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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1-24 18:24
하나뿐인 복음20: 복음과 자유(2)(갈 4:21-31)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65  

하나뿐인 복음20: 복음과 자유(2)(갈 4:21-31)

1:1-4:20까지의 요약

바울은 1장부터 4장 20절까지에서 참된 것이 유한하고 잠정적이며 일시적인 땅의 것에서 나오지 않고 영원하고 항구적이고 완전한 하늘의 것에서 나온다고 강조하였다.

바울은 1장 1절에서 자신의 사도직이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았다.”고 했는데, 이것은 피조물인 사람에게서 나온 것과 창조주이신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바울은 2장 16절에서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다.”고 하였다. 유대교인들은 “율법의 행위로써” 그들이 바라는 바 유한한 지상 가나안땅을 얻고자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영원한 하늘 가나안땅을 얻고자 한다. “율법의 행위로써”는 그리스도교가 제시하는 하늘 가나안땅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율법의 행위로써”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복을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영원하고 참된 복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율법과 믿음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바울은 3장 3절에서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했는데, 이것은 율법과 믿음의 차이가 육체와 성령의 차이만큼 크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1장 1절에서 강조한 피조물과 창조주의 차이를 육체와 성령의 차이로 재차 강조한 것이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와는 아무 관계가 없고,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창세기 15장 6절을 근거로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의 나라와 가나안땅의 시조로 삼고 있는 아브라함을 그리스도의 나라와 하늘 가나안땅의 시조로 삼았다.

바울은 3장 23절부터 4장 11절까지에서 사람들이 율법과 초등학문과 우상들한테 종 노릇해왔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을 하늘 가나안땅의 “유업을 이을 자” 곧 아들로, 율법을 그 아들에게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일시적으로 도움을 주는 초등교사, 후견인, 청지기 또는 초등학문에 비유하였다. 아들은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만 종처럼 율법아래에 놓이고 이후로는 유업을 이를 아들이기 때문에 주인 노릇한다는 것이다.

지상 예루살렘 언약과 하늘 예루살렘 언약

그러므로 신약성서기독교시대가 도래한 후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구약시대의 율법 아래에 있지 않고 오히려 율법 위에 있게 되었다. 신구약성서는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구약성서가 신약성서 위에 있지 않고, 신약성서가 구약성서 위에 있다. 신약성서는 구약성서의 지배를 받는 입장이 아니라 오히려 지배하는 입장에 서있다. 따라서 신약성서 저자들이 구약성서를 이해하고 해석한 예표, 모형, 그림자, 구속사의 영적 방식이 유대교인들이 구약성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문자적 방식을 지배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절부터 4장 20절까지에서 율법을 초등교사, 후견인, 청지기, 초등학문, 육체에 비유한데 이어서 4장 21-31절에서 다시 율법을 종의 신분, 종 하갈의 아들, 육체의 아들, 이스마엘과 지상 예루살렘 시내산 언약에 비유하였다. 반면에 믿음을 본처의 신분, 본처 사라의 아들, 약속의 아들, 이삭과 하늘 예루살렘 시온산의 언약에 비유하였다.

4장 21절에서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은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을 억지로 율법에 매이게 하는 에비온파 유대인들과 그들의 유혹에 빠진 자들을 말한다. 또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는 “율법을 이해하지 못하느냐?”는 뜻이다. 우리말 성경들은 이 부분을 “율법이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하느냐?”로 번역하였다. 유대교인들은 매주 세 번(월목토) 아침기도회 때마다 회당에서 토라를 읽어주기 때문에 일 년에 한번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내용을 듣게 된다. 따라서 유대교인들은 율법을 잘 알고 있었다.

4장 22절에서 “기록된바”는 창세기 16장과 21장을 말하며,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는 여종 하갈과 그녀가 낳은 이스마엘과 본처 사라와 그녀가 낳은 이삭을 말한다.

4장 23절에서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는 아브라함이 신체적으로 임신이 가능한 젊은 여종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았다는 뜻이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다.”는 신체적으로 임신이 불가능한 노령의 사라에게서 초자연적으로 이삭을 낳았다는 뜻이다. 이 이삭은 역시 초자연적으로 태어난 예수님의 예표였다.

하갈과 사라

4장 24-26절에서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써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을 낳은 두 여인을 두 언약에 비유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여종 하갈은 시내산 언약의 상징으로써 자신과 더불어 종 노릇해야할 운명의 자녀들을 낳을 뿐이다. 여기서 바울은 시내산을 지상 예루살렘과 동일시하였다. 반면에 본처인 사라는 하늘 예루살렘 시온산 언약의 상징으로써 자신과 더불어 하늘 가나안땅의 유업을 이을 자녀들을 낳는다. 바울의 이 비유는 오늘날 유대인들이 부계의 유대혈통과는 상관없이 모계의 유대혈통만으로 유대인자격을 결정하는 것과 같다.

27절의 말씀은 이사야 54장 1절의 인용으로써 바울은 이 구절을 이사야가 의도한 역사적 의미와는 상관없이 “잉태하지 못한 자,” “산고를 모르는 자,” “홀로 사는 자”를 도저히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사라에 적용하였다. 28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 또 29절에서 “성령을 따라 난 자”라고 하였다. “육체를 따라 난 자”인 이스마엘이 “성령을 따라 난 자”인 이삭을 지속적으로 괴롭힌 것은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인 유대인들이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인 그리스도인들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것의 예표라고 말한다. 30-31절에서 바울은, 사라가 여종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쫓아버렸듯이, 율법의 속박 아래 두려고 미혹하는 율법주의자들을 교회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율법으로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고, 그리스도인들은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놀드 토인비 교수의 <역사의 연구> ‘제4편 문명의 쇠퇴’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천부적 재능으로 유일신사상이란 과도적 단계의 정신적 보물과 탁월성에 도달하였지만, 그것을 절대시하고 우상화함으로써 신이 나사렛 예수의 강림을 통하여 자기들에게 제공한 한층 더 큰 보물을 거절하였고, 그 응보로써 자기 나라에서 쫓겨나 2천년 가까운 세월을, 한때 그들이 괴롭혔던 그리스도교가 국교인 나라들에서, 방랑자처럼 떠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