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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1-26 20:10
하나뿐인 복음21: 복음과 자유(3)(갈 5:1-12)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68  

하나뿐인 복음21: 복음과 자유(3)(갈 5:1-12)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의 행정구역이었던 비시디아와 디모데와 가이오의 고향 루가오니아에서 발행된 고대 주화들을 보면 황소 한 쌍에 멍에와 겨리를 지워 성내의 신성한 밭을 일구는 로마황제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주화들에 새겨진 황제의 두상과 문구와 부조는 정치선전이나 홍보를 위한 것들이었다. 남 갈라디아 주에서 발행된 주화들에서 신관(사제)복 차림으로 황소 한 쌍에 멍에와 겨리를 지워 고삐를 잡고 성내의 신성한 밭을 일구는 황제들의 모습도 마찬가지로 정치선전이나 홍보와 관련되어 있다. 특히 남 갈라디아 주에는 화환을 목에 걸거나 화환을 등에 걸친 황소 부조들이 유난히 많다. 화환이 걸린 황소들의 모습이 사람들 눈에는 좋아보였을지 몰라도 그 황소들은 신들의 제단에 바쳐질 제물들이었다. 황소들이 자신들에게 화환을 걸어주고 예우해준 사람들을 얼마나 고마워했을는지는 몰라도 바로 그 사람들이 자신들을 죽이고 각을 떠서 불꽃이 날름거리는 제단위에 올려 불살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리가 만무하다. 만일 화려한 화환에 현혹되어 황소들에게 닥칠 운명을 읽지 못한다면, 만약에 살아 있는 신으로 추앙받던 황제들이 겨리의 고삐를 잡고 밭을 가는 모습에 감동을 받고 열광한다면, 그 감동과 열광은 황제를 위해서 밭을 가는 황소들이 바로 자신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민중은 항상 황제와 원로원이 부과한 엄중한 법과 과중한 세금과 노동의 멍에를 맨 자들이었다. 민중은 황제들의 노예나 다름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 28-30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다.”고 하셨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에비온파의 미혹에 넘어간 것은 화환을 걸친 황소나 신관(사제)복 차림으로 밭을 일구는 황제들의 모습에 현혹된 것과 같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의 도덕적 삶과 할례와 같은 겉모습에 속아 넘어가 스스로 율법이라는 멍에를 맸지만, 그 멍에가 얼마나 무겁고 힘든 것인가를 잘 알지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고 하였던 것이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역사가들은 로마제국이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때를 코모두스가 황제에 등극한 때로 본다. <글래디에이터>와 <로마제국의 몰락>은 코모두스의 악정을 재구성한 영화들이다. 코모두스가 사망한 이후 로마는 군인황제시대를 맞게 된다. 영화 <로마제국의 몰락>을 보면, 황제 코모두스가 자신의 정적 리비우스를 제거하기 위해서 리비우스 휘하의 모든 군인들에게 금화를 나눠주는 장면이 나온다. 금화의 엄청난 위력 앞에서 리비우스 휘하의 군인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지휘관들마저도 무너져버린다. 이런 현실을 인식한 이문열은 <사람의 아들>이란 소설에서 “인간은 지금 당장 효과가 있는 것을 원한다. 현실에 쓸모 있는 것밖에는 바라지 않는다. 그것이 인간이다...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현실에 필요한 표적을 구하지만, 정작 그들이 겪는 가장 큰 불행은 표적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을 베풀자가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 국민을 위한다며 떠벌리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그런 사람은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없다는 현실이 불행이란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과 일시적인 것에 눈이 멀어지면, 내면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볼 수 없게 된다. 화환에 현혹되어 희생될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 황소와 같게 되고, 쟁기질하는 황제의 정치적 퍼포먼스에 현혹되어 멍에를 맨 황소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반면에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속에서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발견하는 사람은 겨울나무에서 봄의 DNA를 읽어내는 사람이고, 내면적인 것을 읽어내고 영원한 것을 보는 사람이다. 이런 능력을 가졌던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인류를 율법의 멍에와 죄의 속박에서 풀어주시고 자유를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다.”라고 말한다. 3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이다.”는 유대교의 ‘계명의 아들’에 연결된다. 유대교에서는 할례 받은 13세 이상의 남성을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자”란 뜻으로 ‘계명의 아들’(Bar Mitzvah)이라고 부른다. 4절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에서 “율법 안에서”는 유대교인들이 지상 가나안땅을 얻으려 하는 것을 말하고,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써 하늘 가나안땅을 얻는 것을 말한다. 그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유대교인으로서는 하늘 가나안땅을 얻을 수 없고,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아무 유익이 없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2,4절)가 되는 이유이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다.”

5절,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는 히브리인들이 야훼의 말씀에 따라 구름기둥의 인도를 받으며 지상 가나안땅을 소망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믿음으로 하늘 가나안땅을 약속받고, 성령님의 보증과 인침과 인도를 받으며 소망하는 그 나라 곧 의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6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다.”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 가나안땅을 얻는 데는 할례나 무할례에 무슨 가치가 있지 않고,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고,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대신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믿음뿐이라는 뜻이다.

7-10절에서 바울은 출애굽 후 광야에서 야훼와 모세에게 대항하며 가나안땅을 향한 순례를 지연시키고 공동체를 부패시킨 누룩 같은 무리가 있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셨듯이, 교회를 부패시키는 누룩 같은 자들은 누구이든지간에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들의 권면이 거짓되고 하나님의 뜻과 상반된 이유는 하나님은 부름을 받은 이들이 가나안땅을 향해서 달음질해 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11-12절에서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면서 동시에 할례와 율법을 함께 전해왔다면, 십자가의 복음이 촉발시킨 유대인들의 분노와 탄압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또 바울은 할례와 율법을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자들을 향해서는 표피만 잘라가지고 양이 차겠느냐, 통째로 베어 버려야하는 것 아니냐며 힐난하였다. 이쯤 되면 바울이 율법폐기나 할례폐기를 주장한 사람처럼 비춰질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이스라엘나라와 영토인 지상 가나안땅의 운명이 걸린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요, 할례는 그들이 선민의 흔적을 몸에 새긴 것이다. 그것들은 유대인들을 특별하고 독특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그 같은 사실을 바울이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가나안땅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는, 유대인에게든 헬라인에게든, 그 같은 것들이 전혀 쓸모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들을 지키라고 강요한 것은 그리스도교를 유대교의 분파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본래 유대인들은 절반개종자들에게 할례나 율법준수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개종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유대인들은 점차 그리스도교가 자기들과는 완전히 다른 종교라는 것을 깨달았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에 남을지, 그리스도교에 남을지를 선택해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