으로 도주하였다. 예루살렘에서 바울은 베드로와 함께 15일을 머물렀는데, 그 기간에 예루살렘교회의 수장 야고보 이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했다고 하였다. 이후 바울은 고향 다소로 돌아가 칩거하였다. 이 사건을 설명하는 말씀이 갈라디아서 1장 15-24절이다.

2장 1-9절

바울을 안디옥교회로 불러낸 사람은 바나바였다.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지만 이때가 대략 주후 44년경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후 45년에 유대지방에 기근이 있었는데, 안디옥교회가 바나바와 바울로 하여금 예루살렘교회에 부조금을 전달하게 한 때가 46년경이었기 때문이다(행 11:25-30).

바울과 바나바는 부조금 전달을 무사히 마친 직후 마가를 대동하고 제1차 선교여행에 나섰는데 그 시기가 대략 46-48년 사이였다. 바울은 개종 후 3년 만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났고, 그 후 14년만인 주후 51년경에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는데, 안디옥교회를 혼란에 빠뜨린 에비온파 유대인들로 인해서 개최된 사도총회에 참석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사건에 관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 말씀이 갈라디아서 2장 1-10절이다.

사도행전 15장 23-29절에 실린 사도총회의 판결문은 다음과 같다.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사도총회가 결정한 판결문의 가치는 매우 높다. 사도들은 교회의 열쇠를 쥔 설립권과 승인권자들일뿐 아니라, 그들의 말과 행동이 정통성 여부 곧 옳고 그름을 결정짓는 잣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2장 1-10절은 자신의 복음사역을 이 판결문을 통해서 사도총회 때 승인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6절의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는 사도행전 15장 28절,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다”와 일치한다. 여기서 “유력한 이들”이란 승인권을 가진 사도들을 말한다. 사도들은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유대인에게 맡음과 같은 것으로 여겼고, 베드로를 유대인의 사도로 삼으신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는데(6-8절), 이 점을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 자신과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통해서 인정하였다(9절)는 점을 강조하고자 했다.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놓치지 않고 강조하고자 했던 점도 바로 이 점이었다. 여기서 “친교의 악수를 하였다”는 것은 선교협약을 공고히 하였을 뿐 아니라 동일한 믿음을 실천하는 형제임을 인정하였다는 뜻이다.

2장 10절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바울이 제3차 여행을 마치고 주후 58년 오순절에 맞춰 예루살렘에 도착하고자 할 때 가난한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해 부조금 프로젝트를 진행시켰고(고후 8-9장), 각 지역교회들의 대표자들을 동행시켰다. 이들 가운데 갈라디아 사람들인 가이오와 디모데가 포함된 것으로 보아 갈라디아 교회들도 부조금 프로젝트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 지역교회 대표들은 예루살렘까지 부조금을 안전하게 운반할 사람들이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교회 앞에서 이방인교회들의 현황을 보고할 사절들이었다. 바울이 부조금 프로젝트에 심혈을 기울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주후 51년경 예루살렘 사도총회 때 안디옥교회의 대표였던 바울, 바나바, 디도는 예루살렘교회의 기둥이었던 야고보, 베드로, 요한과 더불어 선교협약을 맺은 직후 사도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 달라“고 특별히 부탁하였기 때문이다(갈 2:9-10).

둘째, 가난한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해 부조금을 모운 것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화목제물이었다. 이 선물은 유대교의 나사렛파와 이방인 그리스도의 교회들 사이의 오해와 갈등을 해소하고, 유대교의 나사렛파를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새 언약 공동체에로 끌어안기 위한 것이었다.

셋째, 갈등의 원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회개함으로써 또 신앙고백하고 침례 받음으로써 값없이 차별 없이 누구나 하나님나라의 시민이 되고 하나님가족의 식구가 된다는 바울의 복음주의와 가나안땅회복과 이스라엘민족해방의 조건이 언약의 말씀인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라고 믿었던 유대인들의 율법주의가 충돌하였기 때문이다.

넷째, 예루살렘교회에서 내려온 어떤 사람들, 곧 에비온파의 꼬드김 때문에 안디옥교회, 고린도교회, 갈라디아교회 등에 변절자들이 생긴 것에 대해서 과격하게 대응했던 바울은 어떤 형식으로든 예루살렘교회와 불편해진 관계를 해소하고자 했다.

다섯째, 바울은 이방인교회들이 예루살렘교회로부터 영적인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롬 15:27). 따라서 바울은 이방인교회들이 낸 부조금은 유대인들로부터 받은 영적축복을 되돌려주는 감사의 표시라고 믿었다.

여섯째, 바울은 거액의 부조금을 통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임을 표명하고자 하였다.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엡 4:13) 모두가 다 하나가 되기를 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