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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5-09 07:33
히든카드10: 일치와 예배(골 3:12-17)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41  

히든카드10: 일치와 예배(골 3:12-17)

갈등을 만드는 본성은 육체에 있다.

바울은 골로새서 3장 12-13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고 권면하였다. 이 말씀은 성도들의 일치를 당부한 말씀으로 볼 수 있다. 일치는 그리스도교 선교의 목교이다. 인간들은 피조물로서 에덴동산에 머물 때 얼마간 하나님과 일치하였다. 그러나 피조물은 선악의 여부를 떠나서 존재 그 자체가 불완전하고 부족해서 죄와 허물을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길 수밖에 없고 인간관계에서 갈등을 만드는 본성이 그의 육체에 있다. 그 본성이 본능인데, 본능은 뇌의 작용으로 인해서 상황에 길들여진다.

뇌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필요하다면 거짓말도 만든다. 뇌는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기억하고 싶은 것만 골라서 기억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가 상대방에게 잘해준 것과 상대방이 자기에게 나쁘게 한 것을 주로 기억장치에 저장한다. 반대로 상대방이 자기에게 잘 해준 것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뇌가 생존에 필수적인 정보를 우선적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또 뇌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기억장치에 저장한다. 따라서 뇌는 끔찍하고 두렵고 위험했던 순간들과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들도 기억장치에 담아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서로 상반된 추억들을 떠올리는 이유는 뇌의 기억장치가 그런 식으로 작동되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가 그렇게 추억하고 싶어 하기 때문일 수 있다. 그래서 뇌의 기억장치 속에는 회상되지 못한 수많은 기억들이, 마치 골방에 처박힌 잡동사니들처럼, 쓸쓸이 처박혀 있다. 그 잊힌 기억들을, 다시 말해서, 자신이 상대방에게 나쁘게 한 기억들을 끄집어내서 반성할 기회를 가져야하고, 또 상대방이 자기에게 베푼 좋은 추억들을 끄집어내서 감사할 기회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인간관계가 따뜻해지고 행복해진다.

이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죄와 허물로 가득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긍휼과 자비와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끝없는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것을 자주 회상하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고 권면하였다. 게다가 상대방이 자기에게 베푼 추억들을 많이 끄집어내서 감사할 기회를 갖는 좋은 습관을 키운다면, 인간관계는 크게 개선될 것이다. 뇌는 길들어지기 때문에 나쁜 습관을 버리고 좋은 습관을 키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일치는 선교의 목표이다.

바울은 14-15절에서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였다.

토마스 캠벨이라는 아일랜드 출신의 장로교 목사가 교회들이 여러 교파들로 쪼개지는 현상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1809년 <선언과 제언>이라는 책을 펴내 펼친 운동이 교회일치운동이었다. 일치는 선교의 목표이다. 하나님과 일치해야할 우리 인간이 죄와 허물로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막힌 담을 쌓게 되었고, 형제들이 일치하지 못하고 수치와 불안과 의심과 미움과 비방과 중상과 모략과 살인으로 피차에 원수가 되었다. 이 같은 원한을 풀고 화목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담들을 허무셨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다. 히브리서는 이 막힌 담을 일컬어 예수님의 몸이라고 하였고,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깨뜨리신 것은 이 막힌 담을 허무신 것이라고 했다. 이 점에 대해서 히브리서 10장 19-20절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이다.”고 하였다.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막혔던 담이 허물어져 지성소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토마스 캠벨을 비롯해서 일치를 추구했던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성도들은 일치를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서 “성서가 말하는 것을 말하고, 성서가 침묵하는 것을 침묵하자.”는데 합의를 보았다. 또 “본질에 일치하고 비본질에 자유(견해)를 허용하며 모든 일에 사랑으로 하자.”는데 합의를 보았다. 14절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이다.”를 제대로 이해한 슬로건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가 침묵하는 것을 자유(견해)로 볼 것인지, 아니면 금지로 볼 것인지를 놓고 대립하였고, 본질이라는 그릇에 담아야할 것과 담지 말아야할 것을 놓고도 대립하였으며, 무엇이 비본질인지, 어디까지가 비본질인지를 놓고도 대립하였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그 알량한 교리와 신념 때문에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한 사도의 권면을 외면해왔다. 이로써 “성서가 말하는 것을 말하고, 성서가 침묵하는 것을 침묵하자.”는 외침도, “본질에 일치하고 비본질에 자유(견해)를 허용하며 모든 일에 사랑으로 하자.”는 외침까지도 공허한 메아리로 남게 되었다.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

바울은 16-17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권면하였다.

16절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는 장로(오늘날의 목사)의 두 가지 기능을 말한다. 그것들은 케뤼그마와 디다케 곧 선포와 교육이다. 여기서 선포는 권면이요, 권면은 하나님의 뜻을 밝히는 예언이며 설교이다. 예언운동은 회개운동과 회복운동을 포함한다.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기준으로 한 권면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토라(모세오경)를 판단기준으로 한 회개운동을 펼쳤고, 하나님의 약속과 신실하심을 근거로 회복운동을 펼쳤다. 사도행전 2장 42절은 초기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다.”고 했는데, “사도의 가르침”이 본문 16절의 “가르치며 권면하고”에 해당된다.

16-17절,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는 사도행전 2장 42절에 언급된 예배의 네 가지 골격가운데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다.”에 해당된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는 “기도하기를 힘썼다.”에 해당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는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에 해당된다.

‘장로교회의 예배회복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한국장로교신학회가 2011년 3월 5일에 개최한 제17회 학술발표회에서 주승중 주안장로교회 목사(당시 장신대 교수)는 종교개혁가 칼뱅이 사도행전 2장 42절에 실린 ‘말씀 선포와 가르침,’ ‘주의 만찬,’ ‘공중 기도와 찬양,’ ‘교제와 구제’를 그리스도교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네 가지 골격으로 꼽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2011년 3일 7일자 <국민일보>). 또 주승중 목사는 한국 장로교회들의 예배에서 ‘성경을 떠난 설교,’ ‘주의 만찬의 상실,’ ‘뿌리 없는 기도와 찬송,’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 예배,’ ‘성령에 둔감한 예배’를 문제점으로 제시하였다. 설교자가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성경을 인용하는가하면, 단편적이고 부분적인 면만 전달함으로써 성경말씀의 전체 맥락과는 동떨어진 설교가 범람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또 기복주의 신앙과 인기에 영합하는 설교들로 인해서 성도들의 삶에 바람직한 변화가 없다고 지적하였다(2011년 3월 8일자 <기독신문>).